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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3년 겨울호.
<집중 조명>
사구시의 노래․1 외 4편
송수권
나로도 항공우주센터
밀리엄 세기의 첫 장을 열었을 때
쑥밭골의 신화는 깨졌다
쑥과 마늘과 호랑이와 곰과
함께 살던 아기곰 한 마리가
굴 속을 빠져나와
꼬리 불을 물고 하늘을 서성거렸을 때
우리들 신화는 빗장을 활짝 열었다
고흥반도의 아침이여
사구시의 노래여
사구시의 노래 •2
물레야 돌아라 빙빙 돌아라
허튼가락 흘립기법
흙을 밟고 흙을 빚던 손
사구시* 사람들 다 떠나가고
물레소리만 남았다
너구리 가마 속 불빛 한 줄기
누군가 살아*독을 짓는 마을
다시 물레를 밟는다
물항아리 간장독 해무리굽 대접
귀얄무늬 *중발들
그 이전의 청화백자 희청자까지……
우리 동네 옹기짐을 지고 온 늙은이
어디서 왔당가 물으면, 사구시
사구시는 어디랑가 물으면
수도암 골짜기 여섯 동네
물레야 돌아라 빙빙 돌아라
*사구시: 지금의 石村, 雲谷里 일대에 흐터져 있는 32여 기의 가마터, 사구시는 11~16세기 500년간 전통을 이어온 한국 최대의 독쟁이들 마을로 사기전(沙器廛)을 갖추어 배(지금의 다리)가 드나들었던 곳으로 이 안골의 마을들을 싸잡아 사구시라 불러온다.
⓵ 절터골 ⓶ 독적골(독을 빚던 마을) ⓷ 사구시(石村, 운곡리 일대) ⓸ 독점골 ⓹ 큰골(석촌 뒷골, 청자사기 11-13C ⓺ 작은골(//) ⓻ 뒷골 자완, 대접, 접시 12~13C ⓼ 수둑골(상감, 귀얌, 덤벙분장의 대접, 접시류) ⓽ 성적골 ⓾ 때등골(농박골, 분청사기, 지방기념물 80호, 1984년 문화재청 발굴 조사 19호-20호)
현재 이를 기념하는 ‘도자기 공원(200만평)’이 조성되고 있어 1호-20호 가마가 복원 될 계획으로 있다.
분청사기와 칼과 국화
미륵도량 수도암(修道庵)*이 있는 계곡 일대
흩어져 있는 20여 개의 가마터**
분청사기(粉靑沙器)며 옹기 그릇의 파편들
사구시 사람들 전체가 도공이요
여섯 마을 모두가 가마터였다
나무 그릇에 밥 말어 먹었던 야마모토族이여
정유대란 때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
남쪽 바다를 건너와 순천왜성(順天倭城)을 쌓고
본격적인 도자기 전쟁을 일으켰다
그때 쌍계사와 연곡사 화엄사 상백운암 하백운암
중들 몰려나와 맨몸으로 막았으나
섬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남원성이 함락되고
사구시 골짜기에도 큰 바람 불었다
일본 국보 1호가 된 사쓰마자기, 이도다완
이도다완의 고향은 샘골[廾戶]이지만
분청사기(고비키)의 고향은 이곳 사구시란다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되었던
우리 도공이 만들었던 그릇들
상포리(上浦里)에 배를 대고 소서군을 맞아 올라온
그때 중흥사(中興寺) 수백 명의 스님들 쏟아져 나와
이 골짜기에도 한바탕 피바람 분 전쟁이 있었다
약탈과 방화로 폐허가 되어버린 사구시 가마터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을 주물러
녹청색, 암갈색, 희청색 모란잎 구름무늬 버들가지 귀얄문
덤벙기법 손가락 하나로 선(線)을 낸 도공들
한밤중에도 탈취해 간 명품 그릇을 들여다보고
입으로 불고 닦는 번주(藩主)들의 호사품이여,
그것은 칼에 새겨진 너희들 국화문장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혼과 피와 눈물……
보라,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이 골짜기에 200만 평 도자기 공원을 세워
사구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며
너구리에 새로 불을 지피는 도공의 후예들이여
이 골짜기에 큰 영광 있으라.
*수도암은 송광사의 말사이지만 당시는 상포에 있는 중흥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가마터: 1-4호, 14호는 석촌(石村), 5-8호는 상대(上垈), 9-20호는 운곡(雲谷).
***칼은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이며 국화는 일 천황가의 문장이다.
무릉도원 백년폭포
칠월 백중날이 오면
온 고을 사람들 나서서 물마중 간다
사시장철 물길이 끊이지 않는 폭포
팔봉을 넘다 보면 어디 무릉도원쯤
백년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세 갈랫길 세 고개
쉬엄바위가 있어 쉬엄고개
한 번 미끄러지면 삼년밖에 못산다는 삼년고개
한 나무꾼이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할멈이 듣고 있다가 별 소리를 다하우!
영감을 앞세우고 다시 세 갈랫길
세 고개를 넘었다
첫째 고개에서 세 번
둘째 고개에서 세 번
셋째 고개에서 세 번
할멈이 물었다
몇 년 밖에 못살지요?
이십칠 년이네 그랴!
폭포수에 올라가 물벼락을 맞고 오다가
백년을 더 살고 싶어
세 번씩을 더 미끄러졌다
노인은 집에 와서 앓아눕더니
삼년 만에 세상길 떴다
백중날은 너도 나도 물마중
쉬엄고개 넘어 백년폭포를 찾아
물마중 간다
* 이 전설 속의 팔영산 백년폭포 이야기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쉬엄쉬엄 살라는 애틋한 뜻이 담겨 있다. 강산리 뒤에 있는 팔영산 폭포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
팔영산 능가사 대웅보전 앞뜰에서
위왕의 세숫대야에도 비쳤다는
수려한 8봉이 대웅보전 지붕 위로 그림같이 솟았다
편백림 숲길을 올라 하늘다람쥐가 되어 볼까
한 봉우리마다 발을 걸고 뜀박질을 해볼까
아니면 한 봉우리마다 그네를 걸고
8선녀를 불러내어 밀어 달라 할까
목탁을 들고 육관대사 성진(性眞)이 되어
나비처럼 숨어 저 꽃송이마다
술래나 되어 한 세상 저물까
대웅보전 큰 스님 무릎 밑에 엎드려
능가경 한 구절로 백 팔 염주알이나 세며
한 세상 저물까
능가사 큰스님은 좋겠다
아침마다 그 세숫대야에
8봉이 거꾸로 비치고
그 8봉 위에 까까머리가
아침 해처럼 떠오른다니……
날아가던 비둘기 떼가 똥벼락을 내리면
대웅전 부처님도 두 눈썹 치켜들고 큰 소리 내어 웃는다니……
능가사 큰스님은 참 재미있겠다
* 팔영산 8봉은 고흥 10경중 제 1경이며 능가사는 가장 큰 절이다
송수권(宋秀權)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창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산문에 기대어 아도 꿈꾸는 섬 퉁 사구시의 노래 등 16권이 있으며, 시선집, 육필시집 등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한민족문화 예술대상, 김삿갓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전 순천대 문창과 교수. 현재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
<대담>
개미가 쏠쏠한 시
송수권․맹문재
맹문재 : 선생님, 안녕하세요. 우리 시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기쁩니다.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상당히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주로 2000년대 이후의 세계를 듣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근래에 『퉁』(서정시학, 2013)이라는 시집을 간행하셨습니다. 근황은 어떠하신지요?
송수권 : ‘퉁’ 소리가 나게 살고 있습니다. 금년부터 대학 교단을 떠나 광주에 안착하면서 생오지 문예창작 시반, 용봉 작은 도서관 강의로 문하생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시를 쓰면 옷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하고 노상 젊은 시절 타박하더니 대학 교수가 되어 봉급이 통장으로 들어가니 시도 밥 먹일 때가 있네요, 시집 『퉁』으로 구상문학상을 타오니 시도 집 사줄 때가 있네요, 하고 집사람이 말하더군요. 그런데 문하생 중 누군가 5천만 원으로는 아파트 한 채 못 산다고 했네요. 이제 시도 가치보다는 값이 좀 상승했으면 싶네요.
맹문재 : 『퉁』의 시세계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시각과 청각에 의존해오던 이미지를 미각과 후각으로 바꾸었고, 토속적인 원형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표준어보다는 토속 방언을 많이 사용했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시집에는 꼬막(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을 비롯해 팥죽, 내빌감주, 대추란, 꽃게장, 묵은지, 각종 젓갈, 갓동지(갓김치), 탕평채 등 음식을 제재로 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의도하신 면이 있는지요?
송수권 : 저에게는 우리 국토의 표본 정서를 크게 서북 정서와 남도 정서로 나누어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끝자락 고흥반도가 저의 태생지고 40년 문학 인생을 고향 언저리로만 떠돌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퉁』에 실린 「시인의 산문」에서 시각은 교육에 의해 길들어진 정서이고 미각과 후각은 타고난 원형 감각인데 나이 들수록 원형 감각으로 회귀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원형 감각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맛과 멋과 메시지로 요약되는 음식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곽효환 시인이 펴낸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에서 서북 정서인 백석, 이용악, 김동환 연구를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산문」에서 소월은 가락이 승하고 백석의 언어는 토속 샤머니즘의 원형 이미지가 짙게 나타난다고 쓴 것 입니다. 『남도의 밤 식탁』에선 한국 현대시 100년사에서 개인이 쓴 음식 시집 한 권이 없어 상재한다고 썼습니다.
맹문재 : 『퉁』에는 「봄날, 영산포구에서」라는 연작시가 네 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시에서는 쭈꾸미가, 둘째 시에서는 멸젓(멸치젓)이, 셋째 시에서는 굴과 낙지국과 무젖(꽃게 무침)이, 넷째 시에서는 대구와 청어가 소개되고 있네요. 첫째 시에서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넷째 시에서 “아버지 입은 대구 입 만하고/어머니 입은 대구 입 만하고/아이들 입은 대구 입 만하고”라고 그린 모습에는 식구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대구탕을 먹는 저녁이 떠오릅니다. 작품의 배경에 대한 말씀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음식을 제재로 한 선생님의 시들은 백석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인상이 드네요. 어떤 면을 계승하려고 했는지요?
송수권 : 백석의 시에 대구탕을 먹는 저녁과 개포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목했습니다. 또 백석의 음식 시를 읽다가 ‘내빌눈’이라는 시어를 보았는데, 나도 어려서 ‘내빌눈 잔치가’ 떠올라 「내빌눈」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서북 정서와 남도 정서가 민속이나 음식에서 일치점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득 ‘눈온 대구 비온 청어’라는 경상도 식담이 생각났던 것이지요, 내가 살고 있는 ‘영산포구’는 자산어보의 물목으로 천년고도 목사골인(나주) 중심지가 됩니다.
남도 밥상이 힘이 실리는 것은 흑산도(홍어)에서 영산포구에 이르는 이 자산어보의 물목 때문입니다. 이 물목이 없으면 남도 밥상은 금방 무너집니다. 남도 김치는 추자 멸치젓이지만 서울 김치는 마포강둑의 새우젓 아닙니까? 남도 김치가 질퍽한 맛이라면 서울 김치는 담백합니다. 이것을 김치의 남북현상이라 합니다. 같은 서울 안에서도 남산골 샌님은 술이지만 북촌 대각골은 매일 잔칫상으로 떡이 빠지지 않아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 하지 않습니까? 또 북무남창(北舞南唱)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영산포구 다리 옆에는 1912년에 세운 등대가 쭈그리고 서 있습니다. 우리 국토에선 연안 내륙 언덕에 서 있는 유일한 등대입니다. 4대강 사업이 끝나면 이 등대에 불이 밝혀지고 목포에서 올라오는 젓갈 배나 흑산도 홍어, 추자 멸치젓 배가 올라올 수 있겠거니 하고 은근슬쩍 바랐는데 지금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 등대를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쓴 것이 「봄날, 영산포구에서」라는 연작시입니다.
백석과의 영향 관계는 위에서 말한 서북 정서의 식탁과 남도 정서의 식탁에 얽힌 토속성입니다. 서북 정서의 식탁은 허약하지만 남도의 식탁은 힘이 넘칩니다. ‘내빌눈’ 이야기도 했지만 백석의 시에 ‘왱병’이나 대숲 바람 소리가 나옵니까? 이는 소월 시도 그렇습니다. 디엔에이(DNA)에서 타고난 유전자의 소인(素因)이 같을 수 없지요. 왱병은 남도의 부뚜막에 올라앉은 ‘촛병’을 말합니다. 서북 정서의 시 속에는 없지요. 『퉁』에 있는 왱병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봄에 봄바람이 터지면 쭈꾸미 철이고 가을에 가을바람이 터지면 전어 철입니다. 촛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한자리 못 있습니다. 「봄날, 영산포구에서」에 나오는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하는 말, 봄바람이 터지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치느라 촛병이 왱왱 울고 전어 철이 오면 또 촛병이 왱왱 운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왱병」입니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 돌아온다”는 말은 이를 싸잡아서 하는 남도의 식담이며 식요입니다. 요즘 현대시의 맹점은 이미지 감각들이 다 주변 감각에서 나오니 나는 여기에서 언어의 대활령과 소활령을 구별해 보는 것입니다. 소활령은 표준어에 있지만 대활령은 토속정서 즉 토속어 속에 숨 쉬고 있습니다. 나는 백석에게서 이 점을 깨달은 것이지요. 즉 백석의 식탁이 ‘흰 쌀밥과 가재미와 식혜, 장고기(피라미), 붕어곰’이라면 나의 식탁은 ‘쇠고기 120부위’(백석은 푸줏간을 피해 다녔음)와 다근바리도 24부위를 쪼개야 시원한 ‘야생의 식탁’입니다. 그래서 『퉁』에는 원숭이 골 파는 이야기(「북치는 원숭이」), 심지어 비파 열매, 숲 속의 악기 등을 진열한 승기악탕(勝妓樂湯)의 생식(生食)입니다. 이것이 「왱병」에서 온 식초 맛입니다. 『한계전의 명시 읽기』에서 백석의 「여승」과 나의 「여승」을 비교 감상한 것을 보았는데, 나의 시에는 백석의 시에서 걸치는 여러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토속 정서를 누비다보니 그런 영향 관계가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맹문재 : 이번 시집에 들어 있는 작품들 중에서 「새벽은 부엌에서 온다」가 전체의 시세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음식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요? 작품의 전문을 옮겨보겠습니다.
세밑은 흰 눈이라도 펑펑 쏟아졌으면 싶다
시골집 장독마다 소복이 쌓인 눈
뜨거운 김이 오르는 이팝 같다
부엌 아궁지에 불빛이 환하다
무쇠솥에서 끓는 밥물 넘치는 소리
그 솥뚜껑 가에도 흰 눈이 자욱하다
어머니가 있는 부엌은 따뜻하다
아직도 팔순 노모가 허리 구부린 집
새벽은 언제나 그 불빛 속에서 왔다
그 가슴 저린 불빛 까치가 잠깬 아침은
마당가 종종거리던 참새 눈 발자국도
해맑은 오이꽃으로 피어 눈시리게 반짝였다
송수권 : 「새벽은 부엌에서 온다」는 어머니의 따뜻한 식탁에 관한 시입니다. 이는 「여자의 성소(聖所)」연작입니다. 2012년 김삿갓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해 영월의 김삿갓공원에 여러 시인의 시비와 함께 새겨져 있지요. 「여자의 성소(聖所)」는 이렇습니다. “어미 등 뒤에 붙은 코알라를 보면/젖니 두 개가 났을 때가 생각난다/움, 움, 움-하다/젖니 세 개가 났을 때/나는 움, 움마라는/이 지상의 마지막 말을 완성했다/부엌 뒷문으로 비친 북두칠성 별자리를 보고/일곱 걸음을 옮겼을 때/밥물이 끓고 뜸 들이는 그 밥 냄새를 처음 알았다/이 세상 어떤 꽃들의 진한 향기보다 진했다/좀 더 자라서는 부뚜막에 부지깽이 숯검정으로/가갸-뒷다리를 썼고/일곱 살 땐/애야, 이곳은 네가 개칠(改漆)하는 곳이 아니란다./그 성소(聖所)에서 쫒겨났다/나 대신 삽살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와/그 깔자리를 개칠하고 살았다/내 나이 지천명이 되었을 때/마지막 타오르던 아궁이의 그 빨간 불꽃/굴뚝 드높이 솟은 연기 따라/그녀는 하늘로 갔다.”
맹문재 :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1995)이나 『시인 송수권의 풍류맛 기행』(고요아침, 2003) 등의 음식 기행집과 시집 『남도의 식탁』(작가, 2012)도 내셨습니다. 맛에 대한 식견이 넓고도 깊다고 생각하는데, 남도 음식의 특성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송수권 : 남도 음식은 한마디로 한정식이 대표 음식인데 이의 특성은 발효, 즉 ‘삭힘새’에 있습니다. 이 삭힘새에서 오는 맛을 개미 또는 게미라고 하는데 ‘개미가 쏠쏠하다’라고 씁니다. 이는 삭힘(숙성)이 잘됐다는 말이고, 판소리로 가면 ‘그늘’이라고 씁니다. 그래서 ‘그늘 있는 음식’ ‘그늘 있는 삶’ ‘그늘 있는 시’라고 쓰며 판소리로 가면 ‘그늘 있는 소리’가 되는데 이를 통성, 즉 뱃속에서 나는 ‘수리성’이라고 합니다. 타고난 해맑은 소리(양성) 또는 천구성이라고 해도 소리에 그늘이 끼지 않으면 건넘은 소리(맛), 캄캄한 목, 째진 목, 떡목이라고 부르지요. 저 또한 시를 판별할 때는 이 그늘(육화)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봅니다.
맹문재 : 대담의 방향을 『빨치산』(고요아침, 2012)을 돌려볼게요. 이 시집은 장편 서사시집인 『달궁아리랑』(종려나무, 2010)에 이어 우리의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여순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좌우익 논쟁이 심각한 상황에서 선생님의 시집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시집을 구상하게 된 동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송수권 : 1990년대는 제주도에서 격포 채석강 가로 서재를 옮겨와 살았는데, 격포 노을 속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때 낸 시집이 제10시집인 『수저통에 비친 저녁노을』이었지요. 나는 이 시기를 ‘격포시대’라고 부릅니다. 1990년대 말쯤 순천대 문창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할 수 없이 서재를 순천에 가까운 섬진강변으로 옮겼습니다. 「지리산 뻐꾹새」(1978)를 발표한 지 20년 만에 지리산 품속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듣는 뻐꾹새 울음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제1시집 『山門에 기대어』 서문에서 “걸려도 한 풍경 속에서 깊이 걸려라. 울어도 울타리 가에서 찔찔거리는 참새처럼 울지 말고 한 마리 뻐꾹새가 수백 수천의 지리산 봉우리를 다 울리고 가듯이 이 시대의 한복판에서 울어라”라고 당찬 소리를 했지만, 지리산 뻐꾹새의 울림이 역사적 한(恨)을 못 실어 실체가 불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여순사건’의 실체를 통째로 집어넣고 보니 『빨치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소설에는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있지만 장편 서사시로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통일 한국이 오면 100년 후에도 빨치산이 역적으로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 셈입니다. 그때에는 지리산에도 ‘빨치산 문학관’이 들어서고, 좌우이념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중음자(中陰者)’의 삶으로 기록한 것이지요.
『달궁아리랑』과 『빨치산』의 내용은 중음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역사가는 산봉우리를 기록하지만 골짜기의 삶은 시인의 몫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신화나 전설이 되고 맙니다. 4․3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은 정당화되어 있는데, 여순사건은 아직도 반란사건으로 치부되고 있어 쓴 것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5)이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달궁아리랑』인 것입니다. 통일 한국 백년 후에는 14연대 주둔지인 여수 신월리 바닷가에도 평화공원이 들어서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뉴스에서 전남도의회가 이에 대한 조례를 만들고 여수시장이 평화공원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맹문재 : 여순사건에서는 아무래도 로명선이란 이름으로 유격대 사령관을 맡아 활약했던 이현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그에 대한 평전도 나오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의 삶에서 어떠한 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요?
송수권 : 이현상은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희생된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1953년 9월 18일 빗점골에서 차일혁 총경에게 수색 중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던 것이 ‘당홍동 유고시’이고, 지하족에서 나왔던 것이 그의 산처(山妻)인 ‘하수복에게 보낸 편지’로 비전향 장기수들이 감옥에서 눈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차일혁 총경과 이현상은 똑같이 일제치하에서 만주독립운동으로 활약한 동지였습니다. 이현상의 시체를 이승만 박사가 서울로 운송하라 해서 운구했지만 보기 싫다고 도로 섬진강에 싣고 가서 불태우라고 했는데, 당시 특무대장이 창경원에 전시하고 호랑이 밥으로 주자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동송림 모래밭 가에서 화장한 것도 차일혁 총경이고, 스님을 불러다 독경한 것도 그였습니다. 저의 『달궁아리랑』에서는 “동지 잘 가시오!”라고 이 장면을 묘사했고, 그때 이현상의 군모와 지휘봉은 김인주 경관이 수습하여 손에 묻은 피를 씻겠다고 중이 되어 절로 들어갔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차일혁은 200명의 대원으로 빨치산 2천명을 잡은 ‘빨치산 잡는 귀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통일 한국 100년을 내다보며 쓴 나의 시집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애매도형인 ‘오리와 토끼 그림’을 제시하고 싶군요. 오른쪽으로 보면 오리요 왼쪽으로 보면 토끼가 되지요. 그러나 100년 후에 이 애매도형은 오리도 토끼도 아닌 민족의 실체로 존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빨치산 역사관’이 지리산에 들어서면 두 인물이 병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기록이 햇빛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는데 나는 신화의 입장이 아니라 역사의 입장에서 이 두 인물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때는 옷을 벗어버린 알몸으로 두 인물이 배제의 원리가 아닌 수용의 원리로 들어오지 않겠어요? 그때 가면 나의 두 권 시집도 더욱 빛을 발할지 모르겠군요.
맹문재 : 이야기의 방향을 돌러볼게요. 선생님께서 엮은 『그대, 그리운 날의 시』(고요아침, 2006)의 서문을 보니 좋은 시에 대한 기준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해 놓았네요. 그 중에서 여섯 번째로 “시는 삶과 죽음의 테마 연구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생체험의 가락을 몰아치지 않고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말씀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송수권 : 제가 보는 좋은 시에 대한 평가 기준이군요. 생체험은 곧 개체험이 아니겠어요. 개체험 없이 시가 육화되지는 않겠지요. 육화되지 않을 때 시인의 영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정지용의 경우 초기 모더니즘 시인 「카페․프란스」는 후기 산수 체험에서 「백록담」이나 「장수산」 등으로 육화됩니다. 그래서 「유리창」 같은 모범 작품을 썼겠지요.
맹문재 : 시선집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고요아침, 2005)의 해설을 오세영 선생님께서 애정을 가지고 쓰셨네요. 오세영 선생님은 그동안의 선생님께서 추구해온 시의 대상이 자연이라고 보고 등단한 뒤부터 두 번째 시집인 『꿈꾸는 섬』까지를 제1기(1975~1982), 여섯 번째 시집인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까지를 제2기(1982~1991), 일곱 번째 시집인 『별밤지기』(1991~) 이후를 제3기로 나누었습니다. 제1기의 자연을 애니미즘의 세계, 제2기의 자연을 생활공간의 세계, 제3기의 자연을 생태 환경의 세계로 나눈 것이지요. 그리고 또 다르게 추구해온 대상으로 민속 혹은 민중이라고 보고 고전의 세계, 역사의 세계, 설화의 세계, 민속적 세계, 향토적 세계, 샤머니즘 및 불교적 세계 등으로 정리하셨습니다. 저는 이들 중에서 역사적 세계에 관심이 갑니다. 그동안 동학혁명에서부터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문제들을 작품으로 담아내셨는데, 앞으로 더 그리고 싶은 것이 있는지요.
송수권 : 저는 시에서 아놀드가 말한 ‘양가정신’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는 언어의 성취도요. 둘은 정신의 성취도입니다. 만해는 ‘님’이라는 명령어 하나로 살아남은 정신의 성취를 보인 시인이고, 영랑은 남도의 비단결 같은 언어(시편제 가락)로 살아남은 시인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양가를 성취하는 시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서정시가 맥 빠진 것은 정신을 추구하는 역사 정신이 없다는 것을 저는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특히 영랑의 시가 그렇지요. 이육사의 일관된 지사적 정신이나 윤동주의 자기 고백적인 부끄러움의 정신은 양가정신을 실현한 시인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개체험과 육화된 서정이 뛰어난 시인들이지요.
이 정신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 저의 시에서는 대(竹)와 황토, 뻘의 정신에서 왔습니다. 이는 남도 풍류 중 줄풍류가 아닌 대풍류입니다. 알다시피 대풍류는 대금, 중금, 소금 3죽(竹)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피리 소리가 난세에는 죽창으로 빛나고 태평한 세월에선 가락으로 뜹니다. 그것이 의향이고 예향이며 ‘문 밖은 대밭인데 방 안에 들어가면 어찌 난초가 없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남도의 풍류이고 남도 정신입니다. 지금까지 저의 시는 이 정신에서 한 치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언어가 시로 가면 ‘구슬리는 말법’이요 ‘눙치는 가락’이 됩니다.
40년 문학 인생을 고향 언저리로만 떠돌았기에 고향에 바치는 시 『사구시의 노래』가 16시집으로 곧 선보일 것입니다. 저는 최치원이 풍류도에서 말한 ‘접화군생(接化群生)’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앞으로의 시 세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맹문재 : 새 시집을 내신다니 기대됩니다. 선생님의 산문집 『아내의 맨발』(고요아침, 2003)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내의 맨발」 연작시도 그러하구요. 소개를 좀 부탁드릴까요?
송수권 : 『아내의 맨발』은 아내의 골수이식 수술비가 없어 10일 만에 쓴 것입니다. 3천만 원의 성금을 내어준 출판사가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저널리즘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조중동이 일시에 터뜨리니 방송 3사가 밀려와 북새통을 이룬 끝에 KBS에서 방영 날짜까지 잡아 놓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처음 약속과는 다른 방향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한 달 만에 취소시켰더니 위약금 2천3백만 원을 내라더군요. 광주집에서 병원, 섬진강 서재까지 오르내리며 촬영했는데 시인의 문학 인생이 아니라 저속한 사랑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그만두었지요. 광주 여관방에서 3일 동안 철수를 하지 않고 있어 애를 먹었는데, 결국 위약금 없이 철수해준 것이 고맙기만 합니다. 저는 속물주의 간판스타가 아니라 진짜 시인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맹문재 : 시선집인 『여승』(모아드림, 2002)에서는 배한봉 시인과 긴 대담을 나누셨네요. 이 대담을 읽으면 선생님의 시세계를 상당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담 중에서 ‘곡선의 상법’과 ‘소리의 상법’이란 개념이 나오는데 좀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송수권 : 십년 전에 나온 시선집을 펼쳐보니 「거침없는 가락의 힘, 그 곡즉전(曲則全)의 삶」이란 제목에 ‘송수권 시에 나타난 굿의 제의(祭儀)와 에로스정신’이 부제목으로 달렸네요. 내용으로는 ①맺힘과 풀림, 恨의 미학 ②곡선과 소리의 상법 ③국토정신과 선풍(仙風) ④에로스 정신과 뻘 ⑤겨레말의 숨결과 토속정서 ⑥곡즉전과 맛깔 나는 그늘의 미학으로 아주 밀도 있게 구성되어 있군요.
‘곡선의 상법’과 ‘소리의 상법’은 「송수권론」에서 부산대학교 김준오(작고) 교수가 처음 끌어낸 이론이었습니다. 저도 이분한테서 노자의 「곡선의 미학」을 배운 셈이지요. 저의 시가 도시 이미지가 아니라 전부 자연 속의 삶의 이미지로 곡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곡선의 상법과 소리의 상법을 정리해서 산문집으로 낸 책이 있는데 『소리, 가락을 품다』(열음사, 2007)입니다. 그 서문을 이렇게 썼습니다.
현대회화에서 처음으로 선(線)을 의식한 아티스트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로드첸코였다. 그는 색채 회화의 마지노선도 이런 선(線)을 통해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훈더트 바서는 “기능주의야말로 범죄며 직선은 선과 도덕에 대한 부정”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선언대로라면 ‘곡선의 상법(想法)’이야말로 웰빙의 선이며 생체리듬의 선이다. 여기에 비로소 소리가 숨 쉬고 가락이 있다. 이 가락은 곧 느림으로 가는 삶이다. 시로 보면 서정의 운율이며 음악으로 보면 선율이다. 건축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머물 수 있는 선조주의(線造主義) 공법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는 대게 이 ‘곡선의 상법’에서 솟아난다. 이 상법에서 나오는 체험의 소리 50여 편을 모아 『소리, 가락을 품다』로 엮는다. 이는 내 시(詩) 쓰기의 코드요, 노자가 말한 ‘곡즉전(曲則全)’ 즉 ‘곡선은 완전하다.’로서 내 삶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군자의 연잎을 두들기는 빗소리, 군청색 바다에 뜬 휘파람새 같은 해녀의 숨비 소리, 나직한 능선을 따라 길게 울리는 황혼의 범종 소리, 한여름 더위도 피해 가는 외할머니 부채바람 소리, 산수진경의 여백을 우렁차게 채우는 여름 산 폭포 소리, 생흙 향기 물씬 풍기는 봄 물꼬에 물 넘는 소리, 새끼를 위해 한바탕 전쟁 중인 딱따구리 나무 찍는 소리, 우주의 소리를 머금고 둥글게 울어대는 농악마당 징 소리, 청자의 푸른 빛깔 속에 담긴 솔바람 소리……. 이는 모두가 나의 시적 소재들로 곡선의 상법과 소리의 상법입니다. 직선은 악마가 만들어낸 죽임의 선이고 곡선은 천사가 만든 살림의 선이란 뜻입니다.
맹문재 :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볼게요. 산문집인 『만다라의 바다』(모아드림, 2002년)에 들어 있는 「훌쩍훌쩍, 비틀비틀」에서는 박용래 시인과 임홍재 시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두 시인에 대한 소개를 들어볼까요.
송수권 : 훌쩍훌쩍, 비틀비틀, 지금 생각해도 참 슬프고 아련한 추억들입니다. 1975년 2월호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자 3월인가 YWCA 강당에서 신춘문예 등단 시인들과 합석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만난 시인이 임홍재였습니다. 그는 서울신문에 시와 동아일보에 시조가 동시에 당선된 친구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줄기차게 편지질을 했습니다. 나는 섬 중학교(지명중) 교사였는데, 그가 서울에 있는 덕택으로 많이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방학 때 겨우 만나곤 했는데 박용래 시인이 곧잘 그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박용래 시인은 벙거지 빵모자를 쓰고 대전에서 올라와 나타나곤 했는데 술이 취하면 훌쩍훌쩍 감정에 복받쳐 울었고, 홍재는 원래가 한쪽 다리를 절어서 비틀걸음이었는데, 어느 여름밤에 곤죽이 된 박용래 시인을 등에 업고 청개천 다리를 건너 그의 집에서 잤습니다. 홍재 등에서는 박용래 시인이 훌쩍훌쩍, 홍재는 비틀비틀, 다리를 건넜던 그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나는 그때 박용래 시인의 벗겨진 구두 두 짝을 들고 뒤따랐었지요.
임홍재는 저와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시 세계를 공유했기에 절친했습니다. 섬학교에서 어느 해(1979?) 편지를 보냈는데 사무실 동료로부터 반송되어 왔고, 홍재는 죽은 지 두 달이 되었다는 것, 청계천 다리를 건너다 한밤중 실족사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는데 그것도 못 봤느냐는 원망조였습니다. 「山門에 기대어」에 나오는 누이(동생)의 자살사건 이후 저에게 두 번째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면 저에게도 큰 힘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한스럽습니다. 그의 유고시집에 그때 심경을 고백한 서문으로 나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안성농고에 그의 시비가 섰을 때도 풍랑으로 배가 뜨지 못해 참석하지 못하였고 다음해 겨울, 겨우 시비 앞에서 울었던 기억이 가슴 아픕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여성동아』 11~12월호에 걸쳐 50여 통의 편지를 공개하였고, 300여 통의 편지가 있었는데, 이사 다니면서 상당량 분실된 것 같습니다. 그때 안성을 다녀오다 장터에 들러 동지팥죽을 들며 썼던 시가 있습니다. “장터 마당에 눈이 내린다/먹뱅이 남사당패 어디 갔나/남사당은 내 고향/내 몸은 아프다/소리소리치며 눈이 내린다/설설 끓는 동지 팥죽/저녁 한 끼 시장한 노을 위에/식어가는 가마솥 뚜껑 위에/安城 세지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이 내린다/비나리패 고운 날라리 가락 속에/눈물 범벅이 진 네 얼굴/고뱅이 텄다 곰뱅이 텄다/70년대를 한판 걸죽하게 놀아보자던/네 서러운 음성 위에/동녹이 슬어가는 유기전 놋그릇들 위에/눈이 내린다/어스레기 황혼을 부른 말뚝 위에.”(「안성(安城) 장터-홍재 시인에게」 전문)
박용래 선생과도 많은 엽서와 편지를 주고받았지요. 홍재의 등에서 훌쩍훌쩍할 때 빵모자 방울이 따라서 좌우로 흔들리며 펄럭거린 모습이 오래 남습니다. 「수권형, 그곳 山門 밖에는 눈이 가득 쌓이고 있겠지요. 병실 창문 밖으로 그 모습이 보입니다」라는 엽서가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맹문재 : 참으로 아련하고도 안타깝네요. 선생님의 시선집인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문학사상사, 1987)에서는 「여승(女僧)」이란 작품이 특히 눈에 들어오네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라든가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같은 표현에서 그러하네요. 이 작품의 배경을 들을 수 있을까요?
송수권 : 「여승」이란 시는 저의 두 번째 시선집의 표제 『여승』(모아드림, 2002)이기도 합니다. 예닐곱 살 때 한 소년이 처음으로 겪는 이 세상의 신비감이라 할까요. 방안 풍경과 동구 밖까지 여승을 따라나선 한 소년의 관음증이라고 할까요. 앞에서 소개한 「여자의 성소(聖所)」에서 ‘움마’란 말을 처음 완성한 후 써 먹은 말이 ‘애지고 막막하여’라든가 ‘도련님’이라든가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저의 시 중 시낭송 대본으로 가장 많이 떠돌아다니더군요.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라고 끝나는데, 저의 삶이나 시에서 변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맹문재 : 저는 세 번째 시집 『아도(啞陶)』(창작과비평사, 1985)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집이 간행되었을 즈음 저는 시를 쓰기 시작했거든요. 「망월동 가는 길」 연작시를 쓰실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듣고 싶네요.
송수권 : 광주 5․18 이야기군요. 그때 저는 섬(금당중)에서 광주여고로 발령받아 왔습니다. 1980년 3월입니다. 두 달 후에 광주사건이 터지고 도청 앞 광장은 바로 학교 옆길에 있었습니다. 광주일보와 전남매일이 한 달간 휴간했고, 6월 4일 광주일보 복간 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라는 피 흘리는 이야기로 장시를 썼는데, 계엄사령부 통제 하에서 「젊은 광장에서」라고 제목을 고쳤지요. 80행의 시가 40여 행으로 잘렸습니다. 아직도 발표하지 않고 숨겨두고 있습니다. 신문사가 곤욕을 치뤘고(일부러 저항하기 위해 청탁했으므로), 시민들이 학교장에게 전화를 걸어 교장이 골머리를 앓았고, 연이어 삐라사건이 터지고, YWCA 문학행사(홍남순, 김지하 출감) 시낭송을 한다는 정보가 안기부․교육위원회에 사전 입수되어 운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광주여고 삐라사건, 「젊은 광장에서」사건으로 전담 형사(백형모)와 같이 출퇴근을 했습니다. YWCA 집회 사건에 하필이면 나 혼자 얼굴을 내밀어 하룻밤 새벽에 서광여중으로 좌천된 것만도 다행이었습니다. 이 무렵에 쓴 시들을 시집으로 낸 것이 『아도』였습니다. 그 시집 때문에(그때 금호문화재단 후원으로 토요시 낭송회를 이끌고 있었는데) 박정구 회장이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불려가 호되게 당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젊은 광장에서」는 2013년 『5월문학총서 1․시』(5․18기념재단)에 들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랍니다. 이때문에 교장 승진도 안 되겠다 싶어 저는 1995년 8월 31일 광주학생 교원 연구사로 명예퇴직을 했던 것입니다.
맹문재 : 두 번째 시집인 『꿈꾸는 섬』(문학과지성사, 1983)의 표제작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꿈꾸는 섬」에 대한 소개를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송수권 : 1979년에 쓴 것으로 생각되네요. 금당도의 금당중학교에 근무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3다 3무가 있는데 3다는 낚시(喫釣), 끽연(喫煙), 끽다(喫茶)입니다. 낚시는 한 달에 두 번, 담배는 하루 두 갑 이상, 커피는 양촌리 회장 커피로 몇 잔. 그리고 3무는 운전을 못하는 것, 신문을 안 보는 것, 컴퓨터를 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3무 인생은 이 시대에 살 자격이 없지요.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쪼그만 돌 밑에/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놓고/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이승에선 누가 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즐거워라” 후반부가 이렇게 끝나는 시인데, 금당도의 가화리 앞바다에서 낚시질을 하다보면 정말 눈썹 같은 두 개의 섬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상길마도와 하길마도로 불립니다. 그때 문득 눈부신 황톳길에서 20리를 아랫마을에 사는 한 소녀의 궁둥이를 따라 3년간을 통학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아랫마을 삼거리에서 그 소녀를 만나면 앞서지 않고 궁둥이만 보고 다녔어요. 하루는 눈에 다래끼가 들었는데 어머니가 그러더라고요. 너는 누구를 쳐다보고 다녀 다래끼가 들었냐고. 그 처방법(민간요법)까지 가르쳐주었는데, 눈썹 둘을 빼어 길 가운데 돌 밑에 눌러두면 그 돌멩이를 차고 가는 사람 눈으로 옮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 날부터 그렇게 했지만 한 번도 그 소녀가 돌멩이를 차고 가는 걸 보지 못했어요. 팔짝팔짝 잘도 뛰어넘는 거예요. 그래서 3년간을 말 한 번 못해보고 졸업을 했지요. 그런데 묘한 것은 순천사범을 같이 들어갔는데, 얼마 후에 보니 소녀가 간 곳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수소문해 보았더니 서울 어느 간호고등학교로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못 볼 것 같았는데 그해 여름방학 때였던가, 길 한가운데서 딱 마주쳤습니다. 말뚝처럼 서서 한동안 말없이 빨개진 얼굴로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어요. 그때 무슨 메시지라도 남겼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수줍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러고는 간호 장교로 제대하고 미국에서 산다는 소식만 들었지요. 추억 속에 있는 소녀들은 어떻게 알고 편지라도 오는데 다님인가 다남인가 하는 소녀는 아직도 종무소식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길 가운데 말뚝처럼 서 있었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요. 그때 눈썹 둘이 비바람에 휘몰려 가화리 앞바다의 두 개의 섬으로 앉은 것이 아닐까요. 이런 걸 연기법에 의한 윤회환생이라고 하는가요? 저의 시에서 「산문에 기대어」에 나오는 눈썹과 더불어 이 눈썹은 징그러울 만큼 원형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특강을 가면 눈썹에 많은 질문들을 해요.
맹문재 : 아무래도 선생님의 등단작인 「山門에 기대어」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없네요. 이미 「동생의 죽음에 바쳐진 엘레지」 등의 글에서 소개했지만, 이 대담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들려주시길 부탁드려요.
송수권 : 너무 많은 화제를 뿌려서 어디를 가나 신물이 날 정도입니다. 작년에도 20여 군데 고등학교에 불려갔습니다. 불교 윤회설로 짜진 이미지라서 그만큼 국어 선생님들도 어려운가 봐요. 호격인 “누이야”에서 남동생을 왜 누이라고 했느냐고 타박이지요. “한국 시인들은 대개가 누이와 근친상간을 한 시인들이거든, 그래서 눈물이 많고 체질이 다 허약하단다”라고 설명하지요. 소월, 만해, 영랑 등 전부 근친상간자들이야, 라고 시를 들어 보입니다. 내 생각으로 ‘한(恨)’을 극복하지 못한 약점은 시에 역사의식이 빠져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서정시가 왜소해 보입니다. 한도 역동적이고 생산적일 때, 그것이 역사를 작동시키는 힘 즉 해학과 풍자로 까벗기는 ‘부활 의지’가 나옵니다. 한이란 것이 로고스 측면에선 민족의 역사를 추동시키는 힘으로, 파토스적 측면에선 ‘한과 멋의 가락’으로 탄생한다는 나의 체험을 들려주곤 합니다.
「山門에 기대어」는 1976년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풀잎에 누어」가 파문을 일으키면서 시끄러워졌는데, 안도현이 그의 시창작론인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한겨레출판사, 2009)에서 두 작품을 비교적 소상히 밝혀 놓았더군요. 「山門에 기대어」를 이해하려면 문태준이 쓴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2008)를 보는 게 좋을 듯하고, 이승원이 쓴 『교과서 시 정본 해설』(휴먼북스, 2008)도 보면 되겠습니다. 「山門에 기대어」는 휴지통에서 걷어 올린 작품으로도 화제가 풍성한데 그때 잡지사의 주간은 “자네는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야”라고 농담을 던지면 “자네는 콘돔 속에서 나온 시인이야”라고 들려서 뒷맛이 씁쓰레할 때가 많았습니다.
맹문재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요?
송수권 : 글쎄요? 참 부지런히 달려온 시간들이었습니다. 2010년부터 시집을 4권 상재했고, 문학상도 만해님시인상(2010), 김삿갓문학상(2012), 순천문학상(2013), 구상문학상(2013)을 내리 수상했군요. 이청준이 살았을 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 「신화를 삼킨 섬」을 쓰다가 미완성으로 갔고, 나는 그때 「바람 타는 섬」이란 표제로 제주 개벽 신화로부터 4․3사건까지 연결 짓는 시를 쓰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여러 가지로 귀중한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맹문재 |시인, 안양대 교수
첫댓글 송수권 시인님의 구상문학상 작품 "퉁" 을 읽었을때 토속적이고 향토적인느낌에 웬지 백석 시인이 떠올랐는데
역시 그러 했군요~!! 구상문학상 시상식때 인사말을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문을 여시는 모습이 정말
어쩔수 없는 남도 토종시인이구나 ! 했지요^^*
난해하고 기교만 부린 시가 넘쳐나는 세상에 송수권 시인 같은 시인이야 말로 국보급 시인 아닐까 싶네요
좋은글 오래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