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만 잡고있는 중입니다. 사료와 시기적 자료등을 점차 세밀하게 덧붙이도록 할 생각입니다.
(죄송하지만 미완성글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
기마족중심의 북방계민족의 남하 그러니까 부여로부터 고구려가 남하하여 독립성장하였고 같은 계열에서 더 남하한 것이 백제라는 통설하에 일반적으로 "한"으로 알려진 남부 삼한지역중 일부는 역사적으로 보아 거의 일시에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남쪽으로 밀려났고 지금의 일본지역중 일부로 대이주가 있었다고 일단의 백제사연구가들은 보고있다.
그당시의 일본은 이주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낙후지역이기에 일본땅에서의 이들의 패권차지는 역시 일순간이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또한 백제계의 일본진출역시 삼한지역 차지만큼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후진지역인 일본진출은 본토로부터 전반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 현재까지 일본고분발굴등에서도 고구려의 일본진출역시 살펴볼 수 있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계 모두가 일본에서 독자세력화하며 경쟁하며 성장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일본내 삼국의 영향중 가장 큰 흐름은 백제계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왜"와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잘 들어난다.
"왜"라는 국가명칭이 그당시 동북아에서 같는 의미는 모호하지만 "한"내지 백제의 일본내 패권국(초기에 부족국가수준을 넘어섰는지 둘째로 하고..)으로 본다면,오히려 일본내 백제계와 본토의 백제계를 아우른 대백제를 의미하거나 또는 해상을 통해 접하는 이들계열의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바 상당히 설득력이 있으며 왜로 백제 신라등에서 후에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기도 하는 바 병력만을 중심으로 국력을 고려할 때 오히려 일본내 백제계를 더 큰 "대백제"로 보려는 경향마저 있다 이것은 부여에서 고구려계가 고구려계에서 백제계가 나왔듯이 백제계에서 "왜"가 나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인 듯하다.
일본에서는 현재의 학설에 따르자면-백제의 고대국가화시기를 최소 3세기정도 끌어올리는 것으로 풍납토성등의 발굴결과 이를 왕성으로 보며 건축시기도 현재까지 추측되던 것보다 이백년 이상 앞선 것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는 점등을 근거한 학설이다- 1세기 내지 3세기부터 "한"의 유입이나 "백제"의 유입이 있어왔고 이후 백제전성기인 4세기경부터는 왕실 대 왕실의 관계가 있어왔다 즉 같은 백제계라도 본토백제가 문화라는 측면에서는 앞선시기였다는 것이다.
이시기 이래로 가라데를 제외한 모든 일본 맨손무예의 원형이라고 할 테고이(데고이)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결국 테고이 내지 데고이란 것이 백제계인들의 무술이란 추측을 뒷받침하게 한다.
대동류와 관련해서는
백제멸망 후 백제도래인들의 후손들중 하나가 일본 무전(다케다)가문이라는 점은 그것이 대동류가 백제무술 그자체다라고 거칠게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백제계후손들로부터 시작된 것은 다케다 가문의 주장이라고 보는데 의미가 있다.
다케다 가문의 지역적 연고나 그지역에 대한 일본 사학계의 입장은 명확하다. 백제도래인 지역이다.
다만 "신라삼랑원의광"이란 이름에 많은 일본인들에게조차 현재까지도 신라와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견해일 뿐 역사적으로는 오류라고 생각되어 진다. 다만 왜 백제계 후손이 "신라"라는 명칭을 자신의 "호"로 사용했는지가 흥미로울 뿐이다.
고구려남진 이후 본토백제의 일본진출이 본격화된 이후 백제패망까지 왜가 백제를 도우려했지만 결국 백제왕족 귀족등이 식솔들까지 이끌고 일본땅으로 대이동을 하게된다. 이때 일본의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단몇년내에 사망한 것이 거의 이주민의 3분의 1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이것은 급작스러운 대이동을 시사한다.
이당시 "왜"즉 일본의 무술은 말그대로 형제국으로서의 본토백제의 무술과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백제계의 무술이 이미 "왜"의 무술 그자체나 다름없었는데 백제패망이후 본토의 왕실 무사귀족등의 대이동과 함께 그대로 이전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고구려패망이후 고구려계역시 일부 일본으로 진출하여 백제계와 항쟁하며 성장해 나갔다고 보는 견해도 유력하지만 백제계의 영향이 가장 컸다는 것을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이후 통일신라자체의 문화나 통일신라를 통한 중국문화의 간접수입이 늘어나면서 신라계의 영향도 본격화되지만 그것이 백제계의 영향처럼 본질적이라기 보다는 영향을 미쳤다는 정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또한 통일신라가 "왜구"의 침략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도 이를 제어하지 못한 점에서도 왜 일본의 무술이 통일신라계열에 큰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가 곤란하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왜의 무술이 비록 왜구라고 불리우는 형태의 하층계급의 무술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명나라까지도 왜구에 대적하지 못해 쩔쩔 맸다는 사실과 그들이 왜구의 장검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살펴보면 왜의 검술자체는 이미 동북아에서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이후는 "왜구"와의 전투위주로 한일간에 무술접촉이 있었지만 본토에서 왜구를 어느정도 제압하게 되는 것은 전통무술을 통한 것이 아니라 화약과 포탄 대포의 도입과 함께라는 것은 시사성이 있다. 즉 그전까지는 왜구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국지적이었던 것이었고 가장 큰 접촉은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에서 볼 수 있다.
규모와 기간을 살펴보면
이당시 풍신수길이 조선에 파병한 숫자는 20만이상이며
1592년부터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정유재란이 끝나는 7년간 왜군은 조선땅에서 주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에 미친 영향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또 왜란은 일본의 조총이 위력을 발휘했던 전쟁이었지만 일본 장군들이 직접 출동한 정예부대들의 무술이 총체적으로 본토에서 전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조총을 이용한 전투란 것은 일단 집중사격후에는 백병전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무술계에는 이 와중에 일부 의병들이 택견을 이용해서 왜적에 대항했다는 무용담도 존재하지만 지역적 이점을 이용한 전술상의 승리가 주된 것이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중에 인상적인 것은 왜군중의 일부가 조선에 귀화해서 왜군과의 전투에 나서기도 했으며 이들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조선인의 이름을 가지고 살게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뿐이다.
이점은 내게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 무사(사무라이)들이 조선무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었으며 어느정도수준의 무사들이었으며 조선에서 자손을 보며 어느정도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했을 것인가?
우선 검과 관련해서는 이들의 것이 "선진"적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지만 이들이 검술과 관련한 호신술-야와라 데고이(테고이)-을 조선에서 전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또 반대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 그많은 조선인들중 전통무예를 아는 사람이 있었거나 이들이 일본 무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없는지...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란 대규모의 접촉은 일본제국의 조선합병이후이다.
이당시 조선 내지 대한제국의 병력내지 무술은 당시 최상위라고 할 황궁무관들과 관련지어 볼 때 1895년 을미사변의 명성황후(당시 민비)시해사건과 고종의 아관파천(러시아 대사관으로의 피신)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후 의병대의 활약상에서 무기술을 제외한 무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하기는 곤란하지만 일본군의 근대적 군사시스템에 대응하는데 큰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후 일본식 총술 검도 유도 가라데가 식민지가 안정화되면서 일본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일본 군경에서 기마술 검술이 강조되었고 유도역시 이후 본격적으로 경찰무술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본격도입되었다. 즉 천황배 등의 대회가 일본과 식민지조선에서 동시에 개최되기도 하는등 식민지가 안정화되면서 동시적으로 진행된 바 있다.이중 가라데는 한국인이 일본에서 가라데 일본본토 지도 제1세대로부터 직접 배워와서 직접 도장을 차렸다는데 특징이 있으며 현재는 당수도 수박도 태권도등으로 변형분파되어 있다.
유도역시 국내도입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강도관에서 직접 배워온 이들이 있었다.
검도역시 현재 대한검도계열외에 진검 거합을 일본에서 직접 배워온 이들이 존재했고 일부는 현재도 제자들이 남아 있다.
유술은 일본에서 배워오신 분으로 최용술선생님께서 야와라라는 명칭으로 주로 제자를 많이 배출하셨는데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중 지한재씨가 합기도란 이름으로 야와라에 발차기기술등을 다양하게 첨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정윤선생께서는 한풀이란 명칭으로 이를 응용한 무술을 보급중이고
서인혁씨는 국술이란 명칭으로 대만국술과 최용술선생의 야와라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동생인 서인선씨는 대한 기도회 회장이었으나 최근 무슨이유인지 대한기도회에서 발을 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명재남 명재옥형제분들께서 일본 아이키도와 직접 교류하며 합기도와 아이키도의 교류를 시도했었고 현재는 회전무술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명광식선생등은 미국등지에서 합기도를 많이 보급하시고 계시며
화랑도란 이름으로 합기도중심의 무술을 가르치는 분도 있으시다.
연배는 많이 아래지만 장수옥씨가 특공무술로 성장하고 있다.
그밖에도 합기도9단이라는 많은 분들이 다양한 새무술의 회장님으로 자리잡고 계시다.
또다른 일본유술로는 장인목 선생님이 홋카이도에서 다케다소가쿠의 제자인 마츠다 토시미로부터 대동류합기유술을 8년간 배워오셨으나 현재 대동류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제자는 단한명일 정도로 제자를 내지 못했다..
첫댓글 한일관계 자료에 대해 알면 알수록 답답해집니다. 아직까지 사료만 보지 방향성을 잡지 못해서 고민입니다.자료에 있어서(구당서 신당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 하면 제 답답함이 조금 이해되실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