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지녔던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고 조선은 본격적으로 관료들의 나라가 된다. 왕들은 끊임없이 관료들과 정치투쟁을 벌였고, 이러한 와중에 지속적인 당쟁이 계속 된다.

장희빈이 활약하던 숙종 시절은 서인과 남인이 대결하던 시절이었다. 숙종 시절 서인이 집권하면서 내세운 서인 세력의 힘의 상징이 장희빈과 대립하던 인현왕후였다. 서인은 전국에 걸쳐 지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이미 경제적 기반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남인이 환국을 통해 종종 정치적 전환을 꾀했지만 잠시 서인이 위축되더라도 지주제를 통해 확보한 경제적 기반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남인이 주목한 것은 중인계급이었다. 당시 중인계급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있었지만 그에 비해 정치적 기반은 형편없었다. 중인계급 중 역관의 딸이었던 장희빈은 남인의 정치적 기반과 중인계급의 경제적 부를 등에 업고 숙종의 비로 들어간다.
특히 장희빈이 숙종의 소생을 보면서 정국의 상황이 급격히 변하게 된다. 그 동안 서인독재에 시달리던 왕권은 장희빈에게 힘들 실어주면서 남인세력이 서인세력을 축출하는데 도움을 주게 되고, 이 와중에 서인 세력의 힘의 상징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기도 했다.
남인 세력이 정권을 잡은지 4년 뒤 남인들은 서인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세우지만 오히려 숙종은 남인의 득세가 왕권강화에 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오히려 서인재집권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 인현왕후가 복귀한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장희빈에게 다시 기회가 오지만 이미 장희빈에게 왕세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인에게 권력을 다시 줄 수 없었던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하게 된다.
서인계급에서는 연산군의 사례가 떠올라 장희빈의 처리에 대해 의견이 나뉘고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된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경종은 결코 장희빈을 다시 왕후로 추존하지 못했다.
경종의 묘
조선에서 유일무이한 중인 계급 왕비이자,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결코 왕후가 될 수 없었던 비련의 여인이 바로 장희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