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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일편단심 당신의 마음
모진 한파에 끄덕없이 견디어라
아름다운 동백처럼 피어나리요
나 오직 당신만 사랑하리오
섬진강 굽이굽이 굽어보소
한 백설 동백꽃으로 피우고
마디마디 매향 날려
백운산 선혈 뿌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영원히 지키어
국화를 새긴 은장도야!
-송병완 <은장도>, 계간 대동문화 200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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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전라도요, 전라도엔 광양이라'(朝鮮之 全羅道, 全羅之 光陽)
조선시대 어사 박문수는 양지바른 빛고을 광양(光陽)을 이렇게 예찬한다. 또, 광양사람을 표현하는 예로 '옛날에 광양사람이 순천에서 수 만 마리 벼룩을 몰고 왔는데 광양에 도착해서 세어보니 한 마리도 빠트리지 않고 다 몰고 왔더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무지고 치밀한 광양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표현한 것인데 벼룩마저 그렇게 다룬 솜씨라면, 손재주는 또 어디 갈 것인가?
장도(粧刀)는 예로부터 서울, 울산, 영주, 남원 등지에서 많이 만들어져 왔지만, 그 중 전라도 광양의 장도는 섬세함을 자랑하며 한국적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다.
흔히 '장도'하면 은장도를 우선 떠올린다. 하지만 은장도는 장도의 여러 종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서늘한 은빛으로 반 만 년 역사와 함께 한, 이 작은 칼 '장도'는 어떤 존재였을까?
옛날 선조들은 성년이면 누구나 자그마한 손칼을 옷고름이나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지켜왔다. 특히 은장도는 은으로 장식된 장도로 칼집이 있고 단장하는 작은 칼을 지칭하는데, 주로 혼인한 여자가 옷고름에 찬 것을 '패도'(佩刀), 미혼여성이 주머니 속에 지니는 것을 '낭도'(囊刀)라 하여 총칭하여 장도라 하였다. 또, 딸을 시집보내며 친정어머니가 마지막 훈계로 준 것이 '장도'요, 관례를 치른 아들에게 아버지가 내린 것이 '패도'로 정절과 충의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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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꼽히는 전통 공예품, 장도
원래 호신용으로 시작됐던 패도는, 훗날 복식의 장식을 겸하게 되자 장도로 불리게 되었는데 광양지방에서는 고려 초부터 그 역사를 함께 해왔다. 전란이나 사화를 피해 광양으로 온 선비들이 자신의 충절과 결백을 의미하는 장도를 손수 만들어 몸에 지니게 되었고 후손들에게 그 기술을 배우게 했다. 반 만 년 역사 속에 우리나라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전통공예품 중의 하나가 바로 장도이다.
"세상에 칼은 많지만 정절과 의리, 맹세가 담겨있는 칼은 한국의 장도밖에 없다"고 말하는 광양의 장도장(粧刀匠) 도암 박용기선생(80세,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그의 눈빛과 손길에서 장인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박옹은 조상들의 슬기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국내 유일의 장도분야의 인간문화재이다.
박옹은 구한 말 장도의 명인인 장익성 선생으로부터 14살 때부터 장도 제작의 맥을 이어받아 5백여 종의 장도를 되살린 역사의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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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광양읍 칠성리에 사시던 장익성 어른에게 전수받았지요. 당시 5명이 시작했는데 중도에 모두 포기해버렸어요. 전수과정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장도비법 전수가 생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박옹은 소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장도장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그는 60여 년의 험난한 외길 인생을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전국의 골동품, 박물관을 쫓아다니면서 장도연구에 일생을 바친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만든 장도에 대한 애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결국 그는 장도제작의 전통과 기술을 이어받은 우리나라 유일의 장도장이 되었다.
2006년1월, 평생 장도장의 맥을 이어온 박옹은 자신이 만든 장도 300여 점을 모아 '광양장도박물관'(광양시 광양읍 소재)을 설립한다. 박옹은 정부와 광양시의 도움으로 평생 숙원이던 박물관과 전수관을 열게 되었다. 전시관을 겸한 전수관은 전시관 2개소와 작업실, 아트숍, 세미나실, 체험학습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1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도검 80여 점, 제2전시관에는 박옹의 작품과 선조들의 유물 수백여점이 각각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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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어가는 희생
박옹의 집념은 외아들 박종군 관장(49)이 전수하여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박 관장이 동국대 불교미술학과와 동대학원을 택한 된 것도 순전히 부친을 뜻을 따르기 위해서다.
"부친의 집념을 가업으로 이어가기로 결정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나름대로 젊은 시절 꿈도 있었지만 결국 이 분야의 학문적 체계와 정리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어요. 결국 석사논문도 '한국장도에 관한 연구'로 썼으니까요."
박옹은 박 관장이 자발적으로 대를 이어준 것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수십 년을 고생했는데, 왜 아들한테 고생을 물려주겠어요. 배웠던 제자가 여러 명 있었지만, 몇 년 있다가는 월급이 적다고 모두 나가고 말았지요. 이러한 상황을 접한 아들이 마음이 아파 결국엔 뛰어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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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칼'이라기보다 '보물'
전시실의 장도는 '칼'이라기보다는 '보물'처럼 느껴진다. '오동상감 타원형첨자도', '금은장 매조문 갖은을자도', '대추나무 은장파초문 갖은사각도', '은장십장생 문첨자도'... 장도의 명칭은 칼자루와 칼입의 표면을 장식한 재료와 형식 및 장식에 따라 붙여지며 꾸밈새로 쓰이는 장식에도 여러가지. 재료로는 은 또는 백동을 사용한다. 장도는 재료를 고르는 것부터 꼼꼼함이 필요한 데다 섬세하면서도 끈기 있는 기술이 요구된다.
장도의 주재료는 강철의 일종인 견강이다. 길이 한뼘 정도의 장도는 1천도 이상의 불에 달구어 칼날의 형태를 잡기 위해 수백 번을 두드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쇠를 너무 달구어도 조금 덜 달구어도 안 된다는 것. 또 달군 쇠를 불에서 꺼내 망치질을 시작할 때까지 잠깐 동안도 한눈팔 틈이 없다. 조금만 시간을 맞추지 못해도 쇠가 너무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극복하는 것에 장도장의 기술이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드림작업이 끝나면 틀에 넣어 모양을 잡고 정성들여 갈아 낸다. 그 뒤 글자와 무늬를 새기고 붙이는 작업을 마친후 고리를 달아 칼날을 완성한다. 장도는 재료와 모양 크기에 따라 첨사도, 을자도, 백장도, 팔각도, 은장도 등 10여 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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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제작 시연을 해 보인 박 관장의 진지한 눈빛과 손길에서 민족혼이 보였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박용기옹에 이어 한국 장도장의 뒤를 잇는 박 관장에게 장도박물관과 관련된 애환을 들어본다.
-장도박물관은 한마디로 어떤 곳인가?
"광양 장도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칼 전문 박물관이다. 이곳은 관람객이 직접 장도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교육과 문화관광이 접목된 공간이다. 우리나라 장도문화의 본거지가 광양지역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로부터 광양 백운산에서 사철이 많이 생산됐으며, 현재 광양에 제철소가 들어온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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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박물관 운영에 어려움은 없나?
"박물관의 1년 운영 예산만 1억 원이 넘어간다. 다행히 시에서 절반 정도인 6500만원을 지원해주고 있다. 하지만, 한낱 노리개나 장식품으로 알고 있는 은장도가 아닌, 민족의 정절과 충의의 상징이라는 장도의 참 의미와 용도를 알리는 지속적인 교육이 절실하다. 지금처럼 전통문화와 공예품들이 사라지는 형편이라면 국가의 지원이 아쉽다. 박물관 입장료도 받지 않고, 장도판매의 수익금으로 박물관 운영금을 조달하는 상황이라면 민족의식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체계적인 운영은 힘들지 않겠나. 문하생을 더 양성하고자 해도 운영비 걱정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진정한 전통공예 계승과 연구활성화를 위해서(광양시의 지원으로 개관하는데 도움이 많았지만) 정부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외길을 걷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며 맥마저 끊어질 위기에 놓인 장도의 학문적 체계화를 어느 정도 이룬 것은 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전통 문화는 누군가가 희생해야만 가꾸고 지켜질 수 있다고 본다. 문화가 없어지면 그 나라의 도덕이 없어진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숙원사업이 있다면?
"아버지(박용기옹)는 숙원 사업이던 장도박물관을 위해 사재를 헌납 하셨다. 나는 그 터전을 이어 장도를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고 장도 제작을 전승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려는 것이다. 인간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후세에게 물려주고 알리는 것이야 말로 선대의 진정한 의무와 책임이 아닐까? 박물관 주변에 카센터 등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 전통문화의 발전과 계승은 요원한 일이다. 박물관부지 뒤편에 700여 평의 공터가 있는데, 다른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전에 꼭 매입하여 전통공예관이나 역사학습체험장 등 연계학습형 테마파크 형식으로 조성하는 것이 꿈이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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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장의 뒤를 잇고 있는 장도장 이수자가 있는지?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 남중이가 전수 장학생이 되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자라고 있고, 이화여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아내(정윤숙)도 92년부터 전수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공예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문하생들이 여러 명 상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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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장의 소망은 간단하다.
"은장도는 딸이 시집갈 때 어머니가 딸에게 선물하던 것이지요. 한 지아비를 섬기라고. 장도에 담겨진 진정한 의미만이라도 이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광양사람 고춧가루 서말 먹고 뻘속 30리를 기어간다'는 속담처럼 박 관장에게서 광양장인의 야무지고 진정한 기질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하
첫댓글 은장도는 우리네의 아름다운 문화 유산이 되어서는 안되는것이죠 -.-;;;;;;;
우리 어머니들의 여인네로 살아야 했던 고단했던 삶을 여실히 . . . . . .
은장도는 왠지 하나쯤 소장하고 싶은 여인네의 소품이죠 21세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