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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남편 홍정택 명창과 함께. |
작은 체구였지만 판소리는 물론 민요와 시조, 민속무용, 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국악인이었던 김유앵 명창.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 김유앵 명창이 28일 새벽 급성심부전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김유앵 명창은 1931년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음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그런 그가 국악을 접하게 된 것은 다섯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후 재혼한 아버지가 이사를 한 곳에 권번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번에서 김명창은 다른 사람들이 배우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됐다.
김유앵 명창은 "바로 뒷집이 권번이었는데, 늘 권번 마당에서 놀았다"며 "우연히 방에서 흘러나오던 소리를 익혀 흥얼거렸는데, 당시 이리권번 소리 선생이었던 김대성이 무릎을 치며 '소리는 네가 배워야겠다'며 권유를 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완고한 부친은 딸에게 절대 소리를 시킬 수 없다며 다른 동네로 두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소리 배우기를 허락하면서 부터다. 열세살 부터 이기권에게 소리 공부를 시작, 열일곱살이 되던 해에는 이미 '춘향가'를 완창했다.
이후 권번 대항 명창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던 김유앵 명창은 해방 직후 창극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남편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홍정택 명창을 만난 것도 이 때였다.
홍정택 명창과 함께 활동했던 선일창극단에서 주연을 도맡아하며 창극배우로서 최고 인기를 누리던 김유앵 명창은 해방되던 해 결혼, 부부가 함께 군산국악원과 전주 전동국악원, 대구 경북국악원 등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서양음악이 범람하던 60년대에는 대구에서 활동하며 공연단을 조직해 경북 일원을 순회하며 창극을 올렸다. 주로 '안중근 열사가' '이준 열사가' 등 역사적인 인물을 창극으로 만들었는데, 대부분 홍정택 명창이 각본을 만들고 김유앵 명창이 연출을 맡으며 '부부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최동현 군산대 교수는 "김유앵과 홍정택은 판소리가 거의 사멸지경에 이르렀던 1970년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전주를 지키며 판소리를 가꾸어온 전주 판소리의 대부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김유앵 명창은 김연수에게 소리를 배운 적도 있지만,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는 데는 이기권으로부터 이어받은 소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의 소리는 고제(古制)의 단순하고 무거운 창법을 특징으로 하며 발림도 절제돼 있어 은근한 가운데 느낄 수 있는 깊은 맛이 있다. 김옥진으로부터 배운 민요 실력도 좋아 전북도립국악원에서는 민요부 교수로 재직했다.
1958년 전국시조대회 특부 1등상, 1961년 제40회 춘향제 전국명창대회 1등상 등을 수상했으며, 198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2003년에는 '제8회 자랑스런 전북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노년에는 남편의 호를 딴 사단법인 추담제판소리보존회를 설립, 대표로 활동해 왔으며 중견 소리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김세미 김선미씨가 그의 손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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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쉬운 이입니다. 훌륭한 명창이셨군요. 오늘 소리를 찿아 접해 봐야겠습니다. 부디 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