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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이성부 시인의 삶과 문학
시와 산의 길에 오르다
강 경 호
2월 28일, 이성부 시인의 1주기를 맞았다. 소설가 문순태 선생을 비롯한 이성부 시인의 동창들인 광주고등학교 9회 졸업생들과 한국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시비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말석에 끼어 심부름을 하고 있어 이성부 시인과의 인연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와사람》 이번 기획은 이성부 시인이 생존해 있다면 얼굴을 마주보며 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2011년 《시와시학》 봄호에 그가 쓴 ‘자술연보’를 골간으로 하여 쓸 수밖에 없다.
시인 이성부는 1941년 12월 6일(양력 1942년 1월 22일, 아버지 이근봉(李根奉)과 어머니 김덕례(金德禮) 사이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광주시 대인동 2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부근엔 기차정거장(옛 광주역)이 있어 어디론가로 떠나고 돌아오는 기차를 볼 수 있었다. 철로 아래 굴다리를 지나면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경양방죽과 드넓은 평야, 그리고 들 가운데 솟은 태봉산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저수지와 들, 태봉산이 근대화물결 속에 사라지고 시내의 번화가로 탈바꿈한 지 오래 되었다.
이성부는 1948년에 광주수창초등학교를 입학하였는데, 3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의 가족은 무등산 아래의 꼬두메와 잣고개 넘어 신촌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꼬두메에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잡혀가는 것을 본다. 이성부의 아버지는 소방서에서 불자동차를 운전하는 공무원이었는데 인공치하에서 소방서로 출근한다. 어린 이성부는 꼬두메 뒷산에서 여러 차례 광주시내가 폭격당하는 모습을 본다.
1952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광주수창초등학교 축구 대표로 뛴다. 이 무렵 고모 이상옥(李相玉)의 책을 훔쳐보기 시작했는데, 모두가 소설책이었다. 독서에 대한 그의 욕구는 동네 친구의 집에서 방대한 소년소녀 세계 명작전집을 통독한다.
1954년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병설중학에 입학한다. 이때 『삼국지』 『수호지』 등 소설 읽기에 심취한다. 소년 이성부는 농구부연습에 몰두하다가도 틈만 나면 문예부에 가서 정덕채 선생님의 강의를 엿듣거나 문예부 친구들과 어울린다. 이후 농구부를 나와 문예부에 들어가 교지 편집과 함께 《녹원》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만든다.
문예부의 정덕채 선생님으로부터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내 마음 아실 이」가 등사된 시험지를 받았는데 이 시들이 소년 이성부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표현과 “내 혼잣마음 날 같이 아실 이”라는 표현에서 무엇에 얻어맞은 듯한 감동에 휩싸인 것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고 지금까지 읽은 산문(소설)의 맛이나 재미와는 전혀 다른 언어함축과 표현의 맛에 깊숙이 빠져드는 계기가 된다.
중학교 3학년 첫 국어시간에 「나의 희망」이라는 작문을 했는데, ‘나의 희망’에 대해서 이성부는 “문인이 되는 것”이라고 썼다. 이후 독서와 글쓰기에 깊이 빠진 중학생 이성부는 문예반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학 중에는 날마다 시립도서관에 나가 소설, 시집, 세계명작들을 읽는다. 이때 가끔 무등산 등산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학생잡지인 《학원》의 학원문단에 여러 차례 시를 싣는다.
중학교 때 교사가 되기 위한 꿈을 꾼 적이 있었지만 사범학교 가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인문계학교인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성부는 문예반에서 장차 사학자가 될 선배 이이화와 시인 임보(본명 강흥기) 만난다. 당시 화제가 됐던 까뮈,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작품들을 탐독하는 한편, 선배들을 따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던 김현승 시인을 찾아다니며 문학적 소양을 넓혀간다. 그 무렵 다른 반에 있던 문순태를 찾아내 문예반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광주고등학교 1학년 때, 본격적으로 문학적 열정이 싹트기 시작한 이성부는 『사랑이 가기 전에』라는 조병화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읽었는데 당시의 베스트 셀러였다. ‘조병화’라는 존재를 알게 된 후 3학년 때는 조병화 시인의 집을 방문했는데, 고등학교시절 전국규모 문예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고, 백일장에서 장원했던 경력들을 소상하게 알리자 조병화 시인이 “무조건 경희대에 응시하고 들어와라. 그러면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을 거다”하여 조병화 시인이 있는 경희대에서 공부하게 된다.
광주고등학교 2학년 때는 선배인 박성룡·정현웅·박봉우·윤삼하·강태열 등을 만난다. 이밖에도 광주시내에 ‘학생문학가회’가 조직돼 문삼석·김이중·김수봉·전양웅·이청준 등을 만나 교유한다.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바람」이라는 시가 당선된다. 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하여 조병화·황순원·김광섭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전상국·이승훈·김용성·신일수·허남헌 등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한다.
시국은 어수선해 대학 1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5·16군사구테타가 일어난다. 이러한 사건들을 목도한 이성부는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참여적이고 민중적인 시세계가 투사된다. 1961년 《현대문학》에 「소모의 밤」으로 광주시절부터 사사받았던 김현승 시인으로부터 1회 추천을 받게 되는데, 「백주」로 2회 추천, 그리고 다음 해에 「열차」로 추천을 마쳐 시인으로 등단하기에 이른다.
1963년 군에 입대하여 복무한 후 제대하여,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된다. 군에 가기 전의 초기시들은 관념적이고 또 당대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조금 난해한 시를 썼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의 시선이 보다 현실을 밀착하여 바라본 결과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사이의 작품들은 이성부의 시적 체질에 맞는 것으로 자신의 체질에 맞는 시적세계를 제대로 찾아낸다.
6·25 휴전 직후, 박성용·정현웅·이일·박봉우·강태열·윤삼하·장백일·주명영 등이 만든 《영도》라는 동인지가 2집까지 발간되다 중단되었는데, 김현·최하림·손광은·김규화·이성부를 추가 영입하여 복간한다. 한편으로 이성부 시인은 권오운·김광현·이탄·최하림과 함께 시동인지 《시학》을 발간한다.
문학적 열정이 넘치는 이성부는 1968년 『6·8문학』 『창작과비평』지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박정희 군사독재가 지식인들의 입을 막고 목을 조여오는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진보적인 문학인들이 참여하는 이들 문예지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해에 한수아(韓秀娥)와 결혼하여 모래내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모래내는 이성부 시인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1968년 이후 거의 평생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았으니 모래내는 그에게 추억 뿐만 아니라 문학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이성부는 부근의 난지도가 청정지역에서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았고, 악취가 나는 난지도에서 쓰레기와 파리 떼 속에서도 사랑을 속삭이고 소줏잔을 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울한 현실과 아름다운 인간들에 대한 기록이랄 수 있는 「난지도」라는 시로 거듭난 것이다.
1969년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게 되는데, 이해에 처녀시집인 『이성부 시집』을 간행한다. 이 시집엔 사연이 있다. 박목월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한국시인협회에서 이성부 시인에게 시집을 내주겠다는 제의가 왔다. 박목월 선생은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을 때 조지훈 선생과 함께 심사를 한 인연으로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박목월 선생이 청와대에 드나들며 영부인에게 문학을 강의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후일 이것은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첫시집을 내는 시인들에게 출판비를 내주겠다고 해 성사된 일이었다. 첫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성부는 청와대 권력기관에서 나온 돈으로 결코 내고 싶지 않아 한국시인협회에서 추진하는 그 시집을 출판하지 않았다. 대신에 친구들이 출판비를 갹출해서 첫 시집 『이성부 시집』을 시인사에서 출간했다. 시집 속표지 뒷면에 ‘제작:이근배, 편집:최하림· 염무웅, 교정:조태일·이성부, 장정:김종일’이라고 밝혀놓아 이 시집이 ‘우정출판’임을 알렸다. 300부 한정판 시집이었는데, 이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이 시집에는, 난해한 모더니즘 경향이 나타나는 것과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의 민중시 계열의 시가 함께 실렸다.
1974년에는 제2시집 『우리들의 양식』(민음사)를 간행했다. 이 시집으로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집은 「벼」와 「봄」과 같은 작품에서 일종의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보여준다. 이해에 유신독재체제를 거부했던 ‘자유실천문인협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한다.
1977년에는 제3시집 『백제행』(창작과비평사)를 간행하였는데, 이 시집으로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다. 이 시집을 쓸 때 이성부는 ‘광주는 한 마디로 폭발직전의 어떤 불덩이 같은 것을 안고 있는 듯했다’고 문학평론가 이성천과의 대담에서 밝혔다. 고려 왕건의 전라도 배제 정책이나 동학혁명과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전라도는 오랫동안 소외와 배제의 정서가 공감대를 이루는 곳이었는데 이성부 역시 그러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부는 이 공간을 중심으로 왜곡되고 과장되고 비틀어진 정치현실에 대해 오랫동안 관찰해 왔다. 그것이 시라는 장르를 통해 형상화된 것이 『백제행』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백제행』은 단순히 역사 속의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국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까지 그 영향과 운명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현재적 역사였다. 백제의 슬픔, 백제의 역사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강자의 논리에 의해서 늘 핍박받고 소외되어온 역사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인간과 세계에 대해 보다 진실한 의미를 은폐하고 있는 역사이다. 이성부의 백제행은 오늘 현실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와 실천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은 시인에게 가혹하고 참담한 해였다. ‘광주민주화항쟁’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그는 편집대장을 들고 계엄사의 검열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중위나 대위급들이 앉아서 한 줄 한 줄 모두 검열을 했는데 군사정권에 조금만 불리하면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모두 지우게 했다. 그때 여러 통로와 경험으로 광주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신문에서는 계속 ‘적도’니 ‘불순분자들’이니 매일 매도한다. 시인으로서의 이성부는 ‘이제 언어라는 것은 완전히 거짓이구나, 완전히 가짜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다.
마침내 광주는 교통망과 함께 통신두절이 된다. 이때쯤 광주의 유명한 수채화가 강연균이 광주를 탈출해 남해고속도로를 경유, 부산을 거쳐 서울의 이성부를 찾아온다. 강연균은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것에 분개하였다. 그러면서 그가 이성부에게 준 <전남매일신문> 한 장엔 김준태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실려 있는데,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은 고교동기인 소설가 문순태였다. 시를 읽은 이성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의 고향 광주가 ‘적도’가 아니며,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1981년에 제4시집 『전야』(창작과비평사)을 출간한다. 이성부는 모든 언론의 언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을 보고 그가 쓰는 ‘시’라는 언어가 이처럼 나약한 것을 인식하고 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그때부터 그는 침묵하며 시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 대신 산악회를 따라서 근교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외진 산 속으로만 돌아다닌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좋다라기보다는 알맞은 일처럼 여겨진다.
1989년 『빈 산을 뒤에 두고』를 출간한다. 산악회 대장이 되어 설악산, 지리산, 덕유산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나선다. 그러다가 1982년경 산행지도를 이우형씨를 통해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인 ‘백두대간’, ‘정맥’, ‘정간’, ‘지맥’ 등을 알게 되고 우리나라 산줄기의 흐름을 이해하면서 반도의 산하를 공부하게 된다. 더불어 서울 삼각산 바위를 오르다가 무기질인 바위가 체온의 흐르는 유기체로서의 생명감을 지니고 있다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바위의 내면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흐르며 무엇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원망(願望)이 숨쉬고 있음을 바위를 타다가 느끼며 깨닫는다. 이러한 기쁨과 법열과 같은 몸떨림을 「바위타기」 「화강암」 등의 연작을 통해 형상화 한다. 이렇게 해서 3년만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1996년에 펴낸 시집 『야간산행』이다. 삼각산, 설악산의 암벽등반 체험을 묶은 것으로 본격적인 산행시의 출발이랄 수 있는 시집이다.
1997년, 이성부는 한국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연하천산장과 제석산장에 이삼일씩 묵으며 부근의 산을 혼자서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상경하여 《뿌리깊은 나무》 편집주간을 맡아 출근한다. 1998년, 《뿌리깊은 나무》에서 《샘이깊은 물》을 계속 발행하는 한편, ‘한국의 발견’ 증보판과 《뿌리깊은 나무》 복간을 준비하다가 갑작스러운 사장의 죽음으로 회사가 해체되자. 오랜 직장생활에서 자유인이 되어 마음놓고 우리나라의 산들을 찾아나선다.
산에 다니면서 산에 관한 옛사람들의 글을 자주 읽는다. 지리산 기행이랄 수 있는 김일손·김종직·조식 등의 『유두류록』이나 선현들의 산행기, 산시 등을 통해 문학의 새로움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든다. 산과 더불어 자신의 문학을 완성시킨 최치원·김시습·조식 등의 삶에 경도되어 그들을 닮고자 한다.
1990년대부터 ‘백두대간 구간 종주 산행’을 하면서 이 산행체험을 작품화시킨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연작시를 발표하였다가 2001년 『지리산』을 펴낸다. 이 시집으로 제9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다.
시집 『지리산』은 지나간 우리의 역사를 시집의 행간마다 깊이 복원시킨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백두대간의 남쪽 극점인 지리산을 여러 차례 오르내리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결과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일련번호가 붙여진 시편이긴 하지만 이성부는 지리산 연작시에서 일관된 주제에 종속하는 연작시가 아니라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주제를 갖는 서정시로 형상화시킨다. 지리산에 서린 역사와 문화,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산행체험과 자기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후 2005년 백두대간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창작과비평사)를 펴냈는데 이 시집이 문예진흥원 우수출판물에 선정이 된다. 더불어 제1회 가천환경문학상을 수상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에서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문학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그러나 이 해에 이성부는 간암판정을 받게 되는 불운이 닥친다. 3개월에 한 차례씩 검진을 받는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산행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후 이성부는 암투병 속에서 2010년 『도둑산길』을 펴내는 집념과 열정을 보여준다. 이 시집으로 공초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국도서관협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다. 그리고 2011년 제9회 영랑시문학상 본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성부는 끝내 그의 마지막 시집 『도둑산길』에서 그의 산행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하산’의 의미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병마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2012년 2월, 생의 마지막 걸음을 멈추고 만다.
그는 세상을 뜨기 직전 영랑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시와 산행의 의미를 정리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 “산이라는 것이 오래 자주 다니면 다닐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이는 50여년 동안 시를 써오면서도 시가 과연 무엇인지, 갈수록 더 모르겠다는 사정과 아주 비슷하다. 나는 지금 누가 시를 설명하여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니면 다닐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지는 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곧 산이다.”
(시와사람 2013년 봄호,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