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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상/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제25장 해원의 노래
“달은 가고 해는 오네. 지천(地天)의 운수로다. 운이 오고 때가 되어 만물이 해원이라.” (道典 11:220:5∼6)
1928년 9월, 그러니까 숙구지 공사로 대사부를 출세시키는 공사를 행한 뒤 고수부님은 오랜만에 정읍군 우순면 초강리 연지평에 살고 있는 딸 태종의 집을 방문하였다. 고민환, 박종오, 전대윤 성도들을 대동했다. 딸과 사위 박노일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부용역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가 한쪽 팔이 불편하여 잘 쓰지 못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고수부님이 여자를 불렀다.
“언제부터 팔이 불편해졌느냐?”
“7년 전부터 우연히 이렇게 되었습니다.”
고수부님은 그 여자를 앞에 앉히고 “불쌍하구나. 몸이나 성하여야 먹고살 거 아니냐”고 하면서 팔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여자는 언제 그랬는가 싶게 팔이 나아 그 자리에서 밥상을 들고 나갔다.
고수부님이 궁핍한 생활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을 돌보는 일화는 숱하다. 인류의 어머니로서 자애로움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해 9월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 때도 은진(恩津)에 사는 김기성의 아내 이씨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아이가 산증(疝症)으로 심히 고통스러워하나이다.” 하니까 고수부님은 손으로 아이의 불알을 어루만져 주었고 곧 아이의 병이 나았다.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을 마친 고수부님은 퍽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고수부님이 신도들 앞에 앉았다.
태모님께서 가곡조(歌曲調)로 온화하게 창하시기를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文武), 주공(周公) 같은 만고성현(萬古聖賢)도 때 아니면 될 수 있나. 전무후무 천지운도(天地運度) 우리 시절 당한 운수 성경신이 결실이니 삼도합일(三道合一) 태화세(太和世)를 그 누가 알쏘냐. 달은 가고 해는 오네. 지천(地天)의 운수로다. 운이 오고 때가 되어 만물이 해원이라.”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란 인간이 못할 일이니, 나는 만물을 해원시키노라.” 하시니라.(22:220)
가사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천지의 대운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후천 선경세계가 그것이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열어 주는 후천 선경세계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세상이다. 죽어서 올라가는 천당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가 곧 후천 선경세계가 된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신 ‘안빈낙도’란 무엇인가.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자가 총애했던 제자 안회(顔回)는 학문을 지나치게 좋아하여 열심한 탓에 나이 스물아홉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 가난하였다는 점이었다. 일생 동안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했고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 안회는 그런 외부의 환경을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주어진 환경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성인의 도를 추구하는데 열심이었다. 안빈낙도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고수부님은 그런 ‘안빈낙도의 삶’을 인간이 ‘못할 일’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질정해 놓은 후천 세상은 정신문명은 물론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전되어 최상의 풍요를 누리는 현실 선경세계이므로 안빈낙도의 삶을 부정한 것이다. 일찍이 증산 상제님이 말씀한 후천 ‘선경세계의 생활 문화’는 이러하다.
후천에는 만국이 화평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통과 한(恨)과 상극과 사나움과 탐심과 음탕과 노여움과 번뇌가 그치므로 말소리와 웃는 얼굴에 화기(和氣)가 무르녹고 동정어묵(動靜語默)이 도덕에 합하며, 사시장춘(四時長春)에 자화자청(自和自晴)하고, 욕대관왕(浴帶冠旺)에 인생이 불로장생하고 빈부의 차별이 철폐되며,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이 바라는 대로 빼닫이 칸에 나타나며 운거(雲車)를 타고 공중을 날아 먼 데와 험한 데를 다니고 땅을 주름잡고 다니며 가고 싶은 곳을 경각에 왕래하리라. 하늘이 나직하여 오르내림을 뜻대로 하고, 지혜가 열려 과거 현재 미래와 시방세계(十方世界)의 모든 일에 통달하며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가 없어지고 상서가 무르녹아 청화명려(淸和明麗)한 낙원의 선세계(仙世界)가 되리라. 선천에는 사람이 신명을 받들어 섬겼으나 앞으로는 신명이 사람을 받드느니라. 후천은 언청계용신(言聽計用神)의 때니 모든 일은 자유 욕구에 응하여 신명이 수종 드느니라.(7:5)
이틀 뒤 고수부님은 성도 10여 명을 대동하고 정읍 대흥리로 행차하였다. 도착한 곳은 보천교였다. 고수부님은 보천교 새 건물 주위를 돌아다니며 담뱃대로 건물을 겨누고 총 쏘듯이 탕탕 소리를 냈다. 이어 증산 상제님이 수부소로 정했던 보천교 본소에 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흥강가, 흥강가”하고 노래했다.
고수부님은 다시 보천교에서 ‘호천금궐(昊天金闕)’이라고 부르는 ‘십일전(十一殿)’으로 갔다. 아직은 공사 중이었으나 완공된 뒤의 십일전은 단일 규모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건축사상 가장 큰 건물이었다.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이 7보 5칸인데 비해 십일전은 9보 7칸의 2층 건물이었고 보통은 8척 기준으로 한 칸을 잡는데 십일전은 16척을 한 칸으로 잡았으므로 실제 규모는 근정전의 두 배가 훨씬 넘는 규모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역대 왕조시절에도 사용한 일이 없었던 황금색 기와를 올렸는데 중국의 천자궁을 본뜬 것으로 중국 기술자들을 불러와 지은 것이었다. 차경석 성도의 ‘천자(天子) 등극설’이 인구에 회자되는 가운데 보천교주 차경석의 야망이 과연 어디에 가 있는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증산 상제님이 그토록 우려하고 또한 경계했던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었다.
1907년 증산 상제님이 대흥리에 머무를 때 차경석을 데리고 네 차례씩이나 비룡산(飛龍山)에 오르며 공사를 행하였다. 그 무렵 증산 상제님은 차경석의 집 벽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이요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라’라는 글귀를 써 붙이며 “경석아, 집을 크게 짓지는 말아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되느니라.”하고 말했다. 어찌 예사로운 말씀이겠는가.
아방궁이란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가 기원전 212년부터 건축한 호화로운 궁전. 전전(前殿)과 후궁(後宮)으로 나뉘는데, 전전의 크기만 동서 500보(675m), 남북 50장(113m)으로 위층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5장(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동작대는 중국 후한 건안 15년(서기 210년) 겨울에 조조가 업(킌)의 북서쪽에 지은 누대(樓臺)로서 구리로 만든 참새로 지붕 위를 장식한 데에서 생긴 말이다. 그러니까 증산 상제님은 차경석이 진시황제나 조조를 흉내 내어 아방궁이나 동작대와 같은 큰 건물을 지을 것을 경계한 것이다. 특히 ‘큰 건물을 짓게 되면 죽게 된다’는 증산 상제님의 단호한 말씀에 주목하자. 『도전』에 따르면 차경석은 이 공사를 증산 상제님이 자신에게 종통을 전했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다. 불행한 운명을 자초했다고 할까.
고수부님은 사다리를 타고 십일전 지붕 위로 올라가 풀쩍풀쩍 뛰어 다니면서 “도솔천궁(兜率天宮) 조화(造化)라, 나무(南無) 미륵존불(彌勒尊佛), 조화(造化)임아 천개탑(天蓋塔), 나무(南無) 미륵존불(彌勒尊佛)”하고 외쳤다. 그리고 고수부님은 “이 집은 지어도 절밖에 못 된다”고 말했다.
공사 내용 중에 보천교 본소 건물을 향해 담뱃대로 총 쏘듯이 탕탕 소리를 낸 것은 보천교와 교주 차경석의 27년 난법 헛도수의 종국을 고하는 ‘사형선고’에 다름 아니었다. 고수부님이 춤추며 노래했던 ‘흥강가’는 『도전』에 기대면 ‘흥강(興姜)’으로서 ‘강증산 상제님을 믿어야 흥한다’는 뜻이다. 그 해 1월에 있었던 신로변경(信路變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차경석은 아내 이씨로부터, “영안을 통하여 보니 상제님의 자리에 삼황오제신이 들어서고 상제님께서 풀대님에 삿갓을 쓰고 보좌를 떠나시더라”는 말과 “삼황오제신은 곧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라는 말을 듣고 혹하여 차치구를 신앙 대상으로 받들고 교리도 유교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신로변경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십일전 건물이 절밖에 못 된다’는 것은 보천교 ‘본소’의 운명을 얘기한 것이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합병과 거의 동시에 종교계의 반일사상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온갖 탄압정책을 구사했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제령 제7호)과 ‘경학원 규정’(제령 제74호)으로 유림과 불교계를 장악하고 105인 사건(百五人事件,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사건) 등으로 유림과 불교, 기독교계를 탄압했다.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로 이른바 ‘포교규칙’이란 것을 공포했다. 총독부가 공인하는 종교는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라고 규정하고, 이외의 종교(단체)는 모두 ‘유사종교(類似宗敎)’로 분리하여 불법화시키고 탄압한 것이다. ‘민족종교’를 사교(邪敎) 또는 유사종교라 격하시키면서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술책으로 혹독한 탄압을 자행한 것이다.
1936년 일제는 ‘유사종교해산령(類似宗敎解散令)’을 내려 민족종교를 모조리 해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해산령으로 민족종교는 물론 민족주의 성향을 띠지 않았던 일반 종교(단체)들도 대부분 해체되었다. 한국 민족종교사상 최대의 암흑기가 닥친 것이다(윤이흠,「일제강점기의 민족종교운동」; 김삼웅, 「사교(邪敎) ·유사종교로 격하 민족정기 말살 획책」). 같은 해 교주 차경석이 죽고 보천교 역시 ‘유사종교해산령’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이와 함께 저 아방궁이나 동작대를 연상케 했던 보천교 본소의 모든 건물은 일제 당국에 의해 뜯겨지게 된다. 십일전 건물은 서울 태고사(太古寺, 현재의 조계사), 정화당(靖化堂)은 전주역사(全州驛舍), 그리고 보화문(普化門)은 내장사 대웅전으로 옮겨졌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짜 놓은 천지공사가 현실화된 것이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지금 ‘보천교 난법 기운을 거두는’ 공사를 행하는 중이었다. 이 공사 이후로 보천교는 교단을 유지하지 못하고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제26장 천지의 어머니
“너희들은 다 내 새끼들이니 내 젖을 먹어야 산다.” (道典 11:226:2)
대흥리 보천교 본소를 다녀온 지 며칠 뒤 고수부님은 담뱃대를 좌우로 휘저으며 말한다. “천하의 뭇 무리들이 서로 내가 낫노라고 다투어 고개를 쳐들고 먼저 나오려 하니 이것이 천하에 끼치는 병폐의 하나로다. 이제 그대로 두면 분란이 가중되고 혼란이 자심하리니 이 담뱃대를 휘둘러 그 쳐드는 꼭뒤를 치면 그 머리가 본처로 쏙 들어가리라.”
천하의 난법자를 없애는 공사다. 그리고 신도들의 심법을 다지는 공사 말씀이 이어졌다.
대업 공부를 하자면 수마(睡魔), 마신(魔神), 척신(隻神)을 먼저 물리쳐야 하느니라. 또 생문방(生門方)부터 알아 두라. 사문(死門)은 입구멍이요, 생문(生門)은 똥구멍이니라. 입은 사문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못 하느니라. 병종구입(病從口入)이요 화종구출(禍從口出)이니라/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니라[병(病)은 입으로부터 들어가고 화(禍)는 입으로부터 나오느니라./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라]. 천지 아구를 아느냐. 천지 입망을 찾으려면 생사문(生死門)을 알고서 공부해야 하느니라. 목구멍 똥구멍이요, 먹고 똥싸는 것이니라.(11:223)
우리 공부는 오장육부 통제 공부니, 곧 선각(仙覺) 지각(智覺)이니라. 이 공부가 도도통(都道統)이니라. 제 몸에 있는 것도 못 찾고 무슨 천하사란 말이냐! 소천지(小天地)가 대천지(大天地)니라. 느닷없이 생각나서 읽는 글이 도수(度數) 맡아 오는 글이니 명심하여 감격(感激)하라.(11:224)
전자에서 ‘병종구입 화종구출’은 진(晉)의 부현(傅玄, 서기 217∼278)이 한 말이고,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는 오대(五代)의 정치가 풍도(馮道, 서기 882∼954)의 「설시(舌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고수부님이 심법(心法)교육 차원에서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후자는 지난 해 동짓달 11일에 행하였던 ‘오장육부 통제 공부’의 또 다른 공사 말씀이다.
잠깐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분이 사용하는 언어적 특성 몇 가지를 살펴본다. 첫째, 가장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필요하다면 유가의 경전은 물론이요 고금의 한시까지 망라한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이다. 셋째, 많은 조어(造語)가 거침없이 사용되고 있다. 증산 상제님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2:13)고 했으되, 여기에는 언어사용도 예외가 아닐 터이다. 넷째, 상황에 따라 비어(卑語)까지도 서슴지 않고 사용한다는 점이다. 증산 상제님은 “육두문자(肉頭文字)가 나의 비결이니라. 육두문자를 잘 살피라.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 아는 체하느니라.”(4:110)라고 말했다. 정리하면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는데 때로는 어려운 듯 심오한 말씀으로, 때로는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듯 자애로운 말씀으로, 또 때로는 호된 육두문자를 사용해 듣는 자들을, 들어야 하는 자들을 후려치면서 정신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하루는 고수부님이 공사를 보는데, 매우 파격적이었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고수부님이 젖을 배꼽까지 늘어뜨리고 성도들에게 젖을 훑어 뿌렸다. “야, 이놈들아! 내 젖 먹어라. 너희들은 다 내 새끼들이니 내 젖을 먹어야 산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갑자기 속옷을 벗고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그리고 마치 천하를 향해 포효하듯 말했다.
“이놈들아, 네놈들이 전부 내 밑구녕에서 나왔다. 내 보지 밑으로 나가거라. 어서 오너라, 어서 와.”
성도들은 그리로 지나가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서로 머리를 들이밀고 먼저 들어가려고 야단법석이었다.
고수부님이 “야, 이놈들아! 한 놈씩 들어오너라”하고 호통을 쳤다. 이 때 호호백발의 노인들까지 갓 벗을 겨를도 없이 뿔뿔 기어서 통과하려고 하는데 고수부님이 갓을 뜯어 버리고 밀어 넣듯이 지나가게 하였다. 남자 신도들뿐만 아니었다. 여자 신도들도 모두 기어서 지나갔다.
이 공사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기에 앞서 먼저 고수부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 공사의 참뜻을 가슴으로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고수부님은 만유 생명의 어머니이다.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을, 아니 한낱 이름 없는 청춘과부였던 인간 고판례를 ‘수부’로 들어 올렸을 때부터, 옥황상제 강증산과 혼례식을 치른 이후부터 당신은 이미 인류의 어머니, 온 천지의 어머니가 되었다. 증산 상제님은 수차에 걸쳐 고수부님이 ‘천지의 어머니’임을 확인시켜 주고 공사로서 확정해 놓았다. 고수부님 역시 1926년에 몸소 ‘온 인류의 어머니로 부르도록 공사’를 보았다. 이 공사는 그와 같은 공사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수부님이 온 인류의 어머니이니까, 천지의 어머니이니까 천하 창생들이 모두 당신에게서 나왔고, 공사에 참석한 신도들 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말하는 것임에 유의하자 이 당신의 자식이 되고, 당신의 젖을 먹어야 사는 것은 당위일 터였다. 결론적으로 이 공사는 고수부님 당신이 억조창생의 생명의 어머니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도전』 그대로 ‘신도(神道)와 인도(人道)의 천지 어머니 공사’이다.
한 해가 저물었고 또 한 해가 시작되었다. 1929년 1월 3일, 정삼치성일이다. 고수부님이 초헌(初獻)을 하고 이어서 성도들이 절을 올렸다.
성도들이 절을 하고 물러났을 때 고수부님이 큰 소리로 “천지정리무기토(天地定理戊己土)”라고 세 번을 외쳤다. 역학에 기대면 ‘무기토(戊己土)’는 곧 하늘 기의 움직임 가운데 중앙에 위치하여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원이 되는 토(土)를 일컫는다. 만유 생명의 조화의 바탕자리가 중앙 토이듯 인사에 있어서도 모든 조직의 근본정신은 중앙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개돼야 조직 자체가 길이 창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지금 천지사업을 이루는 조직기강 확립에 대한 공사를 집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치성을 모시던 제단 바로 위 천장에 큰 거미가 매달려 있는 것이 고수부님의 눈에 띄었다. 고수부님은 앞에 있는 옥구사람 강재숙(姜在淑, 1879∼1945) 성도를 향해 “거미의 이치를 알면 말하라”고 하였다. 강재숙이 “알지 못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고수부님은 “이 또한 특별히 연구해야 할 이치다”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거미가 집을 지을 때 24방위로 줄을 늘이나니 집을 다 지은 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숨어 있느니라.”
이 공사는 우선 고수부님 자신의 은둔 공사로 이해된다. 1926년 6월에도 고수부님은 거미의 이치를 들어 자신의 ‘오성산 은둔’ 공사를 보았었다. 내용인즉 크나큰 세 살림 도장을 다 마치고 나면 오성산에 가서 은둔하겠다는 공사 말씀이다.
이 달에 고수부님은 과거 증산 상제님이 행하였던 종통대권 계승공사를 회상하며 공사를 보았다.
“너희 아버지가 9년 천지공사 끝지는 해 어느 날 자리에 누워 식칼을 내놓으시며 ‘올라타라.’ 하셔서 올라탔더니 또 ‘멱살을 잡아라.’ 하셔서 멱살을 잡았었구나. 다시 내게 식칼을 들게 하시고 당신을 찌를 듯이 하여 ‘꼭 전수하겠느냐.’ 하라 하시는데 말이 나오지 않아 가만히 있으니 역정을 내시며 ‘시간이 지나간다.’ 하시기에 마지못해 목안 소리로 ‘반드시 꼭 전하겠느냐?’ 하였더니 ‘예, 전하지요.’ 하시며 ‘이왕이면 천지가 알아듣게 크게 다시 하라.’ 하시므로 조금 크게 ‘꼭 전하겠느냐?’ 하였더니 ‘꼭 전하지요.’ 하시더라. 이렇게 또 한 번 하여 세 차례를 마치니….”
증산 상제님이 당신에게 보았던 과거 공사를 회상하면서 고수부님은 현재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이후부터는 침식 절차와 제반 일체를 나더러 먼저 하라 하셔서 내가 먼저 하고 너희 아버지는 내 뒤를 따랐던바 오늘날 나를 이런 자리에 이런 일을 맡기고…, 내가 밥을 제대로 먹느냐, 잠을 제대로 자느냐. 너희들이 잘 알지 않느냐! 너희 아버지는 친구와 어울려 어디로 놀러 간 것밖에 안 되느니라.”
말을 마친 고수부님은 별안간 대성통곡하였다. 공사장이 숙연해지는 가운데 고수부님이 “너희들 모두 듣거라. 내가 갔다 다시 올지 모르겠다”하고 얘기를 했다. 당시 공사에 참가했던 성도들이 고수부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들리는 ‘이별의 말씀’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성도들도 모두 통곡했다. 그때 고수부님은 방문을 열어 제치고 어진 속 증산 상제님을 향해 “가려면 갑시다. 어서 갑시다”하고 재촉하였다.
성도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성도들은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어디로 갈까 싶어 문을 막으며 만류하였다. 고수부님은 “그것이 아니다”하고 방에 들어가더니 언제 대성통곡을 했느냐는 듯 자리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이 공사의 앞부분은 ‘도통맥 전수 예식’이고 뒷부분은 고수부님 자신의 선화(仙化)를 암시하는 공사다. 증산 상제님이 자신의 어천을 암시하는 공사를 보았듯이 고수부님 역시 같은 공사를 수차례 보았다. 공사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은 그날 이후 고수부님이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며칠 동안 밤낮으로 문 앞을 지키며 전전긍긍했다.
7월 칠석이다. 고수부님은 해마다 7월 칠석치성을 성대히 봉행하였는데 보통 3, 400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참석하였다. 그해 칠석절에 고수부님은 치성을 봉행한 후 성도들에게 “오성산에 공사가 있어 가리니 행장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다음날 고수부님은 이근목, 강사성, 전준엽, 강원섭, 김내원, 고찬홍 등 성도 10여 명을 대동하고 도장을 떠났다. 옥구 오성산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고민환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그날 밤 고수부님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동서남북과 중앙에 다섯 개의 등을 각기 밝혔다. 이어 오성산의 오성위(五聖位, 오성산 오성五聖에 대해서는 뒤에서 얘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오성산에 모셔진 다섯 성인 정도로만 이해하자)와 산신위(山神位)를 설위하여 술상을 성대히 차리게 한 다음 성도들로 하여금 주문을 송주케 하였다.
어둠이 덮고 있는 오성산 주위에 성도들의 주문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고수부님은 술을 부어 산신에게 권하며 “천지의 무궁한 무극대도를 창건하는 역사(役事)에 협력하여 주니 고맙구려”하고 치하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전송하는 예를 행하였다.
다음날, 그러니까 7월 9일 고수부님 일행은 성덕마을을 출발하여 군산을 거쳐 조종리로 돌아왔다.
제27장 도통천지 해원상생
“선천에서 지금까지는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이요, 지금부터 후천은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이니라.” (道典 11:250:8)
1929년 8월, 한가위치성을 모신 후였다. 고수부님은 갑자기 “내가 이제 정읍에 공사가 있어 가면 장구한 세월이 되겠으니 미리 가서 집 한 채를 사 놓으라”고 말했다.
성도들은 정읍군 입암면 왕심리(旺尋里)에 다섯 칸짜리 주택을 구입해 놓았다. 정읍 입암면은 대흥리가, 보천교가 있는 곳이다. 바로 그곳에서 멀지 않은 왕심리에 고수부님이 머물 주택을 구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며칠 뒤 고수부님은 성도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성경신(誠敬信) 석 자를 일심으로 잘 지켜 수행하라. 찾을 때가 있으리라. 수심(修心), 수도(修道)하야 앞세상 종자가 되려거든 충신과 진실이 제일이니라.”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둘째 도장 살림인 조종리 시절은 고수부님 10년 천지공사 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종리를 떠나려고 한다는 것은 왕심리에 시급하고 중요한 공사가 있다는 것이요, 더 이상 조종리에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도장의 내분이 극에 달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도장 분위기는 그렇게 보이지만 정작 고수부님은 차분하기만 하였다. 천지의 어머니는 천지의 어머니다. 조종리 도장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고수부님은 창생을 구제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공사 말씀 중에 ‘앞세상 종자’란 개벽의 대혼란기에 구원을 받아 후천에 거듭 나도록 선택된 자를 일컫는다. 그들이 바로 후천 세상에서 인간 ‘씨종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조종리 도장에서 떠나게 만드는 ‘신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가는 그날까지 단 한 명이라도 ‘앞세상 종자’로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마음 , 그것이 고수부님이었다.
8월 21일은 추분절로서 치성을 봉행했다. 그날도 고수부님은 천지공사에 여념이 없었다. 바둑판을 가져오게 하여 방 한가운데 놓고 바둑판 중앙 장점(丈點)에 돌을 놓았다. ‘장점’은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에서 배꼽점을 일컫는 말이다. 순장바둑은 첫 점을 장점에 둠으로써 시작한다.
고수부님은 다시 마당에 자리를 깔고 제구와 청수동이를 놓고 그 앞에는 주과포와 매실, 삼씨[麻仁], 밤, 대추를 진설케 하였다. 이어 공사에 참여한 성도 10여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라 읽으라”고 한 뒤 큰 소리로 “천동 지동 인동(天動地動人動) 만물합동(萬物合動) 소원성취”라고 노래하듯 말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춘분 추분 하지 동지”를 읽게 하였다. 그때 별안간 큰 지진과 천둥이 일어나 지축을 뒤흔들었다. 고수부님은 “도통천지 해원상생”을 외면서 성도들에게 다시 따라 읽으라고 하였다.
이 공사에서 고수부님이 ‘장점에 돌을 놓았다’는 것은 곧 후천 개벽의 시작과 전개과정에 대한 공사로 이해된다. 그리고 고수부님이 외친 ‘천동 지동 인동’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는 1928년 4월 초파일치성 직후 공사에서 고수부님이 얘기한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이야말로 ‘천지공사’와 ‘개벽’의 개념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독해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이제 온 천하가 대개벽기를 맞이하였느니라. 내가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했다.(2:42) 앞부분이 ‘천지공사’를 정의한 것이라면, 천지공사가 곧 천지개벽이 된다. 다시 말하면 천개벽(天開闢)과 지개벽(地開闢), 인간개벽(人間開闢)이다. 고수부님은 1928년 공사에서 ‘미륵갱생(彌勒更生)’을 덧붙였다.
‘천동 지동 인동’은 더욱 짧은 조어(造語)로 천지공사를, 개벽을 정의했다고 할 수 있다. 고수부님은 여기서 ‘만물합동 소원성취’를 덧붙였다. 개벽이 완성된 이후의 세계 인류가 가장 소망하는 천지공사의, 천지개벽의 종착역인 후천 선경세계이다. ‘만물합동’한 세상, 인류의 소원이 성취된 세상이다.
고수부님의 공사 말씀이 계속되었다.
1) 너희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누구 하나 알게 하시는 줄 아느냐. / 천부지(天不知), 신부지(神不知), 인부지(人不知) 삼부지(三不知)이니 참종자 외에는 모르느니라. / ... / 일은 딴 사람이 하느니 조화 조화 개조화(改造化)라.(11:250)
2) 잘 되었네 잘 되었네, 천지 일이 잘 되었네. / 바다 해(海) 자 열 개(開) 자 사진주(四眞主)가 오신다네. / 쓸 사람 몇 사람만 있으면 그만이라네. / ‘훔치( 팿?) 훔치(팿?)’는 신농씨 찾는 도수니라.(11:251)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고수부님이 이렇게 많은 공사를 거의 같은 시간에 진행한 일도 드물었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조종리 도장 시절의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반드시 그곳에서 처결해야 할 공사를 집행하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터이다.
1) 공사에서 ‘너희 아버지’는 곧 증산 상제님을 일컫는 말씀이요, ‘증산 상제님이 하는 일’은 후천 가을 세상을 건설하는 천지공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일은 딴 사람이 한다’는 것은 후천개벽이 고수부님이 당대(이것도 하나의 ‘판’으로 이해된다)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판밖에서 인물이 나와 마무리를 짓게 된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판밖의 인물’에 대해서는 『도전』 곳곳에 도수로서 정해져 있다.
2) 공사에서 ‘사진주’는 증산 상제님의 종통맥을 이루는 도체(道體)로서 천지일월(天地日月: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사체(四體)를 일컫는다. 인사적으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그리고 (증산 상제님의) 대행자로서 대사부를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전체 공사 내용은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수부님 공사는 날이 갈수록 더욱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무렵 고수부님 공사 가운데 특히 후천 가을대개벽에 대한 공사가 집중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조종리 도장시절의 마감이 임박했다는 얘기다. 고수부님이 조종리 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배경이 그러하였다.
태모님께서 병인년에 칠성용정 공사를 보신 이후 고민환을 크게 신임하여 모든 일을 민환에게 위임하시니 강응칠과 강사성 등을 주축으로 한 몇몇 조종리 강씨들이 그 동안의 공로와 신앙 경륜을 내세우며 친목단을 조직하여 불만을 토로하다가 무진년에 이르러 태모님께서 간부 조직을 새로운 인물로 대폭 개편하시매 노골적으로 반동하며 강응칠은 아예 도문을 떠나니라. 그 후 이들은 전혀 개심의 여지가 없이 계속하여 태모님께 불평을 늘어놓고 모략을 하거늘 그 동안 태모님을 모시고 ‘사모님, 사모님’ 하며 공사에 수종하던 신앙심은 온데간데없고 심지어 태모님께 ‘이년, 저년’ 하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매 그 불경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더니 급기야 도장에서 10여 년 동안 부쳐 오던 소작답 24두락마저 끊어 버리는 등 도장 운영을 하지 못하게 공작을 펴니라.(11:269)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누구인가. 고수부님이 차경석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쫓겨나다시피 하였을 때 조종리로 모시고 온 장본인들이요, 고수부님의 둘째 살림 도장이 자리 잡고 있는 조종리에서 터줏대감과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는 대흥리 도장 시절부터 신앙해 온 터라 고민환 등 임옥(임피ㆍ옥구) 출신 핵심 간부들보다 신앙경력도 많았다. 결국 선배가 선배 노릇을 못하고 권력만 탐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 자신들의 공로와 신앙경륜을 내세워 은연중에 불만을 토로하다가 지난 해 간부조직 개편 이후 수석성도 고민환에 대한 음해계획까지 세웠고, 그 때문에 고민환 성도가 몰래 고향으로 피난을 갔다는 것은 이미 얘기하였다. 강씨 신도들의 고수부님 도정 집행 방해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고수부님을 괴롭혔다. 조종리 도장에서 10년 동안이나 부쳐오던 소작답 24두락마저 끊어버린 것이었다. 아예 도장 운영을 하지 못하도록 목줄을 조르겠다는 본새였다.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날 때 도장 건물을 위임받게 될 강휘만 성도의 증언에 기대면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날 무렵에는 땅 한 평도 가진 것이 없었다.
고수부님으로서는 도문을 개창한 이후 누구보다도 믿었던 교단 간부들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한 셈이다. 첫째가 차경석이요, 두 번째가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었다. 인간적으로 (누차 지적하였다시피) 차경석은 친남매와 다름없는 이종사촌 동생이요, 조종리 강씨 신도들은 남편 증산 상제님과 같은 일족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역경을 헤쳐 왔던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을 만나 수부 도수의 주인이 된 이후 천하의 ‘우두머리 된 여성’이요, ‘온 인류의 어머니’라고 했으되 여전히 역경 속에 서 있는 모진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것도 휘하의 믿었던 신도들로부터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소용돌이치는 거친 폭풍 앞에 서 있는….
조종리 강씨 종손으로 최고 어른인 강응칠 성도를 주목하자. 한때 한약방을 경영하였고 200석지기의 부농이었던 강응칠은 고수부님에게 등을 돌린 이후 얼마 남지 않은 가산마저 탕진해버렸다. 살기가 어려워진 강응칠은 가산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대로 궁리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 조종리 도장 건물을 가지고 저당을 잡혀버린 것이었다. 물론 고수부님과 한 마디 상의도 없었다.
고수부님은 그런 강응칠을 버리지 않았다. 조종리 도장에서 강응칠의 채무를 대신 갚아 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응칠은 나중에 도장 건물을 (조종리 시절 초기에 고수부님이 잠시 머물렀던) 오두막집 주인에게 팔아 버렸다. 고수부님은 물론 조종리 도장 성도들로서는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오두막집 주인으로부터 도장 건물을 내어 달라는 통고를 받고서야 내막을 알고 고수부님은 크게 노했다. 도장 건물을 비워달라는 오두막 주인의 요구도 거절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오두막집 주인은 강응칠을 전주 지방법원에 고소했다.
재판의 초점은 조종리 도장 건물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조종리 도장은 여러 신도들의 공동 모금으로 건축한 건물이었다. 결국 강응칠이 패소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대용이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 재판 사건을 일러 ‘도집 재판 사건’이라 하였다.
감옥을 살고 나온 강대용이 누구인가. 고수부님이 양자로 삼을 정도로 총애했고 ‘태자 도수’까지 붙인 인물이다. 바로 그 강대용이 아버지의 불의함으로 감옥까지 살고 나오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고수부님의 내면풍경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응칠의 만행은 멈추지 않았다.
얼마 후 강응칠은 다시 도장 건물을 팔아넘길 속셈으로 ‘김제 청년 혁신파’와 의기투합하여 고수부님을 경찰서에 밀고했다. 강응칠이 고수부님을 밀고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독립운동을 위해 집회, 결사를 한 우두머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리 도덕이, 윤리가, 의리가 무너졌기로 인두겁을 쓰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자가 스승을, 신도가 교주를 그것도 교조의 반려자를, 자식이 어머니를 고발한 꼴이 아닌가 말이다.
경찰서에서 출두 통지서가 날아왔다. 고수부님 대신 한 성도가 출두했다. 일본인 서장이 “교주가 여자라며? 내일 교주와 같이 나오라”며 돌려보냈다. 이튿날 김수응 성도가 고수부님을 모시고 출두했다. 또 한 맺힌 걸음을 걷게 되었다. 고수부님의 길은 그렇게 영광과 함께 형극의 길이기도 하였다. 고수부님이 일제 경찰들과 맞닥뜨린 것이 몇 번째인가. 또 경찰서 출두가 몇 번째인가. ‘무오년 옥화’ 때는 대흥리 차경석 교단의 모함을 받아 경찰서에 출두하여 38일 동안 온갖 고초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무오년 옥화 때 목포 경찰서에 함께 구속되었던 장본인이 바로 강응칠 성도였다.
고수부님이 경찰서에 도착하여 일본인 서장 앞에 앉았다. 일본인 서장이 “…돈 많은 영감이나 잡고 지내면 좋지 않소”하고 비아냥거렸다.
“내 몸일지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수부님이 대답했다. 일본인 서장이 주재하여 심문을 하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고수부님은 심문을 받고 돌아왔다. 조종리 도장으로 돌아오는 고수부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행주좌와(行住坐臥), 인류가 진멸지경에 처하게 되는 후천 개벽기를 맞아 창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념 하나로 오매불망 살아가고 있는 인류의 어머니가, 천지의 어머니가 한낱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법망에 끌려 들어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하는.
고수부님의 결단을 재촉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의 온갖 모략과 방해 공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왕래하던 많은 신도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이었다. 고수부님 입장에서 다른 어떤 모욕이나 고초, 역경, 고난도 참을 수 있지만 저기 거대한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후천개벽을 앞두고 천하창생을 구원하는 일을 방해받았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배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었으면서도 묵묵히 참아 왔던 고수부님은 마침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조종리 강씨들의 무도함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아아. 어머니의 사랑이란 그런가. 분노의 폭발은 화살이 되어 날아갔지만, 그 화살은 다시 당신의 가슴으로 돌아와 꽂혔다. 결국 고수부님은 거센 폭풍같이 밀어닥치는 모든 시련을 당신 혼자 온몸으로 감내했다. 고수부님이 분노의 폭발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은 고작해야 조종리와 이별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무도한 자식이라고 해서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자식일수록 더욱 정을 쏟아 키워야 하는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끝없는 모성애가 아니던가.
고수부님이 조종리를 떠나고자 했던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보천교 몰락으로 갈 곳 없이 떠돌면서 헐벗음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보천교 신도들을 구휼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또 있었다. 무엇보다도 증산 상제님이 공사로 짜놓은 ‘세 살림’ 도수 중에 둘째 도장 살림의 기한이 다 된 것이었다.
조종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 9월 18, 19일경 고수부님은 도장에 남아 있는 성도들을 불렀다. 고수부님은 “인간의 원한이나 신명의 원한이 동일하니 할 수 없는 일이로다”하고 정읍으로 옮길 의사를 밝혔다. 인심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바쳐 추종할 것 같았던 신도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떤 신도는 ‘신씨 가문의 일을 하러 간다’고 비웃기도 하였다. 신씨 가문이란 대흥리에 있는 고수부님의 전남편 신여옥의 집안을 가리킨다.
9월 19일,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을 봉행했다. 그리고 이틀 뒤 21일, 고수부님은 대흥리를 떠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오직 담뱃대 하나만 달랑 든 채 몇몇 성도들과 함께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시고 조종리 도장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도장에서 곁방살이하던 강휘만 성도를 불러 도장 살림을 맡겼다. 강휘만이 비록 도문에 늦게 들어왔으나 심성이 착하고 그 동안 도장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일심으로 주문을 읽고 다니므로 그 마음자리를 보고 은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고수부님이 조종리 도장을 떠나던 날, 몇 년을 추종했던 강사성, 강응칠 등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장 대문을 나서며 고수부님은 “용기야, 등 대거라”하고 뒤따르는 이용기 성도를 불렀다. 이용기가 고수부님을 등에 업고 도장을 나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용기 성도인들 발걸음이 제대로 옮겨졌을까. 고수부님이 김제 송산마을에서 조종리 중조마을 오두막집으로 옮긴 것은 1918년 10월 중순이었다. 그곳에서 한 달을 지내다가 하조마을 강응칠의 집으로 옮겨 아홉 달을 지냈다. 중조 마을 도장으로 이사한 것이 1919년 윤7월 18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 2개월의 세월이 지났다. 고수부님의 세 살림 가운데 가장 긴 기간이 될 것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고 보면 정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이미 주택을 구입해 놓았던 정읍 왕심리 . 고수부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7, 8명이 고작이었다. 박종오, 김재윤, 전준엽, 김수열, 전선필, 이용기, 전대윤, 박서옥의 아내 조씨 등이었다. 음력 9월이면 만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이다. 황금빛으로 수놓았던 징게맹경 들판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손길에 의해 거둬지고 빈 짚단들만 수북이 쌓일 무렵이다. ‘배반의 이별’ 길을 가는 고수부님 앞은 그렇게 낙엽 되어 떨어지는 가을 나뭇잎처럼 쓸쓸하고 황량하였을 것이다. 고수부님은 그렇게 모질고 외로운 길을 향해 무거운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제28장 원혼신 해원 공사
“태모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시니라.” (道典 11:274:5)
정읍 대흥리 앞을 가로질러 큰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나아가다가 오른편 마을길로 꺾어 들어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우거진 아담한 마을이 나타난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丹谷里) 왕심(旺尋) 마을 . 원래 ‘성신리(誠信里)’라고도 불렸던 ‘왕심리’ 마을은 단곡리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정읍군지』에 따르면 옛날 왕신원(往信院)이 있었으므로 성신리 혹은 왕심리로 불렸다고 한다. 순흥(順興) 안(安)씨 집성촌으로서 증산 상제님이 어린 시절 머슴을 살았던 거슬막과 이웃하고 있다.
조종리를 떠났던 고수부님이 2년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곳 왕심리였다. 정확하게는 1929년 9월 21일부터 1932년 3월 20일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왕심리는 뒤쪽으로 비룡산이 감싸고 앞쪽으로 내장산과 삼성산, 입암산이 마치 ‘일월도’ 같이 펼쳐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고수부님이 머물렀던 왕심리 도장은 대숲을 약간 비껴 돌아서 마을 맨 위쪽에 있었다. 당시 도장 건물은 4채로서 다섯 칸짜리 본채는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서 조금 뒤쪽으로 사무실동, 그리고 본채와 옆으로 나란히 성전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 사랑채가 있었다. 지금은 고수부님 당시의 도장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도장 터에는 ‘대한불교법왕종 성불사’라는 간판 아래 법당과 요사 두 동만이 서 있을 뿐이다.
고수부님이 굳이 대흥리 이웃마을인 왕심리로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보천교 신도들을 구휼하고, 굶어 죽은 순교자 신명들의 원혼을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고수부님이 보천교주 차경석에게 붙여진 공사를 거두었고, 그 뒤에 보천교 난법기운을 거두는 공사까지 행한 뒤 보천교는 과거의 화려했던 영광의 시절을 뒤로 하고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교주 차경석의 명령으로 모든 재산을 바치고 보천교 본소로 몰려들었던 신도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어버렸다. 당시 보천교 신도 연인원 1만여 명이 고수부님을 찾아와 굶주림을 하소연했다고 한다.
왕심리 도장을 답사하는 동안, 고수부님 도장 시절 저쪽 아랫마을 대흥리로부터 이곳까지 남루한 옷차림에 피골이 상접한 보천교 신도들이 줄을 잇고, 고수부님 도장 성도들이 퍼주는 쌀을 얻어가는 광경이 우련하게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려 대흥리 쪽으로 눈길을 던지자 주위에서 울려 퍼지는 아우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하였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그 때 그 시절 고수부님의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종리 도장을 떠난 고수부님 일행은 20리 거리에 이르는 김제역까지 단숨에 왔다. 플랫 홈에는 이미 정읍행 기차가 도착해 있었다. 곧 출발할 태세였다. 마음이 급해진 이용기 성도가 곧장 역으로 달렸는데 등에 업힌 고수부님이 갑자기 ‘시천주주’를 읽기 시작했다. 두 팔을 나비의 날갯짓처럼 위아래로 휘휘 저으며 춤을 추면서. 그리고 역사 너머 기차를 향해 “네가 나를 모를 리가 있나”하고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밥은 먹어야 산다. 굶고서야 무엇을 하겠느냐? 하루 세 끼 먹으려고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이니 점심이나 먹고 가자.”
고수부님이 이용기 성도를 향해 방향을 틀라고 하였다. 일행은 역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몇몇 성도들이 기차를 놓칠까 우려하여 역사로 달려가 미리 표를 사 놓았다. 고수부님을 모시고 식당에 들어간 한 성도가 “주인장. 여기 밥 좀 주오.” 성급하게 주문했다. 식당 주인이 “남은 찬밥밖에 없는데”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도들이 “그거라도 주오”하고 말했다.
“이놈들아, 이렇게 다니는데 왜 찬밥 먹고 다니냐.” 잠자코 듣고만 있던 고수부님이 성도들을 꾸짖으며 식당주인을 향해 밥을 지으라고 했다. 성도들이 급한 마음에 식당 주인을 도와 부랴부랴 밥을 지었다.
고수부님은 느긋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끝낸 고수부님은 “술 가지고 오라.”고 하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워 문 뒤에야 “밥 먹었으니까 가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차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 성도들은 아예 체념해버렸다. 이용기 성도가 다시 고수부님을 업었다. 일행은 개찰구를 나와 플랫 홈으로 갔다. 떠났을 줄 알았던 기차는 아직 그대로 있었다. 고장이 난 모양으로 기관사가 아무리 조작을 해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기관사들이 분주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장 난 곳을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고수부님이 기차를 탄 후에 담뱃대를 거꾸로 물고 부우 , 기적소리를 냈다. 그제야 기차가 덜컹하면서 거대한 체구를 움직였다. “내가 이 기차를 타려고 멈추게 하였노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김제역을 떠난 기차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넓은 징게맹경 벌판을 가로질러 정읍 쪽을 향해 달렸다.
물론 그날 고수부님이 도착한 곳은 정읍 왕심리 도장이었다. 고수부님이 왕심리 도장에 머물게 된 며칠 뒤부터 굶주림에 허덕이는 보천교 신도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상황인즉 그러하였다.
보천교 십일전이 경복궁의 근정전보다도 더 거대하게 지어졌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다. 『도전』에 따르면 보천교가 한창 부흥할 때 신도들이 가져오는 돈의 액수에 따라 그에 맞는 감투가 주어졌다. 물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감투가 아니다. 전국의 작은 고을 수령까지 내정되었는데 후천 세상이 오면 장상과 고을 수령까지 해먹겠다는 계산이었다. 이는 증산 상제님이 “각기 왕후, 장상을 꿈꾸다 그릇 죽은 동학 역신들을 해원시키리라”(5:205)고 한 공사가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에 착공하였다가 중단되었던 십일전 공사를 1928년부터 재개하게 되자 세간에서는 보천교주 차경석이 드디어 천자가 되어 대궐을 신축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공사가 진척되면서 1929년 3월 15일 봉안식을 거행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십일전 봉안식을 ‘천자 등극식’ 정도로 알았다. 이미 ‘후천 감투’를 사 두었던 신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1928, 29년 사이에 각 지방 보천교 신도들이 대흥리와 그 부근 마을로 이사하여 일대는 순식간에 보천교 신앙촌을 이루었다. 바로 그런 점이 당국을 자극했다.
잔뜩 긴장한 일제 당국이 봉안식 거행을 허가해 줄 리 만무했다. 보천교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봉안식을 거행하려고 시도했으나 당국은 불온설로 민심을 자극하여 소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아예 봉안식 자체를 금지시켜버렸다. 결과적으로 보천교 십일전 건축은 신도들의 노동만 착취하였을 뿐, 차 교주의 ‘천자등극’에 대한 희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어버렸다.
당시는, 국내는 물론이지만 세계적으로 대공황기였다. 갑자기 수천 가구가 이주해 왔으므로 보천교 신도들과 그 가족들이 직업은커녕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다. 게다가 차 교주의 천자 등극까지 무위로 끝나자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져버렸으므로 대흥리와 그 주변마을로 이사 온 보천교 신도들은 끼니조차 잇지 못한 채 곤궁한 날들을 기약 없이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해(1929) 가을, 교주 차경석은 신도들의 구제 방편으로 ‘벽곡방문(?穀方文)’과 ‘생식방문(生食方文)’을 반포했다. 벽곡·생식방문이란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날것으로 먹고 살라는 내용이었다. 교주의 명이었으므로 무지한 신도들은 또 그 ‘말씀’을 믿고 따랐다. 결과적으로 약독(藥毒)과 기아로 인하여 죽은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고, 이주한 것을 후회하고 재산과 건강을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간 자가 또한 수천 명이요, 남아있는 자도 모두 기아에 빠져 오고갈 수도 없게 되었다. 당시 보천교 방주를 지냈던 아무개의 아들 한학규 씨는 그 때 곡식이 없어 소나무 껍질, 솔잎, 시래기 등을 먹고 살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오갈 곳이 없는 보천교도들을 살려야 하는 ‘공’을 떠맡은 이가 ‘온 인류의 어머니’ 고수부님이었다. 고수부님이 보천교 신도들의 죽어가는 참상을 모를 리 없었고, 알았다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 아니던가. 고수부님이 왕심리로 이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때 태모님께서 왕심리에 우거하시매 보천교 신도들이 매일 수십 명씩 와 뵙고 굶주림을 호소하니 왕래하는 자가 무려 만여 명이 되거늘 태모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들을 거두어 구제하시니라. 이로 인해 도장 운영에 지장이 많더니 마침 경찰로 있는 신도 강재룡(姜在龍)의 도움으로 수일을 지내고 또 박종오와 김수열이 임옥 지방을, 이용기 등이 전주, 익산, 김제 지방을 순회하여 경비를 조달하매 간신히 충당이 되니라.(11:274)
그때 고수부님 도장의 수석성도 고민환은 고향 옥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해 12월 왕심리에서 온 신도 한 명이 “어머니(고수부님)께서 종독(腫毒)으로 고통을 받다가 이제는 증세가 위중하여 속히 오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고민환은 부랴부랴 짐을 챙겨 왕심리로 달려왔다. 고수부님을 뵈었는데 과연 어깨에 종기가 나서 커다란 박만 하였다.
“어찌 이다지도 고생이 심하십니까.” 고민환은 차라리 고수부님이 야속하다는 듯 오열을 터뜨렸다.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을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고민환은 몰랐다. 고수부님이 종기를 앓고 있는 것은 모든 원혼신(?魂神)을 해원하는 ‘천지공사’라는 것을(11:276). 왕심리 도장으로 옮겨온 고수부님이 가장 먼저 ‘원혼신 해원공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인류의 어머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고수부님한테 혹독한 한파가 몰아쳤던 1929년이 가고 1930년이 밝았다. 망국의 조선은 그해 1월 역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던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불안과 혼란 속에 한 해의 문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해 만세시위와 동맹휴학 등으로 몇 백 명이 검거되어 퇴학을 당하는 혼란도 계속되고 있었다.
1930년 정월 초사흗날 고수부님은 왕심리 도장에서 천지 고사(告祀)치성을 봉행하였다. 치성을 마친 뒤 고수부님은 치성에 참석하였던 유일태, 이근목, 이진묵, 문명수, 채유중, 이중진 성도 등 10여 명을 향해 말했다.
“참사람이 어디 있느냐. 참사람을 만나야 하리니 춘하추동 사시절에 일시라도 변치 말고 성경신 석 자로 닦으면서 진심으로 고대하면 참사람을 만나리라.”
여기서 ‘참사람’이 누구인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종통맥을 계승한 일꾼들을 가리킴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공부는 용(用)공부니 남모르는 공부를 많이 해 두라. 마음은 성인의 바탕을 갖고 일은 영웅의 수단을 가지라. 되는 일 안 되게 하고 안 되는 일 되게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우리 공부는 남 편할 적에 고생하자는 공부요 남 죽을 적에 살자는 공부요 남 살 적에는 영화를 누리자는 공부니라. ‘대학(大學) 공부 성공이라.’ 하나 저만 알고 마는 것이니라.(11:278)
‘용(用) 공부’에 대한 공사 말씀이다. 1928년에도 고수부님은 ‘용 공부’ 공사를 보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 공부는 용(用)공부니 제 몸 하나 단속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천지의 음덕(蔭德)이요, 선령의 음덕이요, 신군(神君)의 음덕이라. 도(都)부처가 들어앉으니 집은 선가(仙家)가 아닐런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11:212)
고수부님이 얘기하는 ‘용 공부’란 무엇인가? 상제님과 수부님의 가르침 진리가 체라면 그 진리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용이다.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는 후천 가을개벽이 체라면 (가을개벽 때) 실천적 생명 살리기가 용이요, 그 과정이 ‘용 공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