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입대하여 1972년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인 군인생활을 잘 마쳤다. 입대할 때에는 세월을 허비한다고 생각하고 군에 면제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으나 제대 할 때에는 정말 인생의 좋은 경험을 했고 또 많은 것을 배우고 후회 없는 군인 생활을 했다고 감사 하게 생각하며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대학 미생물학 교실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억 불 수출 달성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때 불행이도한국에 코레라가 남해안에 상륙하였다.
당시 우리의 수출 품목은 거의 해산물과 얼마 안 되는 자연산 농산물들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코레라가 발생하여 유행한다면 우리의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활어나 건어물 수출이 전면적으로 중단되게 되어 있어 일억 불 수출 목표는 도저히 달성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이전 군수사령관 시절 의무참모였던 정해식 박사는 그때 경상남도 지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대학 미생물학 교실에 박사 학위를 신청한 연구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지사에게 극비에 콜레라 유행을 차단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정해식 경남지사는 우리 교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제대하고 돌아오자마자 내가 그 임무를 맡아 경남 통영으로 내려가 보건소에 방역본부를 차려 놓고 들어오는 선원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코레라 진단과 방역 사업을 소문 없이 총지휘 하였다.
다행히 콜레라가 더 확산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우리나라는 콜레라 유행이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
제대하자 내려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내가 사비로 사용한 출장비를 청구 하였더니 교실에는 돈이 없어 출장비조차 주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하였다.
문교부나 보건사회부에서 주는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을 타내기 위하여 그 반은 담당 관리들에게 가져다 받쳐야했다.
“어떻게 그동안 우리교실을 이렇게 가난하게 운영 하셨습니까?” 하였다.
우리 연구실의 재정은 바닥이 나 있었고 연구는 고사하고 학생 실습도 하기 힘든 형편이다. 연구생활을 하려면 연구비가 있어야 한다. 교수가 연구비를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교수의 자질이다.
물론 연구 데마가 좋아야한다. 이를 받쳐주는 재정이 있어야 한다. 좋고 실력 있는 교수는 필요한 연구 분야에 재정이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