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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신학박사) 20세기에 태어난 세계 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서 한국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미국의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와 천주교 교황 바울 23세와 함께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거목이라 해도 도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2세의 애 띤 젊은 목회자가 5명의 가정교회에서 출발하여 45년간의 목회생활 동안 75만 명이란 교인을 가진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루어 오늘까지도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은 조직 관리를 연구하는 전문학자들에게도 불가사이한 일 수 밖에 없다. 어느 대기업가도 조 목사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21세기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전도자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목사로 알려져 있고 교황 바울 23세는 천주교의 대표라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할 수 있으나 기독교 역사에서 조용기 목사와 비교될 수 있는 목회자는 없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의 리더십 요소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배울 수는 있어도 그의 현상을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는 단연코 유일한 독보적 인물이 될 것이다. 역사에서 한번이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반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어떤 리더였고 그의 리더십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가? 이 논문에서는 그의 현상학적 사역이나 그의 신학을 관찰하기보다는 그의 리더십의 자질을 관찰 분석함으로서 리더십을 그에게서 알아보기로 한다. 조용기 목사는 20대 초반의 처음부터 확신에 차 있는 목회자였다. 구원에 대한 확신, 성경에 대한 확신, 성령에 대한 확신, 기도에 대한 확신, 치유에 대한 확신, 전도에 대한 확신 등 흔들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찬 목회자였다. 자기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위로를 처음부터 확실하게 믿었다. 최자실 목사가 전도사 시절 교회 창립예배를 드린다며 당일 설교를 갑자기 부탁했을 때 막상 그 장소에 도착하니 최자실 목사의 가족 5명뿐이었다. 최 전도사는 미안해 했다. “조 전도사, 미안해. 다섯 명이 오기로 했는데...” 조 전도사는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비록 다섯 명이 모였지만 천막교회에 수백 명의 성도가 모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의 설교 때마다 자주 “믿습니다”라는 표현을 강하게 반복한다. 그 때마다 회중은 우렁찬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표현은 오늘 한국교회의 많은 부흥사 목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있다. 확신에서 오는 그의 메시지는 대부분 선언적이다. 마치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미래를 학신하고 이미 실현된 것처럼 “예언적 과거 완료형”(prophetic perfect) 동사를 자주 사용하듯조 목사도 성경에 말씀하신 것을 확신한 나머지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다섯 명밖에 앉아 있지 않는 개척교회 창립예배 시간에 “너희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하셨으니 이 시간 대조동 30호가 몽땅 예수 믿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다섯 명의 가족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어떻게 보면 22세 젊은이의 황당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처음부터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다. 이 특징은 시간이 감에 따라 더 강해졌고 변함이 없었다. 확신은 확신을 일으켰고 회중은 그의 확신에 힘입어 믿음의 실체를 경험하며 그와 함께 그 확신이 현실화 하는 것을 체험하며 성장해 갔다.
둘째, 그는 열정이 있는 리더였다. 신학생 시절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조 목사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던 최자실 전도사, 결국 후에 그의 장모가 되신 최자실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 유명한 교수가 되기를 소원하며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조 목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조 전도사는 무엇을 해도 잘 할 거야. 언제나 열심이니까. 학생시절이 생각나네. 서울역과 파고다 공원에서 노방전도 하던 시절 말이야.” 전도하러 가기 위해 큰북을 울러 메고 전차를 타려하자 기관사가 못 타게 해서 서대문에서 파고다 공원까지 북을 치며 걸어갔던 열정과 용기가 그에게 있었다. 그는 목회 초기를 돌이켜 보면서 대조동 일대를 북을 치며 다니면서 전도에 열심을 다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해도 열정이 있었다. 열정은 전염성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주위 사람을 감동시킨다. 조 목사의 열정은 그의 특징이 되었다. 무엇을 해도 그 속에 언제나 열정이 들어 있었다. 다섯 명의 식구들을 앉혀 놓고도 수많은 교인이 있는 것처럼 신이 나서 설교를 했다 (희망의 목회 45년, 24면). 선교사의 통역을 하면서도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부흥강사보다 더 큰 음성으로 통역을 했다. 처음 온 사람들은 누가 강사인지 누가 통역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만큼 그는 언제나 열정적이었다(27면). 그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열정은 감동을 일으킨다. 군대 입대 후에도 교회와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을 때 주말에는 전력을 다해 목회를 계속 했다. 주일에 몇 차례 설교를 하고 4월의 손이 시린 수색의 강물 속에서 들어가 또 침례를 베풀었다. 지치고 지친 그는 또 다시 병이 들었다. 탈장을 수술하고 폐렴까지 겹쳐 40도를 넘나들며 혼수상태에서 죽음의 기로에 처했다 (51). 최자실 전도사와 온 교회는 그의 치유를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했고 뱀이 죽는 환상을 보고는 치유되어 일어났다. 그의 열정에는 끝이 없었다. 열정은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셋째,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다. 개척교회를 시작하고 나서 심방을 갈 가정이 하나도 없어 최자신 전도사와 함께 매일 10시간 가까이 기도했다. “나는 매일 10시간 가까이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아침 7시까지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 또 12시까지 기도를 계속했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또 저녁까지 기도만 했다” (25면). 기도는 사람의 마음에 초점을 만들어주고 목표를 세워주며 희망을 갖게 한다. 그는 시작부터 기도의 능력을 믿어 그가 세운 오산리 기도원은 오늘도 수많은 신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찾는 장소로 유명하다. 그는 기도로 폐병이 나은 경험이 있었고 학생회장 시절에도 심한 폐렴으로 사경을 헤메던 중 역시 최자실 전도부장의 기도와 동료들의 간절한 기도로 다시 치유의 경험을 한다. 건강이 회복되자 최 전도사에게 “영적이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늘 삼각산에 올라가 범 한 마리를 때려 눞이고 성령충만을 받겠다며 학생들과 함께 산 기도를 다녔다 (27면).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계속했다. 주위의 신학생들이 몸이 약하니 철야기도는 중지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더 기도 속에 나를 던졌다” (28면). 기도는 영적인 힘을 일으킨다.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은 땅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추위를 이겨가며 새벽 1, 2시까지 기도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고 또 새벽 4시면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렸다. 힘은 들었으나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넘쳤다 (34면). 평안과 기쁨이 있는 지도자는 평안과 기쁨을 일으킨다. 어려운 시절 누구나 평안과 기쁨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심방을 다니고도 밤에는 철야기도하고 병자를 위해 안수기도를 했다. 그리고 새벽마다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고 자주 금식기도까지 했다 (40면). 군대에 입영하기 전 2-3일을 남겨 둔 때에도 매일 밤마다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했다 (48면). 개척한지 그의 열정적 기도와 전도는 열매를 맺었고 3년만에 재적 성도가 4백 명에 육박했고 교회부지도 6백 평을 사놓은 성장을 체험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소명의 확신이 있었다. 그는 존스톤 선교사의 통역으로 섬기면서 유학의 꿈을 갖고 있으나 그는 자신을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목회자로 부르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신학교 학생회장 시절 병마와 싸우면서부터 있었다(25면). 기도의 체험 속에서 그는 그의 부르심이 학자가 아니라 목회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찍부터 자신의 생애에 대한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자 일편단심 목회자의 길로 달려가게 되었다. 다섯째, 그에게는 병 고침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당시 가난한 동래에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병원에 찾아갈 돈이 없던 시대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치유사역 중 통역을 맡으면서 성령의 능력을 많이 보았다. 세계적인 부흥사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령님의 병고침 역사과 예수님 사역의 대부분이 병고침이었던 사실들을 기억하고 특히 자신의 폐병 완치 경험이 합하여 병 고침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28면). 그의 확신은 목회 초기부터 병 고치는 역사로 이어졌다. 이것은 그에게 더욱 더 치유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불어넣어 주었다. 질병은 누구나 두려워한다. 치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목회 초기 아이 출한 후 7년 동안 중풍으로 누워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 하는 한 여인을 결사적인 찬송과 기도로 나흘 동안 철야기도를 한 결과 남편이 아내가 죽지 않고 살 것 같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아, 죽긴 왜 죽어요. 예수님이 우리 질병을 위해 채찍을 맞으시고 십가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세요. 무성이 엄마는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라고 또 그의 특징인 선언적 확신을 말했다. 그리고 조 전도사와 최 전도사가 함께 병마가 듣고 있는 듯이 병마를 꾸짖고 내쫓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중풍병은 나을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듯 중풍 귀신을 쫓았다. 그 여인을 일어났다. 그리고 걸었다. “예수님! 할렐루야! 시원해요! 시원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성이 엄마의 치유는 조 목사의 목회에 전환점이 되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무당, 알코올 중독자, 폐결핵 환자, 자살 시도자, 앉은뱅이 소년 등 각종 병자들이 예수를 믿고 고침을 받아 모든 성도들이 하나 같이 함께 기뻐 뛰며 찬양하고 감격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다. 그의 목회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사역의 연속이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에 그의 사역은 희망을 일으켰다. 확신은 희망을 만든다. 리더십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 믿음은 희망을 낳는다. 여섯째, 그는 천부적 언어의 능력이 있었다. 신학생 시절부터 그는 선교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영어를 깨우쳐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았다. 방언의 경험도 있었다. 영어와 일본어로 설교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목회자이다. 일제 시대 그는 초등학교 3-4 학년이어서 일본말을 다소 배웠을 수 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도 없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로 세 나라 말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선천적 언어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효율적인 리더는 설득력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사람이다. 그의 스피치는 빠르고 열정적이며 확신에 차 있어 듣는 이들의 주의를 끌뿐 아니라 듣는 이들의 생각이 방황할 수 없도록 집중시킨다. 설교의 능력은 목회 처음부터 그의 통역 사역에도 나타났고 그의 초기 설교와 오늘의 설교에도 완숙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자실 목사는 개척교회 당시 그의 설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조 전도사의 설교야말로 참 재미있고 좋았잖아. 사람들이 주저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교 듣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지” (20면). 리더는 언어의 설득력이 있다. 그에게는 커뮤네케이션의 능력이 있었다. 언어는 사람의 마음을 잡는다. 대중을 설득하여 원하는 목표를 행해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리더이다. 효과적인 언어는 필수이다. 그의 확신과 희망에 찬 열정적 설교는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고 설교를 통해 회중의 현실적 필요를 충족시키려 했다. 당시 한국의 어려운 현실 속에는 가난과 질병이 최대의 문제였다. 이 문제를 그의 설교는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합해진 메시지였다. 그는 그의 설교에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때로는 성경구절 인용 자체로 그의 설교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믿고 있었다. 일곱째, 그는 타고난 리더십이 있었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학생회 회장으로 섬겼다. 좋은 리더는 언제나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그리고 리더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한다. 최자실 전도사가 고아원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를 찾아간다. 형편을 살피고 기도로 돕고 싶은 생각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현장에 찾아가 고아원을 지어 그 곳에 교회를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듣자 즉시로 후배와 목수를 데리고 가서 공사를 시작한다. 건축 자재나 인건비도 없는 상황에서도 즉각적으로 행동화하는 적극성이 있었다. 사상가와 학자는 이론과 생각의 사람이지만 리더는 좋은 이론과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믿음으로 시작한 건축에 필요한 재정은 믿음대로 따라왔다. 리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가 있었고 믿음이 현실화되는 것은 경험하며 그의 리더십은 더 강화되었다. 리더는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본다. 그리고 그 미래를 성취한다. 역사를 무에서 만들어낸다 (22면). 리더는 혼자서 일을 하지 않는다. 동역자 팀을 구성한다. 그는 최고의 팀 멤버를 갖고 있었다. 최자실 전도사였다. 간호사 출신 최자실 전도사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최자실 전도사는 조용기 전도사를 믿었다. 조 전도사가 그에게 영적인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요청할 만큼 강력한 후원자였다. 회장인 조 전도사는 학생들을 이끌고 산으로 기도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리더는 사람을 늘 거느린다. 그에게는 최자실이라는 분이 결정적인 시간에는 늘 곁에 있었다. 최자실은 기도의 사람, 칭찬의 사람, 지혜의 사람, 추진력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었다. 조 전도사에게는 더할 데 없는 팀 멤버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도 최자실 전도사의 집 마루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최자실 전도사와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고 함께 눈물로 통곡하며 기도하는 미국 선교사들과 같은. 멘토들이 늘 주위에 있었다. 그는 주위의 멘토들에게서 목회를 많이 배웠다. 리더는 혼자가 아니다. 늘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여덟째, 그는 고난을 통해 연단 된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질병과 가난을 수없이 극복해 간 살아있는 체험이 있었다. 한국동란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던 때에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를 하나씩 먹으며 연명하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을 때는 금식을 했다. 음식이 없었을 때는 배가 고파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먹지 못하는 상황을 금식이라는 이름으로 긍정적으로 참았다. 고통을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피나는 땀과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48면). 그는 어린 시절 일제시대를 보냈고 전쟁을 겪었으며 헐벗도록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폐결핵으로 죽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내과의사가 되어 많은 돈을 벌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교단의 불같은 시험 중에서 선교사들의 눈물의 회개로 위기를 해결하는 것을 보았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 손길을 체험했다 (54).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조 목사는 갈등에 휩쓸려 상처를 주고받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믿음으로 사는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성령을 따라 살며 복음의 열매를 맺는데 밑거름이 되는 것을 보며 젊은 시절 목회를 배웠다. 그는 가난에 쪼들릴 때 밤을 새워 눈물로 기도하며 견뎌내는 최자실 전도사의 모습을 보며 목회자를 시작했다. 가난하면서도 믿음이 불 같이 일어났다. 거울 앞에서 “조용기 너는 가난하지 않다! 너는 부자다! 우리 교회는 내년에 천 명이 된다! 조용기 너의 믿음은 산을 옮길 만하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 자신을 노려보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도 했다 (58). 자신에게 믿음과 용기와 확신을 일으키기 위한 자신과의 대화였다.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 왕도 자신을 격려했었다(David encouraged himself). 리더는 자신에게 믿음과 용기를 일으켜 고난을 스스로 극복해 간다. 아홉째, 그는 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해 갔다.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그들의 통역을 맡았을 때에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유명한 학자가 되어 신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25면). 그리고 미국 유학 수속을 밟고 있었다.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추진하고 있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학을 가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를 늘 꿈꾸는 사람이었다. 학생회장 시절 학생들과 함께 삼각산에 기도를 산기도를 가도 “산에 올라가 범 한 마리를 때려눞히고 성령충만을 받겠다”며 산기도를 다녔다(27면). 늘 그에게는 단기적 장기적 목표들이 있었다. 중풍병자를 치유하겠다는 결단과 목표를 두고 며칠 밤을 눈물로 새우면서도 기어코 중풍병자가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믿음은 목표가 특징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히12:1). 개척한지 4년 후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서대문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할 때에도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버리고 부자가 있는 문안으로 들어간다”는 성도들의 오해를 사면서도 새 교회 개척이 하나님의 사명인 것을 믿으며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시작을 했다. 그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58). 1961년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교회가 6천명이었다. 당시 그의 교회는 6백 명이 넘었다. 제일 큰 교회를 찾아가 장의자를 세어보며 꿈을 꾸었다. 그는 목회 초기부터 “목표를 세우는 것과 꿈꾸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장을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중요성”을 배웠다(59). 3년 안에 5배로 늘려달라고 기도했다. 기도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다. 3천 명의 중대형 교회가 되기를 소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항상 성공을 목표로 두고 살아왔다. 목회자가 된 후에는 성공한 설교자가 되고 싶었다. 이런 목표들이 한편 인간적인 것들이기는 하나 그에게는 늘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매주 15명 씩 교인이 늘었고 1965년에는 7천5백 명의 성도를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기도 가운데 늘 목표를 설정했다. 그는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설교하고 상담하고 행정하고 병든 자들을 방문했고 문을 두드렸다. 계속 움직였다. 어느 주일에는 3백 명의 새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그는 설교 도중 쓸어져 병원으로 실려갔다.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설교하기를 원했다. 늘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2천4백 명 선에서 조 목사는 건강으로 인해 쓸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새로운 목회 파라다임을 배웠다. 고통 중 구역교회의 새로운 개념을 성경에서 배우며 1973년에 1만 8천명의 교회로 결국 그의 목표는 이루고도 남았다. 여의도에 새 성전 건축의 새로운 꿈을 가졌고 서대문에 8천 명을 남겨두고 여의도로 만 명과 함께 새 시대를 향해 출발했다. 한 달에 3천명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었다. 열 하나, 조 목사는 소그룹의 다이나믹을 깨달았다. 아무리 유능한 리더라 할지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배웠다. 교인이 2천3백 명이 되었을 때 과로로 쓸어져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새로운 구역교회 개념을 배웠다. 목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는 깨달았다. 평신도목회를 알게 된 것이다. 목사는 “성도를 구비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니라”라는 바울의 목회개념을 보았다. 목사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훈련하여 성도들이 목회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목사의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물론 그 당시 한국교회에는 구역모임이 있었으나 조 목사에게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작은 그룹의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그들이 목회자의 사역을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18장에서 이드로의 원리를 배웠다. 중요한 일은 모세가 하고 나머지 일들은 장로, 천부장, 백부장, 50부장, 10부장으로 나누어 각자 2명에서 10명 이상을 맞지 않으면서 전체를 이끄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조직 경영 방법을 배웠다. 모세도 이드로로부터 이 원리를 배워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갔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확고한 신념에서 새롭게 시작한 소그룹 사역은 구역장의 훈련과 함께 복음전도의 목표를 설정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교회의 성장은 새로운 소그룹 구역장의 사역으로 매일 같이 성장을 체험했다. 조 목사의 교회에는 1980년 10만 명, 8천 구역이 있었다. 1984년에는 50만 명 큰 목표를 설정하고 한 해에 3만 명의 작은 목표를 세웠다. 한 구역에서 일년에 4명만 전도하면 목표가 이루어진다. 그 목표는 6개월만에 이루어졌다. 그 해 목표를 10만에서 15만 명으로 다시 올렸다. 구역의 가정교회 사역을 통해서 였다. 1984년까지 50만 명에 도달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계속적인 상향 목표와 구역사역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결과 목표를 달성했다. 오늘 그 수가 75만, 만2천 구역교회로 늘었다. 목사는 구역장들에게 구체적인 지침을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순종하며 따랐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전세계의 대표적인 기업에서도 소그룹 팀과 팀장 제도를 활용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소그룹 사역을 적용해 성장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이 목회 개념을 지금 전세계 교회의 목회 개념이 되었다. 조 목사는 “Cell Group''이란 영어로 된 책을 통해 전 세계에 이 개념을 소개했고 그의 CGI (Church Growth Institute) 사역을 통해 전 세계 목회자들이 배워 때로는 한국교회보다 더 조직적으로 체계를 세우고 잘 적용하여 한국교회가 역으로 배우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오늘도 전세계로 계속 번져가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가난과 질병을 통해 예수를 만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소명을 받은 그는 훌륭한 리더십의 자질 대부분을 젊은 20대 초기부터 갖고 있었고 시간과 함께 그의 리더십은 점점 더 성숙해졌다. 때로는 실수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터득함으로서 그의 천부적 리더십은 절정에 다다랐다. 그 바탕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굽힐 수 없는 강력한 믿음, 기도와 성령과 치유의 체험, 믿음에서 오는 희망과 용기와 위로, 조직과 지도자 훈련 및 양성을 통한 대교회의 지속적 성장을 유지하며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교회와 교인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 땅과 하늘의 소망을 얻게 되었고 세계는 조용기 목사의 목회로 인해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다. 때로는 신학적 정확성의 부족으로 인해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막강한 리더십 스타일로 인해 아들들에 대한 재정적 의혹과 분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기 목사 한 사람에게 나타난 리더십 자질들은 다음 세대에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젊은 목회 후보생들이나 현직 목회자들에게 연구와 배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