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엔카'라는 용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가요 초창기, 레코드가 아직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10년경 번안곡이든 창작곡이든 노래 가사만 인쇄해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들은 엔카시(艶歌師)였다.
오늘날 엔카(演歌)라는 용어가 원래는 엔카(艶歌)였다는 사실은 이미 밝힌바가 있다.
그래서 가사집을 팔러 다니던 거리의 악사들을 演歌師(엔카시)가 아닌 艶歌師(엔카시)라고 썼던 것이다.
남의 집에서 가져온 물건에 약간의 손질만 가해도 자기가 개발한 것이라고 자랑하는 속성을 가진 일본, 일본 가요계는 훗날 일본 유행가요에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됐고 보다 일본적인 이름을 찾다가 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 같은 演歌라는 말로 고쳐쓰게 됐음은 쉽게 상정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고가마사오'는 그 후 오늘날의 엔카(演歌)로 자리잡을 때까지 일대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힛트곡을 양산해 낸다.
일본의 정신이자 일본의 역사라고 추앙받는 가수 미소라히바리(
), 키타시마사부로(北島三郞)로부터 미야꼬하루미(
) 및 호소가와타카시(
)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본가요사의 금자탑을 이룬 수많은 가수들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고가마사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가수가 없고, 그래서 '고가마사오'를 엔카의 대부로 부르는 것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일본에 '고가마사오'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 트롯트의 대부 손목인.전수린.김교성.박시춘이 있다.
그런데 엔카의 대부로 불리우며 1931년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 酒
淚
溜息
)"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 '고가마사오'의 이 곡이, 실은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들었던 이현경 작사/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표절한 것이라는 설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그 전말을 간추리다보면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롯트가 어떤 관계인가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구나 '고가마사오'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절친했던 작곡가 전수린과 포옹까지 나누며 반가워했다는데,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궁금해진다.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국의 작곡가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상당한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수린'은 1907년 개성 출생이며 어렸을 때부터 호수돈 여학교 교장 '루츠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나이에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5세때 송도고보를 중퇴한 '전수린'은 서울로 올라가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다가 한국 작곡가 최초로 빅타에 전속되어 "황성옛터"와 "고요한 장안"을 발표하여 일약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서울에서 활약하던 '전수린'이 어떤 경로로 '고가마사오'와 조우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전수린'이 일본에 가면 서로 만나고, '고가마사오'가 한국에 오면 더없이 반갑게 맞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교분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두 사람의 이런관계는 서로의 음악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노선 또한 닮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문제는 1932년 가수 '이 애리수'가 '전수린'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원정(怨情)]이라는 곡명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표했을 때,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고가마사오'의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 酒
淚
溜息
)"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는 사실이다.
가요평론가이자 작사가 '김지평'이 [권부에 시달린 금지가요의 정신사]에서 이들 두 곡을 악보로 대조해 분석한 바가 있는데, 두 곡은 모든 점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당시 한국에는 레코드 시설이 전혀없었기 때문에 이미 1926년경에 작곡한 [고요한 장안]이 1932년에 가서야 일본에서 [원정]이란 제목으로 '이 애리수'의 노래로 취입되어, 레코드로는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 酒
淚
溜息
)"가 한 해 먼저 나왔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는 [고요한 장안]이 극중에 막간가수의 노래로 그 이전부터 불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곡이 조선곡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음악 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가 닭과 계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사실,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조선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가르쳐지고, 1910년경에 와서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이미 "조선 정악 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등에서 서양악식의 성악과 기악이 가르쳐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미 "시카고 음악학교"등 미국이나 구라파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 위에서 '전수린'을 기폭제로해서 1932년에는 가히 한국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부터 1936년간 10여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 보노라면, 우리 가요가 과연 독창적인 것인가 아니면 일본 엔카를 표절하고 있는가를 금새 알 수 있다.
1927년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 개국과 더불어 관현악단을 창설했던 [찔레꽃] [직녀성]등의 대작을 남긴 '김교성'이 1932년 빅타레코드에 전속되었고, 또 '김정구'의 친형이면서 배우.가수.작곡가를 겸한 천재 작곡가 '김용환'이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되는가 하면,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홍도야 울지마라] [처녀총각]등을 남긴 '김준영'이 이 시기에 데뷔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바이올린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등의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일생동안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등 수많은 힛트곡을 양산한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이 데뷔한 시기도 이 때이고,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가 있다가 북한에 억류되어 평양음대 총장을 지내고 북한의 가극 "피바다"를 작곡한 '이면상'이 역시 이 시기에 빅타레코드에 데뷔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이후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등을 발표하지만, 그는 가곡분야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어 [성불사의 밤] [봉선화]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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