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세월이 유수 같이 흘렀네.
나는 그 시절 명문으로 이름 났든 경남중학교를 졸업 하며 많은 고민을 했다.
가난한 시절에 가난한 조국 가난한 부모 밑에 태어났든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하며 진학의 고민이 컸다.
당시 경남중학교를 졸업하면 경남고등학교를 6~70% 입학 하고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면 SKY대학을 어렵지 않게 들어 갈 수 있는 시절이 었는데
집안 형편으로 대학이 어려울 것 같고...
당시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많이 진학 할 때다.
당시 부산에서는 경남공고,부산공고,부산상고...등의 실업계가 인기도 있었고 제법 셌다.
갈등이 많았다.
쿠오바디스(신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우연한 기회에 중앙지 신문을 보다가
부산에 국립공고를 설립 한다는 뉴스와 함께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서독 대통령 뤼브케의 협정 내용도 소개 되었다.
당시는 서독과의 경제 교류가 활발할 때 였다.
서독으로 간호사도 파견하고 광부도 파견할 때 였으니까.
부지와 건물은 대한민국이 제공 하고 학업에 필요한 모든 기자재와 학습 방법 일체는 서독이 부담 한다는 내용.
당시 세계적으로 독일 기계산업이 엄청 앞섰을 때 였다.
그리고 졸업생중 성적 우수자는 2년간 독일 유학을 할 수 있으며 군 면제도 하며 학비 일체도 국립으로 부담 한다는 내용들.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든가.
그래서 갈등중에 내린 선택은 바로 이거다 였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싶었다.
국비로 공부하고 서독유학 하고 군 면제되고 취업은 보장이고.
어찌 보면 마침 내가 진학 하는 해에 개교가 된다니 천운이라 여길 정도로 다행으로 여겼다.
경남중학교를 졸업한 실력이니 열심히 하면 성적 우수자로 뽑혀 서독 유학도 자신 있을 것도 같고.
모든게 뿅 가버렸다.
1차와 2차도 아니고 특차 모집 이었고
주저없이 입학원서 내었다.
아마도 비율이 7대1이 넘었지 싶다.
당시 부산에서 일류 중학교로 손꼽히던 경남중학교, 부산중학교, 개성중학교...는 물론이고
지방의 중학교에서 교장 선생 추천서를 받은 우수 학생들이 한 학교에서 2~3명씩 몰려 들었다.
입학 시험도 좀 특이 한것 같았다.
제도 비슷한 내용의 시험과목도 있었고 철사로 뭘 만드는 실습과목도 있었지 싶다.
7~8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 나는
국립부산기계공고 제1회 졸업생이 되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국립부산기계공고가 아니고
1967년3월 국립 부산한독직업학교에 입학한 셈이 되었다.
당시 협약에 부지와 건물만 우리가 제공 하고 모든 학업 시스템과 기자재는 서독식으로 따르기로 되었기에
우리나라의 공업고등학교라는 명칭을 독일에서는 직업학교라 칭 한다 하여 그렇게 교명이 정해 진 것이다.
입학과 동시에 용호동이든가에 위치한 수산대학교 허름한 교사에서 더부살이 학업이 시작 되었다.
말이 교사지 그냥 창고라 해도 무방 할 듯.
이렇게 시작된 학업은 완전 서독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주말이라고 토요일은 휴일이고(월~금요일 까지만 학교가고 토,일은 놀고)
독일에서 직송된 독일어 교본으로 아 베 체 데...를 배우고. 데르 데스 뎀 덴을 배웠다.
기계과 2반.전기과1반,배관과1반,자동차과1반이 전부였다.
독일식 집중 교육 시스템으로 학업 한다며 한반 학생 정원은 30명씩.
학생 150명으로 국립부산한독직업학교가 시작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기계과를 졸업 해야 취직이 잘 될것 같아 기계과를 선택 했다.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입학 했든 국립부산한독직업학교.
그런데 당시 문현동인가 어디에 사립으로 부산한독직업학교가 있었다 싶다.
미용기술등을 가르치는 요새 말하면 학원 비슷한 거였는데
어쩌다 이름이 같으니 가끔씩 자존심 상하는 소리 듣는 일도 있었다.
토요일 쉬는 날이고
독일어 원서로 공부하고
버니어 켈리퍼스, 마이크로메타....등 계측기들이 서독에서 들어 오고.
서독에서 뤼브케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 하고.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든가.
양국간 맺어진 협약은 마침 개교된 그해에 터진 동백림 사건등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으로 꼬이게 되어 결국은 협약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 가고.
철없든 시절에 그럭저럭 해가 바뀌고
1968년도에 해운대 우동으로 이사를 했다.
덩그러니 디귿자 콘크리트 건물 실습동 하나만 준비된 교사에 이사를 했으니 알만.
지금은 그때 그 건물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배관과에서 리어커를 만들고 기계과에서는 철사로 바구니 비슷한걸 만들고
가마니 등으로 들것들을 만들어 돌을 실어 나르는 노가다(?)와 수업을 병행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장산 기슭에 교복을 입고 들것과 철사 바구니를 든 노가다 학생들이
불도저와 포크레인 공사 장비들 사이를 헤집으며 돌을 나르든 장면을 상상해 보라.
서독과의 협약은 물건너 갔고 그래서 더 이상 독일에서 기자재도 도입 되지 않고
국내산 선반,밀링,세파,호핑머신들이 설치 되어 실습에 사용 되었고.
당연히 유학도 못 갈 형편이고 ....군 면제도 안될것 같고.
그동안 많은 시간을 독일어 수업으로 채웠는데 이제는 영어로 대신 하게 되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든가.
그렇게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을 맞았다.
처음에 가졌든 기대가 무너지는 아픔으로 학업에 의욕을 잃고
설상 가상으로 한독직업학교라는 교명으로 인해 고등학교 명칭이 아니라고
대학 입학 자격도 없다 하고.
지금도 당시 교정에서 함께 했든 1,2,3회 졸업생들에게 자주 듣는다.
요새 말하면 일진회 비슷한 꼬라지로 전교생에 소문이 났었으니.
7명이 한꺼번에 학교옆 마을(당시에는 절이 있었지) 민간집을 1,2층 달세를 얻어
자취를 하며 해운대 본토 꼴통들과 어울려 철없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가족은 부산 영도에 살고 있었으나.....
어찌 그리도 철이 없었든지.
나의 부산기계공고 1회 운명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지금도 책장에는 '국립부산한독직업학교' 졸업 앨범이 꽂혀 있다.
벌써 반백년이나 되어 가는 세월이 지났다.
인생무상이다.
몇해 전에 해운대에서 부산기계공고 졸업 40주년 기념 1박2일
1회 동기생 모임에 참석 했다.
그리고 또 문경stx 리조트에서 가진 2박3일간
경남중고등학교 졸업 40주년 동기동창회(24회)에도 참석 했다.
죽기 전까지 이어지는 동문회.
야심한 이른 새벽이다.
오늘 하루도 후배님들의 무사고 건투를 빈다.
첫댓글 정말 책이나 TV에서만 보던 격동의 시대를 지나 오셨습니다... 멋지게 잘 차려진 학교에서 서구화된 교육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나온 과거지만 경험하지 못하고 가슴에 와 닿지 못하는 내용들이 많군요 어려운 시간과 시절을 보내면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선배님들의 사명감과 열정이 없었다면 발전은 어려웠을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후배들도 열심히 살고 있는 과정이며 앞서 달리셨던 선배님들께서 많은 조언과 관심 감히 부탁드립니다
백성제 선배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항상 어제보다는 오늘이 행복한 시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영원히 자랑스러운 국립부산기계공고 1회 선배님이십니다.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