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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원동 4대 주임신부님 이셨던 장대익 루도비코신부님,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잠원본당에 계시면서 지내셨던 기록이
루도비코신부님 홈페이지에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회고록을 가지고계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으신 분께
잠원성당의 이야기를 알려드려도 좋을 것 같아서 주소 올립니다.
http://fr.catholic.or.kr/louischang
화보집, 회고록, 특히 회고록제8부에는 잠원교육관 건립, 파티마성가단, 사제생활 50년의 금경축식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떼를 돌보시며 사신 50여년의 시간을 기억해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은총이 되지 않을까요?.
용인 성직자묘지에서는 이병문 베드로신부님과 이웃해 계시니 가실 때 함께 찾아뵐 수 있답니다.
아래는 일부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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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대회를 한해 앞둔 1987년 나는 잠원동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아파트 밀집지역에 자리한 잠원동 본당은 아담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공사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집짓는 사제라는 꼬리표도 떼게 됐다고 생각했다. 신자들도 먹고 사는 형편이 괜찮은데다가 교육 수준도 높은 신자들이 많았는데, 그만큼 영성생활과 신앙재교육에 대한 갈망이 컸다. 나는 우선, 성당 안에 '가톨릭 문고'를 열었다. 교우들에게 책을 기증받은 책과 본당 예산으로 도서를 구입했는데, 모두 7백여권이 넘었다. 성서는 물론이고 철학과 신학에 관한 도서와 교리, 전례, 성인전, 역사, 문학 서적,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갖춰졌다. '가톨릭 문고'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어 대여를 원하는 본당 신자들은 누구나 책을 빌려 볼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주일학교 활성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성탄 예술제 등 학생들의 흥미를 끌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결과 주일학교 학생 수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그런데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주일학교 교리실은 7개에 불과했는데, 학생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다 보니 2부제를 실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게다가 레지오 마리애도 3개 꾸리아에 50개 쁘레시디움으로 성장해 단원들도 일 주일에 한 번씩갖는 주회 때만 되면, 교리실 쟁탈전이 벌어졌다. 급기야 신자 가정을 돌면서 회합을 가져야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교육관을 신축해 교실난을 해소하고, 각종 신심 단체들의 회합장소가 절실하게 요구됐다. 신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할 장소도 필요했다. 이제 더 이상 집짓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또다시 집짓는 일에 나섰다. 일단, 본당 사목협의회와 논의해 교육관 신축을 검토했다. 그런데 부지 확보가 문제였다. 성당터가 좁아 교육관을 지을 땅이 없었다. 성당에 인접한 땅을 매입하려고 해도 소유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고 성전을 다시 헐고 신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데서 풀렸다. 몇 년전부터 매입하려해도 꿈쩍하지 않던 땅의 소유자가 직접 성당을 찾아왔다. 자신의 땅을 팔겠다고 했다. 또, 성당과 새로 구입한 땅 사이에 있던 시유지를 서울시가 매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매듭이 하나 풀리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는 헌금 배가 운동을 전개하면서 교육관 신축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교육관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신자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교육관 조감도를 담은 성탄 카드를 만들어 판매하고, '파티마 성가단'은 교육관 신축 기금 마련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해 정성을 보탰다. 그런데 몇 달이 가지 않아 신립액과 봉헌금 증가율이 형편없이 뚝 떨어졌다. 신립금은 물론이고 92년도 교무금을 책정하지 않은 세대도 전체의 절반이 넘었다. 교무금을 책정한 세대 가운데 교무금을 월 2만원 미만으로 정한 세대도 40%나 됐다. 이래 가지고서는 교육관 신축 기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각 세대의 교무금 책정현황을 주보에 끼워 전체 교우들에게 공개했다. 성당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목회와 의논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결행한 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고 교육관 신축 기금 모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교우들이 늘어났다. 드디어 1992년 11월 교육관 건립을 위한 첫 삽을 떴다. 그리고 93년 말 지하 3층 지상 5층 규모의 교육관 건물이 완공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