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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카페 방문으로 미안해지는 마음에 최근에 쓴 글을 옮겨다 놓습니다.
부부가 단촐히 캠카 여행으로 가도 아주 좋을 곳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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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꼿꼿한 선비정신, 주실
고려대학교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서 이른바 '고소영 내각'의 '고'자에 해당하는 고려대 출신들이 곳곳에 포진했다. 사람을 많이 배치해 머리 수가 많아지니 가지 많은 나무에 어찌 바람이 잘 수 있을까. 잡음 없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고려대에 재직 중인 모 교수는, 동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학교가 구체적인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닌 데 밖에 나가면 공연히 눈치가 보여, 작은 오해라도 받을까 각별히 행동을 유의한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다.
하긴 '고소영'의 '고'자를 들춰내는 식으로 꼬치꼬치 따지자면 먼저 할 일이 있다.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 김성수씨의 친일 행적 의혹부터 시원히 설명해야 하건만 그 얘긴 언제나 유야무야다.
그러나 4.19의 불꽃을 본격적으로 피워 올리며 이 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획을 그었던 고려대학교가 민족혼이 죽어 지낸 학교는 아니다. '죽어도 아닌 것은 아닌' 고려대 인물 중에 국문과 교수였던 지훈 조동탁이 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다.
마을을 숨기려고 심은 나무들, 주실수
경북 영양군에 주실이란 곳이 있다.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다. 마을 앞 들판으로 일제강점기 때 뚫린 '신작로'인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가지만, 그 전까진 오지 중의 오지였다. 아니 이 길을 빼면 지금도 오지다. 교통이 편리해진 요즈음에도 서울에서 출발하여 허위거리지 않고 도착하려면 5시간은 잡아야 하는 먼 곳이다.
주실은 답사객들에겐 '주실숲' 또는 '주실수'라는 숲 이름으로 더 알려진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마을 원로들에 의하면 지금도 30% 정도만 타성바지이고 나머지는 모두 한양 조씨라고 한다.
▲ 영양읍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주실숲. 자연에 인공이 더해진 손꼽히는 경관의 마을숲이다.
이 숲은 산림청이 선정한 '2008 아름다운 숲'으로 뽑혔다.
조선 중종 때 개혁파 신진 사림의 거두 정암 조광조가 죽는다. 훈구파가 조광조에게 씌운 대역죄 모함으로 귀양지에서 사약으로 생을 마감한 이른바 기묘사화가 그것이니 1519년의 일이다.
임금 자리를 욕보인 대역 죄인은 연좌제로 삼족을 멸한다. 한양 조씨 일가들이 멸 삼족을 피해 팔도로 은밀히 흩어지던 중에, 한 가솔이 주실로 숨어든 것이 주실 마을의 시작이다. 주실을 선택된 것은 숨어 지내기 좋은 오지라는 지리적 조건이 유일한 이유였다.
오지인 지형도 불안해 한양 조씨 일가는 마을 앞 들판 왼편 남쪽으로 트인 길목에 울창하게 숲을 가꾸어 마을을 외부로부터 격리시킨다. 마을 불빛이 밖으로 새는 것을 막아 사람이 사는 동네가 있음을 최대한 막아보려는 것이 숲을 가꾼 목적이었다. 그래서 심은 수종도 키가 높게 자라고 가지를 풍성히 치는 느티나무였다.
세간에서는 주실 마을의 빼곡히 심겨진 '주실수'들이 마을의 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주실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느니 풍수가 좋아 인물이 났다느니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을 많이 낸 진짜 요인은 개화기에 신학문을 위한 학교를 일찌기 마을에 들이는 등 후대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마을 전통이다.
주실을 찾아 문향(文鄕)의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마을 원로분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썩 달지 않은 질문을 한 마디 던졌다.
시인 조지훈이 주실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원이 확실한 주실 마을의 역사적 유래와 주실에 입향한 이래 마을이 지켜내려온 각별한 전통은 뒤로 놔두고 '조지훈만을 너무 앞줄에 세우는 것이 아니냐'고 다소 까칠하게 물었던 것.
아직까지도 유가의 반듯함이 남은 근엄한 어르신들은 질문을 받자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부분적으론 긍정을 한다.
특히 문화부에서 약식으로나마 해설사 교육을 받고 마을을 찾아오는 답사객을 상대로 문화관광해설사로 봉사하는 조석걸(71)씨는 적극적으로 동의를 했다. 그는 농협 이사로 정년 퇴임 후 텃밭 농사로 소일하며 마을을 지키고 있는 마을 토박이다.
조씨는 마을을 찾는 답사객들에게 지훈의 영광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마을이 있었기에 지훈이 있었다'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즉 마을의 전통이 지훈을 길러낸 것이지 지훈을 마을과 뚝 떨어진 잘난 인물로 보는 것은 옳은 시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주실마을을 밖으로 얘기할 때 시인 조지훈은 주실의 대세다. 주실을 알리는 이정표에도 주실과 지훈문학관은 동격으로 써 있다.
▲ 지훈 생가 근처에 세운 지훈문학관은 마을의 가장 큰 건물이다. 마을 뒷산의 지훈문학공원에도
상당한 돈과 공을 들였다.
삼불차 정신이 근간이 된 전국 최고의 박사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훈이 주실의 자랑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즘같이 내놓고 권력 해바라기를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껍데기 지성인'이 넘치는 세태엔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실의 선비 정신으로 민족 정기를 지키는 일에 날이 죽지 않았던 지훈이다.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 고려대 교수직 사직서를 써들고 다니며 박정희 정권에 맞서던 조지훈의 기개는 다 주실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이런 기개는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주실에 내려오는 꼿꼿한 선비 정신인 것이다.
주실을 얘기하면서 삼불차를 빼놓으면 안 한 것과 같다. 마을 전체에 누대로 지켜 내려오는 꼿꼿한 마을 정신인 '삼불차(三不借)'는 오늘에도 널리 쓰으면 좋을 덕목이다.
남에게서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의 삼불차는,
재물을 빌리지 않는 재불차(財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 인불차(人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 문불차(文不借) 세 가지다.
재불차의 정신으로 마을 앞 옥토에서 나오는 재물을 근면검소로 아꼈고, 모인 재물은 일제 말기에 의병을 일으키거나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 설립 등에 쏟았다. 마을 앞 50여마지기 옥토는 마을 입향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
인불차로 양자를 들이지 않아 후손들의 집안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마을 원로들의 말에 의하면 인불차의 정신은 당시엔 큰 흠이 아니던 축첩의 배격에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문불차는 '머리는 빌리면 된다'던 어떤 전직 대통령의 인생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덕목이다. 그 대통령은 머리를 빌리지 못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IMF 구제금융으로 나라를 진탕에 빠뜨리기도 했다.
스스로 학문을 익히라는 가르침은 어릴 때부터 책을 놀잇감으로 삼는 전통이 되어, 인구 비율로는 전국 최고의 박사학위 취득자를 낸 마을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삼불차를 단순히 재물 사람 학문의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만 해석한다면 돼지 목에 진주를 걸어주는 격이다. 꼿꼿한 선비 조광조의 피를 이은 후손들이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두메 산골 주실을 선택해 피신하여 자립해야만 했으니 삼불차가 아니라 백불차라도 각오했을 것이다.
주실 사람은 아니지만 문향의 전통을 잇는 영양군 사람으로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한 오일도가 영양읍 감천마을 사람이고, 소설가 이문열도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사람이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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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도 한 가지를 배워 갑니다. 건강하세요.
낮에 여기에 답글을 달았는데 사라졌네요..? 요즘 다음에 가끔 이런 현상이 있더군요... / 언제나 반갑습니다..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주시구요.. 굴 맛있게 먹던 기억이 아리삼삼~~~
답글을 달고 등록을 클릭하면, 모든 글씨가 물음표로 바뀌면서 사라지는 현상이 있더군요..
역시~~꼼꼼두 하셔라..의미를 두고 뜻을 알고 여행을 하는것도 뜻깊은일이 아닌가합니다.안지기님도 건강하세요..
네, 정모 다녀와서는 그 때 일을 많이 얘기합니다~ ^^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사모님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고마워용~저두 잘 있어요.또 뵙길 바랍니당~샤크마눌.
네, 반갑습니다, 아름다우신 사모님~ ^^ 조만간에 뵙게 되겠지요 머.. 내내 건강하십시오..
신혼때 가졌던 마음이 색시랑 천천히 전국일주 하는거 였는데...역시 여행은 준비가 절반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좋은글과 사진 즐감했습니다...감사합니다^^
서울 출발기준으로 일박하면 부근까지 둘러보기 좋을 겁니다..^^
뜻이 담긴 좋은글과 정보 감사합니다~~~
네ㅡ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거의 겉할기식 여행이었다는것을 이글을 읽으며 새삼 느꼇습니다 옛날 수학여행때 선생님이 여행지에 역사나 문화를 숙제로 제출하라 헀을때 남에것 배껴서 제출했던 후유증 인것같습니다 영양 을몇번 지나쳤지만 이런사연이 있다는것에 갑자기 머리가 띵해집니다 잘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ㅎㅎㅎ~ ... 그 때야 뭐 남의 글 베껴서 제출하는 것은 모범생 아니었나요~? ^^ 대개는 건강한 몸으로 때우던 것이~~~ ^^ ㅎㅎㅎ~ 반갑습니다, 아테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