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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어린이, 자연을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타시마 세이조(田島征三)
채소들의 대변인, 타시마 세이조가 이야기하는 ‘채소들의 잔치’
요즈음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채소를 식탁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말 농장을 마련해 놓고, ‘채소 기르기’를 체험하게 하는 부모님들도 있지만,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 심지어 아이들의 부모님조차도 채소와 땅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은 이런 요즈음의 부모와 아이들에게 채소에게도 계절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채소들의 잔치??란 책을 3년 동안의 긴 시간을 들여 만드셨다고 합니다. 잠시 선생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까요?
“채소의 대변자인 저로서는 참 들었습니다. 수박은 한여름인 8월, 양배추는 봄 양배추와 가을 양배추가 있지만 대개 4월, 옥수수는 가을에 수확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채소라도 언제든지 나옵니다.” (위의 잡지에서 인용)
1969년 도쿄로 건너와 그림책을 그리던 선생님은 ??치카라타로우(힘센돌이)??란 책으로 비로소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고 합니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도쿄 시내 한 가운데 사무실을 차려놓고 열심히 그림 작업을 했겠지만, 어린 시절이 그리웠던 선생님은 도쿄 외곽에 땅을 사서 염소와 닮을 키우며 채소들도 직접 가꾸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밭농사를 막상 시작해놓고 보니, 생각같지 않더라는 겁니다. 채소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그런데 병이 걸려 파랗던 잎이 시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혹시 물이 부족한가 해서 잔뜩 물을 주기도 했지만, 다시 살아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럼 영양이 부족한가 해서 비료를 잔뜩 주었더니, 더 시들어버렸다고 해요. 그렇게 채소들과의 동고동락하던 세월이 무려 15년, 아침 무가 물에 젖어 섹시한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선생님은 무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어떻게 된 거야? 저녁에 혹시 애인을 마나러 간 거 아냐?’ 그렇듯 선생님은 채소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노련한 농군 그림책 작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채소밭 잔치??는 선생님이 실제 경험이 녹아든 그림책이지요. 책 내용을 함께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할아버지가 정성껏 가꾼 밭에 채소가 무럭무럭 자랐는데, 채소를 갉아먹는 무당벌레와 채소의 양분을 빼앗는 잡초가 애물단지로 등장했지 뭐에요. 할아버지는 고민이 되었지만, 워낙 잔치와 술을 좋아하는터라, 밭을 내버려둔 채 이웃집 잔치에 놀러가버렸어요. ‘얏호!’ 이제부터 채소 밭 식구들도 나름대로 잔치를 시작합니다. 점이 스물 여덟게 박힌 무당벌레는 방울토마토 입을 갈아 잔치를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고, 덩굴여지는 빙글돌아 춤을 추고, 양파는 마디호박을 두드리며 잔치 소식을 알립니다. 이 소리에 땅 속에 있던 감자와 당근도 튀어 나와 한데 어울립니다. 한참 신명 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데,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밭으로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까지 합세된 채소들과의 잔치는 달빛이 비칠 때까지도 이어집니다. 수세미외 덩굴에 거미가 실을 뽑아 만든 그네를 타고, 참마와 우엉은 놀고, 이어서 토마토와 오크라 당근도 앞다퉈 오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뚱보 호박도 낑낑거리며 기어이 하늘로 올랐지만, ‘쿵’하고 땅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하필이면 술 취해 앉아 쉬던 할아버지 머리에 떨어졌지 뭐에요.
좀 황당한 이야기라고요? 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돕고 존재 그 자체를 즐기는 상생(相生)의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지지는 않나요? 그림책을 펼쳐놓고 그림을 보면, 자연물의 색체만큼이나 알록달록함에 눈을 크게 뜨게 됩니다. 경솔한 의인화를 피하려고 채소의 눈과 코를 그려넣지 않았다고 하는 선생님은 대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채소들의 몸을 정말 날렵하게 표현했어요. 마치 아이가 그린 그림 같이 꾸밈없이 그려진 채소들을 보세요. 게다가 고갱 그림의 원시성을 환기시키는 시원한 원색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자연의 원시성이 꾸밈없이 진솔하게 표현된 그림 속에서, 작가인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의 심성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림도 꼭 선생님처럼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배짱 두둑하지요. 선생님의 경험이 녹아든 그림책이니까, 책 속에서 보여주는 주책없어 보이는 할아버지, 잔치 좋아하는 할아버지는 의심의 여지없이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이시죠. 그렇다고 그림만 춤추는 듯 율동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채소들의 노래 소리를 옮겨 적은 글 역시, 읽는 맛이 대단히 맛깔스럽습니다. 크크, 술에 취한 할아버지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할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흉내내는 달덩어리처럼 둥근 호박의 표정이 있는 장면, 정말 압권입니다. 유머가 ‘덩더쿵 쿵더쿵’, 붓질의 느낌까지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림 들 속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책과 이란성 쌍둥이인 타시마 세이조
세이조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영화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시골로 이사온 쌍둥이 형제는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합니다. 따돌림의 이유를 자신에게 쏟아지는 선생님들의 칭찬 탓이라고 생각한 세이조는 정작 그 이유가 자신이 그린 멋진 그림때문이란 것을 모르고, 교사인 어머니 때문에 아이들이 시샘을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세이조의 어머니는 도내 대회에 아이들의 그림을 출품하는데, 곧 세이조의 그림만을 출품한 것으로 오해받으며 편파적 행동이라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영화는 두 쌍둥이 형제의 숲 속 생활을 신비롭게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세 유럽의 고전 음악이 깔리면서, 신비스럽고도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 쌍둥이의 벗이 되어준 센지라는 친구와 함께 문명 보다는 야성의 혜택을 누리고 지내는 꼬마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히가시 요이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만든 이 영화의 원작은 그림책 작가인 타시마 세이치가 쓴 ??그림 속 나의 마을??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이조는 자신과 나란히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게 된 쌍둥이 형제 유키히코의 커다란 밑천이 되어준 시골 시코쿠의 유년 생활을 총 11개의 장면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동심의 순수함이 은빛 물살 위에서 팔딱이는 물고기들처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추억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이 잔잔해진 투명한 물결 위로 굽이쳐 흘러가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시퀀스처럼 이어져 마침내 히가시 요이치 감독으로 하여금 필름으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도록 했죠.
2006년 8월, <어린이와 문학>이 주관한, ‘평화의 그림책을 그리는 일본 작가들’에서 자신의 책 ??뛰어라 메뚜기??에 싸인을 하고 있는 타시마 세이조 선생님
타시마 선생님은 환경주의자란 호칭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삶과 작품 경향 모두 환경주의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또한 그림책을 통해 풀어나가는 메시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참여적인 활동은 평화주의자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타시마 선생님은 평화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강연회에서 어린시절 잡았던 물고기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계신 타시마 세이조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일본에서는 시민 운동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는 여기 참여한 우리들(일본 그림책 작가)도 젊었기 때문에 많은 운동에 참여했지요. 요새 젊은이들도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노래하거나 시위를 하거나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정면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일도 없고요, 또 지금 일본에서 헌법을 개정해서 전쟁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세력이 있습니다. 모두들 그런 일은 반대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나는 반대다 하며 외치는 일은 부끄럽다, 고집스럽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호소 방법을 사용해야 우리들의 생각하는 일과 젊은이들이 평화를 바라는 일이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질까요?”(<평화를 그리는 사람들 - 일본 그림작가 4인과 나눈 이야기>,??어린이와 문학 2006.10월??)
타미사 세이조는 지금도 방법을 동료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선생님은 환경보호에 대한 적극적인 활동의 일례로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도쿄에 있는 히노데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페기물 처리장이 생겼습니다. 그 때 나는, 불도저 앞에 누워 반 년 내내 시위를 했습니다. 누워 지내니까 숲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숲 속의 동물이나 식물들한테 ‘우리들이 너희를 지켜 줄 테니까, 너희도 힘내.’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물론 나무나 말하거나 너구리가 말하는 것은 아닐 테죠. 그런데도 ‘세이조, 영차영차!’하고 들리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저는 나무 열매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위의 월간지 인용)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그림 속의 생명이 펄덕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갔다면, 그것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된 것이라고 말이죠. 생명이 갖고 있는 강렬함이나 강함, 반대로 절실함이나 연약함은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화가가 살아오면서 경험해 온 많은 것들, 이를테면 화가가 울부짖거나 행복해서 기뻐했던 체험들이 손으로 흘러들어와 종이에 표현되는 것입니다. 세이조 선생님 경우에는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열심히 자연 속에서 살았던 것이 몸속에 스며져 있는 것이지요.
타시마 세이조는 1969년에 ??치카라타로우??로 제2회 세계그림책원화전에서 ‘황금사과상’을, 1974년 ??후키마북쿠??로 제5회 ‘코단샤 출판문학상’을 1988년 ??뛰어라 메뚜기??로 ‘그림책 일본상’을 수상했으며, 1992년 무라타세지와 함께 공동 제작한 ??숲으로 찾으러 가자??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그래픽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입니다.
지나친 집착에 대한 경고
??푹풍우 이는 밤에??로 1995년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과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받은 기무라 유이치가 글을 쓰고 타시마 세이조가 그림을 그린 ??늑대의 돼지 꿈??은 참으로 현란합니다. 전신의 털을 꼿꼿하게 세운 앙상한 몸매의 늑대와 유머러스한 표정의 동물들은 단순화된 선을 대신해 강렬한 색체로 채색되어 있지요. 루오의 그림에서처럼 검정 윤곽선 처리된 동물들과 노랑, 파랑, 분홍, 하양으로 반복되는 배경색이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런 성의 없이 그려진 그림 같지만, 대단한 자신감과 노련함으로 그려진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컨대 첫 번째, 두 번째 장에서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진 늑대의 뒤집힌 몸과 뾰족한 이빨들 사이로 내민 긴 빨간 혀와 색의 앙상하고 삼지창 끝 모양의 나뭇가지들이 신경이 날카로와졌을 늑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늑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통통한 분홍 돼지의 지그시 감은 눈은 참으로 태연하네요. 늑대의 간절함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타고난 행운을 믿고 있음직한 돼지의 모습이군요.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엉뚱한 경험담을 나눠봅시다. 차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 점심때가 되면 슬슬 배가 고파집니다. ‘어느 집으로 갈까?’ 차의 속도를 늦추며 밥집들을 물색합니다. ‘이 집은 된장찌개를 하는군, 여기까지 와서 된장 찌개는 좀 그렇겠지........’ 그러면서 차는 차대로, 눈은 눈대로 앞으로 나갑니다. 또 다음 식당이 보입니다. ‘여기는 좀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러면서 다음 식당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죠. ‘여기는 돈까스? 에고 속 부대껴서 안 돼.’ 그러다 어느새 5분, 10분이 후딱 지나가고 배는 고픈 정도가 아니라, 부화가 속에서 치밉니다. ‘첫 집에 가서 먹을 걸 그랬네.’ 후회가 시작됩니다. 결국 지쳐 들어간 곳은 정말 첫 집의 그럴싸한 외관이나 주차장에 세워졌던 수많은 차들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결국 첫 집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서, 배고픈 대로 입에 우격 우격 음식물을 넣으며 배를 채우지요.
이 그림책도 같은 내용입니다. 다만 사람이 아닌 늑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처음 본 된장찌개 대신 포동포동 살이 오른 새끼 돼지가 등장합니다.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고픈 주린 배를 위해 늑대는 숲 속을 헤매입니다. 좀 더 맛난 짐승이 보이면 ‘꿀꺽’ 해치울 생각인 것이죠. 토끼와 산양, 어미 사슴, 산닭을 만나지만, 어째 늑대에게는 처음 봤던 살찐 돼지에 못 미칩니다. 마음속에 품은 돼지를 꼭 먹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늑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갑니다. ‘어라, 배짱 좋은 새끼 돼지가 그만 우거진 풀덤불 속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 버렸네요.’ 늑대는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섰겠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일까요?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새끼 돼지가 도망갈 힘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는데, 늑대는 벌린 입을 다물고 마는군요. 그 때 늑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던 거예요. ‘가만 있자. 아까 본 그 새끼 돼지가 이렇게 작았나?’ 고개를 갸웃하며 늑대가 새끼 돼지를 놓아주죠. 고픈 배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도 망각하게 되는지, 늑대는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갔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처음 본 퉁퉁한 새끼 돼지 생각뿐이었겠죠?
남을 위하는 방법에 대한 근본적 모색
배고픈 거지를 보면 짠한 마음이 들어 동냥을 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날 그 거지가 자식까지 등에 업고 추운 지하철 지하보도에 앉아 두 손을 벌리면, ‘저 어린 것이 무슨 업보가 있기에......’ 혀를 끌끌 차며 주머니를 뒤지게 되지요. 하지만 그 지하도를 지날 때면 번번이 전에 본 그 거지와 어린애가 구걸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때는, 또 다시 주머니를 뒤지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건네는 이 푼돈이 저들의 배고픔과 헐벗음에 도움이라도 되는 걸까? 근본적으로 저들이 배고픔을 면할 수 있도록 다른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은 아닐까? 아니지. 내가 뭐라고 그런 것까지 참견하고 고민한담. 아니야. 선행을 하면서 조건을 따지는 내 자신이 옹졸한 거지.’ 참으로 많은 말들이 내 마음속을 오갑니다.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그들을 위해 볼 때 마다 주머니에서 푼돈을 꺼내주는 것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까요?
이런 경우는 또 어떤가요? 지하철을 탈 때 가끔 아주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는 종이를 승객들에게 나눠주고는 손을 벌리고 물러나지 않는 뻔뻔하게 구걸하는 사람들 말예요. 정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그들의 염치없는 행동 앞에서는, ‘저들이 내게 언제 돈 맡겨놨어?’ 하는 괘씸함이 느껴집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죠? 왜들 끊임없이 상대편의 양심을 스스로 점검하도록 하는 걸까요? 맘씨 좋아 보이는 승객들 앞에 그들은 더욱 오래 서서 두 손을 내밀고, 심한 경우는 얼굴까지 빤이 들여다보고 서 있습니다. 어쩌라고요? 맘씨 좋아 보이는 것은, 요즈음 유행말로 ‘호감’에 속하는 좋은 인상을 지녔단 것인데요, 그것을 악용해서 그들의 양심을 떠보는 구걸하는 자들의 속내가 사악하고 경박하게 느껴집니다. ??맘씨 좋은 고양이 호루스??도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맘씨가 좋아서 스스로 착한 일,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서는 고양이 호루스는 동네 고양이가 아프면 대신 쥐를 잡아주고, 다리 다친 고양이가 낳을 때까지 대신해서 먹이를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호루스란 고양이의 선행이 벼룩한테도 소문이 났던지, 스스로 열심히 배고픔을 면해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벼룩 한 마리가 호루스에게 피 한 모금만 달라며 부탁합니다. 고양이는 마지 못해 피 한 모금이 벼룩에게 빨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벼룩은 새끼 열 마리를 낳아서 고양이에게 또 다시 피를 부탁합니다. 맘씨 좋지만, 거절할 줄 모르는 호루스는 또 다시 자신의 몸을 내주고 피를 빨립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새끼 열 마리가 또 다시 새끼들을 10마리씩 낳아 무려 111마리가 되어 호루스 앞에 나타나 뻔뻔스럽게도 피를 부탁합니다. 호루스는 벼룩에게 뜯기고 피를 빨리면 자신의 몸이 심각하게 가렵고 근지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차마 거절을 못하고 이번에도 피를 빼앗깁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뻔뻔한 벼룩이라고 하더라도, 속담에 ‘벼룩 같은 녀석’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용서됩니다. 그런데, 100마리의 새끼가 또 알을 까고 나와 1000마리가 되었으니, 무려 1,111마리의 벼룩들이 우르르 몰려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호루스에 등 뒤에 오르려고 합니다. 도저히 참아줄 수 없던 호루스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등을 내놓을 수 없었던지,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물속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온 호루스가 본 것은? 자신이 뛰어든 물위를 동동 떠내려가는 벼룩들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배고픔을 해결하지도 않고, 마냥 남의 피나 빼앗아 먹는 벼룩들에게 호루스는 세 번의 선행을 몸소 실천했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그들의 요구에 넌더리를 쳤지요. 과연 호루스가 잘못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례한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니까요. 문제는 선량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마냥 이용하려고 드는 벼룩 같은 사람(여기서는 벼룩 그 자체이지만)들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림책 뒷면을 이용해 작가인 타시마 세이조는 질문을 던집니다. ‘만약 고양이 호루스가 냇물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고양이 호루스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또한 ‘여러분이 벼룩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등등.......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아이들에게 10의 배수라는 수학적 개념도 알려주는 덕목을 갖춘 그림책이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 인간됨의 조건 등에 대한 난해한 철학적 사고를 던져주는 만만치 않은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서도 여전히 타시마 세이조씨는 현란한 색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특유의 익살맞은 표정을 살리고 아이가 그린 것처럼 순수함이 느껴지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제는 그의 그림책의 특징이 분명해 지는 군요. 강렬한 배경색과 재미있고 순진한 인물 묘사, 단순화된 처리, 여러분이 저처럼 직접 타시마 세이조씨를 만나보셨다면, 그림과 사람이 어쩜 저리도 닮아있는지 무릎을 치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평화의 그림책>을 그리고 있는 타시마 세이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실지는 못했지만, 최근 번역 출간된 ??뛰어라 메뚜기??역시 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림책입니다. 가식 없는 삶, 가식 없는 그림으로 자신의 삶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타시마 세이조, 일본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멀리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려준 멋진 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