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해제(解題)-김동욱(金東旭)
1. 서론
필자는 이규보(李奎報)를 광세(曠世)의 문인(文人)이라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의 일생의 작시가 7, 8천 수에 이르고,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주필(雙韻走筆)을 일컫고 있으니, 천성의 시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곡예(曲藝)이기도 하였다.
이 주필(走筆)이란, 옆에서 호운(呼韻)하고 경각에 시를 지어 수십 운을 계속해 내는 일종의 문인들의 놀이로서, 최충헌(崔忠獻)의 군문(軍門)에서 문인의 기상을 드높인 하나의 기적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변혁기를 당하여 무(武) 밑에 이사(頣使)당하고 유린당하여도 문(文)의 힘을 믿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였고, 또 문장경국대업(文章經國大業)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를 얼마간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그는 또 그것을 믿고 몽고 몇 만(萬)의 대군을 문사(文辭) 한 장으로 물러가게 한 바 있으니, 이런 문장의 마력(魔力)을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의 화신(化神)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강화 천도(江華遷都) 이후에 평생 비축이 없어 다른 관원들이 전답을 사는 등 생자(生資)의 계책에 여념이 없을 때 객사(客舍) 한 칸에 차가(借家)를 얻어 간고하게 살면서도 국가의 사명(詞命)을 도맡아 문인으로서 영광된 자리를 지켰으나 이 나라 강토가 몽고의 철기에 눌려 3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신라 이래의 귀중한 문화재가 회신(灰燼)으로 돌아갔으니, 역시 문(文)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강화 길상면(吉祥面) 진강산(鎭江山)에 그의 분묘가 있어 인생무상의 감회에 젖게 한다. 그러나 그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3권은 8백 년 뒤에까지 우리들에게 남겨져 문인의 생애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그가 최씨 정권에 아첨하고 문객(門客)이 되었다 하여 왈가왈부하는 이가 있다. 이 점은 뒤에 언급해 보겠다.
2. 생애(生涯)
10세기의 과거법(科擧法) 시행 이후, 지방의 호족, 특히 향리층(鄕吏層)에서 이 문을 두드려 여기에 입격(入格)하고 관원(官員)으로 부상하여 문관 계급에 진출하였다. 이들 신흥 사대부(士大夫)들이 12세기 후엽, 의종(毅宗)의 향락에 편승 오만해져, 이들 문관 관료층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정중부(鄭仲夫)ㆍ이고(李高)ㆍ이의방(李義方) 등에 의하여 보현원(普賢院) 거사(擧事)로써 표면화되고 대참화의 변이 있었다. 이보다 2년 전 의종 22년(1168) 12월 16일에 이규보(李奎報)는 황려현(黃驪縣) 즉 현 여주(驪州)에서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윤수(李允綏)와 금양군인(金壤郡人) 김씨(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인저(仁氐)였으나, 기유년(1189, 명종19) 사마시(司馬試) 때 꿈에서 규성(奎星)이 과거에 오를 것을 알리더니 입격하였으므로 규성(奎星)의 보응(報應)이라 하여 규보(奎報)라 이름을 고쳤고, 뒤에 선적(禪的)인 데 끌려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하였고 다시 백낙천(白樂天)의 풍류에 따라 스스로 시금주삼혹호 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라고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주필 이당백(走筆李唐白)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는 이미 9세에 글을 잘하였으므로 당시 그를 신동(神童)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그가 14세가 되던 신축년(1181, 명종11) 문헌공도(文憲公徒) 성명재(誠明齋)의 문을 두드려 학업을 닦고 16세에 사마시에 응했지만 이후 세 차례나 낙방을 하는 고배를 마시다가 명종(明宗) 19년(1189) 그가 22세 되던 해에 급기야 장원을 하였고 이듬해에 진사(進士)에 뽑혔으나 그 등차(等次)가 하위를 차지하여 이를 물리려 하자 엄군(嚴君)으로부터 준엄한 꾸지람도 받았다.
당시, 무신집권(武臣執權)이라는 역사의 전환기적 상황 속에서 세상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술과 시로 스스로 청고(淸高)를 자랑하던 소위 해동칠현(海東七賢)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여, 마침 비어 있던 그와의 망년우(忘年友) 오덕전(吳德全)의 자리를 대신하라는 말을 듣자 그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자리도 아니거늘 어찌 그 빈자리를 대신한단 말이오? 혜강(嵇康)ㆍ완적(阮籍) 뒤로 그를 계승한 이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소.”
하고 시를 지었다.
영광되이 죽림의 모임에 참여하여 / 榮參竹下會
통쾌히 동잇술 기울였네 / 快倒甕中春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 / 未識七賢中
그 누가 오얏씨 뚫은 이기주의자이던고 / 誰爲鑽核人
천마산(天磨山)에 우거(寓居)하면서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 전집(全集) 20권)과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 전집(全集) 20권)을 짓고 난 5년 뒤인 명종 27년(1197) 12월 총재(冢宰) 조영인(趙永仁) 등 네 정승이 차자(箚子)를 올려 왕에게 추천하였으나 반대파들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등과한 지 10년 만에 겨우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에 보임되어 관로에 등장이 되었으나 참소를 입어 얼마 안 있어 서울[京師]로 돌아왔으며, 사륜정기(四輪亭記 전집 23권)와 남행기(南行記)를 지은 다음해인 신종(神宗) 5년(1202), 경주에서 반란이 있자, 군막(軍幕)에서는 벼슬하지 못한 자로서 문서를 다루는 수제원(修製員)을 충원하려고 했으나 모두 출정하기를 꺼리자 그는 분연히,
“내가 비록 유약한 선비이지만 또한 국민이니 국란을 피함이 어찌 장부일까보냐?”
라 말하고 종군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로서 수제를 겸하기도 하였다.
희종(熙宗) 3년(1207) 그의 나이 40세 되던 해에는 진강공(晉康公)의 모정(茅亭)에서 이인로(李仁老)ㆍ이원로(李元老)ㆍ이윤보(李允甫) 등과 함게 기(記)를 지으니 제일로 뽑히고 12월에 처음으로 한림(翰林)에 들었으며 강종(康宗) 원년(1212) 1월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에 제수되었다. 6월에 다시 겸직으로 한림원에 복직하였으며, 을해년(1215, 고종2) 여름, 최충헌(崔忠獻)에게 시를 올려 참직계(參職階)에 제수되기를 구하니, 충헌이 그 시를 보고,
“이가 분명 뜻을 높이 가진 자이다.”
라 생각하고, 전첨(典籤) 송순(宋恂)에게 뜻을 묻고서는 이에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내려주어 좌우 사간(左右司諫)을 역임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高宗) 3년(1216) 5월부터 약 1년 반 동안에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지어졌다. 나라에서는 새로 급제한 사람을 위하여 학사연(學士宴)을 열거나 추천희(秋千戲)를 열어 주는 것이 향례였다. 이때 금의(琴儀)의 문생 중에서(여대는 문인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에서 급제를 뽑으면 바로 지공거의 문생이 되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별곡을 불렀다.
元淳文 仁老詩 公老四六
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
沖基對策 光鈞經義 良鏡試賦
위 琴學士의 玉笋門生 위 琴學士의 玉笋門生
위 날조차 몇 부니잇고
이는 문인들의 시장경(試場景)의 서술이다. 당시 이규보가 정언 벼슬에 있던 때이고, 진화(陳澕)가 고종(高宗)의 사부(師傅)이면서 한림으로 있을 때였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창작연대’에서 고증하였다.
그러나 고종 6년(1219) 팔관회(八關會)일로 말미암아 최충헌(崔忠獻)의 탄핵을 받고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이해 일세의 권병을 잡고 있던 최충헌이 죽었으며, 당시 이규보는 52세였다.
충헌이 죽고 난 뒤 예부 낭중(禮部郞中, 53세)으로 부름을 받고 태복 소경(太僕少卿, 55세)ㆍ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ㆍ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ㆍ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ㆍ판위위사(判衛尉事)를 역임하였으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고종 17년(1230) 63세 때 팔관회의 시연(侍宴)의 차례가 구례(舊例)에 어긋났다 하여 11월에 위도(猬島)로 유배되었는데 이때의 모습을 잘 드러낸 시가 있다.
옛날에 이소경을 읽고 초신을 슬퍼하였는데 / 舊讀離騷悼楚臣
어찌 오늘 내가 이럴 줄 알았으랴 / 豈知今日到吾身
선비 되기 틀렸고 중 되기는 늦었으니 / 爲儒已誤爲僧晩
알지못게라 종내 어떤 사람 될 것인지 / 未識終爲何等人
고종 19년(1232) 4월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65세)로 기용되었는데, 몽고가 국경을 넘어 병란을 일으킬 때에는 그는 사명(訶命)의 일을 도맡아 서(書)ㆍ표(表) 등을 지었으니, 이규보의 문필에 몽고왕은 크게 감탄하여 병사를 거두게도 하였으나 세과부득(勢寡不得)으로 조정은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겼다 고종은 다음해 6월 그를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보문각학사(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寶文閣學士, 66세)에, 12월에는 상부(相府)로 들여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태학사 판예부사(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太學士判禮部事)에 제수하였다.
을미년(1235, 68세) 그해 10월, 표(表)를 올려 퇴직을 청하자 임금이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정사를 맡기므로 나라의 일을 보다가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거듭 보이니, 고종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게 하였으니 바로 이해에 대장경 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그 후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평생에 즐겼던 시와 술로 낙을 삼고서 가난한 생애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옛날엔 일개 유생이었는데 / 伊昔一布衣
인연이 있어 재상이 되었었네 / 夤緣作邦宰
재상 자리 이제 물러났거니 / 宰相已退老
다시 어찌 그 태도 있으랴 / 寧復宰相態
품팔이 잡된 일 하더라도 / 傭保與雜作
어느 누가 괴상히 여기랴 / 人亦何必怪
더구나 이 집은 / 況此一戶壺
몸 담고자 장만한 것 / 自奉所可辦
화로 끼고 손수 숯을 피우며 / 擁爐自添炭
술 있으면 손수 데우곤 하지 / 有酒手自煖
그러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나 대외적인 서(書)ㆍ표(表) 등은 그가 계속하여 짓기도 하였다. 고종 28년(1241) 7월에 병을 얻었을 때 최이(崔怡)는 이규보가 지은 시들을 모아 판각하게 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문집을 미처 보지 못하고 사제(私第)에서 향년 74세로 운명하였으니 1241년 9월 2일의 일이었다.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으며 시호를 문순공(文順公)으로 봉하였고, 그해 11월 6일 진강산(鎭江山) 동쪽 기슭에 안장하였다. 지금도 강화읍에서 전등사로 가는 길목 목비(木碑) 고개에서 숲으로 300m쯤 가면 그의 묘가 있다.
3. 어용(御用) 시비에 대하여
위와 같이 그의 생애는 화려하다면 화려하였다. 이러한 생애를 놓고 그에 대한 평가로 요즈음 젊은 평론가에서 어용 시비(御用是非)가 나왔었다. 그가 최씨정권 치하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살았기 때문에, 그는 의도했건 안 했건 간에 최씨의 문객(門客)밖에 될 수 없었다. 그는 무인 정변의 2년 전인 서기 1167년에 나서 서기 1241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국내는 무인들의 치하에 있었고 다시 북에 요(遼)와 금(金)의 침략의 위협과 또한 실제로 몽고(蒙古)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江華)에 천도(遷都)하여 4년이나 살다가 돌아갔으니, 가위 환난동탕(患難動盪)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때, 민중은 자구책(自救策)으로 민족주의적 양상을 띠고, 지배자는 이에 영합하여 민족지상(民族至上)의 철학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규보가 민에 있을 때, 우리의 민족서사시(民族敍事詩)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쓴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보다 4백 년 뒤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다. 이 임진왜란에는 재야의 민중 속에서 의병(義兵)들이 봉기하여 새로운 양상을 띠었지만, 고려의 몽고 침략 때에는 세외교(世外敎)인 불교를 종교로 하였기 때문인지 이런 항거가 민중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층은 문(文)ㆍ무(武)로 갈라져 상호 견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 견제 정도가 아니라 문이 무에 이사(頣使)당하고 있던 시대이니, 한림별곡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문이 아무리 자존자대(自尊自大)해도 당시의 패권자 최충헌(崔忠獻)의 눈에 들지 않으면 오덕전(吳德全)과 같이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몸을 담다가 자기 고향으로 낙향(落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농민으로 전락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방의 향리(鄕吏)로서 과거의 문을 뚫고 올라온 사대부 계급에 있어서는, 조상의 이름을 빛내고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참을 수 없는 전락인 것이다. 이런 상황 설명을 모씨는, 이규보로 대표되는 지식분자들은 무인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에서 유교의 이념을 왜곡하고 거기다 유가의 입세철학을 엄호하면서 권귀(權貴)에 붙어 이런 강권 정치하에서 지식인들이 국수주의자로 위장하여 외적에 저항할 것을 외치면서 안으로는 시문으로 아유첨미(阿諛諂媚)의 공세를 펴고 권귀(權貴)에 대하여는 고관후록(高官厚祿)을 바라고 시문은 입신출세의 요구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규보가 26세 때 쓴 동명왕편(東明王篇)도 같은 이론 밑에서, 오국본위천하성인지도(吾國本爲天下聖人之都)를 내세우며 민족감정을 고무하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왜곡하고 당시의 무인정권의 연장을 꾀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두지 않더라도, 이규보가 어용문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명왕편도 최씨정권수립(1196)의 3년 전의 소작이라는 데에는 이상의 소론이 얼마나 관념적이라는 것인가 알 수 있다. 그러니 여기에 나오는 권세, 아부, 유교이념, 국수주의, 외적 침략에 저항할 것을 고취하는 등의 사적은 불교도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의 일연법사(一然法師)도 그런 성향이니, 이것은 외적의 위협하에 있던 당시인들의 공통된 성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규보의 행적 속에서 그가 그의 문필을 어떻게 출세의 도구로 삼았는가를 볼 때에 그가 최충헌의 사자인 최이(崔怡)의 택중에서 천엽류화시(千葉榴花詩)를 쓴 것은 그의 32세 때이다. 그리고 모정기(茅亭記)를 쓴 것은 40세 때이다. 그동안 그의 관직은 미관말직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최이와 알고 최충헌 앞에 끌려가 주필(走筆) 헌시(獻詩)하여 최충헌을 감동시켜 탁용(擢用)의 뜻을 두게 한 것은 46세 때이다. 그러나 그는 최충헌이 소망을 말하라 할 때에 당시 8품 벼슬에서 겨우 7품을 소망하였을 뿐이다. 이는 그의 천부의 재능에 의하여 얻은 것이지 결코 아첨 수단이나 권문에 가까워지려고 한 것은 아닐 것으로 본다. 그의 조명풍(釣名諷)
물고기 낚음은 고기 때문이지만 / 釣魚利其肉
이름 낚음은 무엇 때문인지 / 釣名何所利
이름은 바로 실의 객이니 / 名乃實之賓
주 있으면 저절로 객 이르네 / 有主賓自至
실 없으면 헛된 이름일 뿐이니 / 無實享虛名
모두 이름으로 생긴 누일레 / 適爲名所累
에서 보면 이규보는 허명을 버리고 정도를 걸어간 인사라고 보여진다. 또 그의 무관탄(無官嘆)을 보면,
벼슬 없어라 / 常無官常無官
떠돌며 밥 비는 건 내 마음 아니고 / 四方糊口非所欲
한가히 지내며 세월 보내기로 했네 / 圖兎居閑日遣難
아 인생 이 운명 이다지도 궁상스런고 / 噫噫人生一世賦命何酸寒
하였으니 이 얼마나 철저한 자학(自虐)인가. 그의 뜻은 한결 높은 데에 있었다. 그의 자찬(自贊) 시에서 보면
뜻은 본디 우주 밖에 있어 / 志固在六合之外
천지도 날 제한 못해 / 天地所不囿
기모(氣母 원기(元氣)의 모체)와 함께 무하향(無何鄕)에서 노니려네 / 將與氣母遊於無何乎
하였으니, 가히 그의 인생의 철리의 심각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안전의 욕망을 승화시키고 우주 사이에 참여하고 있으면서 자기의 생을 무하(無何)의 지경에 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 보고 어찌 아첨을 일삼는다고 할 수 있는가. 그가 한림별곡에 있는 대로 좌사간(左司諫)에 임명된 때는 이미 52세 때였다. 인생 50이면 하나의 단락이 될 수 있다. 그 뒤에 그에게 주어진 여명(餘命)은 주어진 것이지 단순히 구해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또 그동안에도 여러 번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63세에 최충헌이 죽고 최이 치하에서 63세에 다시 위도(猬島)에 유배당하였다. 65세에 강화로 피난가기 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강화에 가서 여축이 없어 몸을 담을 집도 없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그가 광세의 문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간고했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미에서 어용(御用)과는 인연이 멀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4. 시관(詩觀)
이규보는 우선 시인이었다. 그의 호가 시금주삼혹호 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란 백낙천(白樂天)의 그것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자칭하면서, 고려 일대가 당에서 멀지 않음으로 해서 아직 구투(舊套)에 철주(掣肘)당함이 없이 자유자재로 시사(詩思)를 구사할 수 있어 신선미가 있고, 또 고풍시(古風詩)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동하고 기골[氣套]에 차 있다. 그의 전후에 많은 시인이 배출되었지만, 완전한 문집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전모를 밝힐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줄지는 몰라도,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시를 보면 놀랄 만한 대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자기의 작시법에 대하여 시론을 남겨 놓고 있으므로, 여기서 그의 시에 대하여 품평은 하지 않겠다. 그의 주필(走筆)에 대하여는 생애편에 언급하였으나, 이는 문인들의 놀이에 불과하였다. 그의 장기는 운(韻)을 따라 시상(詩想)을 형식 속에 자유자재로 채워 넣는 굉재(宏才)에 있었다. 그래서 장편(長篇)에 능하여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삼백운(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은 무려 3백 2운(韻)에 이르고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는 41수에 이르며, 그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1백 41운이나 되어 우리에게 이미 없어진 구삼국사(舊三國史)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평생에 쓴 시가 7천~8천 수에 이른다는 것도 그의 마르지 않는 시상을 말하여 주는 것이지만 그가 만년에 이를 불태웠다는 것도 그의 준엄한 비판안을 보여 주고 남음이 있다. 최자(崔滋)는 그의 시를 평하여 ‘일월(日月) 같아 칭찬을 초월한다.’ 하였고, 다시 ‘천재준매(天才俊邁)라 하고 탁연(卓然) 천성(天成)’이라 하였다. 중국 시인에 비하면, 두보와 같은 침음(沈吟)이 아니라 이백(李白)과 같이 일기가성(一氣軻成)으로 신운(神韻)이 약동하는 것 같다. 아울러 그의 시 가운데도 이백다운 시상과 이미지가 넘쳐흐르는 곳이 많이 산견된다. 우선 그는 술에 대한 찬가로 속장진주가(續將進酒歌)를 지었는데, 이것은 당 나라 이하(李賀)의 장진주를 화(和)한 것이지만, 이백의 장진주사가 그 조형이 되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특히 이백이 경도한 달에 대한 이미지도 이규보의 시에서 많이 산견된다. 이규보의 정중월(井中月) 시에
중은 달빛을 탐내어 / 山僧貪月色
한 병의 물에 달까지 담았네 / 並汲一甁中
절에 이르러야 깨달았지 / 到寺方應覺
병이 기울면 달 또한 없어짐을 / 甁傾月亦空
하는 해학적인 시 이외에도 달을 읊은 시는 많다. 이리하여 그는 달의 이미지 속에 달을, 마음의 그늘과 낭만(浪漫)을 그리고, 청신(淸新)함을 나타내기도 하고, 희망과 이상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5. 영물시(詠物詩)
그에게는 많은 영물시(詠物詩)가 있다. 작게는 자기 신변의 물건으로부터 자기 집 주위의 구체적인 물상에 이르기까지 - 이것은 송시(宋詩)의 영향이라 하면 그만이지만 - 이규보는 존재하는 만물의 구체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그의 실존의 밑바탕이 되는 물세계(物世界)와의 조화를 일깨워 준다. 접과기(接菓記 전집 (全集) 23권)ㆍ사륜정기 등의 글은 사물(이곳에서의 사물은 존재표상으로서의 모든 세계를 가리키고 있다)을 독립된 세계로 인식하려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답석문(答石問 후집 (後集) 11권) 같은 글과 시루의 깨어진 원인을 구명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시에서는 즉물적(卽物的) 개방성(開放性) 속에서 자신과 궁극적인 조화를 이루는 영물시(詠物詩)로 변모되는데 이 과정에서 먼저 그는 사물을 자기화하여 의식을 백지화한 상태에서 단순화된 외부의 형태만을 글로 그리고 있다. 섬(蟾 전집 13권)ㆍ주망(蛛網 전집 14권)에서와 같이 두꺼비와 거미의 모습을 단순한 자성(自性)속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칠호명(漆壺銘 전집 19권)에서는 대상을 단지 있음의 상태로 극대화시켰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 自瓠就壺
술 담는 데 사용한다 /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 頸長腹枵
막히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다 / 不咽不欹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 我故寶之
칠을 칠해 광채나게 했네 / 漆以光之
한편 그는 관념을 해체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물을 의인화하였는데 이 의인화는 사물에 육체를 부여함으로써 보편적인 개념에 탄력성 있게 맞서고자 하는 작가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더욱 발전되어 쥐를 통해서 사물의 교환 가치와 도구적인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한 아래의 시를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결국 그가 사물에 투명한 시선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까닭 중의 하나는 물(物)과의 참된 모습 속에서 인간의 존재 양식을 제시하고자 하려는 때문이다.
사람은 천생의 물건을 훔치는데 / 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의 훔친 것을 훔치누나 / 爾盜人所盜
다같이 먹기 위해 하는 일이니 / 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랴 / 何獨於汝討
이규보의 영물시가 갖는 또 다른 내용은 사물에 대한 초월적인 인식이다. 문조물(問造物 후집 11권) 중에서 ‘물자생자화(物自生自化)’는 모든 사물의 독자적인 존재 이유를 부여하여 우주 자연의 원리를 구명하는 그의 독특한 세계관으로부터 나온 언어이며, 또한 괴토실설(壞土室說 전집 21권)은 자연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규보의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가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슬견설(蝨犬說 전집 21권)에서와 같이 이와 개의 죽음을 동일하게 봄으로써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며 금명(琴銘 전집 19권)에서는 소리를 해체시켜 공(空)이라는 다른 차원을 통하여 파악하기 어려운 절대 체계를 시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그의 무한한 시선은 모든 존재의 굴레가 영원히 돌아가며 그 커다란 틀 속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실상을 통해 관조된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6. 민족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
이규보는 명종 23년(1193)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 4월에《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대하 같은 글로 서(序)와 함께 1백 41운(韻) 2백 82구(句) 1천 4백 10언(言)의 장편 서사시(敍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전집 3권)을 지었으니, 그것은 당대 문학의 압권일 뿐만 아니라, 한국 서사문학의 한 좌표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규보가 갖는 시대적 정신이기도 하다. 김부식(金富軾)이 유교적인 관점에서 삼국의 역사를 신라(新羅) 중심으로 편찬하였지만, 그는 동명왕의 이야기를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만 보지 않고 당시 민중들에게 구전(口傳)되어 오던 설화와 《구삼국사》를 통해서,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에 상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을 중국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점에서,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高麗人)의 자부심과 함께 동명왕의 사적이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해야 할 민족정신의 지주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당했던 시대에 서경(西京)을 북진 기지로 삼고 웅혼한 뜻을 다시 한 번 대륙에 펴고자 했던 고려 민중의 실천적인 소망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동명왕편은 해모수(解慕漱)와 유화(柳花) 사이에서 태어나기 이전의 과정과 탄생시 주몽(朱蒙)의 신비한 모습을 신화로써 그리고, 그가 시련 속에서 자라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고대 국가를 건설한, 역사적인 대업을 천신(天神)과 산악(山嶽)을 숭배하던 우리의 고유한 신앙 속에서 근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끝으로 왕자 유리(類利)의 왕위 계승과 함께 이규보는 왕위에 오르는 임금들이 관인(寬仁)과 예의(禮儀)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희망했는데 구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우의(羽衣)를 날리며 하늘과 인간 세상을 오르내리더니 하백(河伯)의 세 딸이 패옥을 쟁쟁이며 웅심연(熊心淵)에서 노니는 것을 보고 비(妃)를 둘 뜻이 있어 동실(銅室)을 차리고 큰 딸 유화를 잡았다. 이에 하백이 크게 노하여 신통(神通)을 시험하고서는 술자리를 베풀어 딸과 함께 혁여(革輿)에 태워 천상으로 오르도록 했다. 그는 술에서 깨어나 놀라고는 황금꽂이로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리니, 하백은 딸의 입술을 석 자나 되게 한 뒤 우발수(優渤水)로 추방하였다. 어느 날 어부가 기수(奇獸)를 보고서는 금와왕(金蛙王)에 고하여 건져 입술을 자르고 보니 해모수의 비였다. 별궁에서 햇빛을 받아 주몽을 알로 낳으니 모든 짐승이 지켜주었다. 그가 자라 재능이 날로 늘자 부여의 왕자들이 투기하여 참소하니 왕은 목마(牧馬)를 시켜 그의 뜻을 떠보았을 때, 주몽은 남쪽으로 떠날 뜻을 어머니에게 고하고서는 붉은 말 혀에 바늘을 꽂아 자기의 말로 만들어 남행(南行)할 적에 엄체(淹滯)에 다다라 배가 없자,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니 자라들이 다리를 놓아 주었다. 주몽이 시련에서 벗어나 왕도(王都)를 정하고 군신의 자리를 대략 이루었을 때, 비류(沸流)의 송양왕(松讓王)이 다가와 재주를 겨루어 보다 크게 놀라고 또한 동명왕의 신하 부분노(扶芬奴) 등 세 사람이 비류국의 고각(鼓角)을 취하였으나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동명왕이 서쪽으로 사냥나가 흰 사슴을 잡아 해원(蟹原)에 매달고는 위협하여 비를 이레 되도록 오게 하여 송양을 물바다로 만들고서 그 백성들을 갈대풀로 구하니 송양왕은 백성을 이끌고 항복하게 되었다. 이어 왕은 상서로움으로 궁궐을 이루고 황천(皇天)에 절하고서는 재위(在位) 19년 만에 승천하게 되는데 그 뒤를 이어 원자(元子) 유리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설움 속에서 자라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부러진 칼을 찾아 왕위를 잇고서는 고구려를 더욱 빛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아있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신화학(神話學)의 전개를 가능케 해 주고 있다.
7. 시론(詩論)
그의 시론은 우선 기(氣)에 대한 해명부터 시작된다.
기(氣)는 작품 이전의 것이요, 의(意)는 작품이 담고자 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겠으나, 기와 의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이를 함께 묶어서 다루고자 한다. 문학에서 기(氣)는 작가와 작품의 유기적인 연관성과 작품의 미적(美的) 기준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는 작가의 개성을 중시하고 문학의 자주성을 인식하여 유교(儒敎)의 도덕적 가치관에서 차원을 높여, 철학적으로 의미를 확대하고 문학을 더욱 심화(深化)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규보가 시의 원리에서 주목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기(氣)였다.
시는 의(意)가 주가 되므로 의를 잡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맞추는 것은 그 다음이다. 의 또한 기(氣)가 위주가 된다. 기의 우열에 따라 뜻의 깊고 얕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딸린 것이어서 배워서 이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떨어지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의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체로 글을 깎고 다듬어 구(句)를 아롱지게 하면 아름다움에는 틀림없다 하나 거기에 심후(深厚)한 의가 함축되어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지만 다시 씹어보면 맛이 없어진다.
즉 시는 의를 주로 하며 그 기는 하늘에 근본하고 있기 때문에 후천적으로는 취할 수 없다는 것으로, 기가 시를 낳게 하는 근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규보가 말한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도구이며 시를 낳게 하는 시재(詩才)로서 이는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입신(入神)의 경지에 도달함이 최고의 시가 된다는 것인데, 실제《백운소설》에서는 그가 꿈에 신선과 만나 시를 화작(和作)하거나, 시적인 영감(靈感)을 얻는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또한 기의 우열에 따라 뜻의 깊고 얕음이 생기고, 기가 부족한 사람은 조루(雕鏤)와 단청(丹靑)을 일삼고 함축(含蓄)이나 심후한 뜻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 작품이 가볍게 된다는 본질적 문제를 제시하고, 자연 시를 짓는 어려운 점을 ‘설의최난(設意最難)’이라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확립시켰다.
결국 이규보는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여 뜻을 중시하게 되고 신의론(新意論)을 내세우게 되었는데, 구속과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세계에서 인생을 만끽하고 문학을 통하여 이상향(理想鄕)을 펴려는 그의 사상적 일면을 많은 시에서 바라볼 수 있으니, 이러한 입장이 강조되어 호방하고 개성을 중시한 그가 시론에서 기를 뜻의 으뜸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편 이규보는 흥(興)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시적인 감흥을 뜻하는 것으로 생활과 사고에서 얻어진 시흥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이다.
“시라는 것은 자신이 본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그는 시가 경치나 사물에 촉발(觸發)되어 시흥을 얻는 것으로 보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다가 저절로 시를 읊게 되는 시흥의 경지를 시작과정(詩作過程)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한번은 주사포(主史浦)에 간 일이 있었는데, 명월(明月)이 산마루를 나와 모래강변을 환하게 비춘다. 속이 유달리 시원해져, 고삐를 풀고 달리지 않으며, 창해(滄海)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니 말몰이꾼이 이상해한다. 시 한 수가 되었다……나는 전연 시를 지으려고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모르는 결에 갑자기 절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자연을 관조하고 달관하여 침잠의 세계에 몰입한 무아의 경지에서 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며, 이것은 시본호심(詩本乎心)의 시관으로 보며 이러한 과정에서 제작된 시는 곧 입신의 경지요 조탁한 시구보다도 차원이 높은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이규보는 시의 본질을 어떻게 보았는가 정리하였다. 다음은 이러한 시관을 기초로 하여 작시법(作詩法)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시서육경(詩書六經)ㆍ제자백가 및 사가(史家)의 글을 비롯하여 궁벽한 경서ㆍ불서(佛書)ㆍ도가(道家) 등을 다 자기 약롱(藥籠) 중에 넣고 정화를 모아 작시에 응용하였다. 그러나 이를 기초로 하여 그는 신의(新意)를 주장하였다.
당시 고려의 시인들은 당송(唐宋)의 시문을 숭상하여 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숙독하는 것을 시의 정도(正道)로 생각하여 그들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어려운 시경(詩境)을 개척해 나가려는 의도는 표절로 변질되고 말았다. 표절은 어느 시대의 문학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규보는 이렇게 표절을 일삼는 당대의 시풍을 지양하고 새로운 의경(意境)을 개척하려는 시에 대한 자세를 신의로 주장하였다.
그가 표절을 도덕에 비유한 것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고인의 시를 많이 읽어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규보는 ‘구불의체(九不宜體)’에서 옛사람들의 의경을 따 쓰는데 잘 훔쳐 쓴다 해도 나쁜데, 더욱 훔쳐 쓴 것도 잘되어 있지 않은 것을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라고 꼬집어 말하고 있다.
한편 이규보는 용사(用事)를 많이 한 것을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라 하였고, 용사의 기교가 부족한 것을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라 하여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사는 경서나 사서 또는 제가의 시문이 가지는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적(事迹)을 두세 어휘에 집약시켜서 원관념을 보조하는 관념의 소생이나 관념배화(觀念倍化)에 원용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당시의 용사가 동파(東坡)를 숭상함에 있어 시의 정도를 밟지 못하여 모방과 표절에 끝나게 된 것을 지적하면서 이의 사용에는 정교한 기교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더욱 이규보는 평측(平仄)을 굳이 맞추어 시의 기교에만 힘쓸 필요는 없다는 지론을 펴고 있다. 대개 한시는 엄격한 정형시다. 복잡한 평측을 맞추어야 하고 대(對)를 짝해야 하는 규율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음률을 중시하여 가창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주원인이 될 것이다. 그 엄격한 시형에서 성률을 무시한다는 것은 과감한 변혁이 아닐 수 없다. 복잡한 시법을 맞추느라 본래의 시의(詩意)를 이루지 못하는 병폐를 제거하려는 진보적인 작시 태도로 개성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작시관을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시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고찰한다면 이규보는 청경(淸警)ㆍ웅호(雄豪)ㆍ연려(姸麗)ㆍ평담(平淡)한 것을 섞어 모든 체와 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시작의 다양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에게서 가장 특이한 작시론으로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를 정리해 본다.
1.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 : 고인의 이름을 많이 쓴 것
2.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 고인의 뜻을 훔친 기교가 부족한 것
3.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 근거없이 억지 운을 쓴 것
4.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 : 압운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
5.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 험자(險字)를 써 미혹하게 하는 것
6.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한 것
7.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 : 상말을 많이 쓴 것
8. 능범존귀체(淩犯尊貴體) : 공맹(孔孟)을 범하기 좋아하는 것
9.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 : 수사가 거친 것
1ㆍ6ㆍ8은 용사론이고, 2는 환골탈태론, 3ㆍ4는 성률론, 5ㆍ7ㆍ9는 수사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1. 용사를 지나치게 과용하지 말 것
2. 환골탈태를 피할 것
3. 압운법에 집착하지 말되, 지나치게 벗어나지 말 것
4. 수사에 있어 험자(險字)와 상말을 피할 것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규보의 이러한 입장이 작품을 평가함에 있어, 자구의 기교보다는 작품 전체가 갖는 품격을 중시하고 귀어정(歸於正)하여 사무사(思無邪)이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보아 먼저 기골의격(氣骨意格)을 살피고 다음에 사어성률(辭語聲律)을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작품 평가에 풍골(風骨)을 적용한 것이다. 풍은 작가의 생각을 작품에 뚜렷하게 나타낸 것이고 골은 수사(修辭)에 있어서 정확한 결구(結構)를 말하는 것으로 미사여구만 늘어 놓은 시는 골(骨)이 없는 것이요, 작가의 생각이 나타나지 못한 것은 풍(風)이 없는 시다. 그러므로 뜻이 곡진(曲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8. 산문(散文)
문집 19권에서 41권까지는 그의 산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진정표(陳情表) 하나로 몽고의 군사(軍師)를 거두게 하였다는 것은 그의 산문도 그의 시 못지않게 설득력이 있었고, 그 바람에 그는 국가의 사명(詞命)을 맡아 최씨 막부(幕府) 하에서도 고려 문치주의의 실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국문학면에서는 국선생전(麴先生傳 전집 20권)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 전집 20권)이 있어 임춘(林椿)을 이어 조선조 소설에의 맥락을 이어주고, 시화(詩話)에 있어서는 백운소설(白雲小說)이 있어 조선조 시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의 백운소설은 시화(詩話)만 있고, 이야기[稗官小說]가 없다는 것은 도중에 산일되었을 것이라고 이병기(李秉岐) 선생은 추측하였지만 정곡(正鵠)을 잡았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산문은 국가의 사명(詞命)으로 쓴 것은 현재에도 고문서(古文書) 연구에 커다란 범(範)이 되고 자료가 되고 있다.(전사(前謝)ㆍ중사(中謝) 등의 사사(謝辭) 같은 용어 등)
그의 시론에서 언급한 대로 많은 고전적 지식 위에 용필하였기 때문에 그의 문(文)은 유교뿐만 아니고, 도교ㆍ불교의 용어와 운축을 경도한 것이어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엄유(奄有)한 느낌이고, 이런 글에 탈속(脫俗)ㆍ표고(飄高)한 맛을 지녀 그가 단순히 최씨 정권에 아첨한 것이 아닌 그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그의 문중에서 우리나라 금속활자(金屬活字) 주조의 사실을 알려줌은 망외의 유주(遺珠)가 아닐 수 없다.
9. 문집(文集) 출간 및 구성
벼슬에서 물러난 지 4년 뒤인 신축년(1241) 그의 나이 74세 되던 7월, 병을 얻으니 진양공(晉陽公)이 이 사실을 듣고 명의(名醫)를 보내는 한편 이규보가 평생에 지은 글들을 모아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판각하게 하였으나 그는 자기 문집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일이 워낙 방대하여 그의 생전에 이룩하려고 했던 것은 연보(年譜)의 기록과 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이수(李需)가 쓴
“其平生所著 不蓄一紙 嗣子監察御史涵 收拾萬分之一 得古賦古律詩牋表碑銘雜文幷若干首 請爲文集 公可其請 分爲四十一卷 號曰東國李相國文集 涵又請曰 集已成矣 不可無序”
란 문집 서로 미루어 보아 41권만이 편성(編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집 서에는
“大人平生所著多矣 然本不收蓄 又爲人取去不還 或焚棄之 前集有焚稿詩 僅存十之二三 故難於編綴 凡大人所嘗遊踐儒家釋院及交遊士大夫間 無不搜覓 得詩之凡若干首 分爲四十一卷 編成前集 侍郞李需序之 集成之後 又得遺逸及近所著古律詩 八百四十七首雜文五十首 成後集十二卷”
이라 되어 있으니 《동국이상국집》전집 41권 후집 12권 총 53권은 아들 함(涵)에 의해서 고종 28년(1241) 12월을 중심으로 편간(編刊)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초간본(初刊本)이 ‘欲及公之眼見 以慰其情也’ 하려는 의도에서 급하게 간행되었기 때문에 탈루(脫漏)함이 매우 심해, 신해년(1251, 고종38)에 분사도감(分司都監)에서 대장경(大藏經) 판각을 마쳤을 때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사손(嗣孫) 익배(益培)가 개간(改刊)하니 동국이상국집발미(東國李相國集跋尾)의
“嗣孫益培言 祖文順公全集四十一卷 後集十二卷 年譜一軸 行于世者尙矣 多有訛舛 脫漏之處 今者分司都監雕海藏告畢之暇 奉勅鏤板 予幸守此郡 以家藏一本 讐校流通耳”
한 기록이 그것이다.
이것이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임란 전과 후에도 몇 번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영본(零本)으로 전하는 여러 책들로 추정할 수 있는데, 실본(失本) 되었던 것을 일본(日本)에서 입수하여 다시 간행하였다는 이익(李瀷)의 말로 오늘날 완전히 전해지는 판본을 영정(英正) 시대의 복각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제 일부 조사된 판본의 서지적 관계는 아래와 같다.
[서울대본]
목판본 53권 13책 시주쌍변 19.5×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연대본]
1. 목판본 33권 10책(영본) 사주쌍변 19.8×15.2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徐首生 白雲李奎報의 문학연구 韓國詩歌硏究 형설출판사 1974 개정판 p.125》
2. 목판본 12권 2책 사주단변 23×19.5cm 무계 12행 17자 무어미(고려시대본으로 추정)
[성암조명순본]
1. 목판본 8권 2책(영본) 사주단변 21×17.4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2.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17.4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3.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쌍변 19×14.8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4. 목판본 6권 2책(영본) 사주쌍변 20×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5. 목판본 32권 7책(영본) 사주쌍변 19.5×15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6. 목판본 5권 1책(영본) 사주쌍변 18.6×14.3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고려대만송문고본]
1. 목판본 2책(영본) 사주쌍변 19.8×14.7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2.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8×17.3cm 무계 10행 20자 무어미
3. 목판본 4권 1책(영본) 사주단변 21.8×17cm 무계 10행 20자 무어미
4. 목판본 2책(영본) 사주쌍변 21.7×17.4cm 10행 18자 상하흑구내향어미
[국립도서관본]
목판본 16권 4책(영본) 사주단변 21.5×18.2cm 무계 10행 18자 무어미
[용재백낙준본]
목판본 12권 3책(영본) 사주쌍변 19.6×15.2cm 유계 10행 18자 상하내향화문어미
1913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는 조선군서대계속(朝鮮群書大系續) 22ㆍ23집에 활자본으로 상ㆍ하 2책을 간(刊)하였으며, 1958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는 서울대 규장각(奎章閣)본을 영인하여 출간하였고, 1973년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대동문화연구소(大東文化硏究所)에서 고려명현집(高麗名賢集 1)에 다시 영인본을 내놓았으며, 민족문화추진회는 이를 대본으로 하여 1979년부터 3년에 걸쳐 번역과 원문을 실어 7책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동국이상국집》이란 명칭은 문집의 서(序)에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을 통칭한 것이다. 전집(全集)에는 연보(年譜)ㆍ부(賦)ㆍ시(詩)ㆍ상량문(上樑文)ㆍ송(頌)ㆍ찬(贊)ㆍ명(銘)ㆍ운어(韻語)ㆍ어록(語錄)ㆍ설(說)ㆍ서(序)ㆍ잡문(雜文)ㆍ기(記)ㆍ방문(牓文)ㆍ조서(詔書)ㆍ서장(書狀)ㆍ표전(表箋)ㆍ교서(敎書)ㆍ비답(批答)ㆍ마제(麻制)ㆍ관고(官誥)ㆍ비(碑)ㆍ지(誌)ㆍ뇌서(誄書)ㆍ애사(哀詞)ㆍ제문(祭文)ㆍ도량(道場)ㆍ초소(醮疏)ㆍ불도소(佛道疏)ㆍ석도소(釋道疏) 등이 수록되었고, 후집에는 시(詩)ㆍ찬(贊)ㆍ서(序)ㆍ기(記)ㆍ잡기(雜記)ㆍ문답(問答)ㆍ서(書)ㆍ표(表)ㆍ묘지(墓誌) 등을 실었고, 권말(卷末)에는 뇌서(誄書)와 묘지명(墓誌銘)이 들어 있는데 구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 내역 권 내역
全集 序 7 古律詩 59首
年 譜 8 古律詩 52首
1 古賦 6首 古律詩 6首 9 古律詩 66首
2 古律詩 73首 10 古律詩 78首
3 古律詩 64首 11 古律詩 68首
4 古律詩 43首 12 古律詩 56首
5 古律詩 44首 13 古律詩 77首
6 古律詩 96首 14 古律詩 82首
15 古律詩 64首 28 書狀 表
16 古律詩 90首 29 表
17 古律詩 80首 30 表牋狀
18 古律詩 103首 31 表
19 雜著 上樑文 口號 頌 贊 銘 32 狀
20 雜著 韻語 語錄 傳 33 敎書 批答 詔書
21 說 序 34 敎書 麻制 官誥
22 雜文 35 碑銘 墓誌
23 記 36 墓誌 誄書
24 記 37 哀詞 祭文
25 記 牓文 雜著 38 道場齋醮疏祭文
26 書 39 佛道疏 翰林修製
27 書 40 釋道疏祭祝翰林誥院幷
41 釋道疏
後集 序 7 古律詩 97首
1 古律詩 105首 8 古律詩 57首
2 古律詩 105首 9 古律詩 58首
3 古律詩 101首 10 古律詩 41首
4 古律詩 98首 11 贊 序 記 雜識 問答
5 古律詩 98首 12 書 表 雜著 誄書 墓誌銘 踐尾
6 古律詩 97首
〈參考文獻〉
金東旭 變革期의 文學人 李奎報. 比較文學 및 比較文化 第3ㆍ4輯 서울 韓國比較文學會 1979
金時鄴 李奎報의 現實認識과 農民時. 大東文化硏究 12 서울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8
金禹昌 궁핍한 시대의 詩人. 서울 民音社 1978
金鎭英 白雲居士 李奎報의 文學世界. 金亨奎博士頌壽紀念論叢 1971
徐首生 白雲 李奎報의 文學硏究. 韓國詩歌硏究 대구 螢雪出版社 1974
申東旭 高麗詩評考. 韓國現代文學論 서울 博英社. 1972
李能雨 李奎報의 詩論. 心象 서울心象社 1974, 1
李庸昱 李奎報 硏究-白雲小說을 中心으로 서울大碩士學位論文 서울大大學院 1968
李相翊 麗朝散文學小考-白雲小說ㆍ破閑集. 箕軒孫落範先生回甲紀念論文集 1972
李石來 韓國의 名著. 東國李相國集 玄岩社 1969
李佑成 高麗 中期의 民族敍事詩.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서울成均館大學校 1962
張德順 英雄敍事詩 東明王. 인문과학 5 인문과학연구소
全鎣大 高麗의 詩學 韓國古典詩學史 서울 弘盛社 1979
鄭在洪 李奎報의 假傳體文學考 曉星女大國語國文學硏究論文集 8 曉星女大 1959
趙東一 李奎報.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서울 知識産業社. 1978
趙東一 假傳體의 쟝르規定. 藏菴池憲英先生華甲紀念論叢 1971
崔雲植 李奎報의 詩論-白雲小說을 中心으로. 韓國漢文學硏究 第2輯 서울 韓國漢文學會 1977
Copyright ⓒ 한국고전번역원. All rights are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