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람다운 사람
정석준(수필가/ 법사)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장차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태어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유아기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시절과 유년기의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세월을 거쳐 어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흉내 내고 친구와 스승과의 접촉을 통해 차츰 성숙되고 우리 사회가 보편 가치로 여기는 도덕과 윤리, 나아가 규범이라는 질서 체계에 익숙해지면서 기성세대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차츰 다듬어져 삶의 방향이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를 위해 정열과 지혜를 모아 전력투구(全力投球)하고 기대만큼의 성과에는 만족하기도 하며 실패에는 허탈과 실망으로 분노하기도 하면서 눈물과 땀과 슬픔과 기쁨이 뒤범벅된 기나긴 한 편의 드라마를 엮어가는 것, 그것이 생의 여정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또 한 번뿐인 세월이다. 따라서 우리는 살같이 흐르는 짧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저마다의 가슴 속에 던지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알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는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면서부터 죽는 순간에 끝나는 물음의 연속이 바로 인생이란 것인데, 내일을 생각지 않고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서글퍼지기만 한다.
장지연(張志淵)이 쓴 「일사유사(逸士遺事)」 라는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떠한 삶이 과연 사람다운 삶인가를 넌지시 깨우쳐 주는 듯하다. 우화같은 고사를 한번 음미해보자. 옛날 김좌명(金佐明) 댁에 최술(崔述)이라는 심부름꾼이 있었는데, 판서한데 잘 보여 서리가 되고 살림이 좀 나아지자 어떤 부잣집 사위가 된다. 그러자 최술은 그만 사람됨이 근본적으로 삐뚤어져 딴사람이 되어 버린다. 게을러지고, 기생집도 출입하고, 겸손하던 태도는 간 곳 없고, 건방을 떨며 으시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최술의 어머니가 판서를 찾아가 제발 옛날같이 몇 말의 곡식만으로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해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왜 그랬을까? 진정한 사람됨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따른다는 것을, 그래서 가난하고 힘들었어도 사람답게 살던 지난날이 그립다는 인간미에의 향수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간적 ·․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많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세상이지만, 물질이 불어남에 따라 사람의 근본마저 변해서야 어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선인들은 인간의 삶에 태산보다 무거운 의리가 있고 갈잎보다 가벼운 목숨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람됨에 따라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교훈으로 일깨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 사람됨이란 것이 바로 외형적인 멋을 쫓아 살아가는 인생을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리라.
공동묘지에 가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주검의 군상을 바라보게 된다. 숱한 세월을 풍설(風雪) 속에 삼키며 말없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야말로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의 우리들 모습이 아닌가? 살아생전에 그 무엇을 위하여 때로는 감격하고 때로는 분노하면서 뜨거운 열정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을 생애를 연상하노라면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우리의 부질없는 삶의 무상이 가슴을 적신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전제 아래 삶을 바라보노라면 삶은 슬픔을 동반한 시간의 흐름임을 깨닫는다. 우리의 생애가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 그 답은 자명해 진다.
(월간 경주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