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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1-23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힘든 세상에서 살면서 기뻐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어서, 기뻐하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실없는 사람이나 위선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정말 항상 기뻐하라는 뜻으로 듣기보다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만 듣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바울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강조 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누린 기쁨이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1. 신자가 누리는 기쁨(1-5) :
우리는 1-5절에서 신자가 누리를 기쁨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양들로 인한 기쁨입니다(1): 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형제들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기쁨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제아무리 사도 바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기 위해 고난과 죽음에까지도 참여하기로 한 그라도, 감옥에 있으니 고독하고 슬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빌립보 형제들을 생각하면 기쁨이 솟았습니다. 비록 죄수이지만 면류관을 쓴 왕들이 부럽지 않았던 것은 그의 양들이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도 찬란한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기쁨과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양들로 인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가 그의 양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2:17에서 그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의학적으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데도, 오직 분만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절개수술을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 없이 분만한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덜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고전 4:15). 바울은 양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당했고 그들을 위해 생명까지 바쳤기 때문에, 그들이 귀했고 그들만 생각하면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바울이 양들만 생각하면 기쁜 것은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크신 뜻을 두고 계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13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지구는 만원이라고들 할 만큼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는 사람들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크신 뜻을 두고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소원을 두시고 그들을 키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힘든 세상을 생각하고 인류 구속역사를 생각할 때 그들은 보배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경목자와 우리는 이연우 자매를 돕기 위해 많이 수고했습니다. 여름수양회 초청하느라 수고했고, 수양회 후에는 그가 금융사기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또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 먼 안동교도소로 여러 차례 면회하러 갔고, 각자가 판사 앞으로 탄원서를 냈고, 늘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애를 태웠습니다. 마지막 공판 날에는 영아 목자가 화장실 가고 싶다는 예훈이를 도우러 나갔는데, 예훈이를 차에 데려다주고 마지막 판결을 듣느라고 서두는 바람에 손이 차 문에 끼는 사고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연우 자매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가 그를 위해 수고하는 가운데 우리와 연우 자매가 서로 가족처럼 사랑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우리를 가족처럼 의지했으며, 우리도 그를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남경으로 돌아갔지만, 남경센타에서 계속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에 참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경기 센타 1호 선교사가 될 것을 생각하면 그가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연우 자매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이 된 것은 우리가 그를 위해 마음과 힘을 다 해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우리는 많은 양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배우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호태 형제 한 사람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주일 모임에도 꾸준하게 참석했습니다. 방학이 되어 아무도 학교에 나오지 않는 때에도 매일 센타에 와서 영어공부와 독서모임에 참석했고,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다 공부했습니다. 그의 집이 있는 인천에서 수원까지 오려면 3시간이 족히 걸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개척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소원을 두고 행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가 있어서 창조과학 특강 때에 강의실을 빌릴 수 있었고, 축제기간에 도서관 앞에서 설문조사 할 수 있는 자리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요즘 1학년들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 보배로운 사람입니다. 호태 형제를 생각하면 사도 바울처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쓰러질듯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함께 양식을 나누고 기도하기 위해 제 방으로 찾아오는 김태헌 목자를 볼 때도 그러하고, 정든 연희센타를 떠나 낯설고 외로운 이곳에 온 이수희 목자를 볼 때도 그러합니다. 개척역사를 감당하고 수고하면서도 이렇게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망하거나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랑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함께 인류 구원의 역사를 감당할 동역자들이 있었고, 그의 생명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역자들과 양들로 인해서 그는 어떤 곳에서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기쁨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둘째, 같은 마음을 품는 기쁨입니다(2,3) 2절을 봅시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의 조상은 루디아 자매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빌립보 교회도 자매님들의 영향력과 세력이 컸던 모양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도 자매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자매님들 특유의 시샘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 중 누가 잘했다 잘못했다, 누가 틀렸다 맞았다,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또 3절에서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건 모두가 그와 멍에를 같이한 동역자(同役者)들이요, 함께 하늘 나라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또 개성이나 성격이나 취향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음은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할 때 의견이나 성격들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할 때, 같은 사람들이 모인 모임보다 오히려 다양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자신의 성격에 맞추어주기를 요구하기 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같은 마음으로, 그리고 복음역사에 함께 멍에를 멘 사람들이요, 함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로서, 서로를 뜨겁게 용납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배척되거나 왕따 당하지 않고 서로 용납될 수 있을 때, 거기서 얻는 기쁨은 또 얼마나 큽니까? 간혹 어려운 선교지의 선교사들이 함께 모이면 그들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얻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님 때문에 얻는 기쁨입니다(4,5) 4절을 봅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18번이나 나옵니다. 감옥에서 쓴 서신이 이렇게 기쁨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리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으면, 즉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내가 손해봤냐 이익 봤냐 하는 식으로 나를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면 늘 비교의식과 피해의식으로 마음이 슬프고 비참해지고, 어둡고 좁아집니다. 그러나 내가 수치를 당해도 주님 때문에 당하고, 내가 손해를 봐도 주님의 은혜를 감당하기 위해서 본다면 마음이 기쁩니다.
‘주 안에서’ 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슬픔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에 따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되기만을 원하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늘 불만과 슬픔에 잠깁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과거의 쓰라림이 있고, 현재의 어려움이 있고, 장래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생 마디마디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우리는 그 모든 애환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무엇보다 우리는 이 말씀이 아주 강한 명령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기뻐하는 것은 신자가 순종해야 할 의무라는 뜻입니다. 살전 5:16-18에서는 이같이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듯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기쁨’이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플 때 슬퍼하고, 화날 때 화내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슬플 때도 기뻐하고, 화가 날 때도 기뻐하며 관용해야 하고, 어려움이 있어도 기뻐하며 극복해야 합니다. 신자는 벌레 씹은 얼굴보다 꿀 먹은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 안에서’ 생각함으로써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신자가 기쁨을 누리는 법(6-23)
6-23절에서 우리는 신자가 기쁨을 누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6,7) 이제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는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기뻐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염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염려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염려하지 않는 것을 무책임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염려를 하면 염려할 게 점점 더 많아지고, 나중에는 염려가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리게 됩니다. 결국에는 무기력한 영적 중풍병자가 되고 맙니다. 염려는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6절을 다시 봅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를 극복하려면 한 마디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마음과 생각은 비워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이 차지하지 않으면 사탄이 차지합니다. 사탄이 차지하면 우리의 마음은 염려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시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으며, 어려움을 감당할만한 믿음과 지혜와 힘을 덧입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저는 어려움이 있어 기도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염려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염려가 커졌습니다. 그럴 때, 제 자신의 기도하는 태도를 잘 살펴보니 아주 골똘하고 경건하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로 고민하던 중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라는 책을 읽게 되었고 ‘단순한 기도’에 관해 배웠습니다. ‘단순한 기도’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말하듯 자신의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화가 날 때는 ‘주님 제가 지금 화가 납니다’ 피곤할 때는 ‘주님 제가 지금 피곤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기도가 ‘단순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시작할 때 염려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곤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염려가 불신에서 비롯된다면 감사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볼리비아의 조스데반 선교사님은 장사하던 물건을 모두 도둑맞은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는 놀라운 평강이 임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지각으로는 알 수 없었던 신기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물질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고 믿음과 감사로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과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이것들을 생각하라(8,9) 8,9절을 봅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다시 하나님의 평강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을 얻으려면 생각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행동에 대해서는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형제님들은 특히 자매님들이 볼 때 더욱 행동을 조심합니다. 하지만 생각은 드러나거나 돈이 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그 마음 상태가 결정됩니다. 참되고 경건한 생각을 해야 고상한 사람이 되고, 옳고 정결한 생각을 해야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천하고, 바르지 못하고, 악한 생각을 하면 마음에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오래 가면 얼굴도 미워지고 건강도 나빠집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행동도 나빠집니다. 행동을 훈련 통해 고치듯이 생각도 훈련해야 합니다. 나쁜 생각 미운 생각들이 떠오르면 재빨리 멈추고,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 사람의 미운 점이나, 보기 싫은 점이나, 깎아 내릴 생각은 하지말고, 사랑할만하고 칭찬할만하고 기릴만한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키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산에 비가내리면 작은 물길이 생깁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 그 물길은 물고랑이 되고, 골짜기가 파입니다. 이런 일이 생각에도 일어납니다. 같은 생각이 반복되면서 생각은 습관이 되고 그 사람 고유의 사고방식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 사고방식에 따라 생각이 흐릅니다. 정신병적인 사고방식도 그래서 고착화 되고 병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의 흐름이 말씀을 따라 흐르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매주 소감을 쓰면서 우리 생각의 물줄기가 잘 형성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족하기를 배우라(10-23) 11,12절을 봅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립보서를 읽으면 사도 바울이 참 부럽지만, 이 말씀을 읽을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비천에 처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얼마나 못쓰게 되기 쉽습니까? 또 풍부에 처하면 얼마나 교만해지고 이기적이 되고, 방탕하게 됩니까? 그러나 바울은 어떤 환경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또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려 하면 두렵기 마련인데, 그는 어떤 환경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으므로, 앞으로 부딪치게 될 환경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담대함과 여유가 있었기에 그 나이에 감옥에 있는데도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빌립보 교회의 헌신을 격려하고 그들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13-23). 나이 들면 어린아이처럼 유치해지고 자식들의 짐이 되곤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바울의 노년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노년도 바울과 같이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이런 비결을 배우게 되었습니까? 13절을 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가 어떤 환경에 처해서도 못 쓰게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볼 때 믿음은 우리로 모든 것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임을 배우게 됩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민권목자가 수희목자의 동생 양희목자와 대화할 때,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듣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공감해주는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어려움을 넘을 수 있는 비결을 말할 수 있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을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그가 믿음을 배워 승리의 비결을 말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맺는 말 :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 - 어떤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입니다. 기뻐할만한 상황과 조건을 주시도록 기도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자 하는 방향과 소원을 가지는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또 ‘배운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기쁨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세상에는 저절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좋을 일 생길 때 기뻐하는 일은 하늘이 하영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배우고 성숙한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신자들이 세속적인 일에서 기쁨을 추구하기 때문에 욕먹는 일을 생각하노라면 이 일에 사명감마저 느껴집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