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곳에 설치된 행정기관과 일본인 집단거주지역을 일컫어 부르는 말이다. 요새로 치면 상공회의소와 대사관을 합쳐놓은 개념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가 날뛰자 정부는 유화책으로 오늘날의 진해와 울산, 부산 근처의 항구를 열어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왜관을 두어 행정사무 등을 처리하게 하였다. 삼포왜란 이후에는 진해에만 왜관을 두었고 1541년에 조선의 포졸들과 쓰시마인들이 싸움을 벌이자 진해의 일본인을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으로 옮겼다.
1678년이 되면 부산포에서 초량으로 왜관을 옮겼다. 왜관 주변엔 돌담을 쌓고 거류민들의 주택과 시장, 창고, 관청 등이 위치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가면 교역량이 감소한다. 양국 모두 쇄국정책을 쓰게 되고 그 뒤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조선 초기 왜관의 규모는 부산포왜관이 1494년에 일본인 450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진해에 위치한 내이포왜관이 가장 컸는데 1494년에 2,500명 정도가 살았다. 울산에 위치한 염포왜관은 150명 정도 수준. 한양에도 조선을 방문한 다이묘나 상인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상설은 아니었고 동평관(東平館)이란 이름이었다. 현재의 충무로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에도 막부와 관계가 복원되면서 왜관은 다시 나타난다. 1607년 현재의 부산 동구 좌천동 부근에 1만평 규모의 왜관이 위치했는데 술집과 일본식 주택이 지어졌다. 건설을 추진한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주였다. 당시에 이 부근이 교통이 불편한 탓에 쓰시마 번주는 계속 이전을 요청했고 1673년 허가가 나서 1678년에 현재의 중구 남포동 용두산공원 근처에 초량왜관으로 옮긴다. 규모는 약 10만평 수준이었다고 한다. 신왜관(新倭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신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려온 유학생이나 한의학을 배우러 온 일본인도 있었다. 1727년 쓰시마에 아메노모리 호류(雨森 芳洲)가 한국어를 배우는 기관을 세웠는데 우수한 학생은 왜관으로 보내 공부시켰다.
아메노모리 호류의 초상화. 이 사람은 중화사상에 빠져서 툭하면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옷차림만 봐도 일본인의 복색이 아니다...
18세기에 들어서 중국 비단을 수입하던 일본이 자체적으로 비단을 만들어내면서 왜관의 교역은 감소한다. 특히 조선인삼의 일부 종자를 반출해 일본에서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인삼 수출도 감소했다. 다만 왜관은 19세기 중반까지 폐쇄되지 않고 근근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