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연 거목들 <13> 앨런 튜링
튜링은 경제학자 케인스의 후원으로 1935년 케임브리지대 ‘펠로(fellow·특별 교우)’로 선출됐다. 그는 프린스턴대가 선정한 가장 자랑스러운 동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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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스프레드시트 파일을 열거나 문서작성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튜링 기계’의 화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에 앨런 튜링(1912~54)을 포함시키며 발표한 선정 사유다. 올해는 앨런 튜링 탄생 100주년이다. 그는 ‘컴퓨터과학의 아버지’ ‘인공지능(AI)의 아버지’로 불린다. 튜링은 1936년에 발표한 논문인 ‘계산 가능 수에 대하여(On Computable Numbers)’에서 컴퓨터의 개념적 기초를 확립했다. 그가 논문에서 제시한 ‘튜링 기계(Turing machine)’는 개인용컴퓨터(PC)에서 수퍼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컴퓨터의 원형(原型)이다. 튜링 기계는 실제 기계가 아니라 컴퓨터의 실행과 저장에 대한 추상적인 모델이다. 이 가상 모델에 따르면 컴퓨터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바꿔가며 무한히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노트북 컴퓨터가 수퍼컴퓨터와 동일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이유다. 튜링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국가, 전쟁의 함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을 저지한 사람을 딱 한 사람 꼽으라면 누굴까. 영국 총리를 두 차례 지낸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앨런 튜링을 지목했다. 섬나라 영국을 위협하는 독일의 대형 잠수함 유보트(U-boat)를 막은 것은 튜링의 독일 암호문 해독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39년. 런던 북서쪽으로부터 80㎞ 떨어진 블레칠리파크(Bletchley Park)에 있는 정부암호학교(Government Code and Cypher School)에 영국 최고의 수학자·암호학자들이 집결했다. 블레칠리파크가 선정된 이유는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블레칠리파크에 모인 전문가 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튜링이었다. 튜링과 동료들의 상대는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Enigma)였다. 독일 수뇌부는 에니그마의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튜링이 암호를 깼다. 그가 1939년 디자인한 초고속 계산기 더 봄브(The Bombe)는 매일 바뀌는 독일 암호문의 배열을 몇 주가 아니라 단 몇 시간 안에 풀어냈다. 영국은 유보트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영국 상선들은 독일의 대형 잠수함들을 피해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영국 전함들은 유보트를 격침시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은 암호 해독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스파이나 내부의 제5열을 의심했다.
인문학 싫어해 사립중등학교 생활은 지옥
튜링은 중등교육을 받은 기숙학교 시절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미적분학을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고난도 수학 문제를 풀어냈다. 그러나 튜링에게 사립중등학교(public school) 생활은 지옥이었다. 교사들은 과학과 수학만 좋아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교사들에게 인문학을 배우지 않는 중등교육은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립학교에는 구타와 ‘왕따 괴롭히기’가 난무했다. 이상하게 보이는 튜링을 급우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를 마루청 밑에 묻어버린 적도 있다.
튜링이 입학한 캐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King’s College)는 천국이었다. 온갖 유형의 기행(奇行)과 기인(奇人)에 대해 관대한 분위기였다. 블레칠리파크 역시 자폐증세가 있었던 튜링을 이해하고 용인한 천국이었다. 머리를 빗지 않고 손톱이 더러웠던 튜링은 면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는 피를 보면 실신까지 했기 때문에 면도가 두려웠다. 튜링은 괘종시계를 허리에 묶고 다니고 머그잔을 파이프에 묶어 남들이 훔쳐가지 못하게 하는 기인이었다. 매년 6월이 되면 고초열(枯草熱·hay fever) 때문에 방독면을 쓰고 다녔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 튜링도 남의 눈을 의식할 때가 있었다. 튜링은 동성애자였다. 학문과 연구가 다른 무엇보다 중시되는 케임브리지와 블레칠리파크에서는 동성연애 성향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튜링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가급적 숨기려 했다. 동성애를 둘러싸고 튜링이 세상과 벌인 숨바꼭질이 그를 암호 전문가로 훈련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첫사랑도 기숙학교에서 만난 남학생이었다. 한때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했다. 1941년에는 동료인 수학자 존 클라크(Joan Clarke)에게 청혼했다. 고민 끝에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고백했으나 클라크는 동요하지 않고 튜링을 이해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아 튜링이 클라크에게 파혼을 요구했다.
1940년대 말부터 튜링은 동성연애에 대해 보다 공개적이 됐다. 자부심까지 품게 됐다. 그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으며 고지식했다. 그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났을 때 학교나 학계와 달리 일반 사회는 가혹했다. 1952년 튜링은 아널드 머리라는 19세 노동자와 동성애 관계에 빠졌다. 궁핍한 아널드에게 돈을 주기도 했다. 일종의 원조교제였다. 둘의 관계는 튜링이 ‘엄중한 외설 행위(gross indecency)’, 즉 동성애를 이유로 처벌되는 비극으로 끝났다.(영국에서 동성애 처벌법은 1967년에야 폐기됐다.)
어느 날 튜링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범인은 아널드 머리와 그 동료였다. 그들은 동성애자는 동성애가 발각돼 처벌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경찰에 절대 신고 못한다고 오판했다. 튜링은 신고했을 뿐만 아니라 ‘범인을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동성애 관계를 털어놨다. 법원은 튜링이 컴퓨터를 개발하는 중요한 인력이라는 점을 고려해 징역형 대신 화학적 거세를 제안했다. 튜링은 여성 호르몬의 일종인 에스트로겐을 투여받았다. 튜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조정(漕艇)·마라톤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런 그가 가슴이 나오고 체형이 비대해졌다. 점차 심각한 우울증세로 빠져들었다.
독사과 먹고 자살애플 로고 기원설
1954년 튜링은 자살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시안화물(cyanide)을 묻힌 사과였다. 사과를 선택한 이유로 튜링이 월트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년)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됐다. 기왕에 그는 취침 전 사과를 먹는 습관이 있었다. 어머니 세라는 자살이 아니라 실수라고 주장했다. 튜링은 실제로 실험에 시안화물을 사용했다. 어떤 전기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튜링은 어머니의 충격을 덜기 위해 자신의 자살이 실수로 보일 수도 있게 자살 정황을 꾸몄다.
영국 정부에 의한 타살설도 있다. 튜링은 영국의 핵무기·컴퓨터·암호·첩보 시스템에 대한 핵심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적국인 소련이 탐낼 만한 대상이었다. 소련은 협박에 취약한 동성애자들을 공작의 타깃으로 삼았다. 실제로 동성애 관계라는 소문이 돌던 두 명의 영국 외교관들이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다 1951년 소련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튜링은 호르몬 ‘치료’와 보호 관찰이 끝나자 동성애 상대를 찾아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여행지에는 동유럽 국가와 인접한 나라들이 포함됐다. 영국 첩보기관이 이를 모니터링했을 것이다.
튜링의 시신은 화장됐다. 그를 칭송하는 부고 기사는 없었다. 대중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업적은 국가 기밀이었던 것이다. 비밀이 해제되고 컴퓨터 시대가 개막하자 네티즌은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2009년 9월 10일 고든 브라운 총리는 튜링이 받은 ‘극악한(appalling)’ 처벌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나 튜링은 아직 ‘범법자’ 상태다. 동성애에 대한 처벌이 당시로서는 적법했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 때문이다.
사망하기 몇 달 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튜링은 과학이 미분방적식이라면 종교는 경계조건이다(Science is a differential equation. Religion is a boundary condition)라는 말을 남겼다. 튜링은 뇌의 작동을 포함해 만물의 움직임은 물질적이라고 믿은 무신론자였다. 그에겐 영혼도 물질이었다. 하지만 튜링은 오히려 영혼이 물질이기에 사후에 남는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의 아버지’인 튜링은 기계도 언젠가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뇌와 컴퓨터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주장했다. 튜링이 제안한 ‘튜링 테스트(Turing test)’에 따르면 기계가 사람인 척했을 때 사람이 속으면 그 기계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던진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사람이 한 것인지 기계가 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그 기계는 생각하는 것이다.
애플 로고는 사과를 먹고 자살한 튜링에 대한 오마주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유포됐다. 에덴동산에 있는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에 달려있던 선악과(전통적으로 사과로 추정), 뉴턴의 ‘만유인력 사과’, 튜링의 사과를 연결하면 그럴듯한 스토리라인이 형성된다. 하지만 애플사와 로고의 디자이너는 오마주설을 부인했다. 관련 있는지 스티브 잡스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It isn’t true, but God, we wish it w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