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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 이시우 작가는 법정 모두진술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했다. 사진은 이 작가가 사례로 든 일본 요코스카 미군기지를 촬영한 사진. "눈길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에 게 모아진다"고 설명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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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창작관과 예술문화론의 바탕인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으로 요약됩니다.”
국가보안법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의 모두진술에서 예기치 못한 미학관과 창작론, 사진론이 쏟아져나왔고, 국가보안법과 대인지뢰, 유엔사 문제가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무려 2시간 20분간에 걸친 보기 드문 장시간 모두진술이었다.
10일 오후 2시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2차 공판에서 이시우 사진가는 자신의 사진작품까지 제시하며 장시간의 모두진술을 진행했고, 이어 검찰측의 심문이 일부 이어졌다.
제22형사부 김용석 재판장은 피의자가 입정하기 전 방청객들에게 “변호인과 재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민주법정이다”, “박수치는 것은 운동경기장에서나 하는 것이지 박수치 는 것이 아니다”라고 1차 공판 당시의 소란을 의식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1차 공판 당시 극우단체 회원들이 “대한민국 변호사가 맞느냐”며 고함을 지른 것과 이시우 작가와 뜻을 같이한 방청객들이 이시우 작가 입정시 박수를 보낸 사실을 의식한 재판장의 주문인 셈이다.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 있다”
이날 이시우 작가 2차 공판은 200석에 가까운 417호 대법정이 가득 메워졌으며, 극우단체에서 동원한 것으로 보이는 70대 노인들 50여명도 앞자리를 차지했다.
한창 무더운 여름날씨에도 불구하고 긴팔 푸른 수의에 흰고무신을 신고 길게 자란 수염에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한 이시우 작가는 재판장의 양해 하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시종 차분하게 긴 모두진술을 이어갔다.
이시우 작가는 모두진술에서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 있다”며 “보수단체에서 여려운 걸음을 해주신 분들”에 대해 “분도와 감정의 앙금을 털고 저와 어르신들이, 또 우리사회가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이 뿌리내리 수 있기를, 그리하여 50년전 전쟁의 비극에서 잉태된 원한과 살육의 기억이 우리의 미래를 막지 않도록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시우자각가의 모두진술 (일부)
재판장님. 이 방대하고 복잡해 보이는 사건을 담당해주시고 특별기일을 잡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해주신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검사님의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최병모, 이정희 변호사님을 비롯 16분의 변호인 여러분께는 특별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법조인에 대해 갖는 일반 관념인 어떠한 기득권도 권위의식도 없이 오로지 ‘정의’ 를 위해 헌신적으로 이 사건을 연구해주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구치소를 방문해주시는 어려운 발걸음에도 즐거운 표정을 잃지 않아주시는 모습에서 진정 법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재판마다 방청을 해주시는 여러 원로 선생님들과 친지, 그리고 이름모를 방청객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과 배려에 고개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구속이 되는 순간부터 제 안에 밀려온 깊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꽤 긴 단식과 묵언을 했습니다. 단식 40일이 넘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 가 단식을 접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눈물겨운 설득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보수단체에서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분들입니다. 지난 재판 뒤 몇몇 어르신께서 ‘빨갱이들’이란 표현을 쓰며 분노를 표출하셨다 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저를 단식으로 이끈 깊은 슬픔은 제 생을 바쳐 최선을 다해온 일이 누군가에겐 상처와 위협과 무기가 될 수 있었구나라고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저를 그렇게 부른 심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책상이 아닌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공부하고 창작해온 저는 우익에 의한 좌익의 학살 뿐 아니라 좌익에 의한 우익의 학살의 실상을 보았고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어떤 사상과 논리도 그 아픈 죽음의 기억을 치유하거나 대신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한과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지 않고, 눈물과 감동으로 부둥켜안지 않고서는 역사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이 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단식을 6월 6일 현충일에 접은 것은 역사의 슬픔을 제 가슴에 끌어안고자 함이었습니다. 저는 6월 6일 묵념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해 108배를 했습니다. 제 안에 교만 은 없는지 위선은 없는지 저를 낮추고 또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을 자리에 누워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준단식중인 6월 25일에도 단식을 하며 전쟁의 고통고 비극을 제 마음 뿐 아니라 몸에까지 각인시켜 놓고자 노력했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소년은 이미 평범한 소년이 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육과 저주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좌익에 의한 죽음에 분노하여 우익 청년들이 ‘빨갱이’들을 죽이겠다고 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며 그들을 눈물 흘리게했던 철원 제일감리교회 서기훈 목사나 우익에 의해 아들 셋을 잃고 인민위원장이 된 영광군의 인민위원장이 우익들을 오히려 보호했던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우리는 간직해야겠습니다.
저는 정성을 다해 재판에 임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진정으로 몸을 낮춰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장 제가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씀드릴 수 없지만 진지하게 경청할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욕을 하셔도 들을 것이고 뺨을 때려도 맞겠습니다.
분노와 감정의 앙금을 털고 저와 어르신들이, 또 우리 사회가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이 뿌리내릴 수 있기를, 그리하여 50년전 전쟁의 비극에서 잉태된 원한과 살육의 기억이 우리의 미래를 막지 않도록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을 제 마음의 가운데에 모시는 심정으로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이하 생략)
<정리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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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자신이 사진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특히 2001년 9.11사건 이후 미군문제에 천착하면서 유엔통합군사령부(유엔사)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93년 철원 여행중 사진가로 본격 나서게 된 계기와 이후 대인지뢰와 비무장지대 관련 사진집을 출간한 과정, 그리고 2000년 작업실을 강화도로 옮긴 뒤 IMF 이후 경제문제에 천착하기 위해 ‘자본론’을 연구하던 중 9.11사건을 계기로 미군문제에 집중하게 된 과정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나의 미학관은 어둠, 결, 가슴”
이어 그는 자신의 미학관을 ‘어둠’과 ‘결’, ‘가슴’으로 요약해 창작론을 설명하고, “작품의 90%는 이론으로, 9%는 실천으로, 1%는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나의 창작관이지 만 1%의 순간이야말로 목숨을 건 비약과 결이 창조되는 순간이다”며 “그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피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 사진을 보고 평화의 각오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진가는 죽을 각오를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창작론을 설명하며 “사람의 활동은 사회의식의 형태에 의해 5가지로 분류된다”며 이론, 가치, 교육, 조직, 예술활동을 제시하고 자신의 창작활동 역시 이같은 범주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사진가이면서 평화운동가, 전문기자, 이론가, 교육자 등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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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우 작가가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사진으로 설명한 강화도 고려산 미군 통신시설. "전파의 기교도 빛의 장엄을 넘지 못한다"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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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우 작가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찍었다는 오산 미공군기지 내 '노란 물통'. 치명적인 화학물질인 '백린'이 보관되어 있다는 간접 증거라고 설명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 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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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자신의 사진론을 “사진은 사실이 아니라 모형이다”는 명제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예술적으로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작품사진”과 “국민의 생명과 행복의 권리와 알권리 를 위해 반드시 알려지고 토론되어야 할 사진” 만을 발표해왔다고 주장했다.
“국보법, 헌법 3조 개정해야”, “유엔사, 해체 의제 선점해야”
그는 자신의 미학관에 이어 국가보안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국가보안법은 헌법 3조 영토조항을 근거로 수립되는 일관된 가치체계의 법적표현이다”며 “대한민국 헌법 영토조항의 개정으로 한미갈등과 남북갈등을 예방하고, 유엔사 해체로 미국의 대북 선제점령권에 대한 남측의 불안감을 예방함으로써 급박하게 속도를 내고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준비해야”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어 검찰 측의 공소장에 적시된 내용 중 주로 대인지뢰와 비무장지대, 유엔사에 관한 입장을 밝히면서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군사시설을 촬영한 사진들”에 대해 “이들 사진은 대인지뢰실태조사 작업 과 정에서 찍은 사진들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1975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유엔사 해체 결의안이 채택되었다”며 “유엔사 해체는 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주도하는가에 따를 이를 주도하는 국가에게 가장 큰 이득을 줄 것이다”고 주장하고 한국이 유엔사 해체 의제를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뢰 꽃,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는 핵무기와 열화우라늄탄, 화학무기, 작전계획 군사연습 문제 등은 변호사의 심문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며 모두진술을 마치고 몇몇 사진작품을 직접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사진작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해 를 구했다.
이 작가는 미군기지 앞 두 소년 사진, 요코스카 7함대 극동통신센터 건물 사진, 의정부 캠프카일 노을빛 사진, 강화도 고려산 미군통신시설을 찍은 사진과 태풍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사진, 오산 미공군기지 탄약고 사진 , 지뢰 꽃 사진 등에 대해 각각의 사진들이 어떻게 촬영됐고 어떤 의미(기능)를 갖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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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우 작가가 철원 지뢰밭에서 목숨을 걸고 찍었다는 '지뢰 꽃'. "작은 꽃이 마치 김준권 할아버지 환생인 것처럼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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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지뢰 꽃’ 사진에 대해 설명하면서 “지뢰지대는 들어갈 수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작은 꽃이 마치 김준권 할아버지 환생인 것처럼 느껴졌고 비극을 딛고 꽃을 대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철원 이평리에 살았던 김준권 할아버지는 나물을 캐다 지뢰에 전신이 해체된 시체로 발견됐고 바로 그 지뢰밭을 목숨을 걸고 들어가 지뢰와 나란히 생명을 피워올린 한송이 작은 들꽃을 찍었다는 것이다.
검사, “북한의 주장 알고서 동조하여...”
“북한에서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동조하여 유엔사를 해체해야 한다고 선전.선동하여 피의자의 사상이나 정치적 신념의 실천이 유엔사 해체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2시간 20분여에 걸친 이시우 작가의 모두진술이 끝난 뒤 잠시 휴정한 뒤 진행된 검찰 심문에서 이영재 검사는 이 작가의 통일뉴스 기고문들을 장황하게 인용한 뒤 결국 이처럼 북한에 동조해 국가보안법상 이른바 ‘자 진 지원’한 혐의를 추궁했다.
이 작가는 “선전.선동을 자주 거론하시는데, 북이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남에 유익하게 하고 있다”며 “주도적으로 이 문제 풀어나가 의제설정 권한을 우리가 기지도록 하자는 것 ”이라고 받았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한 탓인지 검사는 “북한 외무성 성명자료를 어디서 구했느냐?”, “강화도는 비무장지대에 가까운데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유엔사 문제 선전활동을 위해서이냐?”는 초보적 사실 관계도 확인되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기도 했다.
이 작가는 자신이 자료를 인용할 때는 출처를 항상 명기한다는 점과 유엔사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강화도 이주 이후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검사의 통일뉴스 기고문 인용이 길어지자 변호인단은 이미 알려진 기고문을 자의로 일부만을 발췌해 피고의 사상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심문하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재판장은 “피고인 진술이 없어 공판중심으로 진행돼 다소 재판이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고 피고인 심문이 다소 장황하게 된 것”이라며 속행을 주문했다.
결국 변호인단이 피고의 건강상태를 이유로 공판을 마무리하자고 요청해 오후 5시 16분경 2차 공판이 마무리됐다. 재판장은 “피고가 건강을 회복해서 재판해보자”며 다음 공판기일과 장소를 7월 26일 오후 2시 417호 대법정으로 고지했다.
모두진술, “간첩임을 증명하는 얘기”
재판장의 사전 경고와 2시간이 넘는 모두진술 뒤 잠깐 휴정한 사이 극우단체 노인들이 대부분 돌아간 탓인지 첫 공판 때와 달리 폐정 후 극우단체 회원들의 집단적인 고성은 터져나오지 않았으며, 문정현 신부와 권오헌 양 심수후원회 회장, 변연식 천주교인권위 위원장 등이 이시우 작가와 악수를 나누며 격려하는 모습만 눈에 띠었다.
대령연합회 김중광 공군회장은 “나는 자기(이시우)가 쭉 설명한 것이 간첩활동을 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나하나가 간첩임을 증명하는 얘기다”며 “사진각가가 폭탄관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 터지면 인명 이 죽든 말든 자기가 뭔 관계가 있다고 왜 파고드냐?”고 비판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은 다른 동료는 “강의시간이냐? 좌경화를 홍보하는 거다”라며 “피고인이 오래 떠들면 관례적으로 무죄다”라고 장시간 피의자 모두진술을 허용한 재판장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 다. 국민행동본부 본부장인 서정갑 대령연합회 회장은 기자의 논평 요청을 거부했다.
이에 비해 공안기관에서 일했다는 윤정경씨는 이 작가의 모두진술 내용에 대해 “옛날부터 안보기관에서 상당히 논의됐던 것”이라며 “국제법 전문가들에겐 공지의 사실이지만 수사기관에게는 어려웠을 것 ”이라고 평하고 “일반 사람들에겐 좀 생소한 얘기”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모든 걸 보여줬다"
문정현 신부는 “역시 검사의 태도나 말은 변함이 없다. 7,80년대 국가보안법 공소장과 변함이 없다”며 “공부도 잘한 사람이 저렇게 머리가 굳어져 이전에는 분노했는데 이제 식상하다 못해 아주 야비하게 느껴진다”고 검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문 신부는 이 작가의 모두진술에 대해 “담담하게 논리정연하게 얘기해 강의를 듣는 것 같았다”며 “집요하게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었고, 학구적인 줄 알았지만 전문가 수준의 공부를 한 것 같다” 고 높이 평가했다.
권오헌 회장은 “2시간이 넘는 모두진술은 드문 것으로 재판장도 통일뉴스 등을 통해 이 사건의 내용과 무게감을 알고 있어서 허용했을 것이다”며 극우단체 노인들이 첫 방청과 달리 소란을 피우지 않은데 대해 “모두진술에 압도당했다. 내용도 잘 모를 것이다”고 평했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는 동료들과 함께 방청했다는 강민규(중앙대 사진과 3년) 학생은 “자신의 모든 걸 보여줬다. 생각이 뚜렷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창작품이 나오려면 작업과정에서 피눈물 을 흘리고 감옥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평화사진작가 이시우 석방 대책위’(간사 고정호)는 전날(9일) 대책회의를 갖고 ‘이시우 사진전’을 전국적으로 계속 진행하고 통일뉴스를 통해 이시우 작가에게 ‘전자 서신’을 보 내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로 했다.
통일뉴스 / 김치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