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칠의 영화(榮華)를 꿈꾸며 재배에 나선 정순태씨.
전남 강진에 유배온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1804년 썼던 ‘황칠(黃漆)’이란 시로, 송재소씨가 역주한 ‘다산시선’에 실려 있다. 해마다 공물로 바쳐야 하는 황칠의 량이 서리들 농간 때문에 갈수록 많아졌다. 이리하여 황칠 나무를 도끼로 몰래 베어버리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는 농민들의 아픔을 다산은 고발하고 싶었으리라.
이처럼 황칠이 200년전 만해도 도료로 쓰여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황칠에 대한 기록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황칠은 중국, 특히 황실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도료였기 때문.
북송(北宋) 시대 백과사전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당 태종(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산문갑(山文甲·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황칠)을 요청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에도 이 같은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더 있다. 황칠은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의 역대 주요 교역품이었다.
최근 관심을 끌만한 연구성과가 나왔다. 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 신라 제사 유적에서 발굴한 도기 그릇에 담긴 유기물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황칠로 밝혀졌다. 더구나 유기물질에서 전남 해남과 완도산 황칠에서만 나오는 베타 셀리넨(β-SELINENE) 성분까지 검출됐다고 한다. 이 결과를 따른다면 신라의 유물에 칠해진 도료 황칠이 서남해안 일대에 자생하던 황칠 나무에서 채취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동아시아 최고의 황금색 도료로 인정 받았던 황칠은 200년 사이에 명맥이 끊겼다. 현재 이 같은 황칠 나무가 해남 등지에서 정순태씨 등에 의해 다시 자라고 있다. 황칠의 역사를 다시 잇고 시장가능성도 크게 보기 때문. 중국의 최고급 가구, 전자기파차단 전자제품, 안식향 기능 염색의류와 신약시장에서 각광 받을 것으로 보인다.
연평균 기온 14도 이하 서남해안 야산 박토에서도 잘 자라는 황칠의 부활, 농민을 괴롭히는 작물이 아니라 농민의 삶을 살찌우는 작물로 커나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