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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군산시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귀만(사정동)
1975년 11월 13일 열린 경성고무공업사 창립 43주년 기념식장을 빽빽하게 메운 여성 근로자들이 이용일 사장의 창립 기념사를 듣고 있다. (desk@jjan.kr) | ||
이만수 사장이 군산에서 고무신 소매점을 개업한 1924년 무렵, 군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무신공장이 있었다. 군산에 고무신공장 진출이 빨랐던 것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 고베지방과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고베의 고무공업이 군산으로 이전,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무공업의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신발 원료인 천연고무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변질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가황공정(생고무에 황과 열을 가해 경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경화시킨 후 고무신을 만들어야 했는데, 일본에서 수입한 천연고무 가황작업을 멀리 경성까지 운반해 하는 것보다 군산항에서 물건을 하역한 뒤 곧바로 작업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 일본인 고무신 공장을 인수하다
이만수 사장은 처음 소매로 시작했던 고무신 사업을 착실히 성장시켜 도매업까지 손을 댔다. 고무신은 인기가 높은 생활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장사가 잘됐다. 그는 성실 근면 정직했고, 밤 잠을 자지않고 일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사회 활동도 활발했다. 군산상공회의소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주로 미곡상들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다양한 직종의 기업인들이 참여하는데, 세대 교체의 성격도 띄었다. 이런 가운데 1930년 군산상공회의소 선거에서 이만수 사장은 상의원에 선출됐다. 한국인으로서 군산상의 첫 상의원이었다. 이어 1930년대 말에는 부회두(부회장)에 선출됐다. 이는 이만수 사장이 군산 상공업계에서 큰 발언권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 어느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당시 군산에는 고베에서 온 사업가가 세운 고무신공장이 있었는데, 이 공장이 매물로 시장에 나온 것이다. 이만수 사장은 일본인 사장이 공장을 내놓자 이를 놓치지 않고 인수, 1932년 11월13일 (합)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했다. 이 당시 군산의 공업은 일제 독점자본으로 발전했고, 대부분의 공장이 일본인 소유였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
군산시 장재동에 자리잡은 경성고무공업사는 당시 임직원이 100여명이었다.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삼천리표 고무신이 인기였지만, 서울 이남지역의 고무신은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 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 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기술을 적용해 흰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
경성고무공업사는 해방 직전까지 이 4가지 제품을 생산, 전국에 공급했다. 1일 생산량은 일제시대 당시 500족 정도에 불과했지만, 해방 후 60년대 들어서는 3만족에 달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 하늘색 등 색고무신을 출시했고, 꽃무늬 고무신과 농구화, 포화 실내화, 슬리퍼 등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 3000여명 직원이 하루 3만 족 생산
고무신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1957년 경성고무 전무로 취임, 부친 이만수 사장으로 부터 경영수업에 들어간 이용일 사장(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에 따르면 고무신은 생고무와 화공약품을 혼합해 만든 고무판을 미리 제작한 신발 모양 금형에 넣고 증기 철가마 안에서 2000℃에 달하는 고온으로 찌는 공정을 통해 생산됐다.
즉, 생고무에 황 등 여러가지 화공약품을 혼합해 열을 가하는 가황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원료를 잘 섞은 다음 롤러를 통해 고무판(Rubber Seat)과 밑창(아웃솔·Outsole)을 제작했다. 고무신 몸체와 밑창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에 고무 재질이 달랐다. 이어 몸통용 고무판은 다양한 모양과 크기에 맞춰 사전에 제작한 수십가지 금형(Mold)에 넣어 제품 형을 만든 다음 별도로 제작한 밑창과 붙여 제품의 원형을 완성했다. 이것은 증기철가마에서 고온으로 쪄내는 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접착, 고무신 완제품을 생산했다.
밑창(구두창·아웃솔)은 고무신은 물론 운동화(Canvas Shoes) 제품 제작에 사용되는 부품이다. 천(Canvas)이 재료인 운동화 윗부분(Upper)은 재단 후 미싱 과정을 거쳐 만들었고, 이 어퍼(Upper)에 운동화 밑창인 아웃솔을 붙여 운동화 원형을 만든 다음 역시 고무신 처럼 증기가마에 넣고 고온에서 쪄 완제품을 생산했다.
이 당시에는 증기가마에서 고온으로 찌는 과정을 거쳐 아웃솔과 몸체 접착을 완성했지만, 후에 접착제가 개발된 후에는 이 과정이 훨씬 쉽고, 또 다양한 재질의 신발 생산이 가능해졌다.
또 고무판 생산도 후에 믹서기가 도입되면서 한결 손쉬워졌다.
고무신 공장은 초창기는 물론 지금까지도 제작 공정 특성상 노동집약적이다. 실제로 전성기 때 하루 3만 족 이상을 생산한 경성고무의 경우 직원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500여명이 여성이었다고 이용일 사장은 회고했다. 고무판을 생산하는 롤러부를 비롯해 남자들이 근무하는 부서는 주야간으로 계속 일해야 밀려드는 일감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근로자들은 낮에만 근무했다.
▲ 1960년대 이후 부산업체와 경쟁 치열
창업주 이만수 사장이 1964년 별세한 후 경성고무 경영을 맡게 된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공장의 모든 작업공정이 수작업이었기 때문에 저도 항상 작업복을 입고 공장에서 살다시피하며 일했습니다. 중간관리자들이 잘해 준 덕분에 공장도 잘 돌아갔죠"
운동화를 만들면서부터는 경성고무공업사 공장 한켠에 방직공장도 뒀다. 실을 사다가 방직공장에서 운동화용 천(캔버스)를 직접 만들었고, 여성 근로자들이 재봉틀 등을 이용해 운동화 어퍼(Upper)를 제작했다.
또 롤러 등 고무신 생산라인의 기계가 고장날 경우 공장내 기술자들이 필요 부품을 제작하는 등 직접 수리에 나섰기 때문에 공장 내에 철공소도 운영했다.
즉, 고무신공장 내에 방직공장, 미싱부, 철공소까지 둔 셈이다. 게다가 신발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금형(Mold)도 수십종류에 달했다. 금형은 신발공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디자인 전문가를 두고 금형을 떴다.
이용일 사장은 "고무신의 품질은 10여가지에 달하는 화학약품을 배합하는 기술에 있었다"며 "1960년 혁명기 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60년대들어서면서 부산쪽 신발공장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6.25전쟁 이후 부산지역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많은 신발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제시대 이래 전성기를 구가하던 군산 경성고무는 큰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경성고무는 고무신 외에도 폴리우레탄과 스폰지를 생산하며 고무신 쪽 경영난을 타개했다. 방한용 의류 안감용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의류업자들이 스폰지를 확보하기 위해 몇 천만 원씩 선불을 주고 공장 인근에서 대기할 정도여서 경영에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대부분의 방한의류에 스폰지가 들어가야 소비자들이 눈길을 주었으니, 의류업자들은 스폰지를 사기 위해 장사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이후 부산 신발산업도 민주화, 노동자 대투쟁의 물결 속에서 신발업 생산지 임금 가이드 라인이라고 알려진 300불선이 무너지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부산지역의 동양, 삼화, 태화, 진양 등 대규모 신발기업이 도산했다. 하지만 생산기지 해외이전과 기술혁신, 특수화시장 개척, 시장집중화 등을 통해 부산신발산업은 지금도 부산경제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힘이 되고 있다.
태광실업은 베트남으로 진출해 세계 최고의 브랜드 나이키 생산으로 연간 1억4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트렉스타 브랜드를 갖고 있는 성호실업은 중국에서 연간 7000만달러 이상으 생산능력을 갖췄다.
지금의 부산 신발산업계는 르까프, 프로스펙스, 트렉스타, 비트로 등 독자 브랜드를 성공시키며 중흥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