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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5 강
坐高大牀(좌고대상)이라. 坐. 앉는다는 뜻이고, 高 大牀. 高라고 할 때는 높다는 말이지만 넓다는 뜻도 그 다음에 붙거든요. 넓다는 뜻은 거기에 줄여진 것입니다. 높고 넓은 큰 평상에 앉지 말아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높고 넓은 큰 평상이라고 할 때는 자기의 생활공간을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지 말아라. 그러니까 이불은 여읠 離자 부처 佛자니까 이불도 비단 요이부자리 궁전같이 번들번들 하게 그렇게 하지 말고, 휘장 커텐 같은 것도 비단으로 너무 요동심심하게 그렇게... 그러니까 방 안에 장식물 꾸며 놓은 것 보면 그 사람 성격을 알 수 있거든요. 방에 탁 들어가 보면 ‘아, 이사람 성격이 어떻구나.’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방에 퀴퀴하게 발가락 냄새가 나고 방 안에 구질구질 하게 어질러놓으면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람이구나.’
방이 깔끔하고 깨끗하면 ‘아, 이 사람은 성질이 깔끔하고 깨끗하고 그렇구나.’ 알 수 있거든요.
정돈이 되었느냐 안 되었느냐 이것이 다 자리하나 반듯하게 놓고 앉는데도 다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 저 어릴 때 경책을 삐딱하게 놓으니까 우리스님한테 경책을 반듯하게 안 놓고 삐딱하게 놨다고 혼난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아무개야~.” 하고 불러요. 쫓아가니까
“저 장 단지 좀 봐라.” 마당 장광에, 장 단지가 있거든요. 장 단지 뭘 보라 하는지 알 수가 있나요?
“장 단지가 어째서요?”
“장 단지 좀 보란 말이다.” 뭘 보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요. 큰 된장단지 인데... 14~5살 때니까 장 단지 키가 제 키만 하거든요. 그러니까 발뒤꿈치를 들고, 뚜껑은 옛날 큰 넓고 큰 옹기 뚜껑이거든요. 그것을 열어젖히고 된장을 (꽤도 없어, 작은 단지에다 퍼 놓고 먹으면 될 텐데...) 된장 뜨고, 된장, 그것도 뜨고서는 바쁘다고 그냥 갔다가는 나중에 혼나거든요.
탁 뜨고서는 옆을 콕콕콕콕 눌러놔야 됩니다. 김치도 그렇고요. 노장 가끔 조사를 하거든요. 그래가지고는 혼나는데... 그것을 안 해놓으면 그런 줄 아는데 된장 단지를 쳐다보라니 된장 단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나요?
“된장 단지 뭐요?” 하고 소리를 꽥 질렀더니 ‘요 자슥 봐라’ 싶었는지 노장이 맨발로 후닥닥 뛰어나와 가지고 한 대 딱~ 올려붙이더니 된장 단지가 삐딱하다 이겁니다. 뚜껑이 삐딱한 것이 눈에 안 뵈느냐 이겁니다.
된장 단지 삐딱한 것을 어떻게 해서 잘못 건드리면 떨어져서 깰 것 아니냐 이겁니다. 그것을 사람이 어떻게 반듯하게 닫지 않고서 삐딱하게 닫아놓고 그냥 사느냐 이겁니다. 그 노장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거든요. 뭐든지 반듯하게 놔야 된다고요. 놓는 것도 그렇지만 하여간 사용하는 물건 자체를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중의 분수에 맞지 않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옷도, 스님들은 흰 옷을 입지 않고 먹물 옷을 입잖아요.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서 먹물 옷을 입는 겁니다.
왜 그러냐? 옛날 2000년 3000년 전에는 그 때는 원색 시대거든요.
누구든지 빨간 것을 입든지ㆍ파란 것ㆍ노란 것ㆍ임금은 노란 황금색을 입고요. 대신들은 파란 것을 입고요. 계급 따라서 자색을 입기도 하고 붉은 옷을 입기도 하고, 하얀 것을 입는다든지 모두 원색.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때는 다 그랬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원색적인 것을 입지 말고, 물을 들여 가지고 수수름하게 해서 입어라. 그러니까 옷 물을 하나들이더라도 종합적이고 보변적이고 非靑非白亦非黑(비청비백역비흑)인데 非靑非白亦非黑이지만, 역시 靑黃赤白黑(청황적백흑)이 겸해져 있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스님들 옷이다 이 말입니다. 회색이라고 그랬거든요. 원색적이고 화려한 그런 것을 피하고 말하자면 수수름하니 與道(여도)로 相應(상응)이라. 도로 더불어 相應하다 이 말입니다. 이러한 옷 색깔을 만들어 입어라.
지금 세상 사람들은 신비감 예술감각이 있어서 수수름한 색깔의 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양면 다 그러는데 세상 사람들이 절에 오면 5색 단청을 너무 화려하게 해 놨잖아요? 그것을 보고 무당집ㆍ무당사당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서 사실은 별로 기분 안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요. 그런데 부처님의 궁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집이기 때문에 모든 풍습이 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단청을 하고, 단청을 하면 또 나무가 오래 간다고 하니까 몇 천 만원씩 들여서 단청을 하고 그러기는 그러지만, 화려하게 단청하는 저 풍습도 우리 한국이 저렇지 외국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는 밖의 것은 할 수 없이 세상 따라서 단청하지만, 안에까지 돈 많이 들여서 단청할 것 뭐 있나싶어서 안에는 아니하고, 바닥에 칠하는 것도 요즘 니스칠. 비까번쩍하니 번쩍번쩍하는 그런 것 보다는 無光(무광)을 칠해서 수수름하니 표 안 나게 때도 안 묻고... 무광이 좋으냐 번쩍번쩍하는 것이 좋으냐 하면 저는 무광이 좋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회색의 뜻도 그런 겁니다. 그런 것의 전체가, 그런 사상이 坐高大牀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안 어울린다 이겁니다. 중 색깔하고 안 어울린다 이겁니다. 與道로 相應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與道로 相應하게 하라는 것이 坐高大牀하지 말라는 뜻이 되고, 또 그로 말미암아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 마음이 둥둥 뜨게 되어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강의 오달국사 얘기 처럼요.
그 다음에 香鬘塗彩(향만도채)는 화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옛날 서역의 귀인들은 향수를 몸에 문댄대요. 사람을 시켜서 문대게 해서 몸이 부드럽고 향기가 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화장을 많이한다. 갖가지 화장이지요. 그런데 화장한다는 것은 스님들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다 이겁니다. 香鬘塗彩. 彩는 채색. 연지곤지 찍고 입술 붉게 바르고 눈썹 그리는 것이 塗彩아닙니까? 香鬘이라는 것은 몸에 향수를 뿌린다든지 장식을 하는 것. 鬘: 꽃다발 만자라고도 하고 달비 만자라고도 하는데, 달비 라고 하는 것이 가체(어여머리)를 말하는 겁니다. 역시 꽃을 장엄하는 것도 鬘에 속하는 겁니다. 어쨌든지 간에 얼굴을 아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인데...
慢藏誨盜(만장회도)요 冶容誨淫(야용회음)이라. 얼굴을 다듬는 것은 음욕심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겁니다. 쉽게 말해서 얼굴을 아주 예쁘게 꾸미는 것은 ‘나를 이쁘게 주세요.’ ‘나를 끌어안아 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慢藏誨盜. 아무렇게나 놔두는 것은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100원짜리 수표를 길 바닥에 아무데나 놔둬 보세요.
‘훔쳐가라’ 이말 아닙니까?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의 물건을 자신이 제 자리에 잘 단속하지 않고 함부로 놔두는 것은 남에게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얼굴을 너무 예쁘게 꾸미는 것은 남자들에게 음욕심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화장을 너무 곱게 하지 말아라.” 이 말이거든요.
坐高大牀이라고 할 적에는 자기의 방을 너무 호화스럽게 꾸미지 말고, 또 입는 옷도 너무 사치스럽게 꾸미지 말고... 어떤 여자들은 여우 목도리 같은 것. 얼굴에다 분을 보얗게 바르고 절에 와서도 법문 들을 때 자기를 좀 돋보이게 하려고 용을 쓰거든요. 그런 것이 다 출가한 사람으로서는 “당치 않은 것이다.” 언제 어디까지나 “검소한 생활이 청빈한 생활이 출가인의 기본이다.” 이런 말입니다.
歌舞作樂(가무작악).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쓰지 말아라. 이랬거든요.
그러니까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쓰고 띵땅거리고 오락. 즐겁게 하려니까 자연히 그렇게 꾸며야 되잖아요. 그런 것들의 전부가 이쪽 前五戒(전오계).
殺盜淫妄酒(살도음망주), 그것을 범할 가능성이 많은. 말하자면 전제 작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막을 遮자, 遮界(차계)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어떤 취미생활이 하나 있어야 된다. 취미생활로 기타 하나쯤은 칠 줄 알아야지. 취미생활로 바이올린 하나쯤은 실을 그을 줄 알아야지. 피리 하나는 불 줄 알아야지. 어쩌고... 대금을 하나 불 줄 알아야지. 옛날부터 전부 다 그런 짓들을 좋아하고 그러는데 부처님의 율법에 있어서는 중이 生死大事(생사대사)를 위해서 출가하여 無上大道(무상대도)를 닦으려는 사람이 취미생활이 어디 따로 있느냐 이겁니다.
공부하는 그 자체가 취미생활이 되는 것이라야 되는 것이지...
요전에도 기자가 와서 “스님 취미가 뭐냐?” 고 그러더군요.
공부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쓸데없는 취미냐? 고 제가 그랬지요.
난초? 난초를 누가 갖다 줘서 할 수 없이 그냥 물주고 있는 것이지 취미생활은 아니라고요. 글씨? 글씨 쓰는 것도 자꾸 써달라니까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써 주는 것이지 제가 무슨 취미로 쓰는 것은 아니라고요.
취미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있느냐? 공부하기 바쁘고 참선하기 바쁘고 그렇지, 취미라고 한다면 참선하는 것이 취미라고 하면 될런지는 모르지만, 그 밖에 즐겁기 위해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랬는데요.
사람이 본래 낙천적으로 되는 사람들은 그런 버릇을 그렇게 들여 놓으면, 그것을 아니 하고는 못 견디거든요. 항상 해야 되거든요.
유담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이 피리 불기를 좋아해요. 항상 피리 불기를 좋아해서 피리를 언제든지 들고 다녀요. 가나오나 피리를 들고 다니거든요.
범어사에서 원주를 사는데 그 양반은 손님이 오거나 말거나 누각위에 올라가서 두 다리 떡 동겨 가지고 삐~~ 피리를 분다고 고개를 꺼떡꺼떡꺼떡하고 정신이 없어요. 손님이 오든지 말든지 원주가, 원주라고 하는 것은 손님이 오면 방으로 안내하고 그래야 할 텐데... 조실스님은 손님 숭늉그릇 가지고 쫓아가고, 이런 제기, 원주라는 사람은 저 위에 앉아서 피리 불고 앉았고 그 모양이었어요.
이 양반이 평생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는... 피리를 잘 불고하니까 기생들이 좋아하거든요. 기생들 기방에 가가지고 피리 한 바탕씩 불어주고 한잔 얻어먹고 그러고 다니다가 죽었어요. 죽었는데 그의 친구가 경월스님이라고 있는데 그 스님은 또 천재적으로 대금 선수입니다. 대금을 잘 불어요. 대금 불고 피리 부는 것을 그 스님한테 배우고 그랬거든요. 아주 친한 친구입니다. 유담스님이 죽고 난 후에 경월스님이 동래 금정사에 주지를 살고 있는데, 하룻밤 꿈을 꾸니까 유담스님이 턱 들어오거든요. 들어오는데 반 중 반 속인이 되어서 맨 날 피리나 불고 돌아다니다 보니까 중은 참선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야 되는데, 피리 불고 노는 것이 취미니까 중 맛이 안 납니다.
사방 담배 피우는 집으로 돌아다니며 놀다가 보니 몸에서 냄새가 나거든요. 목욕도 자주 아니 했는지 어쨌는지...
세로 두루막을 입었는데 두루막위에 하얀 동정을 다는데 누구 빨아주지도 않으니까 동정이 새카만 것을 입고 다니고 그래요.
“아이고 내 갈 데가 있나? 밥 좀 얻어먹으려고 들어왔다.”
“니 또 담배 피우는데 가서 온 종일 앉아 있었구나. 아이고 냄새 난다. 저 객실로 나가라.” 안 나가고 꾸적꾸적 아랫목으로 자꾸 들어오거든요.
나가라 해도 안 나가고 자꾸 들어오니까 멱살을 번쩍들으니까 졸장 같이 가볍거든요. 들고 나가서 금정사 누각 옆에 구렁창에다가 탁 집어던지니까 그 구렁창 속에 “꽥” 하고 쳐 박히거든요. 그리고는 잠을 깼어요.
깨보니 꿈인데 ‘야~, 내가 그래도 친구인데, 수십 년 친구인데 친구를 멱살을 집어들고 가서 쳐 꼬라박다니 내가 그렇게 부랑스럽나? 내가 그렇게 부랑한 놈은 아닌데 그것 참~’ 영 기분이 안 좋거든요. 잠은 안 오고 가만히 앉았으니까 4시 싸이렌이 불거든요.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와서, 새벽에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서 施食(시식)을 해 줬어요. ‘먹고 싶은 것 먹고 해탈하고 가라’ 고 ‘기로에 머물지 말고 가라’ 고 시식을 해줬습니다. 범어사 동산노스님이 그 얘기를 듣고
“그래 그런 것을 직접 지눈으로 보고서도 그 눔의 대금. 그것을 뚜두려 깨서 내다 버리지 않고 그것을 짊어지고 다녀? 이 눔의 자슥 나쁜 놈이네.” 그러고 노장님이 야단을 치셨거든요. 실지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이나 가지고 놀면 죽고 나서 갈데가 없어요. 유유상종으로 그런 것을 따라 다닐 수밖에요.
그러더니 경월스님은 그 뒤에 발심을 해서... 대금은 내 버렸는지 어쨌는지 모르되 절 내 놓고 토굴로, 토굴로 다니면서 정진하고 그러셔요.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렇게 발심해서 수행하러 다니신다고 하더군요. 찬불가 하고는 다르지요. 자기를 위해서 즐겨서 하는 것이 아니고 法事ㆍ佛事(법사 불사)를 위해서, 법의 일이나 부처님의 일을 위해서 부처님을 찬탄하고 법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는 노래는 그것은 자기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非自樂也(비자요야)라. 자기의 오락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찬불가 하고는 같지 않다고 그랬어요.
법화경에 비파여발직구 라고, 비파는 요즘 기타 같은 것이지요. 여발은 바라춤을 추고 징을 치고 하는 그런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출가한 스님이 하는 짓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이 하는 짓은 아니고 그것은 다 거사들을 시켜가지고, 거사들 가운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도 스리랑카 켄디 불치사라고 하는데 가면, 아침저녁 예불 할 때 마다 그 악대들이 옵니다. 와 가지고 위층 아래층이 있는데 위층에서는 스님들이 예불하고, 예불하고 나서는 사리탑을 열어놓고, 황금탑입니다. 순황금이 삐까 번쩍번쩍번쩍 하지요. 그 탑문을 열어놓고 참배하고 이쪽 문으로 나오고 그러는데 아래층에서는 쫭지리장짱짱 쫭지리장짱짱 뚜두리고 난리가 났어요. 그것이 다 거사들이 그렇게 합니다. 신심 있는 거사들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뜻으로 하는 것이지요. 가사 장삼 입은 사람들이 가사 장삼 입고 펄럭거리면서 춤을 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다 안 맞는 것입니다. 중이 연극을 하는 것도 안 맞는 것이고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전에 중들이 연극을 한 적도 있거든요.
그런데 중이 연극을 하는 법 아닙니다. 방편이든 아니든 중은 하는 것이 아니라고요. 거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부대중 가운데 각각 해야할 일이 따로 있잖아요.
沙門(사문)은 어디까지나 三千威儀(삼천위의)와 八萬細行(팔만세행)을 가지고, 떡하니 점잖은 거동을 가지고 그야말로 승가리야. 승가리야 라는 것이, 스님들이 입는 대가사를 승가리라고 하잖아요. 승가라고 하는 것은 대중이라는 뜻이고, 리야 라고 하는 것은 항복시킨다는 뜻입니다.
說法伏從(설법복종). 설법을 해서 대중을 항복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큰옷을 입고, 위의를 갖추고 떡 점잖게 설법함으로 해서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 이런 것이지 들이 꽹과리를 뚜두리고 고개를 흔들어 제키고 다리를 꺼떡꺼떡 들고 있을 수 없는 짓이다 이겁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지요. 옛날에 등타연나왕 이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는데 등타연나왕 이라고 하는 그 임금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왕이어서 궁녀들을 500명 데리고 경치 좋은 산속으로 갔다는 겁니다.
벌판인데 꽃이 사방에 피어있고 경치 좋은 숲속으로 갔어요.
사방 벌판에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아주 경치 좋은 그런 곳에 술 고기를 가지고 가서먹고, 궁녀들에게 춤을 추게 하는데, 남자는 하나도 없게 만들고 전부 여자들만 전부 옷을 발가벗게 해서 춤을 추게 했다는 겁니다.
풍장고를 울리며 춤을 추고 난장판이 벌어졌지요. 그 때에 5신통을 얻은 신선들이 허공으로 쭉 날아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 신선들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어디서 풍장고 소리가 나고 향냄새도 진동을 하고 하니까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해서 내려다보니까 여자들이 전부 발가벗고 춤을 추고 있거든요.
여자들의 관능미에 혹해가지고 마음이 산란해져 버렸어요. 그것을 구경하다가 마음이 산란해져 버리니까 허공에서 날개 부러진 새처럼 왈카닥 다 떨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뚝 떨어졌어요. 지금 한창 신나게 노는 판인데 웬 남자들이, 500신선들이 확 떨어지거든요. 등타연나왕이 깜짝 놀라 가지고
“웬 놈들, 뭐하는 놈들이냐?”
“우리는 신선들이요.”
“신선들이면 이미 四果를 다 證得(4과증득)했느냐?”
“증득한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고 그렇소.”
“그러면 5신통을 다 얻었느냐?”
“5신통을 얻었는데 지금은 잃어버렸소.”
“네 이놈들, 不離慾之人(불이욕지인)이, 욕심을 떠나지 못한 사람이, 음욕심을 떠나지 못한 놈이 어찌 나의 궁중처녀를 너희 마음대로 도적질해서 본단 말이냐?” 엿보는 것도 도적질이거든요.
“이 도적놈들, 너희들은 다 다리를 끊어야 된다.” 고 하면서 장검을 뽑아가지고 500신선 다리를 다 잘라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옛날에 왕이라고 하면, 칼 하나 빼면 500명을 다 당할 수 있는 대장군이니까요. 힘이 막 천하장군이고 그만한 정력이 있고, 그만한 고수꾼 이거든요. 이래 가지고는 그만 500신선이 다리가 다 잘렸다는 겁니다. 觀聽之害(관청지해)가, 보고 듣는 해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自作乎(자작호)아? 자기 스스로 자작을 할까보냐? 자기 스스로 그런 짓을 할까보냐?
그러니까 중은 歌舞作樂도 아니하는 것이고, 또 그 뿐만이 아닙니다.
바둑을 둔다든가 장기를 둔다든가 이런 것이 다 歌舞作樂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겁기 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거든요. 딴 것 아닙니다.
사행심을 가지고 하는 것이거든요. “시간이 있는데 한판 할까?” 그러면 아무데서나 한판 벌이거든요. 그것도 사회악입니다. 안 좋은 것이거든요.
더군다나 중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바둑에 취해놓으면 밤을 꼬박 새운다대요.
옛날에 양 무제가 바둑을 두는데 바둑을 두면서 使者(사자)를 시켜가지고 계도법사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어요. “계도법사라는 스님을 모셔 오너라” 이랬거든요. “그 스님 청해다가 법문 듣게 모셔 오너라” 이랬거든요. 모시러 갔는데 지금 한창 바둑이 이기느냐 지느냐 요즘 말로 크라이막스에 올랐다 이겁니다. 지금 한창 신나게 두는 판인데 바깥에 사신이 와가지고
“폐하 계도법사 대령하였나이다.” 했어요. 그렇지만 그 소리는 조그마해서 못 들었어요. 그 소리 하는 찰라에 “죽여라.” 하고 딱 한 놈 잡았거든요. 바깥에서는 계도법사 모셔왔다니까 “죽여라.” 하고 소리를 방에서 지르거든요. ‘아이고 어떻게 일 났는구나’ 할 수 없이 “왜 그러십니까?” 했다가는
“이 눔의 자슥, 죽이라면 죽이지 네가 무슨 잔소리냐? 묻기는, 이놈까지 갖다가 죽여라.” 하면 자기도 죽는다 이겁니다. 그래서 더 물어보지도 못하고
“계도법사님 큰 일 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계도법사가 껄껄 웃으며 하는 말이, 某甲(모갑)이, 내가 前劫(전겁)에 沙彌(사미)러니, 과거전생, 과거전생에 사미가 되었었는데 괭이로 땅을 파다가 한 꼬부라진 두꺼비 한 마리를 찍어서 죽인 일이 있다. 무량겁 전에 그 때 그 두꺼비가 지금 양 무제 라는 겁니다. 오살은 誤殺之果(오살지과)가 있으니, 내가 모르고 죽였는데 지금 왕도 나를 모르고 죽이는 거라면서 단 두 대에 올라갔거든요. 단 두 대에 올라가서 四大는 本來空(사대본래공)이요,
사대색신은 본래 내라고 할 것이 없는 것이고, 五蘊은 本非也(오온본비야)라. 색수상행식. 내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감성과ㆍ생각하고, 사유하고ㆍ행동하고ㆍ분별하는 이 모든 감정이 본래 내가 아니다 이겁니다.
환경 따라서 이것도 생겨나고 저것도 생겨나고 하는 것이지 본래 내가 아니다 이겁니다. 以首臨白刃(이수임백인)하니, 내 머리를 흰 칼날 앞에 대고나니, 猶如斬春風(유여참춘풍)이로다. 마치 춘풍을 베는 것과 같도다. 봄바람을 끊는 것과 같다. 그러고서는 돌아가셨어요.
양 무제가 바둑을 다 두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가? 스님 안 오시나?” 이렇게 하거든요. “천자가 죽이라고 해서 이미 목 베었습니다.”
“어? 그거 무슨 소리냐? 돌아가실 때 뭐라고 했느냐?” “이만저만해서 죽이는데 턱 하니 四大가 本來空 五蘊이 本非也라. 以首臨白刃하니, 猶如斬春風이로다. 이렇게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양 무제가 그 소리를 듣고 대성통곡을 하고 내가 이 손가락을 가지고 바둑을 다시 뒀다가는 이 손가락이 성하지 못할 줄 알라고 자기 손가락을 보고 욕을 하고, 다시는 바둑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출가해서 생사대사를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이 어디 바둑 같은 것을 가지고 세월을 보낼까 보냐 이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짓이다 이겁니다.
그거 다 못 쓰는 겁니다. 피리 같은 것도 불지 말고ㆍ바둑ㆍ장기ㆍ투전같은 것도 종류가 많지요? 수 십 가지되는데 탁구 같은 것은 운동이니까 이것도 좀 안 맞기는 안 맞지만 탁구 좀 치는 것은 꼭 놀음은 아니니까요.
놀음을 위해서 하면 이것도 게임을 해가지고서는 한 판에 돈을 걸고 이기려고 하면 이것도 놀음입니다. 경마장에서 얼마 이말 걸고 저 말 돈을 거는 것은 놀음이잖아요. 경마장 그것은 놀음입니다. 놀음은 못 쓰는 겁니다.
놀음이 아니고 운동으로 하는 것은 종류가 다르고요.
피리를 불고 그러더라도 불사ㆍ법사를 위해서 하는 것은 종류가 다르다지만, 그러나 그 나마라도 출가한 스님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재가 인들을 시켜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는지 10계 가운데에는 歌舞作樂은 하지 말라고 했고, 재가 5계에는 歌舞作樂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재가인들은 할 수 있는 것이고요. 다음은
受蓄金銀(수축금은)인데, 이것은 금과 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남이 욕심낼만한 물건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그것을 잃어버리면 아이고 동동 할 만 한 것. ←이런 것 갖지 말라는 겁니다.
그 전에 어떤 중이 100만 원짜리 시계를 차니까 상좌란 놈이 자꾸 와서 만지거든요. ‘자슥이 왜 자꾸 만지노?’ 잠깐 여가만 있으면 또 곁에 와서
“스님, 그 시계 좋으네요.” 하면서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밤에 잘 적에도 와서 슬슬 만져보고, “스님, 시계 좋으네요.” 자꾸 그러거든요.
할 수 없이 그것을 벗어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스님들이 시계 차는 것을 수갑 찼다고 그러잖아요. 시간을 보기위해서 차는 것이 아니고 옛날에 사치품으로, 폼 재기위해서 시계도 차고 반지도 차고 “아이고 골치야” 하면서 자기 이마에 손을 얹힙니다. 이 반지보라고... 그것이 출가한 사람으로서는 마땅하지 않은 것입니다.
시계뿐 아니고 반지든지 출가한 사람은 마땅하지 않은 것이지요.
중이 반지 찼다면 아주 참 안 맞는 것이거든요.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요.
보통 시계는 괜찮지만 고급시계. 좋은 시계는 다 안 맞는 일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모든 물건에 있어서 잃어버려서 아이고 동동 할 만 한 물건은 갖지 말아야 됩니다. 그거 다 탐심을 일으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부처님말씀에는 財色之禍(재색지화)는 甚於毒蛇(심어독사)라. 재색의 화는 독사보다 심하다. 이랬는데요. 불법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재색을 멀리 했느냐? 재색을 가까이 했느냐? 딱 거기에 달렸어요.
종단 자체가 재색을 멀리 했을 때는 불법이 흥하고, 재색을 가까이 하면 불법은 망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중노릇도, 중노릇 자신도 그래요.
발심에 보면 出家富(출가부)는 是君子所笑(시군자소소)라는 말이 있듯이 출가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군자 들이 웃을 바다. 그랬는데요. 중이 부자라고 한다면 그 중노릇은 알쪼인 것입니다. 돈 하고 道하고는 반대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도 닦는 사람은 돈 이라는 것이 도 뒤에 따라와야지 도가 돈을 질질 따라가면 그것은 아주 천덕꾸러기거든요.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도만 잘 닦고 있으면, 돈은 거기에 분수대로 저절로 따라붙게 마련입니다. 슬금슬금 따라붙어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의 100%는 안 된다 하더라도 50%는 저절로 따라붙는 겁니다. 배 안 곯으면 되는 것이지요. 10리에 한 사람씩 배고파서 죽은, 부황 들어서 죽은 사람이 있어야 눈 먼 중하나 굶어죽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고봉정상에서도 중은 굶어죽는 법 없어요. 그것은 도를 닦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중이 돈을 모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금이나 은이나 사치품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실제,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내 보따리를 세 번쯤 털렸어요. 완전히 제 몸뚱이만 되어버린 것이 세 번 있었습니다. 제가 18세 때니까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 자질구레한 것들을 18세까지 가지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바랑 안에다가 만년필이니 뭐니 뭐니 지금으로 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제가 귀하게 여기던 물건.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때로서는 굉장히 귀하게 여겼는데 누가 바랑을 짊어지고 가버렸어요. 완전히 두 손 탁 털었어요. 딱 입은 것 하나 뿐이었어요. 입은 것 하나 뿐인데 누비바지 저고리 입었거든요. 한 달을 넘게 입으니까 봄이 되니 덥기도 덥고 빨아야 되겠는데 장삼까지 다 없어졌으니까 빨 재주가 있나요?
우리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때는 상복 장삼이라고 해서 상주들은 전부 다 광목으로 장삼을 하나씩, 그냥 둘둘 박아가지고... 그런 것이 마침 있었는데 그것을 얻어다가 물을 들여 가지고 그것만 하나 딱 입고 속옷까지 빨았지요. 속옷도 안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장삼 하나만 입고 앉아서 하루 종일 앉아서 글만 읽으니까 쟤가 어쩐 일이냐고 “어이 공 차러가자”
“나 공 안 차” 옷이 없어서 일어서지를 못하는 판인데 다른 사람은 그러는 줄 몰라요. “저 눔아가 말뚝 신심 났네” 그러거든요. 그런 적도 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옷이 하나 생겨가지고 입고...
강원에 있는데 다른 아이들은 여행 가는데 여행비 달라고 자기 스님한테 편지 하니까 자기 스님이 여행비 보내주나요? 안 보내준다고 지대방에 와가지고 고민을 하고 끙끙 앓고 우는 놈도 있고 그래요. 저는 차는 공짜니까 돈 없으면 안 사면 그만 아니냐고 하고 덮어놓고 그냥 따라 갔어요.
경주로 포항으로 방어진으로 한 바퀴 도는데 저, 돈 한 푼 없는 줄 아니까 다른 아이들이 두 개씩 사가지고 한 개씩 주대요. 얻은 떡이 가락 반이라고, 돈 주고 산 그들보다 제가 더 많아요. 그래서 미리 구하지 아니하면, 미리 구하지 아니하면 다 넉넉하다. 중은 최소한도 그렇다 이겁니다. 그래서 달마스님의 四行論(사행론) 가운데 無所求行(무소구행)이라. 구하는 바 없이 행하라. 미리 구하면 구하는 것만큼 괴롭다 이겁니다.
無 所 求 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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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無 所 求 行 하라..._()()()_
미리 구하면 구하는 것만큼 괴로우니 구하는 바 없이 행하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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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 所 求 行 하라... _()()()_
스님들은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서 먹물 옷을 입는 겁니다. 無所求行(무소구행)하라... 미리 구하면 구하는 것만큼 괴롭다. _()()()_
어떤 물건이든 반듯하게 놓는 것, 자기의 본분을 넘치지 않게 처신하는 것,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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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구하는 바 없이 행하라. 미리 구하면 구하는 것만큼 괴롭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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