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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우리를 비추는 거울
한홍구 (성공회대ㆍ평화박물관)
아름답게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당신과 마주선 곳은 서글픈 아시아의 전쟁터
우리는 가해자로 당신은 피해자로
역사의 그늘에 내일의 꿈을 던지고
어떤 변명도 어떤 위로의 말로도
당신의 아픈 상처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나 두 손 모아 진정 바라는 것은
상처의 깊은 골따라 평화의 강물흐르길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어둠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 자욱마다
어둠속에서 우리가 남긴 부끄런 흔적마다
미안해요 베트남 미안해요 베트남
(박치음 노랫말, 「미안해요 베트남」)
한국과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참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맹획과 대결하여 칠종칠금의 고사를 남긴 남만의 땅이 바로 지금의 베트남이다. 우리가 중국과 끊임없는 대결 속에서 민족적 자주성을 지켜 온 것처럼, 베트남도 중국이란 거대한 이웃 옆에서 민족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 온 자존심 센 나라였다. 베트남은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에 자리잡고 있지만, 라오스나 캄보디아와는 달리 유교적 전통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흔히 한국, 중국, 일본을 묶어 동양 3국이라 하지만,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역사는 베트남을 포함해야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유교적 전통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1950년대에 이승만이 사이공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고위 관료들과 한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베트남 지식인들은 원래 한학 소양이 풍부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세기에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었는데, 베트남이 우리보다 먼저 국권을 상실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불행한 역사를 기록한 월남망국사는 베트남의 망국을 남의 일로 보지 않으면서 나라를 지켜보려던 한말 지식인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3ㆍ1운동 직후 김규식, 조소앙 등은 1차대전 이후의 시계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회의인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참가했다.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서. 베트남에서도 호치민 등이 역시 같은 기대를 안고 베르사이유에 왔다. 그러나 한국과 베트남을 각각 강점하고 있던 일본과 프랑스는 모두 1차대전의 전승국이었고, 그들의 식민지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김규식이 이끈 한국대표단과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대표단은 일본과 프랑스의 반대로 본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못한 채 피눈물을 삼키며 파리를 떠나야 했다. 뜨거운 프라이팬을 벗어나니 불속이라던가,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난 한국과 베트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민족의 분단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분단은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국권 상실의 비극은 베트남에 먼저 찾아왔지만, 전쟁의 참화는 한반도를 먼저 덮쳐왔다.
닮은 꼴처럼 앞서거니 뒷서거니 비슷한 경로를 밟아 온 한국과 베트남, 어쩌면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서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렸을 한국과 베트남은 과부사정 홀아비가 안다고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어야 할 두 민족이었다. 그러나 우리와 베트남은 1960년대 중반 서글픈 아시아의 전쟁터에서 불행하게 만났다. 박치음 교수의 「미안해요 베트남」의 노랫말처럼 아름답게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베트남 전쟁. 마치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필사적인 투쟁을 벌였던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민족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전쟁에 잘못된 방식으로 끼어들었다. 만일 박정희가 진정한 민족주의자였다면, 그리고 월남망국사를 읽으며 베트남의 불행을 남의 일로 보지 않았던 민족적 지식인들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물려받았다면, 그는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베트남의 전장에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제 나라 젊은이들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베트남의 정글에 남베트남의 우방으로서 우리 젊은이들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한국은 미국의 우방으로서,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미국의 졸개로서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베트남을 거쳐간 한국군은 32만여명, 그 중에서 5천여명이 전사하고 1만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미국에게 잊혀진 전쟁이었듯이.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베트남에 대해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정글로 파견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에게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변변한 책 한 권 제대로 없었다.
베트남전쟁은 전세계의 지성과 양심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전쟁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의 두 주역인 베트남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군인이 투입되어 가장 많은피를 흘린 우리에게 베트남전쟁은 잊혀진 전쟁이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세월이 훌쩍 흘러 잊혀진 전쟁의 나라 베트남은 어느 새 우리 곁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로 다가와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투자국이자 교역국이다. 장동건과 김남주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한국의 유행가요는 곧 베트남에서도 히트한다. 여기에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한 이후, 축구열풍까지 더해진다.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에 가면 어김없이 베트남 쌀국수집이 성업중이다.
그러나 베트남과의 재상봉에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이주노동자 집단의 한 축을 이루는 베트남인들, 그들이 한국말을 배우는 교과서는 오늘의 한국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교과서를 펼치면 제1과에 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절실한 말 몇마디가 나온다. “때리지 마세요” “욕하지 마세요” “월급은 언제 주실 꺼에요?” ... 꼭 베트남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기업이 진출한 나라에서 어김없이 일어나는 문제이지만, 한국기업주나 관리자의 70년대식, 군대식 노동자 관리는 현지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아 심각한 갈등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그리고 베트남에 가면 이른바 라이따이한들이 있다. 물론 수많은 미군혼혈아에 비하면 적은 숫자이고 외모도 덜 눈에 뜨이지만, 한국인들이 떠나간 분명한 흔적이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미군혼혈아들이 태어났지만, 지금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차별과 멸시와 천대를 피해 스스로 이 땅을 떠나거나, 해외로 입양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30대에 접어드는 라이따이한들은 떠나갈 곳도 보낼 곳도 없는 곳에서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다. 최근 한국법원이 라이따이한들의 한국국적 획득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한사코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베트남과 관련하여 가장 가슴아픈 대목은 민간인학살 의혹이다. 베트남당국이 조사한 바로는 지금까지 약 80여건의 학살 사례에 피해자수가 9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9년 9월. 그 직후에 오랜 기간 묻혀져 있던 노근리 사건이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노근리와 베트남, 한 사건에서 우리는 피해자였고, 다른 사건에서 우리는 가해자였다. 우리의 위치를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달라 보이는 이 사건들은 기본적으로는 동맹국 군대에 의한 주둔국 주민의 집단학살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가 작년 가을부터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면서 우리는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거센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이라니, 그런 일은 없었고, 듣도 보도 못했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완강한 부인이 반론의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베트남에서의 현장취재 앞에 이런 반론은 힘을 잃었다. 사실 30대 후반 이상의 사람이라면 민간인 학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네 이발소에서, 중국집에서, 교련시간에, 군대에서, 예비군 교육장에서 우리는 그럴싸한 무용담으로 포장된 한국군의 보복전술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와 돌이켜 볼 때 더 끔찍한 사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빨갱이는 죽여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까지 더하여 - 이런 이야기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이 전부 사실로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점은 참전군인들이 모두 학살자나 전쟁범죄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이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는 불행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은 중대장급이 1935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일반 병사들은 대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했다. 그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의 살육을 겪었고, 그들이 겪은 모든 불행은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고, 동족도 아니며, 빨갱이일 뿐이었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은, 아니,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강력한 극우반공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빨갱이 사냥에 나설 심리적 준비를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냉전체제의 확립과정과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좌우익 상호 간의 동족 내부의 학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급속히 변모한 불운한 민족의 가난한 아들들이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병사들이 별다른 사전 교육없이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띠는 유격전의 현장에 배치되었다는 점이다. 전장의 흥분과 공포, 그리고 동료들이 죽고 다치는 데 대한 복수심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를 “빨갱이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보다 강력한 심리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당시의 고위지휘관들이나 참전용사들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전시복무규정을 들어 가며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증언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체포된 민간인을 그냥 보내라는 중대장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살이 자행되는 것이 현실이었던 터에 저 고상한 전시복무규정이 얼마만큼 지켜질 수 있었을까?
자유수호나 반공십자군이라는 거창한 명분과는 달리 가난한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정글로 간 이유는 돈,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별을 셋이나 단 한국군 사령관이 받는 돈이 태국이나 필리핀군 소대장인 중위급이 받는 돈에도 못미치고,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든 한국군 사병들이 제 나라 전쟁을 치르는 베트남군 사병들과 비숫한 돈을 받을 정도로 턱없이 작은 돈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달 50$ 남짓한 돈은 당시의 사정에서는 아주 큰 돈이었다. 민간인 학살 의혹이 한참 제기될 무렵, 필자는 한 참전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거친 전화도 많이 받았지만, 그 전화만큼은 달랐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께 송아지라도 한 마리 사드리려고 머나먼 남쪽 나라로 가는 배에 랐는데, 돈있고 빽있는 놈들은 다 빠지고 자기같은 사람들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는데, 그리고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런 자신이 용병이고 학살자냐고. 그 울음 섞인 전화에 필자도 가슴이 찢어졌다.
2000년 12월 15일 필자가 몸담고 있는 베트남전진실위원회와 참전군인들이 공동으로 민간인 학살 문제를 포함하여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다시 짚어 보는 공동토론회를 갖었다. 참전군인들 수 천명이 그 해 6월에 한겨레 신문사를 습격하여 격렬한 항의를 벌인 일도 있던 터라 분위기는 자못 긴장되었다. 300석이 넘는 방청석의 대부분은 군복을 입은 참전군인들로 채워져 있었다. 필자가 발표를 시작한지 채 5분도 안되어 - 민간인 학살 문제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 방청석에서는 “저 새끼 죽여!” “끌어내” “야 이 새끼야, 니 배떄기에는 총알 안들어갈 줄 알어!”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필자는 성능좋은 마이크의 힘을 빌어 30여분에 걸쳐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그런 분위기에서 겁이 전혀 안났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필자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두려움보다는 슬픔이었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나이에 군복을 입고 이 자리에서 이런 식의 행동을 해야 하다니... 바쁘게 바쁘게 달려 온 우리의 현대사는 한번도 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 본 적이 없었다.
필자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솜털이 보송보송한 너무나 귀여운 제자들을 보면서 아, 그 때 베트남에 내던져졌던 우리 병사들이, 이제는 초로가 된 그들이 이 학생들보다도 어린 아이들이였구나 하는 생각에 소스라치곤 한다. 왜 우리는 베트남의 정글에 이 어린 병사들을 보내야 했던가? 그리고 거기서 보낸 1년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아직 삶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어린 청년들을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면서, 그 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보이는 것은 모두 적이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라라고 가르쳤을 뿐이다. 이 젊은이들을 베트남의 정글로 보낸 자가 18년,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군내에서 승승장구한 자들이 정권을 이어받아 12년을 보낸 나라에서, 정작 참전군인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든 아무도 괘념하지 않았다. 피부에 반점이 돋고, 이유없이 아프고, 그리고 자식들마저 픽픽 쓰러져도 그게 고엽제 때문이란 것을 안 것도 미국에서 고엽제가 문제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진실은 귀중한 것이지만 진실과 마주선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는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무나 당혹스러운 진실을 마주하는 우리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죽음을 당한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힘겨운 생을 살아내야 했던 생존자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정신대 할머니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미국인들이 노근리를 비롯한 한국전에서의 민간인학살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처럼,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의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과 미국에게 과거사의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려 한다면, 우리도 베트남인들에게 남긴 상처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박정희의 정략적 목적을 위한 파병은 베트남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베트남에 미안함을 전하는 마음은 일차적으로는 우리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지만,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번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한 적이 없이 전쟁을 정당화해온 우리들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의혹이 제기된 이후, 한겨레21에는 남녀노소의 성금이 답지했다. 이 1억5천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지난 4월 베트남에서 평화공원 기공식이 열렸다. 국제민주연대 등 시민운동단체들이 조직한 베트남전진실위원회는 의혹의 진상규명과 아울러 평화공원 내에 평화역사기념관을 건립할 준비와 모금을 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였던 문명금, 김옥주 두 분 정신대할머니께서 생전에 기탁하신 수천만원의 돈이 평화역사기념관 건립의 종잣돈이 될 것이다.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산하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2000년부터 학살 현장 부근에서 진료사업을 벌이고 있다. 시민단체 나와 우리는 베트남과 친구되기란 사업을 벌이는 한편 베트남 현지를 찾아 학살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해 왔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도 베트남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갖고 평화의 세기를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도 2001년 8월 23일 방한한 천특렁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정부는 지난 1년간 베트남 중부지방에 40개의 초등학교를 건립했고, 중부 5개성에 병원을 지을 예정으로 있다. 특히 학교가 건립된 지역은 주로 민간인학살이라는 불행한 역사가 일어났던 곳이다. 일본군성노예 문제와 관련된 일본정부의 어물쩍거리는 태도와 비교해 볼 때, 한국정부가 취한 조치는 파격적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피해국이 요구하기 이전에 가해국이 먼저 사과를 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기왕에 사과를 하려면 진상규명의 토대 위에서 보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거친 뒤에 정부만이 아니라 범국민적인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베트남에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미라이 기념관이 있고 광주군 퇴촌면에는 일본군위안부이었던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과 정신대 역사기념관이 있다. 그러나 이 소중한 기억의 공간은 가해국 정부나 시민들이 아니라 피해국 시민들이 세운 것이다. 반면 한겨레신문사가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세우는 한-베 평화공원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가 공원 내에 건립을 준비 중인 평화역사기념관은 가해국 시민들이 사죄의 뜻을 담아 세운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갖는다.
민간인 학살 현장에 가면 증오비가 서 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민간인 학살 현장의 아이들은 이런 증오비 비문을 보며 자라고 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기록한 그 비석 앞에서 베트남의 아이들은 뛰놀고 있었다. 그 동안 우리는 베트남을 잊고 살았다. 우리도 큰 일들을 많이 겪었다. 정신없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었고, 암울했던 군사독재를 겪었고, IMF사태도 겪었다. 그리고 베트남을 다시 만났다. 베트남에서 총성이 멎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우리는 그 전쟁의 기억을 덮어 두었을 뿐 전쟁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우리 한민족을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또는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민족”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우리를 비추는 거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이 글은 황해문화(통권36호), ‘2002년 가을’호에 실린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