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장막의 회복, 이것은 오늘날 신사도운동의 핵심 가르침중 하나입니다.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다윗의 장막,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도시적 차원의 사도적 기름부음과 권위아래서 성숙한 연합과 온전한 승리가운데 대추수를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다윗의 장막이 신약의 교회이며,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유대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다윗의 장막(성전)이 다시 세워져야 하며 온 세상이 유대의 절기를 지켜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말씀을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특별히 다윗의 장막과 관련하여 아래의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 9:11)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행 15:11)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다윗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다윗시대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었고, 구약의 장막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나아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제사를 드렸던 곳으로서 다윗의 장막이 오늘날의 교회라면 우리도 소잡고 양잡고 우리 죄를 지성소에서 고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황소와 염소의 피로 제사 드리던 것을 단 한 번의 영원하신 제사(십자가에 죽으심)로 끝을 내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18)
신약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온 우주적 하나님나라의 모델인 교회(에클레시아)입니다.
두 번째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유대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무교절, 칠칠절, 유월절 등을 말합니다. 사실 구약의 절기들은 신약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되었으므로 지킬 이유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것을 다시 지켜야 한다는 말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는 초림되지 않았으며,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하시고 영생을 주시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약성경자체는 아직 오지 않은 약속이 됩니다. 이 얼마나 그릇된 가르침입니까?
세 번째로 다윗의 장막은 성전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장막을 구약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적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면, 다윗이후 솔로몬시대, 헤롯성전, 솔로몬 성전, 예루살렘 성전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장소적 개념의 성전)
그러나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던 솔로몬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시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보혜사로 보내주신 성령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이를 토대로 건물적 교회를 교회라 칭하지 않고 예배당이라 칭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3~22)
또한 구약의 이런 장막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모형과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이었고 비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율법의 완성이 되심으로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절기나 날들에서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쉽게 말하면 구약의 절기나 날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이런 것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히 9:1~10)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6~23)
지키지 않아도 될 구약의 율법적 짐을 지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이단적 가르침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바 의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3:1~22)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윗의 장막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가르침에 바울과 바나바, 그런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들과 다툼과 변론이 있었는데, 사도바울은 이에 대하여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었고 성령을 주어 증언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하사 우리나 차별이 없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 명하라는 바리새파의 가르침)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매지 못하던 멍에를 지우려 하느냐며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장막처럼 쉬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내용도 아니며 우리도 다윗이 이런 장막에서 예배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이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구약의 율법으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장막”처럼 성경말씀을 인용했다고 해서 다 성경적이거나 성경적 운동이 아닙니다. 예수님, 하나님 운운한다고 덮어놓고 용납해서는 안 되는 시대입니다. 더욱 분별하고, 더욱 말씀을 살펴보고, 이러한 가르침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곡된 것은 없는 살피고 신중하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 때입니다.
in Jesus Christ..
배병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