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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강도]가 주는 몇 가지 교훈들
(Some Lessons from the Robber at the Cross)
여기서는 십자가상의 강도가 직접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 뿐만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건과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수 있는 교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카 23장
39 매달려진 행악자들 중 하나가 그분을 모독하여 이르기를 “네가 그리스도여든, 너 스스로와 우리를 구원하라.”하니 40 다른자가 대답하여 그를 꾸짖어 이르기를 “너는 동일한 정죄를 받아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41 우리는 과연 우리가 행한 바에 당연한 것을 정당하게 받거니와 그는 아무것도 잘못을 행하지 아니하였도다.” 42 그리고 그가 예수께 이르기를 “주여,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43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상에 매달렸던 한 행악자가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얻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 행악자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비록 소극적으로라도 욕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태 27장
44 그분과 함께 못박힌 강도들도 똑 같이 그분을 욕하니라.
마가 15장
31 마찬가지로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조롱하며 함께 말하기를 “그는 남들은 구원하였으되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게하여 우리로 보고 그를 믿게하라.” 하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
아마도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 그 한 강도는 처음에는 다른 강도가 욕할 때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다가 예수님의 행하시는 바와 과거에 들었던 소문등을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자신은 행한 바에 따라 마땅히 형벌 받는다고 깨닫고 반대로 예수님은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벌받는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믿음을 예수께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의 사연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배우게 됩니다.
(1)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 가 확증됩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믿음+인간의 노력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 곧 구원을 얻습니다.
이 강도는 율법을 지켜서 낙원에 가게된 것도 아니며, 헌금이나 십일조를 많이 내어 낙원에 간것도 아닙니다. 마태는 그가 강도였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율법으로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로 그분 앞에서 어느 육체도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나니, 왜냐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임이라.
그는 장로도 집사도 아니었으며, 예배당 다닌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나, 유대인으로나 신앙생활을 한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보여드릴 아무런 선한 행위도 한적이 없습니다. 그가 오직 내놓은 것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로 너희가 구원을 얻었음이며, 또한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그가 내놓은 믿음의 고백은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서 볼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극히 낮아진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그분의 나라를 믿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마태 27장
41 마찬가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파리새인들이 함께 조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였으되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만일 이스라엘의 왕이어든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해왔으니 그분이 저를 기뻐하시면 그분으로 하여금 지금 저를 구원하시게 하라. 그가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 이다 하였음이라.
이런 식의 비방은 오늘날 불신 비기독교인들이 흔히 기독교 성경의 진리를 비방하는 방식과 아주 흡사합니다.
이에 반하여 이 십자가상의 강도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아무런 선행도, 아무런 구출조치도 할수 없었지만 그 자신의 운명을 위하여 가장 가치있고 보상받는 마음의 고백을 행한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만왕의 왕,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육성으로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확답을 얻었습니다.
로마서 10장
9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 10 왜냐하면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름이라.
이 강도는 예수를 주로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못보았으며 대신 예수님이 그분의 나라에 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이 그분의 나라에 임하실 것이라는 것을 대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소망과 관련되어 있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요약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믿음, 죄사함에 대한 믿음, 부활의 소망, 그분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오늘날 수많은 종교들은 행위를 강조합니다. 심지어 기독교라고 하는 어느 종파나 로마 카톨릭등은 사실상 믿음+행위를 가르치는 종교들입니다.
(2) 연옥설(Purgatory, Purgatorium)이 부정됩니다.
카톨릭은 특별히 성인으로 추대되지 않은 모든 신자들은 반드시 연옥으로 간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연옥설은 무수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카톨릭의 우스꽝스러운 교리임이 자주 드러나기에 요즈음에는 모든 사람이 연옥에 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살며시 다음과 같이 교리를 수정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연옥설이 생겨난 것도 4세기 말에 어거스틴이 그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
처음부터 카톨릭이 주장했던 바가 아니라, 11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주장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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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령: 이는 세상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하고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영혼을 말한다.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잠벌(暫罰)이 남아 있는 영혼은 일정한 기간 동안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정화(淨化)의 기간이 끝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사는 자들의 기도와 공로, 그리고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연령을 위해 위령 기도, 장례 미사, 위령 미사를 드리도록 하고 있다. 특히 11월은 위령의 달, 11월 2일은 위령의 날로 정하여, 연령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있다. → 모든 성인의 통공
2. 연옥: 연옥은 연령이 하느님 대전에 나가기 위해, 즉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연옥불에 의해 정화되는 곳이다. 그러나 이는 일정한 장소라기보다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연옥은 최후 심판 후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연옥은 성서에는 확실하게 계시되지 않았으나, 성전(聖傳)에서는 확실하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13세, 우르바노 8세 등의 교황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를 신조로 정의한 바 있다.
(http://info.catholic.or.kr/term/term_view.asp?ctxtIdNum=809)
카톨릭은 항상 다수 대중들을 위하여 교리들을 수정해갑니다. 그것이 카톨릭이라는 말의 뜻과도 통합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이란 보편적인, 보편타당한, 그런 뜻을 갖고 있으며 바로 세속, 세상과 짝하여, 세상을 좇아가는 종교가 바로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진정한 기독교는 죄많은 인생들을 기반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는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며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좇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풍속을 좇는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종교와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런 카톨릭이 이런 연옥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대체로 성경에서는 찾아볼수 없고 마카베서 특히 마카베 하 12장 43-46절에서 그 근거를 가져옵니다.
다음은 카톨릭 대사전의 설명입니다.
가톨릭에 있어서의 연옥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죄를 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에 의해서 죄를 정화(淨化)한다고 하는, 천국과 지옥(地獄, infernum)과의 사이에 있는 상태 또는 장소를 말한다.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서 지은 자 또는 소죄(小罪)를 지은 의인의 영혼은 그 죄를 정화함으로써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바로 이 ‘일시적인 정화’(satispassio)를 필요로 하는 상태 및 체류지가 ‘연옥’이다. 가톨릭의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예지,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 및 중세의 카타리파(Cathari), 발두스파(Waldenses) 등 이단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전구와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루터는 ≪연옥론철회≫(Widerruf vom Fegefeuer, 1530)에서 연옥신앙을 부정하였다. 로마 교회가 연옥에 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내린 것은, 리용 및 피렌체의 합동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Urbanus)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였다.
연옥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의 경우 은총의 도움에 의해서 행하여진 애덕(愛德)에 따른 통회(痛悔)와 기도에 의하여 소죄가 정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옥에 있어서도 소죄가 정화된다. 하지만 죄에 대한 슬퍼함이 벌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착한 일을 하거나 공덕을 쌓는 상태가 아니라, 단지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내세(來世)에서는 공덕을 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옥의 영혼은, 신이 내리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고, 각자의 죄에 상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의 신자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의 전구에 의해서 단축 또는 경감된다.
그 다음 연옥의 영혼은, 신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연옥의 영혼은 지상의 사람들을 위하여 전구할 수가 있다. 그들은, 지상의 신자에게 연옥의 영혼의 전구를 기도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옥의 영혼에 대하여 성 토마스는, 연옥의 영혼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지는 못하며, 또한 지상의 일에 관하여 지식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us, 1542∼1621), 수아레스(Francisco de Suarez, 1548∼1617), 구트베를레트(Konstantin Gutberlet, 1837∼1928), 셰벤(M.J. Scheeben, 1835∼1888), 바우츠(Bautz), 두르스트(B. Durst)등 신학자는, 연옥의 영혼이 그 형벌 상태 아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는 공덕이 없지만,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공심판(公審判) 뒤에 연옥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하나의 영혼에 있어서는 그 벌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정화가 끝나면 영혼은 곧 천국으로 들어가 버린다.
[참고문헌] F. Schmid, Das Fegfeuer, 1904 / M. Landau, Holle und Fegfeuer im Volksglauben, 1909 / J.P. Kirsch, Sprazzi, d'oltra tomba, Roma 1924 / V. Kerns, The Traditional Doctrine of Purgatory, IrEccl Rec 80, 1953 / M. Schmaus, Vom den letzten Dingen, Aufl. 5, Munich 1959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2422
위에서 카톨릭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카타리, 발덴지안 들은 기독교의 순수한 믿음과 성경말씀을 지켜온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카톨릭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주 성경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과거 제가 자주 접했던 연옥 설명은 교황에 의해 성인 혹은 성녀로 선언되지 않은 모든 카톨릭 신자들은 연옥으로 간다. 고 교리문답에 나와 있었습니다. 요즈음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는 연옥에 가지 않고 곧바로 낙원으로 가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는 살아서 지은 강도(혹은 강도 살인)의 죄에 대한 갚음을 실행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즉 보속을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위에 기술된 카톨릭 교리대로 하면 그는 연옥으로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연옥이 낙원과 동일하지 않은 이상, 카톨릭의 연옥 교리는 틀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카톨릭 신자가 다음과 같은 신앙상담을 요청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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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죽은 후 죄값 치른다는 연옥, 두렵기만 합니다죽은 후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란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마음 중심에서 믿으면 낙원에 곧바로 가며 이 강도가 곧바로 낙원에 갔듯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연옥에 가지 않으며 연옥이란 곳이나 과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겠습니다. 연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죄사함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구원얻지 못한 증거요, 거듭나지 않은 증거이며, 지옥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불신 영혼들이 로마 종교 가톨릭 안에 많이 있다는 것은 슬픈일이며 우리 모두는 친인척 관계로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들에게 전도의 손길을 펼쳐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중죄를 지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곧바로 낙원에 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연옥에 간다는 카톨릭의 연옥설은 성경의 진리와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Purgatory (Lat., "purgare", to make clean, to purify) in accordance with Catholic teaching is a place or condition of temporal punishment for those who, departing this life in God's grace, are, not entirely free from venial faults, or have not fully paid the satisfaction due to their transgressions.
카톨릭 가르침에 따른 연옥이란 이 세상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떠나는 사람들로서 용서될만한 잘못들이 전혀 없지 않은 혹은 그들의 잘못들에 응당한 댓가를 충분히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임시 형벌의 장소 혹은 상태이다
(카톨릭 사전)
making a gathering . . . sent twelve thousand drachmas of silver to Jerusalem for sacrifice to be offered for the sins of the dead, thinking well and religiously concerning the resurrection (For if he had not hoped that they that were slain should rise again, it would have seemed superfluous and vain to pray for the dead). And because he considered that they who had fallen asleep with godliness, had great grace laid up for them. It is therefore a holy and wholesome thought to pray for the dead, that they may be loosed from sins. (2 Maccabees 12:43-46)
http://www.newadvent.org/cathen/12575a.htm
이들은 교리가 우스꽝스럽게 보이면 수시로 바꿉니다. 이 연옥설은 죽은 자에게 기도하는 잡신 사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근거로 마카베 하 12장 43-46을 가져옵니다.
(3) 침례중생주의( Baptismal Regeneration) 가 배격됩니다.
침례중생주의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요한 3:3-7)에서 물을 물 침례로 해석하여 사람이 물속에 예수님 이름으로 잠기고 나면 거듭난다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로마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영국 성공회, 북미 감독교회, 그리스도교회, 장로교의 대부분, 루터파의 상당 부분이 이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이 교리와 유아세례 혹은 유아침례는 항상 같이 다니므로 다음의 유아세례 실행 교단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Most Christians practise infant baptism.[4] They include the Roman Catholic Church, the Eastern Orthodox Church, Oriental Orthodoxy, Armenian Apostolic Church, Assyrian Church of the East, the Anglican Communion, Lutherans, Presbyterians, Methodists, some Church of the Nazarene,[5] 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6] the United Church of Canada, the United Church of Christ (UCC), and the Continental Reformed.
http://en.wikipedia.org/wiki/Infant_baptism
그런데 위키피디아에 보시면 침례중생주의를 믿는 교단으로 침례교를 포함시킨 것을 보는데 그것은 위키가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원래 침례교의 정의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진정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서 거듭남이 확인된 사람에 한하여 침례 베푼다는 것이 침례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다음의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Adherents of this doctrine include Baptist,[2] Roman Catholic[citation needed], Orthodox[citation needed] and Anglican[citation needed] Churches (especially its Old High-Church and Anglo-Catholic factions). It is also taught by Mormons.[citation needed] Lutherans are thought to purport this doctrine,[citation needed] but article 251 of Luther's Small Catechism recognizes this is not an absolute necessity, only an ordinary ministerial means that if despised in unbelief, condemns on account of its rejection in unbelief. Churches associated with the Restoration movement, which includes the Churches of Christ, are sometimes alleged[3] to support the doctrine of baptismal regeneration, a contention which the Restoration Movement churches themselves deny.[4][5]:133
http://en.wikipedia.org/wiki/Baptismal_regeneration
"If by baptismal regeneration the accusers mean that the act of immersion inherently regenerates or converts or saves a person, then the charge is not true. From the earliest days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the teaching has been that the only proper subjects for baptism are those who have faith in Jesus Christ as the Son of God and who repent of their past sins. It is the blood of Jesus that cleanses people from all sin by his grace. Baptism is not a ritual act that has inherent redeeming power. It is not true that when people “get baptized,” they are automatically “born again.”" Douglas A. Foster, "Churches of Christ and Baptism: An Historical and Theological Overview," Restoration Quarterly, Volume 43/Number 2 (2001)
침례중생주의에 의하면 물속에 잠기는 행동이 내재적으로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거나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장은 틀린 것이다…….
침례는 사람을 내면적으로 구속하는 능력을 가진 의식이 아니다. 사람이 침례받을 때 자동적으로 그가 거듭난다는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http://en.wikipedia.org/wiki/Baptismal_regenera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소위 범 기독교 교단이라고 불리우는 기독교 세계 인구의 95% 이상은 이 침례중생주의를 믿고 가르치는 교단에 속해 있습니다. 이것에 반대하는 교단은 대부분의 침례교, 플리머스 형제단, 웨슬레안, 아미쉬, 메노나이트, 사도교회( Apostolic Christians), 안식일교, 일부 오순절교회,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입니다.
이들의 침례중생주의 근거 주장은 대개 앞서 언급한 요한복음 3장 3-7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물속에 침례받거나 세례받으면 거듭난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과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물은 바로 죄로부터 인간들을 정결케하는 정결능력을 중심으로한 하나님의 말씀, 혹은 십자가 이전의 율법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씻겨지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서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가시적 물 H2O 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그림자요 가시적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말씀이 빠진 채로 물속에 잠겨졌다가 나오면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거듭난다고 믿는 것은 마치 물귀신(Aqua- 신) 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수영장에서 100번 다이빙 하며 뛰어들었다가 나와도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으면 거듭나지 못합니다. 거듭남은 말씀을 들음으로 죄를 깨달아 회개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음을 믿음으로 물로 씻음받음같이 깨끗하게 되고,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성경 말씀이 믿어지게 될 때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황당한 교리를 믿는 사람이 워낙 많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침례중생주의를 주장한 사람으로는 어거스틴이 있으며 그는 로마 카톨릭의 교부로 알려졌습니다. 장 칼뱅(존 칼빈)은 이 어거스틴을 그의 책 기독교 강요 ( Institute of Christian Religion)에서 400번 이상 언급하며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의 침례중생주의를 따랐습니다. 그의 직접적인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의 인용글은 헨리 비버릿지( Henry Beveridge) 가 번역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책에서 옮기온 것입니다.
3권 3장 믿음과 회개에 의해 거듭남
11절 When it is said that God purifies his church, so as to be “holy and without blemish” (Eph 5:26, 27) that he promises this cleansing by means of baptism and performs it in his elect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를 거룩하고 흠없게 하시도록 정결케 하신다고 하셨을 때(엡 5:26-27) 그분은 침례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 정결케 하심을 약속하셨으며 그분의 택하신자 안에서 이를 실행하신다.
13절
We will produce some other passages to make it more apparent what his sentiments were. In his(Augustine) second book against Julian, he says “the law of sin is remitted in the spiritual regeneration and remains in the mortal flesh because the guilt is forgiven in the sacrament by which believers are regenerated….. Therefore the law of sin (which was in the members of this great Apostle also) is forgiven in baptism, not ended”
… 어거스틴은 그의 줄리안에 대한 둘째 책에서, 죄의 법이 영적 거듭남에서 면제되지만 죽을 몸안에는 남아있는데 이유는 허물이 성례에 의해 사함받기 때문이며 그 성례로 믿는자들은 거듭난다… 그러므로 죄의 법(이 위대한 사도의 지체들안에도 존재하는) 은 침례에 의해 용서되어진다, 다만 끝나지는 않는다.
제 4권 15장 4절
I know it is a common belief that forgiveness, which at our first regeneration we receive by baptism alone, is after baptism procured by means of penitence and the keys (see chap. XIX sec 17). ….
What is the sign and evidence of that washing if it be not baptism? We see, then, that that forgiveness has reference to baptism.
우리의 첫 거듭남에서 우리가 오직 침례(세례)에 의해서만 얻는 죄사함은 고해성사와 열쇠들(성례들?)의 수단으로 확보되어진 침례 후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씻음의 징표와 증거가 침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죄사함이란 침례를 언급함을 우리는 알수 있다.
제 4권 15장 20절
But there is a danger that he who is sick may be deprived of the gift of regeneration if he decease without baptism! ( p 525)
병든자가 침례받지 않고 죽으면 거듭남의 은총을 박탈당할 위험이 있다!
제 4권 16장 20절
In fine, the objection is easily disposed of by the fact that children are baptized for future repentance and faith.
세밀히 말하면, 반론은 어린이들은 미래에 회개할 것과 믿음을 위하여 침례받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쉽게 분쇄된다.
제 4권 16장 25절
By “ water and the Spirit “ therefore, I simply understand the Spirit, which is water.
물과 성령에 의하여, 라는 말씀으로부터 나는 단순하게 성령이 물이라고 이해한다.
이외에도 이 16장에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교리들이 칼빈에 의해 주장되어져 있습니다. 시간이 현재는 더 이상의 번역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요약합니다.
이러한 황당한 교리에 의해 거듭남이 물의 침례 혹은 물세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바탕위에 세워진 교회들에서는 비록 그 교리에서 떠났다 할지라도, 인간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관계가 회개를 통하여 형성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피흘리심과 죽으심에 의한 대속적 희생에 의해 자기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확신을 가짐으로 거듭남이 고백되고 증거되어진 사람에 한하여 침례를 실시하는 성경적 진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워낙 많습니다.
거듭남은 내면적 회개에 의해 시작되어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완성되며 그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유다서 3절)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이 거듭남의 경험이 없으면 아직 중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십자가 상의 한 강도는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는 성령님께서 안에 내주하시는 시대라기 보다는 성령께서 개인에게 함께하시는시대를 살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가 행한 고백은 구원얻기에 충분한 회개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의 주,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주님으로부터 듣는 순간 거듭났다고 저는 분별합니다.
다시 말하여, 이 십자가상의 강도는 물침례나 물세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서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비록 그는 침례받은 적이 없었지만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침례중생주의를 배격하는 사실입니다.
침례중생주의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얘들아, 이 강도가 믿음을 고백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사람을 위하여 물을 퍼다가 밑에서라도 끼얹어주어야 한다”그러나 그렇게하시지 않았습니다.
침례중생주의자들은, 이 예를 들어서 반박하면, 이 사람은 십자가의 완성 이전의 사람이기 때문에 예외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의 코넬료 사건에서도 부정됩니다.
사도행전 10장
44 페트로가 여전히 이 말씀들을 말하고 있는 동안,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사람들에게 내려오시니, 45 페트로와 함께온 자들 모두 곧 할례인중에 믿는 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졌음을 인하여 감탄하니라. 46 왜냐하면 저희가 방언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존귀히하는 것을 그들이 들었음이라. 그때에 페트로가 대응하여, 47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은 이사람들이 물로 침례받지 말도록 누가 능히 금할 수 있겠느냐?” 하고 48 저희가 주의 이름으로 침례받도록 그가 명하니라. 그때에 저희가 그에게 며칠을 더 머물도록 청하니라.
이 대목에서 보시면, 코넬료 일행이 먼저 성령을 받은 다음(성령으로 거듭난 다음) 그 믿음의 바탕위에서 그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먼저 침례를 받아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침례란 거듭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공표의식입니다. 그 거듭남은 듣고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십자가상의 강도 사건은 분명히 침례에 의해 거듭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침례중생주의는 세례구원론이라고도 불리우며,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가 16장 16절, 사도행전 2장 38절, 22장16절 갈라디아서 3장 27절, 에베소서 5장 26절 디도서 3장 5-6절등을 가져옵니다.
이 침례중생주의에 관하여는 제가 쓴 글 “ 사도행전 8장 36-40 절이 주는 여섯가지 교훈들”에서 다시 상술하였습니다.
(4) 카톨릭의 사도신경의 일부가 모순됨을 드러냅니다.
참고 : 현재 개정된 사도신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ctxtIdNum=1371
앞서 말했듯이 카톨릭은 그들의 교리를 수시로 수정해갑니다. 여기서는 저승에 가셨다고 말합니다. 저승이 낙원과 같다는 뜻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성경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용어입니다.
반면에 카톨릭은 다음과 같이 사도신경을 써놓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신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고성소에 내리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 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신을 믿으며,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 신경
이 고성소란 라틴어의 Limbus, 영어의 Limbo 를 번역해놓은 것인데 얼마전에 교황청에서 이 개념을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사도신경에는 그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그들의 림보에 대한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계(境界)라는 뜻의 라틴어 'limbus'에서 유래하였다. 라틴 신학에 의하면, 이미 죽은 이들이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완전히 들지는 못했지만 벌을 받고 있지는 않은 상태에서 머무르는 곳을 지칭한다. 구약의 조상들이 그리스도가 강생하여 세상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는 곳([라] limbus patrum [영] limbo of Fathers)과 영세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幼兒)의 경우와 같이 원죄 상태로 죽었으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무르는 곳([라] limbus infantium [영] limbo of infants) 등 두 가지 뜻이 있다. 후자의 경우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영세를 통해 얻은 은총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라는 성경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지복을 받을 수는 없지만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자연적 상태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교회의 고성소의 존재를 명확히 정의한 적은 없으나 여러 번 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하였다. 고성소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 중에는 얀센주의자가 많은데, 이들은 예정설(豫定說)을 통해 인간을 원죄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모든 은총, 즉 성세성사까지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즉 카톨릭은 예수님이 고성소(림보) 혹은 저승에 가셨다가 사흗날에 부활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의 말씀은 예수님이 그 강도와 함께 낙원에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승과 낙원이 같거나 림보와 낙원이 같지 않다면 이 주장은 틀린 교리가 되겠습니다. 카톨릭이 그런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베드로 전서 3장을 근거로 함이 있습니다.
페트로 전서 3장
18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들을 위하여, 의인이시면서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당하셨음은,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심으로, 그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고자 하였음이며, 19 그것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그분께서 가셔서 전파하셨으니,
카톨릭은 예수님이 죽으신 3일 동안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언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분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선포하셨다는 뜻이지 그들이 구원얻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낙원과 지옥이 동일하지 않다면 예수님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지옥에 내려가리라, 하시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카톨릭 사도신경
1. 전능하신 천주 성부
2.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3. 그 외아들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5. 성령으로 인하여
6.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7.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8.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9.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10. 하늘에 올라
11.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12.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13. 성령을 믿으며
14.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15.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16. 죄의 용서와
17.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18. 아멘.
개신교의 사도신경은 “ 저승으로 가시어”를 빼버렸습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70182
(5) 삼위일체나 기타 교리에 대한 인식이 없더라도 구원얻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십자가 상의 강도는 삼위일체 교리라든지, 환난전 휴거론이라든지, 재림의 시기라든가, 목사제도나 장로 집사직에 대한 교리라든지, 침례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교훈이라든지, 천년왕국과 부활의 순서라든지에 관하여 별로 아는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실히 그리스도로 부터 낙원에 들어가리라는 보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믿느냐 여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러한 문제가 여러가지로 겹쳐서 성령님은 에너지나 전기처럼 인격이 없는 하나님의 활동력일 뿐이고 인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요한 14:26, 16:13) 를 힘입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결코 거듭날 수 없는 그릇된 신념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에서 이 강도는 예수님이 주이심을 믿었으며, 그분의 왕국이 있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6) 삼위 하나님의 차별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이 그를 통해 증거되었습니다.
그 날의 십자가 밑에서는 장로들, 서기관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관원들, 그외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루카 23장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한편 저희는 그분의 옷들을 나누며 제비를 던지더라. 35 백성은 구경하며 섰더라. 관원들도 저희와 함께 조롱하며 이르기를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그가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자, 그리스도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게하라.”36 군인들도, 다가와서 그분께 신포도주를 주며, 그분을 조롱하여, 37 이르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 스스로를 구원하라”
마태 27장
41 마찬가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파리새들과 함께 조롱하여 가로되 42 “저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였으되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만일 이스라엘의 왕이어든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해왔으니 그분이 저를 기뻐하시면 그분으로 하여금 지금 저를 구원하시게 하라. 그가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 이다 하였음이라.”
이 사람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앙생활 많이 하는 교회인들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방의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강도는 놀라운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바로 이 비난의 대상인 사람이 주이심을 믿었으며, 그분의 왕국이 있음을 믿었던 것이며, 비록 죽더라도 그곳에 갈수 있는 소망을 갖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깨달음에는 성령님께서의 도우심이 있었을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천한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찾으심을 알수 있으며 반면에 인간의 종교 조직, 종교적 명성이나 지위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선지자로서 사셨으며, 이제 그분은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인류 모두의 죄들을 위하여 드리는 사역을 실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심한 고통중에서도 그분은 이 영혼을 인도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끝까지 사랑하시더라는 말씀(요한 13:1)이 여기서도 다시 증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예수께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제는 만왕의 왕으로서, 천년왕국의 국왕으로서 취임하시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날들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한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심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보라 어떠한 사랑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우도록 하셨는가 (요일 3:1)
http://cafe.daum.net/Eliyahu?t__nil_cafemy=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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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7년 환난전 휴거설의 전도사인 흠정역의 역자 정동수씨도 예수님이 지옥에 가셨었다고 믿는 사람 입니다.
그가 주장하고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시편 16:10절과 베드로전서 3장 19절인데 번역을 맡은 알 레이시의 영향을 많이 받은것 같습니다. 알 레이시라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이던데...
이런 잘못된 믿음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내논 성경을 언제나 바꾸게 될수 있을지, 현재는 대안이 없어 흠정역을 보고 있지만 답답 합니다.
저도 그 알레이시 글을 보았는데 특별히 번역하여 보급할 가치를 못느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과학적인 추론을 해볼수는 있는 것이므로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는 있겠으나 성령님을 좇아야 함을 생각할 때 그리 옳은 생각들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의 스올은 지옥이 아니라 그냥 음역 ( 부활대기 장소)로 보이기 때문에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 3장 19절은 감옥(지옥?) 에 선포하였다는 뜻이고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개역 한글로도 몇 십년 지냇는데 앞으로 좀 못 참겠습니까? 성도게시판 읽어보셨지요?
알 레이시는 소설가이며 목사이지요..피와 UFO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천년왕국에서도 동물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지요..UFO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은데, 이 분이 이 분야 연구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고 싶습니다..정동수 목사는 존 맥아더 주니어 목사가 피에 대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배도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더군요.
정동수님은 존 맥아더 따라가려면 한 참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북미에서는 아주 좋은 평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얻고 있는 사람이 존 맥아더인데, 역시 칼빈주의자라서 예정론을 옹호합니다. 천년왕국에서 동물제사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예수님의 속죄 희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분별됩니다.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과 행함의 혼돈....믿음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믿음과 행함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임을 알며, 갈 2:20절로 믿음을 확증하고 찬송할 것입니다
갈 2:20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날마다 재확인하는 삶이 바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믿어집니다. 실천적인 믿음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동수씨는 미 독립 침례교내의 유명한 박사들의 이론이라면 무엇? 도 다 받아들이는 사람 같습니다.
환난전 들림받는 사상, 7년간 공중에서의 혼인 잔치, 동물 희생제 회복, 성경 번역자가 자신의 믿음의 바탕에서 면밀히 살피며 상고하지 않고 자신도 유명 해지고파 남의 것을 좇아 책들 펴 내는데(책장사) 에 주력하다보니 스스로 우매함에 빠진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 또 자기 야심에 빠져 교회를 하며 좌우 분간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복음의 독을 먹이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미 독립침례교가 벌떼같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피에 대해 존 맥아더를 공격할때
그의 글을 지지하는 데이브 헌트씨의 반박론의 글을 읽으면 누가 옳게 분별하고 이해하는가 어려울것이 없는데 정동수씨처럼 오로지 독립침례교,한편에만 치우쳐 추종 하다보면 한눈만 뜨고 걷는 격이 됩니다.
몇년전 존 맥아더씨와 카톨릭 사제,밥존스 jr, 이 세사람이 레리킹쇼 TV 에 불려나와 카톨릭에도 구원이 있는가? 대담할때 맥아더씨의 응수와 복음주의자로서의 탁월함을 보았습니다.
그 같이 복음을 바로 아는이가 뉴 킹제임스역을 지지 하는데에는 또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아만님, 참으로 장군님 답습니다! 데이브 헌트 말이 나왔으니, 그의 글이나 생각을 접해보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는 강력한 반카톨릭이고, 강력한 반칼빈주의자입니다. 그는 칼빈주의를 매우 잘 분석하여 비판하였습니다. 뉴킹제임스는 최상의 교재는 아니지만 현대영어로 된 성경으로는 대안이 된다고 믿어집니다. 뉴킹제임스는 약 1700 구절이 변개되었다고 말합니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몇십구절일 것입니다.
십년전 데이브 헌트씨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그의 뉴스레터를 받아 읽은지는 더 오래 되었고 성경해석에 있어 예리하고 날카로우며 이 어두운 마지막 시대에 긴히 쓰이는 사람 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아만님, 데이브 헌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다섯 안에 당연히 꼽을 사람입니다. 그분의 환난전 휴거 신념에는 제가 반대하지만 그 수많은 글들은 참으로 주옥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우 날카롭고 강력한 글들입니다. 제가 감동하며 읽은 책은 " What Love is this?" " Misrepresentation of God by Calvinism 이었는데 캐나디언들도 읽으려면 아주 힘들어하는 영어로 쓰여 있습니다. 대개 모르는 단어가 페이지당 20개 정도는 나옵니다. 이분은 카톨릭에 대한 수많은 반박글들을 써놓았습니다. 그분이 형제모임에 속해있다는 것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예. 데이브 헌트씨가 미국내 유명하다는 비 성경적인 거성들과 맞서며 밝혀주는 사역은 훌륭하고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만 형제모임의 세대주의사상을 갖고 있는것이 그의 맹점 입니다.
저도 '베레안 콜'에서 나오는 책자들을 다 읽고 있습니다. 그중에 "짐승위에 탄 여자"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지 10년도 넘었습니다. 모든이들이 한번쯤 읽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한가지, 그분의 매년 집회 itinerary를 보면 80%가 갈보리 교회로서 이것은 풀리지 않는 혼자의 의문입니다.
미국의 갈보리교회는 척 스미스가 founder 로서 어디던 롹 뮤직 복음성가,
반바지, 슬립퍼, 남자들의 등밑에 늘어진 긴머리,코걸이, 귀걸이,
문신 등으로 어지럽기짝이 없습니다.
미국내의 갈보리교회는 주로 젊은층들인데 그들의 사역자들부터 같은 모습이니 밑에 있는 사람들이야 당연히,,,그분은 그들의 교회 강단에서 설교때 단 한마디도, 한번도,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것이 의문으로 남습니다.
중심이 더 중요하다 하겠지만 속이 바뀌면 겉 사람의 모습도 변화 할텐데
카톨릭의 음모와 뉴 에이지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잘못된 목사나 학자들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는점은 시원 합니다만 그분이 매해 같은 갈보리교회의 초청을 받아 순회 하는 그들 교회들이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데이비드 헌트씨는 크리스챤들의 그러한 모습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합니다.
최근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개혁주의 장로교 목사인 50년도 더 된 훼밀리 라디오 설립자'헤롤드 캠핑'씨의 --내년으로 종말을 맞는-- 사상을 반박, 매우 흥미 진진 합니다.
형제교회내의 유명한 신학자로서 데이비드 헌트씨를 꼽는다면 또 한편에 있는 개혁주의 장로교 헤롤드 캠핑씨도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그가 끼칠 영향과 파장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열열한 복음주의자 한국사람들도 헤롤드 캠핑씨의 사상을 따르고 있는데 내년(2011) 5월과, 그리고 10월21일이면 세상이 불로 완전히 멸함을 받는 끝 이 된다고.
하루살이 종말론자들인 이단들과는 전혀 다른 헌트씨의 상대가 될 정도의 부류의 사람들이라서 관전 하고 있습니다.
Harold Camping : http://en.wikipedia.org/wiki/Harold_Camping
이분은 원래 네델란드 개혁교회 배경을 갖고 있고 건설 토목회사를 경영하여 돈을 번다음 Family Radio, Family Bible Hour 프로그램을 북미 전역에 보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캐뜨린에 살때에는 그곳 형제모임이 전적으로 이 방송을 후원하였습니다. 그 모임에 네델란드계가 많은 까닭도 있엇는지 모르겠는데 비교적 가까이 지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이트에 보면 내년 5월21일에 휴거가 일어나고, 10월 21에 종말이 온다고 합니다. 이 시한부 종말론은 전체적으로 환난전 휴거론자들의 일 분파로 밖에 안보입니다. 그들은 계시록의 전체 윤곽을 파악하지
엉터리 종말론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도 2012년 종말을 주장하는 분이 어떤 해석들을 써놓았는데 모두 엉터리들입니다. 데이브 헌트의 다른 글들은 참으로 명쾌합니다.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말씀하신 갈보리 교회란 갈보리 침례교회가 아닌가요? 제 아들이 그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들이 락음악과 같이한다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저는 갈보리 뱁티스드를 건전한 교회들로 분류해왔습니다.
갈보리 침례교회, 갈보리 교회, 갈보리 채플은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만 십여년전 제가 만난 데이브 헌트씨는 (갈보리 교회) 에서 였습니다.
갈보리 벱티스트는 거의가 독립이나 모두는 아니고 제가 말한 것은 데이브 헌트씨의 일년 일정을 보았을때 척 스미스의 라인 아니면 한때 그의 제자였던 (Harvest Crusade)의 Greg Laurie 라인의 갈보리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미 독립 침례교에선 그분이 환영 받질 않는것으로 들어 알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주의 일지라도 독립 침례교편에서 형제교회와 다르다고 생각 하는것 같습니다.
잘 아는 미국인들이 갈보리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해롤드 캠핑의 황당한 계시록 해석은 1994년에 종말이 온다고 한 예언이 실패로 끝난데서 더욱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을 강력히 비판한 사이트는 다음으로 보입니다.
http://www.jesus-is-savior.com/Wolves/harold_camping.htm
헤롤드 캠핑씨의 주님이 오신다는 책 "1994?"는 나중을 생각해서인지 (?) 을 달아 노았더랬습니다. 믿으면서도 불안해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날이 허무하게 지나갔을지라도 너그러워 계속 따르고 있습니다.
캠핑씨의 변명은 자기가 숫자 계산을 잘못 했는가보다,였는데 이번엔 (?)이 붙지 않은것을 볼때 자신 있는가 봅니다.
캠핑씨의 성경해석을 믿는 저 아는 사람들이...재산은 정리하지 않은채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보리 뱁티스트 교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독립교회들입니다.
http://www.bing.com/search?q=calvary+baptist+church&filt=all&qs=HS&sk=&pq=calvary&sp=1&sc=8-7&first=11&FORM=PERE
그렇다면 청바지와 락음악은 일부에 국한하지 않을까요? 그점은 확인해보지 못한 사항입니다.
갈보리 침례교회가 아닌 갈보리 채플 운동은 오순절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척스미스는 비행기 사고로 아들과 함께 죽었고 그 손녀가 등에 예수의 초상을 문신으로 새기는 것, 그외에 그리스도인들 문신새기기 운동등을 펼친 것으로 보아 아주 문제가 많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http://calvarychapel.pbworks.com/Chuck-Smith
아들 척 스미스 쥬니어는 이혼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뱁티스트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레안 콜, 성경을 상고하라. http://www.searchthescriptures.com/index.html
또는 thebreancall.org 을 타이프 쳐도 같은 사이트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