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과 반야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하여 먼저
불교수행에서는 <욕(欲, 욕망, 의욕, chanda)을 욕(chanda)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함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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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欲, 욕망, 의욕, chanda)을 욕(chanda)으로 제거하는 것은 가능한가?
경문을 인용해 봅니다.
“존자 아난다여, 무엇을 위해 수행자 고따마(Gotama)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합니까?”
“바라문이여, ‘欲을 끊기 위해(chandapahānatthaṃ)’ 수행자 고따마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합니다.”
…
“존자 아난다여, 그 欲(chanda, 의욕)을 끊기 위한 어떠한 길이나 방도가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이 세간에서 비구가 <①欲(chanda)에 바탕을 둔 삼매나, ②精勤(viriya, 노력)에 바탕을 둔 삼매나, ③心(citta)에 바탕을 둔 삼매나, ④思考(vīmaṃsā)에 바탕을 둔 三昧>와 <의도적인 노력(padhānasaṅkhāra, 勤行)으로 이루어지는 ‘神通의 기초(iddhipādā)’>를 닦습니다. 바라문이여, 欲(chanda)을 끊기 위한 길과 방도는 이와 같습니다.”
“존자 아난다여, 그렇다면 부당한 것이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欲(chanda)으로 欲(chanda)을 끊는다는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예전에 승원에 <①가고 싶은 欲(chanda)이 있더라도, ②가고 싶어 精勤을 했더라도, ③가고 싶은 心이 있더라도, ④가고 싶어 思考했더라도> 그 승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때문에 생겨난 ‘欲(chanda), 精勤, 心, 思考’는 소멸합니까?”
“존자여, 그렇습니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①가고 싶은 欲(chanda)이 있더라도, ②가고 싶어 精勤을 했더라도, ③가고 싶은 心이 있더라도, ④가고 싶어 思考했더라도> 聖人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欲(chanda), 精勤, 心, 思考’는 소멸됩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타당한 것입니까? 부당한 것입니까?”
“존자 아난다여, 실로 그렇다면 타당한 것이며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SN. vol.5. p.272]
'식(識, viññāṇa)과 반야(paññā, 慧)'는 구별할 수 있는 것인가?
경전은 어떠한 것을 '식(識, viññāṇa)'이라고 부르는지를 알아 봅니다.
Vijānāti vijānāti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kiñ-ca vijānāti: sukhan-ti pi vijānāti, dukkhan-ti 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 pi vijānāti. Vijānāti vijānāti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ti.
벗이여, ‘識, 識’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벗이여, ‘分別한다(vijānāti), 分別한다’고 해서 ‘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엇을 ‘分別하느냐’ 하면, 樂(sukhan)이라는 것을 分別하고, 苦(dukkha)라는 것을 分別하고, 非苦非樂(adukkha-asukha)이라는 것을 分別합니다. 벗이여, (이렇게) ‘分別한다, 分別한다(vijānāti)’고 해서 ‘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MN. Vol.1, p.292]
이어서 경전은 어떠한 것을 '반야(般若, paññā, 慧)'라고 부르는지를 알아 봅니다.
Duppañño duppañño 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duppañño ti vucca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 ti vuccati, kiṁ na-ppajānāti: idaṁ dukkhan-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samudayo 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o ti na-ppajānāti,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 na-ppajānātiti kho āvuso, tasmā duppañño ti vuccati.
“벗이여, ‘반야가 없다. 반야가 없다’고 하는데, 벗이여, 어떻게 해서 반야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벗이여,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한다.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반야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하느냐 하면, ‘이것은 苦다’고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苦의 集이다’고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苦의 滅이다’고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하고, ‘이것은 苦의 滅로 가는 길이다’고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이같이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한다. (꿰뚫어서)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해서 반야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MN. vol.1, p.292]
이어서 경전은 '식과 반야를 어떻게 구별한다'고 설하는지를 알아 봅니다.
“(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입니까, 아니면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입니까?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 썩인 것, 결합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꿰뚫은 것(pajānāti) 것을 분별하고(vijānāti)하고, 분별한 것(vijānāti)을 꿰뚫어(pajānāti)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이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般若는 닦아져야(bhāvetabba, 修行되어져야, 修習되어져야)만 하는데, (반하여) 識은 (수행 없이 그냥) 지각할 수 있는(pariññeyya, 알 수 있는)데에’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MN.1, p.292~p.293]
번역에 문제점은 있으나, 대충 의미는 잡아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저 나름대로 본 글에 대한 답글로써 쓴 것이오니 참고 삼아 주십시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 '본질론'............... 아닌데..................
예를 들어 봅니다. 그 어떤 분이 지금 병이 들어서 고통받고 있다고 합시다. 그 분에게 '병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고 거짓이름이다'라고 말해주고 그 분이 그 설명을 받아 들인다고 해서 '고통스러움'이 사라질까요?
'봉행'님께서는 형이상학과 철학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불교가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팔정도의 두 번째 덕목에 '정사유'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정사유'에서의 사유에서도 ..........
'무상, 고, 비아'는 견(見)한 것이지 절대로 사유한 것은 아닙니다.[=====>제가 틀렸을 수도 있음.]
제가 설명이 좀, '제가 말하고 나서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요. 음~~~~~~~
<십이처(=일체)가 '명색'에 불과한 것임을 견(見) 하라는 것>이고, 그렇게 견(見)하는 방법과 길을 설하는 것이 불교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이러이러 하기 때문에 이러하다'는 사유는 좀 아니다 싶습니다. 불교 그 어디에 그런 가르침이 있는 것인지 저는 처음 듣습니다. 십이처(=일체)가 고임을 보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연기도 보는 것이고..............백문이불여일견.........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제가 정확한 표현을 못하겠읍니다. ㅋㅋ. 생각은 <이건 아닌데> 싶은데도 표현을 못하겠읍니다. ㅋㅋㅋㅋ
경전에는 <연기를 작의(의에 새김)하라, 연기를 보라>라는 표현은 있어도, 연기를 사유하라는 말은 없고 십이처를 사유하라는 말도 없거든요. 어떻게 사유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도 않고요. 사유의 결론을 고집하는 것은 ........좀..........
십이처(=일체)가 '무상, 고, 비아'임을 볼 수 있는 방법론을 설하신 것이 불교고요. 그 길을 설하신 것이 불교고요. 심이처(=일체)의 집을 보라는 것과 집을 사유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요? 집(集)이란 것이 사유의 대상도 아닐 뿐더러 사유가 가능하기는 하겠습니까? 그러하니 '봉행'님이 형이상학이나 철학을 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불교에 없는 말을 주장하시는 것 같다는..
<아함의 중도체계>를 쓰신 이중표교수의 '철학(불교가 아니고 철학)'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과연 불교가 철학일까요? 그런 부분이 불교에 있기는 한가요?
철학은 어차피 사변이므로 자신의 사유를 말하는 것이지만, 불교가 사유의 결과물도 아니고 사유를 강조 하지도 않으며 사유를 이야기하는 '정사유'는 철학적 사유가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의 아라한 중에는 '일자무식'이 더 많았고, 대승의 조사님들 중에서도 육조 혜능 스님 같은 분은 전혀 글을 읽을 줄 몰랐던 분이십니다. 사유를 통하여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교육수준이 꽝인 인도인데 그렇게 무수한 아라한이 출현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불교는 '보고서 공부하는 가르침'이기에 그와 같은 무수한 아라한들이 출현한 것이 아닐까요?
<6근을 가지고 6경을 볼 때, 법을 보도록 하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말일까요? 글쎄요? <6근을 가지고 6경을 볼 때, 6식이 연기하는 것을 보는 것>이지 그 연기를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싶네요. 그런 사유가 경전에 언급되기라도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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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감로 법우(법의 비)가 내려도 중생들은 각자 자기 그릇대로 담는다고 합니다. 같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도 어떤 사람은 '깨닫고'. 어떤 사람은 '분노와 증오'를 갖는다고 하니 ..... ㅎㅎㅎㅎㅎ....... 자신이 먼저 지혜로와야 귀가 생기고 앎이 생기고 눈이 생기는 것이라고 봅니다.[<----ㅋㅋ. 제 주제를 생각할 때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