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박태식 신부 / 영화평론가, 성공회신부
인연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평생을 같이 살아온 사람이 갑작스레 낯설게 느껴지는 때도 있지만 난생처음 만난 사람과 뜻밖에 잘 통하는 때도 왕왕 있다. 그렇게 서로 통하는 상대를 만나면 그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이 매우 맘에 들어 무조건 따라 하고픈 생각까지 들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몰입해 이성이 통제가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남녀간의 (혹은, 동성 간의) 사랑에 빠진 경우로 섣불리 규정해서는 곤란하다.
뉴욕에 갓 이사 온 대학 신입생 트레이시(롤라 커크)는 엄마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는다. 곧 재혼할 남자의 딸인 브룩륵(그레타 거윅)이 마침 뉴욕에 사니까 한 번 만나보라는 당부였다. 어차피 한 가족이 되는 마당에 미리미리 친해 놓아서 손해 볼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미스트리스 아메리카>(Mistress America, 노아 바움벡 감독, 극영화/코미디, 미국, 2015년, 84분)는 상황을 미궁으로 몰아넣으며 출발한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채.
<프란시스 하 2012>라는 독특한 영화를 선보인 바 있는 바움벡 감독은 이번에도 뉴욕을 배경으로 신선한 이야기를 써나간다. 트레이시는 아직 사회생활을 할 준비가 안된 어린 여성이고 대학이라는 곳은 그녀를 며칠 사이에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제까지 이렇다 할 게 없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오늘부터 진지하게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화에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트레이시와 과제물 준비로 한두 번 만난 토니(머튜 쉐어)는 대책 없고 정신없는 19살 대학 새내기다. 토니의 여자 친구 니콜은 트레이시와 토니 관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한 때 브룩과 룸메이트였던 메이미-클레어(히서 린드)는 브룩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큰돈을 벌었고 남자친구 딜런(마이클 처너스)까지 가로챈 바 있다. 딜런은 큰 부자이긴 하지만 냉철한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브룩,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개성은 영화 내내 무수히 발산된다.
브룩은 전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역할을 담당해, 도저히 엮일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을 순식간 한 차에 태우고 부자들의 동네로 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 번 여러 사람들을 엮어낸다. 결국 딜런과 메이미-클레어 부부의 거실에서 도합 여섯 명을 앉혀놓고 자신의 사업 구상을 설명한다. 정원이 훤히 보이는 뒤편 창문을 배경으로 온 몸을 써가면서 프레젠테이션을 해내는데, 바로 이 장면이 영화의 압권이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에서는 그렇게 우연을 가장해 은근슬쩍 제작 의도를 집어넣는다.
브륵은 활력에 가득 차 끊임없이 세상에 도전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는 셈이다. 뉴욕에 이사와 잔뜩 겁을 집어먹은 트레이시에겐 이상적인 여성으로 비쳐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브룩의 분망한 정신으로는 경쟁의 도시 뉴욕에서 꿈을 성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저 번잡한 일들만 그녀에게 생기는 것이다. 딜런이 예의 그 거실에서 브룩에게 하는 충고는 참으로 적절했다. “자기가 재미난 사람이라는 것 알아? 그래서 채무를 대신 갚아줄 수는 있지만 구상하는 사업엔 투자할 수 없어.”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유도해 웃음을 유발해내는 장르를 이른바 ‘슬랩스틱 코미디’라 부른다. 거기에다가 상황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점점 꼬이면 보다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브룩과 트레이시의 특별한 인연을 주목하기 바란다. 인생이 조금은 다시 보일 것이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는 유쾌한 영화다. 그러나 영화 뒤에는 비극이 숨어있어 관객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세상일은 그만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그런들 어떠랴. 소중하게 맺어진 브룩의 인연이 있고, 우리들의 브룩이 살아가는 인생은 씩씩하기만 한 것을! 앞으로 이어질 브룩과 트레이시의 이야기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