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몸부림치던 한 젊은이의 삶 -
한 시퍼런 젊은이가 80년 6월 9일 신촌 이대 앞 네거리에서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훨훨 타서 숨져갔다.
1. 그는 누구인가?
1958년 6월 7일 부산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채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였다.
그는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천막 야간학교를 다녔고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몇 달씩 장기결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이 야간학교가 생긴 이래 최초의 검정고시 합격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공식적 학력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는 학력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참인간이 되기 위한 배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공사판과 공장을 전전하며 가진 자의 횡포에 전혀 대책 없는 근로자의 억울한 현장에서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분해하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사내다.
배우는 일, 약자를 돕는 일, 억울한 자를 위로하는 일, 정의로운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라면 미친 사람같이 뛰어 다녔던 젊은이 이었다.
그가 분사했을 때는 방위병 제대를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2. 왜 그랬을까?
그가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한사람의 근로자가 경제적, 정치적 인간 됨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행복도 평화도 없다는 것을 불현듯 자각한 뒤부터 함께 더불어 사는 일을 위해서,
구조악의 횡포에 대처할 자력을 기르기 위해서 힘껏 살았다. 그의 표현대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했다.
그러던 중 80년 5월 17일 광주 민중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총칼로 진압됐고 왜곡 선전에 이용당했다.
의로운 피가 불의의 피로 매도 된 때에 그의 양심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너무도 너무도 억울한 이 일을 표현하는 길은 몸을 불태우는 길뿐이었다.
3. 어떻게 살았을까?
75년 12월 25일 그가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현실을 개선해야겠다고 천막 야간학교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것이 "형제단"이라 부르는 독서토론회였다.
이들은 함께 학교 공부의 한계를 의식하고 학교를 그만둔 대신에 형제단 활동을 통한 공동체 의식을 확장하는 데 전념했다.
낮에는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밤에는 독서와 토론 등을 계속하여 그들의 관심은 이웃문제와 사회 문제로 확대되어 나갔다.
77년 4월에는 성남시에서도 가장 취약지역인 창곡동 꼭대기에 월세 방을 얻어 쓰레기 같이 버려진 주민들이 자신들의 현실에는 무감각한 체 먹는 일만을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삶은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풍토인 것을 개탄하고 그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일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서 '모임터'라는 회보를 손수 프린트해서 만들어 내었다. 78년 3월에는 단대동에 '형제의집'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한울 야간학교'를 시작했다. 공동생활, 노동 그리고 연구활동을 본격화했다.
김종태는 이 학교에서 근로기준법과 상식을 가르쳤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세한 경제적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실시했다. 78년 5월경 모 정밀에 근무하며 공장 동료들과 소그룹을 결성하고 근로기준법 독서토론을 그가 방위에 입대할 때까지 계속했다.
79년 6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고등학생을 모아 '조나단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했다.
77년부터 교회 청년들과 함께 전태일 추모회를 하는 등 동일방직 사건에 많은 지원 격려세력이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가 정신적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은 79년 9월 12일 Y. H사건이후 '한울야간학교'교사들이 경찰서에 연행되고 학생들은 강제 해산될 때부터이었으며 방위병에 소집된 후에 그렇게 기다리던 민주주의 부활이 무참히 박살이 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겹친 실의에 광주의거는 결정적으로 그를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했다.
- 김종태의 친구들이 쓴글-
김 종 태 열사 유서
- 광주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오늘날 한국의 이 암울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고자 분연히 일어났던 <용기 있는 한국인들>이여!
그대들이 피를 흘리면서 성토하던 그 안개정국들은 이제 완전히 그 마각을 들어내어 뻔뻔스럽게도 그 음모와 책략들을 표면화했습니다.
소위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군장성들로 구성되었으며 행정부의 전 기능을 장악하고 그 우두머리에 전두환 중장이 상임위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올라앉았습니다.
허수아비 같은 최규하 대통령 위에서 조종하며 숱한 민중의 지도자들을 법의 이름으로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숱한 학생들을 포고령의 이름으로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땅엔 또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오 5. 16쿠데타, 그 후 19년간 장기독재.
아! 한국의 앞날이 먹구름으로 덮이고 있습니다.
박 정권 20년간의 좋은 시절을 좀처럼 청산할 수 없다는 듯이 독재 밑에서 부정부패로 치부해 오던 유신체제의 잔당들이 지금 이 나라를 이 국민들을 손아귀에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전설은 유언비어가 되고 유언비어가 진실이 되어버리는 이 어지러운 시국은 국민들에게 입을 막고, 귀도 막을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체, 귀가 있어도 못들은 체, 눈이 있어도 못 본 체해야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국민들이 수군거려선 안 되는 무서운 음모 계략들로 가득한 정권야욕에 불타는 무리들, 민주가 어떻고 민족이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무리들이 지금 이 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악이 선보다 강한 세상, 정의가 불의에게 눌리는 세상, 이런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 하고 고쳐나가야 할 세상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폭력,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우리들의 모든 법과 자유는 빼앗기고 눌린 채, 한국의 밤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수의 국민들은 저마다 모두 불신을 품고 앉아 점점 무기력해 가고 있습니다.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무관심해지고 있습니다. 몽둥이와 포승줄 아래 두려움을 느끼고있습니다.
국민여러분!! 과연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 안아서 자기나라 군인들에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의 피를 흘리고 스러지면 죽어 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지금 유신잔당들은 광주시민학생들의 의거를 지역감정으로 몰아쳐 (전라도 것들) 이라는 식의 민심교란 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국민의 의사를 몽둥이로 진압하려다 실패하자 칼과 총으로 진압하고서, 그 책임을 순전히 불순세력의 유언비어 운운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우롱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계엄철폐를 주장하면 계엄을 더 확대시키고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면 더욱 늘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학생들에겐 자제와 대화를 호소하다니 정말 정부에 말하는 대화의 자세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안보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계엄령 확대와 시민의 감시등을 위해서 전방의 병력들을 빼돌려 서울로 집결시키는 조치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사리사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새삼 느꼈으며, 권력이 그렇게도 잡고 싶은 것인가를 새삼 느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 국민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저력을 우습게 보고 있는 저들에게 따끔한 경고를 해주고 싶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 질러서 국민 몇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몸을 던지겠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 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없이 이 민족을 위하여 몸을 던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