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여름, 기쁨과 감사의 차
부회장, 충북지부장
한문교육학 박사 박숙희
모든 것을 무료하게 만드는 무더운 여름, 한바탕 쏟아지는 여름비는 새로운 활기를 부어주기에 충분하다. 시원하게 소나기라도 지나가면 만물은 밝은 햇살과 함께 천지창조의 기쁨인 양 짙푸른 녹음 속에 유쾌하게 살아난다.
초여름 아침 7시. 부지런한 햇살은 나뭇잎 사이 틈새로 찬란히 비쳐들고 희망찬 하루를 속삭인다. 간밤에 티끌 하나까지 씻어낼 듯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치고 여름 아침은 맑고 깨끗하고 싱그럽기만 하다.
비 개인 날
맑은 하늘이 못 속에 내려와서
여름 아침을 이루었으니
녹음이 종이가 되어
금붕어가 시를 쓴다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인 김광섭(1904~1977)님의 ‘비 개인 여름 아침’이다. 빗물에 씻긴 산뜻한 여름 아침 연못에 비친 하늘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그 속을 헤엄치는 금붕어들은 못 속을 헤엄치며 여름을 즐기고 싶은 또다른 나이다.
자연은 지친 우리의 삶을 치유하는 안식처이다. 희망과 새로운 다짐을 찾고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자연 속에 서면 겸손되이 나의 지나간 날을 반추하게 된다. 진정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아는 내가 되기를 소망하며 다가올 날들을 맞아들이게 된다.
자연은 중요한 시적(詩的) 제재이다. 특히 산사(山寺)에서 생활하는 선승들에게는 생활공간이자 구도의 장소이니만큼 더욱 비중 있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자연은 때로 깨달음의 표상이 되기도 하고 고요한 도의 상징으로 인간을 정화시키고 안정을 주는 절대적인 시적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 속의 차 한 잔은 어느 때 어느 모습이든 우리를 잠시 속세로부터 격리시켜 신선이 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자연을 벗하며 한 잔의 차를 마시는 조촐한 자리를 그린 차시는 미혹의 세계를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속으로 가만히 이끌어 준다.
원감국사(圓鑑國師)의 <산중의 즐거움(山中樂)>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산사 생활의 즐거움 속에 해탈의 만족감을 더해 가일층 즐거움을 배가시킨 작품이다. 국사가 처음 출가해서 백련암에 있을 때 지은 시로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에 실려 전한다.
山中樂 산중의 즐거움이여
適自適兮養天全 내 좋아하는 대로 사니 천성이 살아나네
林深洞密石逕細 우거진 숲 깊은 골 가느다란 돌길
松下溪兮岩下泉 소나무 아래 계곡 바위 아래 샘물
春來秋去人跡絶 봄이 오고 가을 가도 인적은 끊어져
紅塵一點無緣 세속의 티끌은 한 점도 없다네
飯一盂蔬一盤 한 발우의 밥에 한 소반의 나물
飢則食兮困則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드네
水一缾茶一銚 한 병의 물에 한 냄비의 차
渴則提來手自煎 목마르면 가져다 손수 끓인다네
一竹杖一蒲團 대나무 주장자에 부들방석 하나
行亦禪兮坐亦禪 걸어가도 선이요 앉아서도 선일세
山中此樂眞有味 산중의 이 즐거움 참된 맛이 있으니
是非哀樂盡忘筌 시비와 희로애락 모두 잊고 산다네
山中此樂諒無價 산중의 이 즐거움 값을 매길 수 없으니
不願駕鶴又腰錢 신선도 부자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네
適自適無管束 내 좋아하는 대로 구속받지 않으면서
但願一生放曠終天年 일생 자유롭게 천명을 마치고 싶을 뿐
원감국사(1226∼1292)의 법명은 충지(冲止)이고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다. 19세에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지만,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고, 원오국사 입적 후 수선사의 제6세가 되어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유학사상과 소통하는 선풍으로 문장과 시에도 뛰어나 유림은 물론 원나라 세조의 흠모를 받았다. 충렬왕은 원감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국사는 참된 자신의 모습은 항상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이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며 천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라 여겼다. ‘적자적(適自適)’은 《장자(莊子)》 외편(外篇)의 ‘남이 좋아하는 것만 덩달아 좋아하고,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지 못하는 자가 되지 말라(夫不自見而見彼, 不自得而得彼者, 是得人之得, 而不自得其得者也, 適人之適, 而不自適其適者也)’는 의미로 인용한 것이다.
대체로 속인들은 남이 좋아하는 것을 덩달아 좋아하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진실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산다. 그러나 천성을 찾아 그것을 기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 좋아하며 사는 것은 일생 최고의 즐거움으로 이는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대상만이 가능하다.
속세인의 자취는 끊어져 세속의 티끌 하나 없는 산속에서 ‘한 발우의 밥에 한 소반의 나물’은 더할 나위 없는 은덕이며, ‘한 병의 물에 한 냄비의 차 목마르면 가져와 손수 끓이는’ 여유는 거리낌 없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만끽하니 ‘걸어가도 선이요 앉아서도 선’이라 하였듯이 삶 자체가 선이다. 깨달음을 향한 정진은 어렵고 고뇌스럽다 여기지만 실제로는 자연 그대로인 가장 쉬운 방법인 것을 속인들은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반추해 보는 순간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 높은 벼슬이나 부유한 삶일까. 속세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일까. 살면서 가치 있다고 여기던 그 어떤 부와 명예도 부질없게 느끼며 결국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국사에게는 일거수일투족 자연 속 일상의 하나하나가 해탈의 즐거움이다.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체득한 기쁨은 인생의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다. 이 자족감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요 희망이요 즐거움이다.
미망(迷妄)에 소일하지 않고 자연의 즐거움에 묻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삶. 번뇌에 구속받지 않으며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으면서 일생 자유롭게 천명을 마칠 수 있기를 부족하나마 짐짓 소망해 본다.
차 한 잔의 즐거움을 마주한 시간. 국사의 해탈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여름 초목의 싱그러움처럼 잠시나마 진정한 자연의 참된 맛을 만끽하고 싶은, 무더위가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지는 오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