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해(寧海)의 개기(開基)
조선시대 택리지와 지리서에는 영해(예주)가 지리적으로 많은 인물이 나는 곳이라 하였다.
영해부(府)는 청정해역 바다와 인접해 있고 백두산맥의 자락에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禮)와 효(孝), 문향(文鄕)의 전통고을이었다. 영해는 예부터 영덕(盈德)과, 진보(眞寶), 영양(英陽), 청기(靑杞), 기성(箕城. 현 평해), 우산도(于山島. 현 울릉도) 등의 속현(屬懸)을 둔 대규모의 고을이었다.
영해는 칠보산에서 흘러내린 평야와 동해바다에 접한 관아가 있었다.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어내린 독경산과 맹동산(812m), 형제봉(704m), 봉화산(409m)과 서쪽으로는 등운산이 있으며 동으로는 상대산(183m), 대소산 망월봉 봉화산(278m)로 산들이 병풍처럼 영해평야를 감사고 있는 암석해안을 이룬 수심 깊고 평야가 있다.
서울과는 태백산맥이 가로막혀 교통, 정보, 문화, 정치적으로 불리한 여건이지만 선조들은 주경야독하는 정신과 효와 예를 실천하는 고을로써 외침이 빈번할 때는 말을 타며 생활하였으나 임진왜란이후에는 책을 읽으며 문향의 고장으로 자리잡아 17세기부터는 소안동(小安東)이란 별칭이 붙은 고을이다.
영해는 풍수적으로 거미가 망을 짜는 형국이다. 영해부 관아는 부의 중심 남쪽을 향해 있었고
서쪽에는 누각이 있었다. 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지기(地氣)를 알 수 있다.
조선 숙종때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1690년 숙종 16년에 태어난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은 실학자이다.
택리지는 팔역지(八域誌) 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 동국총대록(東國總貸錄), 형가승람(刑家勝覽), 팔도비밀지지(八道秘密地誌) 등 여러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학풍에 의해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지리서이다. 택리지는 살 만한 땅을 가려 택하는 것이 초점이며 벼슬에서 물러난 사대부(士大夫)들이 대(代)를 이어 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