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울에서 들려오는 각종 루머와 향수병
형님댁에서 6개월을 보낸 우리는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어느 정도 미국생활에 대해 적응력이 생긴데다 형님네와의 생활이 조금은 불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님에게 말씀드린 뒤 91년 3월경 놀클로스의 형님집에서 30분 거리인 매리네타로 이사했다.
나 혼자 있을 경우를 대비해 백인밀집지역인 이곳을 선택했다.
사실 한반도보다 조금 큰 조지아주는 우리가 흔히 느끼는 흑인들에 대한 위협은 없는 편이었다.
할렘이 있는 대도시 지역과는 거리가 먼데다 워낙 보수적인 성행의 사람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남부특유의 백인 우월 사상이 강하고 흑인들이 온순했지만 미국이라는 선입관에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50평정도의 우리집은 한달에 4백50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5만원 정도였는데 집주위의 제반시설은 훌륭하기 그지없었다.
수영장, 테니스코트, 농구코트 등 동네사람들이 즐기며 놀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처음 집에 들어선 순간 느낀 감정은 내집마련에 성공해 이사가는 사람들의 심정과 똑같았다.
나의 미국생활은 사실 정말 무미건조했다.
서울처럼 벅적거림도 없었고 분위기를 잡기 위해 커피를 한잔 마실 장소도 변변치 않았다.
그냥 밥해먹고 남편 따라 일하러 같이 나가고 잠자는 외에는 그 무엇도 바랄 수 없었다.
그나마 내 생활의 윤활유 역할을 한 것은 그 지역사회에서 운영하는 학교 다니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외국에서 이민온 사람들을 위한 영어회화시간이 있었다.
그때쯤 나는 서울에 있던 식구들과 연락을 취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연락을 하면 나를 추적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전화연락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어머니와의 통화는 미국온 지 6개월이 지난 다음에 했지만 나는 그전에도 수차례 집으로 전화했었다.
물론 말을 하지 못하고 단지 식구들의 목소리를 한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특히 1월 1일 설날에 집으로 걸었던 전화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전날 너무나 슬픈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 온 집안식구들의 얼굴이 보였고 심지어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까지도 꿈에 보였다.
꿈속에서는 또 나의 쌍둥이 언니가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뒤숭숭하고 기분 나쁜 꿈에서 깨어난 나는 갑자기 식구들이 보고싶어 '엉엉'하고 울 수밖에 없었다.
연락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야 될 혈육들인데 전화한통 못하는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다음날 나는 집에 전화를 했다.
남동생이었다.
"여보세요"하는 목소리를 듣고 동생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아직은 내가 나타날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었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한 내가 어머니와 처음 전화통화를 했을 때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내가 미국에 온지 6개월이 지나 집에 통화를 한 다음부터 국내에서는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국내소식은 미국에서 잡지를 통해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생생한 소식은 친정집과 시댁을 통해 전해들었다.
"이지연이 LA의 한 슈퍼마켓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가장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나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단 한번도 LA근처에 가본적이 없다.
그러나 LA에 있다는 소문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얼마전에 LA에 살고 있는 원준희의 남편에게 들은 얘기인데 LA에는 나와 너무나 비슷한 용모를 가진 한 아가씨가 있다는 것이다.
키는 나보다 조금 크지만 얼굴생김새와 몸매가 정말 나와 흡사하다고 한다.
그외에도 몇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LA에 있다는 소문은 그곳에 나와 닮은 아가씨가 있다는 것 외에도 몇가지 원인이 있었다.
LA에 한인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내가 당연히 LA에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내가 미국에 오기전 연예계에 종사하는 잘아는 분이 "어디에서 살거냐"라고 물었을때 "LA에 갈거예요"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모여서 내가 LA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또 하나 나에 대한 소문은 내가 뉴욕 피포트라는 곳에서 하루 2천달러를 받고 밤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국에 건너가 뉴욕을 한번이라도 구경했다면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에서 발간되는 코리안 저널에 실린 나의 기사는 정말 황당했다.
내가 국진씨와 헤어진 뒤 LA에 있다가 돈이 없어 LA에 공연온 가수 ㅈ양에게 SOS를 요청했다는 내용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것.
그때 심정으로는 당장 코리안 저널을 찾아가 항의하고 싶었지만 "이미 나온 기사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나만 떳떳하면 됐지"하는 생각에 없던 일로 덮어버렸다.
그외에도 내가 임신을 해 임신 몇개월이니 아기를 뗐느니 하는 소문들이 나돌았다.
물론 나와 국진씨는 결혼할 때부터 앞으로 2~3년간은 아기를 갖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런 소문들에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도 "내가 컴백을 위해 앨범준비를 하고 있다"는 등 나의 행동과 의지에 관계없는 얘기들이 흘러나오자 나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소문들이 국내외에서 무성하게 흘러나왔지만 우리 부부의 생활은 전혀 동요됨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형님네서 독립해 우리만의 공간을 가진 직후 국진씨는 형님에게 부탁하여 관리직에서 영업직사원으로 일했다.
활동적인 국진씨 성격에 6개월간의 관리직 업무가 무척 따분하고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수입한 물건들을 직접 미국내 상인들과 만나 파는 일이 국진씨 성격에 맞는 것 같았다.
국진씨는 "젊은놈이 뛰어다니며 세상을 알고 일을 배워야지"라며 신이 나서 일을 했다.
국진씨 형님은 나보고 "국진이는 월급 2천달러 이상의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가슴이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