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교(人道敎)는 지금은 멸실(滅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창교자(創敎者)는 구악(龜岳) 채경대(蔡慶大) 성도(聖徒)님이십니다.
위 사진은 채경대(蔡慶大) 성도(聖徒)님으로 추정되는 분의 사진입니다. (사진출저: 국사편찬위원회). - 일제(日帝)에 의하여 감금되었을 때 찍힌 사진입니다.
채경대(蔡慶大) 성도(聖徒)님은 교도들을 이끄시고 만주로 떠나셨고 만주(滿洲)에서 선화(仙化)하셨습니다. 인도교(人道敎)는 채경대(蔡慶大) 성도(聖徒)님의 선화(仙化) 이 후 파벌이 생겨 둘로 나누어 집니다. 아래의 내용은 용악(龍岳) 최윤걸(崔允傑)님을 따르던 분들의 기록으로 사료됩니다.
자료의 출처는 1995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만든 “길림조선족”이란 책입니다.
류하 조선(朝鮮) 증산교(甑山敎)
조선(朝鮮) 증산교(甑山敎)는 1939년 류하에 전해졌다. 증산교(甑山敎)는 조선 보천교(普天敎) 교주 강증산(姜甑山)이 창설했으며 제일 처음 중국에 전해진 곳은 요녕성 강평현 료양와보이다. 그 후 일본 개척단이 그곳에 자리잡고 조선인을 몽땅 쫓아내자 증산교도 그들을 따라 류하현의 가난하고 치벽진 대전자툰으로 옮겨졌다. 그 때 대전자툰으로 이주해온 조선인은 모두 91호였고 절대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교주 최윤걸 등 사람들이 돈을 내고 남들의 주권은 받아들여 대전자툰에서 평지를 사 논을 풀었다.
그리하여 이주해온 농민들은 집집마마 5~6무의 밭을 다루게 되었고 또 한족들의 일부 비탈밭도 소작맡게 되었다. 그들은 <개척조합>을 뭇고 허진이 조합장을, 박종률이 이사장을 맡았으며 모든 밭을 그들 두 사람이 관리하였다. 그 후 친척관계, 친우관계, 종교관계를 통하여 조선으로부터 또 일부 농호들이 이주해와 전 촌 조선인 호수가 130호에 달했다. 그들은 돈을 모아 학생 100여명에 교원이 4명인 소학교를 꾸리었다. 말하지 않아도 <개척조합> 성원들은 모두 증산교 교민들이었다.
증산교는 대순전경(大巡典經)을 신봉하였든 바, 교의 교례/교규는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들의 취지는 인간이라면 선량해야 하고 나쁜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道)를 올바로 닦으면 신선으로 되어 극락세계에 간다고 주장했다. 이 교에 참가한 사람들은 훔치지 않고 도박을 놀지 않으며 색정을 외면하며 사람을 욕하지 않는 것을 계율로 삼았다. 만일 남이 자기를 때리면 자기가 되려 때린 사람의 손을 만지며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야 했다.
증산교의 조직구성을 보면 <중앙>과 <8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때 조선에는 8개의 도(중극의 성과 비슷함)가 있었으므로 무릇 같은 도에서 온 증산교 교도들이 한데 모여 한 개 <원>이라 했다. <중앙>과 <8원>에는 모두 치성장소가 있었다. <중앙>의 치성장소는 대전자툰 복판에 있었고 지붕은 8개 각을 이루었으며 동서남북 4개 대문에는 태극 팔괘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의 교주들은 용악, 봉악, 귀악, 린악 이었다. 봉악과 귀악 두 교주는 조선에서 병들어 죽고 대전자에는 용악교주 최윤걸과 린악교주 박종률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 원은 신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황해도원을 <손양원>이라 불렀고 충청도원은 <가릉원>이라 부른 등등이다. 각 원의 교주는 <교사>, <계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는 교주거나 교도들이 서로 <선생>이라 불렀다.
증산교 교회내부에서 뚜렷한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착취가 없었으며 서로 돕는 정신을 제창했고 힘겨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 나섰다. 도수에 따라 교주가 교도들에게 <신명>을 달아주었는데 남성들에 대해서는 <춘강>, <하강>,<추강>,<동강>이라 불렀고 여성들에 대해서는 <동사>,<서사>,<남사>,<북사>라고 불렀다. 교도들 가운데서 이같은 신명을 가진 사람은 얼마 안되었다. 한 <원>안에서 이처럼 특수한 영예를 지닌 사람이 남성교도 가운데는 많아서 10명이었고 여성교도들 가운데는 한 두 사람밖에 없었다. 신명을 주는 권리는 중앙에 있을뿐 각 원에는 없었다.
<중앙>과 <8원>의 치성활동은 음력 24개 절기순서에 따라 <중앙>에서는 한 달에 두 번, 각 <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했다. 치성활동의 비용은 모두 교도들이 헌납했으며 많고 적은 제한이 없이 모두 성심에 따랐다. 치성장소는 아주 깨끗하였다. 문을 열로 들어서면 미닫이가 있고 미닫이를 열면 병풍이 있었다. 병풍에는 천지일월신(天地日月神)이라는 글자가 큼직이 씌여있는 흰 명주가 덮여있었다. 신령패쪽 아래에는 제물을 차려놓는 상이 있었다. 치성일 저녁이 되면 교도들이 이곳에 모여와 정성껏 향불을 지피고 염불을 외우고 절을 하고는 하나 하나 해쳐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교도들이 또 이곳에 모여 아침식사를 하는데 제물을 몽땅 먹고 마셔버린다. 그러나 술만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고 한 사람이 석잔밖에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면서 장고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아주 즐겁게 보냈다. 교도들은 평시에 집에서도 치성활동을 했다. 그들은 아침이거나 저녁에 깨끗한 사발(전문용품)에 맑은 물을 담아 작은 상 위에 놓고는 온 집 식구가 상을 둘러 꿇어앉아서는 염불을 외웠다. 염불에는 단주(丹呪), 시천주(侍天呪), 동방주, 운장주(雲長呪), 개벽주(開闢呪)등 8가지가 있었는데 수요에 따라 외웠다. 약 한시간 동안 염불을 외우고 절을 하고 나서 사발에 담은 물은 나누어 마시었다. 그리고 물이 남게되면 절대 버리지 않고 밥을 짓는데 썼다.
그 때 70살에 난 용악교주 최윤결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어도 하늘색 웃옷에 풀색 조끼와 자지색 바지를 받쳐입어 젊은이 같이 보였다. 아들과 손자는 있었으나 일찍 아내를 잃은 그는 홀로 <중앙>에서 음양도수를 보았다. 교도들의 관혼상제는 되도록 간단하게 치렀고 종교의식도 가지지 않았다.
증산교는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중앙> 치성장소 문위에 태극기(太極旗)를 그려놓았다. 하여 일본 침략자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1942년 겨울의 어느날, 위만 군경들은 대전자툰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수색을 했으며 증산교 교주, 교도등 28명을 붙잡아갔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류하에 갇혀있는 기간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중앙을 따로 내오고 8원을 설치하고 태극기를 그려 일본을 반대했다>는 죄명으로 판결을 받았다. 판결받은 뒤 대부분 사람들은 본계 시멘트공장에 가 강제로 노동을 했고 신체가 허약한 몇몇 사람들은 심양 제 1감옥에 갇히었다. 1945년 광복후에야 판결받은 교주와 교도들이 되돌아 왔다. 그때로부터 증산교가 활동을 회복하기는 했으나 호수가 70여호로 퍽 줄어들어 지난날의 성세를 잃고 말았다.
1947년 좀, 류하지구에서는 토지 개혁운동을 하였다. 계급성분을 획득할 때 최윤걸(교주), 허은선(조합장), 박종률(순사, 헌병보)등은 지주로 획분되어 군중소고운동 가운데서 맞아 죽었다. 그 밖의 17명 골간교도들도 군중의 투쟁을 받았다. 그후부터 증산교는 아무런 활동을 가지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일본놈들의 압박 때문에 머나먼 만주(滿洲)로 가야했던 그 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천상(天上)에서 편히 쉬시고, 못다한 광구창생(廣救蒼生)의 일을 신인합일(神人合一)을 과정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놈들의 압박 때문에 머나먼 만주(滿洲)로 가야했던 그 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천상(天上)에서 편히 쉬시고, 못다한 광구창생(廣救蒼生)의 일을 신인합일(神人合一)을 과정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_LFyMId4SU
첫댓글
증산교가 아니라 甑山道입니다 가르친다는 敎가 아니라 道 길.입니다
증산도 14 甑山道 33= (47)
신령 11 神靈 34=45
신명 11 神明 = 29
합 ( 74)
神靈 神明으로 天上에서 작용하고 계십니다
나의 일은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되는 일이니라. 증산
길화개길실 27 吉花 開吉實 47=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