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국석불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보리
정읍답사.
한국 석불 문화 연구회 2004년 11월 정기 답사
너른 들판에 피어오른 불향(佛香)의 고장
어김없는 출발이다. 이렇게 길을 떠나는지 몇 해이던가? 석불의 흔적이라도 있으면 찾아가고야 마는 우리 일행. 한국석불문화연구회원들이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시원하다. 약속했던 몇 분이 동참하지 못한 것이 서운했지만 가는 길은 막힘 없이 잘 뚫려 있다. 그러나 이 길이 돌아 올 때는 지옥길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제 단풍철도 지나고 행락객이 많이 줄었을 터인데 다음날 방송에 나올 정도로 길은 답답한 길 고통의 길이 될 줄이야 -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바로 정읍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우리 회원의 연고가 있는 곳이라 고재두씨의 친구가 마중하기로 했고 또 답사의 도움을 위해서 향토 문화관심을 가진 분의 길안내를 받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서 오늘 답사 길은 수월하리라 -
이호섭 원장님이 간식거리를 많이도 가져 오셨다. 아침이 시원찮은 사람에겐 요긴한 먹거리다. 항상 신경써 주시는 마음이 너무 깊다. 문화를 사랑하는 정읍 사람들(문사정)에서 지역 문화를 지키고 발굴하며 그 가치를 얻고자 하는 모임의 곽상주씨를 차에 태우고 맨 처음 답사지인 고부면 남복리인 미륵암을 찾았다. 꼬불탕 꼬불탕 시골길은 재미가 있다. 추수가 끝나 논바닥은 비어 있지만 아직 뽑아내지 않은 배추가 있는 밭이랑은 푸르름에 힘이 있다. 그러나 올해 날씨가 좋아서 배추 값이 떨어 져서 농민의 시름이 크다니 잘 되도 고민 못 되도 고민인 이 농사를 어찌 하란 말인가? 길가의 억새는 바람 부는 데로 몸을 맡기고 태연한척한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또 기나긴 겨울이 오면 황량해질 들판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이 없나보다.
청아한 염불 소리가 들린다. 미륵암에 올라가니 지금 한창 불사가 진행중이다. 이곳은 내가 전에도 와본 곳으로 기억한다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미륵암에는 큰 석불님이 계신다. 미륵암이니 미륵부처님일까? 이곳 정읍은 지금은 전라도요 본디 마한과 백제의 지역이라 미륵 사상이 창궐한곳이라 무엇이든지 미륵님이라고 이야기하는 곳이다. 장승도 미륵이고 문인석도 그냥 미륵으로 불린다. 자세히 따져 보지도 않고 무조건 미륵이다. 더욱이 김제 금산사하고 가까워 신라 경덕왕때의 진표가 개산할 때 미륵 사상으로 무장한곳이 가까워서 일까? 본디 백제 법왕이 원찰암자로 시작한 금산사가 진표의 점찰 사상과 미륵 사상으로 시작된 그 지역이다. 산하가 부드럽고 토지가 비옥하여 산출이 많아 모든 영웅들이 눈독을 들인 곳이라 전쟁이 많았고 그래서 서민은 고통 속에 지내야만 했던 곳 그래서 분통이 터져 동학혁명의 발상지 고부가 여기다. 고려 왕건의 훈요십조에 금강이남 사람을 인재로 등용하지 말라는 우려가 정도령이나 다른 반대세력을 꿈꾸는 자가 많아서 인가 이곳은 억새게 부딧치며 살아온 백성 그리고 핍박만 받아서일까? 사후에라도 또 메시아의 출현을 기다려서 일까? 유독히 미륵사상이 강하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9호 두승산 기슭에 옛 날에는 큰 암자가 있음직도 한 곳이다. 이 석불은 화마를 한번쯤을 입었는지 전체가 검정색이다.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뒤를 보고 있는 현판의 미륵암 같지 않게 수인은 통인이라. 육계가 크다 이렇게 육계가 클 때는 제작 시기가 좀 더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소발이 아닌 나발의 형태가 남았다. 백호공 자국은 보이지 않지만 눈섭이 원만하여 반원형이다. 이마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마멸, 파손된 것이지만 그 형태는 짐작 할 수 있다. 거기의 기록에는 고려시대의 불상이라 적혀 있지만 고려의 전기인가 중기인가 후기인가 구분이 않돼있다. 좀더 연대를 위로해도 될법한 두상이다. 입술의 모양이 잘 보이지 않아 좀 아쉽다. 입술 모양으로도 조성시기를 어림짐작 할 수 있을 텐데 - 그러나 입술의 폭이 좁은 것이 조성시기를 늦게 할 가능성이 많다 목에 삼도가 분명하지 않다. 머리에 비해 어깨 폭이 좁은 것은 돌 때문일까? 세련된 조각 기법은 아닐지언정 갖출 건 다 갖췄다. 귀는 어깨까지 드리우고 통견에 장삼의 앞 여밈이 분명하게 도들새김 되있다. 앞면은 더불유자의 의문이 밑자락으로 흘렀고 옆의 물결 무늬가 선명하다. 통인인 수인은 오른손 올라가는 부분 즉 손목부터 잘려져 나가 상처를 많이 입었다 더욱이 왼손의 여원인의 모양새가 특이하다. 손바닥을 편하게 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엄지와 단지를 서로 이은 모양이다. 이런 모양은 이곳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석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엄지와 검지 또는 장지, 약지를 데고 있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무슨 외계인의 약속신호인가? 부처님의 사랑의 표현인가? 하기야 정형화되어 있는 수인이라도 석수쟁이의 맘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으니 무어라 이야기 할 바는 못 되나 통인 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석가여래라 불렀으면 좋으련만 계시는 곳이 미륵암이라. 대웅전으로 다시 불사하겠다는 주지 스님의 말씀이다. 하복부는 본디 매몰된 상태이나 그나마 입불인데 앞의 수미단이 가리고 있어 연화대가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나중 훌륭한 대웅전을 짓고 다시 모실 때는 이 밑 부분을 찾아내서 한번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련되지는 못했더라도 정감 가는 백제의 후손이 만든 석불이다.
멀리 서울서 이 곳 까지 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면 섭섭하다는 자윤주지와 녹차 한잔을 마실 기회가 생겼다. 낭낭한 목소리가 나이가 들어 많이 탁해졌다는데도 아직도 소리가 크고 맑다. 주지란 말은 본디 절의 주인을 이야기하나 신라 경문왕 이후다 그 전에는 화상 또는 사주라 불렀다. 조선 선조 때는 총섭으로, 고종때는 섭리라고도 불렀으나 지금은 지주로 불린다. 난 사진 찍을 욕심으로 밖으로만 돌았다. 역광으로 비친 버들강아지와 같이 노는 구절초의 실루엣이 멋들어지게 보인다. 낯익은 장독대 돌담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들-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한참이나 절 안팍을 맴돈다. 심검당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옛날 집 사랑채 같은 곳이 심검당이다. 현판과 거기 벽에 그려진 노송도 같은 것이 없으면 여늬 여염집과 다를 바 없다. 당이라 했지만 당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대웅전 보다 먼저 심검당을 짓고 있다. 일하는 사람과 이야기 해본다. 40여평쯤 되보인다. 아직은 뼈대만 세웠지만 조간만 훌륭한 심검당이 되리라. 맛배 지붕에 간소한 차림이다. 창방 평방 바로 위에 도리를 얹어 바로 들보를 올렸다. 좀 큰 모양이라 그럴까? 내진주를 세웠는데 가운데라 심검당이 목적이면 부처님을 모시지 않아도 될 터인데 내진주를 세운 이유가 뭘까? 또 앞의 평주는 원형인데 뒷면의 평주는 방형이다. 서까래, 부연까지 있으나 익공이나 다포 계열에서 벗어난 모양이라 평범한 도리5칸에 양3칸인 당호다. 문사정의 이용찬님이 자료 찾으러 학교에 갔다 뒤늦게 이곳에서 합류했다. 멋진 달력 얻어들고 이제 차 두 대가 달린다. 가을 날씨는 정말 하늘이 높다. 작은 저수지 옆에는 물빛에 반사된 빛으로 황금옷을 입었다. 내려서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 모임은 사진 모임이 아니라서 포기하는 마음이 좀 서운하고 억울하다.
후지리 석불, 전북 유형문화재98호다. 이 부처님도 수난을 많이 당하셨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건 그대로 참을 수 있지만 두부가 없다. 누가 세워 뒀는지 혹 그 두부의 파손된 것인지는 모르나 삼각형 돌 하나가 댕그러니 놓여있다. 크지 않은 좌상이다. 어깨 폭이 좁고 아까본 석불과 같은 세련되지 못한 석불이다. 두부가 없어 알 길이 없지만 삼도의 모양은 흔적만 남았는지 법의는 통견에 주름이 많지가 않다. 더욱 소박하다. 수인이 지권인이라 비로자나불로 보인다. 9세기에 우리 나라에 출현하는 비로자나불이나 신라 말 이후에나 만들어 졌겠지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꼭 오래된 것인지 아닌지는 난 잘 모른다 그 뒤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비로자나불은 많이 조성 됐기 때문이다. 본디 지권인은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 손안에 넣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서로 맞데는 모습이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는 모습으로도 많이 나타난다. 특히 전남화순의 운주사의 석불 마냥 가사 안으로 두 손을 모은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후대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월의 아픔이 커서일까 부처님 왼쪽 어깨가 처져있다.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잘못 본 것일까? 풍성하지 못하고 마르신 부처님이다. 그러나 이곳의 문제는 석불보다 좌대에 있다. 가부좌한 석불에는 지금 다 갖추진 않았더라도 좌대가 있다. 상대석과 한 몸인 앙련좌가 이중연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8각형일 중대석은 그리 크지는 않았을 텐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로 하대석이 버티고 있다. 이것도 조각은 잘 남아 있는 이중연꽃의 복련이다. 하대석에 안상의 무늬가 음각 되어 그 형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석불은 거꾸로 모신 듯한 기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 앞에 방형의 구멍이 두 개나 파여 있는 상대석이있다. 이는 아마 이 부처님을 조성 할 당시에 광배 까지 한꺼번에 조성했으리라 여긴다. 꼭 석불이라 해서 돌로만 광배를 만드는 건 아니다. 지금은 없어 졌으니 그 형태는 알수 없지만 철로도 광배는 만들 수가 있다 이때는 이 때는 철로 부처님의 등뒤에 광배를 꼽기 위해 홈을 판 자국이 있는데 이곳엔 없다. 만약 돌로 광배를 만들었으면 크지 않는 부처님이라 좌상이고 해서 돌로 다듬어 상대석 두 구멍에 꼿았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 말이 수긍이 가면 상대석을 180도 바꿔서 놓으면 될 것이다. 본디 부처님을 조성 할 때는 그 크기가 크던 작던 모든 장엄 불사를 했기에 광배에 채색에 아마 사찰에 있는 것이 아니더래도 보호각 까지는 만들었다고 봐야한다. 이 백제 지역인 정읍에서 비로자나부처님을 보다니 미륵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보호 철책안으로 이 마을의 이름 후지리 탑동 답게 석탑의 잔해가 많이 묻혀있다. 부처님 앞의 네모진 돌에는 탑신부의 돌이 분명하고 사리공 정도의 구멍이 너무나 선명하다. 옥개석 부분은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주위에 많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탑신부가 이렇게 많은데 아마 5층탑 정도는 서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예산 타령에 발굴에 관심이 없고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그 주위를 파헤쳐 볼 겨를이야 없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곳을 다녀간 이후에는 슬그머니 분노가 치민다.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 문화 유산을 보전하고 후손에게 잘 물려주어 자긍심을 심어줄 좋은 기회인데 왜 우리는 우리 것을 소홀히 하는가? 더욱이 자기 고장의 것이고 자기 집 주위에 있는 것인데-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선다 서로의 의견개진에도 힘이 없다. 다른 곳에서는 침이 튀도록 자기의 주장을 이야기 하던 회원들도 심드렁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복병이 있었다. 주차 할 곳이 마땅찬아 벼 벤 후에 빈 논에다 세워뒀던 차바퀴가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바퀴 앞 뒤로 짚을 넣어본다. 헛바퀴만 앵앵거린다. 모든 사람이 밀고 나서야 부르릉 - 얏호 소리도 잠간 차가 서는 사이에 또 바퀴가 헛돈다. 미리 한번에 다 가야하는데 뒤에 장애물이 있어서 서 버린 것이 잘못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그러나 도와주는 구세주는 항상 있는 법이다. 곽선생이 이 지역 분이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트랙터를 가지거고오란다. 10분만에 트랙터는 논 가운데 빠진 버스를 힘있게 뽑아낸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다 불회사에서 부회장님 도랑에 빠진 차 빼 냇을때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는데- 석불회의 수호천사는 전국에 계시나 보다.
고마웟습니다. 트랙터 운전수 아니 곽선생 친구분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
힘들고 긴장한 탓인지 허기가 돈다. 더 힘이 빠져 그런지 이제 나이 먹어 그런지 제때에 밥 먹지 않으면 전보다 심한 허기를 탄다. 과연 동내 사람이 있으니 좋다. 언제 전화했는지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상이 차려져있다. 부처님 죄송 하지만요. 민물 메기탕 맛있게 먹었거들랑요 배도 고프지요. 맛있는거 그냥 넘어가는 성미가 아니거든요 또 같이 먹자는데요 못이기는 체하면서 맛잇게 먹어야지요. 반주도 한 잔 했어요. 꿀맛이 따로 있나요 배고플 때 맛있는 것이 다 꿀맛이지요. 그래도 단풍잎 아래에 있는 시래기 말리는 사진도 폼나게 찍어 뒀어요. 벌써 메주 쑤어 달아 놓은 것도 놓치지 않고 담아 뒀습니다.
다시 좁은 시골길을 가고 또 간다. 가을 해가 길다면 걸어가자고 때라도 쓰고싶다. 비닐하우스 만들려나 밭이랑 이랑 고랑을 만들기 여념이 없는 한 가장집에 들어섰다. 이곳은 앵성리로써 옛 부터 목장이 있었던 곳이라던데 곽선생이 이 석불을 발견했다한다 기록에도 없다. 파손이 심하여 모두 석불로 보질 않아서 그런가?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석불인데 목과 양 손목이 없다. 하도 험하게 살으셨는지 몸의 무늬가 보이질 않는다. 더군다다 목과 양손목에는 구멍이 있어 이 석불을 조성할 때 목 따로 손목 따로 해서 끼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손이 내려와 있으면 통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좌상에 통인을 만든다는것도 좀 이상하다. 그러면 아미타의 수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 . 오른손, 왼손을 위로해서 이미타 수인중 중품의 모양을 나타내거나 두 손다 아래로 해서 하품의 수인을 나타냈을수도 있다. 아랫배 쪽 의 의문은 선명히 물결무늬로 남아 있다 가부좌한 다리는 빈약하기 그지없다. 만들다 힘들어서 밑에는 대충 넘어갔나 그 석수장이 힘깨나 없었나 보다 어느 회원이 이야기한다. 라호르 박물관에 있는 부처님 고행상과 비슷하다고 배부분이 훌쭉하다. 그러나 팔 부분과 가슴과 배 부분에는 한돌로 연결되 있어 소조상이나 판석같이 얇게 만들어져있는걸 보니 많은 기교를 부리기 힘들었으리라. 분분한 의견 속에 짧은 가을 해는 넘어 가려한다. 기왕 왔으니 더 부처님을 뵙고 가야하는데 발걸음을 재촉하여 코스모스 속에 서있는 시멘트 탑을 뒤로 하며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용흥리 해정사지 석불 전북 유형문화재 96호 이곳은 고부읍 성황산 해정사라는 큰절이 있던 곳이라하나 지금은 작은 절 이름이 같은 해정사다. 바다해에 솥정자를 쓰는 특이한 이름이다. 이 석불은 입불로 따로 떨어진 두부를 붙여 논 상처입은 부처님이다, 그나마 오른 팔은 관절 부위부터 떨어져 나갔다 육계의 모습은 보이나 상호는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귀 부분도 파손으로 길이만 알 수 있을 뿐 머리에 바짝 붙어 만 있는 모습이다. 삼도의 흔적이 보인다 법의는 통견의 모습으로 왼팔은 손목을 가슴에 데고 있다. 형태로는 보살상이 아닌 여래상이나 이외로 크기가 큰 입불이다. 다만 좌대는 새로 만들어서 모셨는데 발 앞부분은 따로 만들었는지 흔적은 남았다. 보호각 안에 계시고 햇볕의 상태가 극히 대조적이어서 사진 찍기 힘들다. 그러나 이 해정사는 석불보다 석탑이 더 유명한곳이라 불상의 바로 윗편 솔 밭 속에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는 석탑이 서있다. 크기나 모양으로 봐서는 5층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의 형태로는 3층탑이라면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5층탑의 기단이라고 봐도 충분한 상대갑석이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백제형식의 탑으로 이 근방에는 거의 5층탑만 남아 있어 그리 추정해도 유별난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다. 위에 남아 있는 3개의 옥개석은 고려시대의 영향이 크게 느껴진다. 옥개 받침은 3개로 그것을 증명하고 남으나 상륜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간신히 노반만 남아있고 복발이라고 보기에는 또 보주라고 보기에도 어중간한 돌이 놓여있어 보물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대석은 다 어디로 갔는지 돌이 틀린 느낌이다 하대갑석이 목탑의 흔적이 역력해 이곳이 백제의 땅이라 말 안해도 알 것같다. 절 주위에 무수한 주춧돌이 많이 남아 있다 보이는 데로 모아둔 모양이다.
차는 이평면 산매리 백운암으로 향한다. 1.4미터의 . 전북 문화재 자료 139호인 입불이 계신 곳이다 보호 각이 넓다. 보통 보호 각의 경우 입불 이던 좌불 이던 간에 비좁게 보이는데 이 부처님이 계신 곳은 좌우로 여유공간이 많다 새로 세웠는데 기둥부분만 머리초를 넣은 모로 단청인데 위의 서까래나 창방 쪽은 얼금 단정에 가깝다. 소박한 맞배 지붕으로 사방이 시원하다. 작은 불상에 크고 웅장한 보호각이면 부처님이 눌려져 보이는데 이곳은 넓고 편하게 만들었다. 두부는 눈 부분이 팬더곰 같아 이 석불도 화상을 입의셨나? 아니면 접착제의 흔적인가? 목이 떨어져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육계가 너무 뾰쭉하다. 귀의 모양이나 길이는 위엄이 아직도 남아 있다. 통견으로 늘어 뜨린 장삼 자락이 유연하다. 수인은 오른손을 든 모습이나 왼손은 가슴에 대고 있어 어는 수인이라 단정하기가 매우 힘들다. 여기에 이 석불은 좌대가 일품이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줄일데로 줄이고도 좌대의 위엄과 화려함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특히 발 부분은 앞 발가락 부분은 좌대에 조각해서 입불을 세웠다 이는 크지 않는 입 불을 세울 때 앞 발가락까지 몸에 붙여 조각하면 그 부분이 약해 세우거나 옮길 때 부러질 염려가 많고 조각할 때도 어려움이 많아 거불 일 때는 앞 발가락 부분을 따로 조각하야 붙이는 경우도 있으나 이렇게 좌대에 다가 바로 조각하기도 한다. 방형의 상대석엔 앙련이 부처님을 받들고 있다. 나머지는 많이 소실된 모습이다.
마침 김장 담그는 철이라 그곳에서 늙은 호박을 멸치와 함께 푹 고아 김치의 속을 만들 때 쓴단다. 그러니 얼마나 달고 맛있는 김장이 되겠는가? 배추도 속이 너무 꽉 차면 맛이 덜하다. 적당히 덜 차야 달콤한 배추 속이 되니 이것을 간해 놓은 배추가 입맛을 당기게 한다. 왜이리 많이 하느냐는 물음에 서울에 있는 아들, 딸래집 보내려고 많이 한단다. 자식들 생각에 부모는 마냥 일하는 것도 즐겁다. 이리 다 키우는 것도 업이요 내 하고픈 고생도 업이라 새끼들이 이 고생 다 알아 줄리야 만무하지만 하는 즐거움이 있고 감싸는 마음이 있는 부모는 그 부모의 부모가 그랬듯이 내리사랑의 표본을 보인다. 자식들 다 크고 나면 자기 혼자 자란지 안데나, 그러나 지금은 다 키워 놓고도 보살필게 많은 부모들이다. 하루만 늦게 왔어도 김치 속 버무릴 때 소에 감싼 맛있는 배추 먹어 보는 건데 아니 하루만 먼저 김장 시작 하셨드래도 맛을 봤을 텐데 아쉽기가 그지없다. 그래도 서울에서 온 사람들 맛이라 보고 가라고 홍시 감을 내온다. 점심 먹고 슬슬 배고파 오려는 때 운 좋게 얻어걸린 먹거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이제 시간의 여유가 없다 해가 넘어가 려한다 늦으면 석불 뵙기가 힘들다. 오후 5시도 못됐는데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보물 제914호인 소성면 보화리 부처님을 뵈러간다. 이 석불은 백제불로 추정되어 보물의 영광을 얻었다 지금 남아 있는 백제불은 유명한 서산 마애불과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그 조성 기법이 비슷하다고 여겨서 일까? 많이 파손 됐지만 두 분의 입 불이 계신다. 그럼 국보와 보물, 유형문화재, 문화재 자료는 어떻게 정하는가? 첫째는 대채로 기간은 50년이 넘으면 보물로 지정 될 수 있다 다만 특이 한 것으로는 50년이 되지 않아도 될 수 있지만 우리 문화 유산으로 그 가치가 길이 남을 만하고 보존해야할 필요성이 있을 때 그 작품이 문화적인 가치가 높을 때 보물로 지정이 된다. 국보는 그보다 한 단계 높아서 그 문화재가 보물과 같은 조건을 지녔으되 그것이 그 분야에 유일 할 때 그래서 대략 국보, 보물 사적. 유형 문화재. 문화재자료의 순으로 결정이 된다. 멀리서도 보호 각이 보인다. 내가 맨 처음 왔을땐 보호 각이 없었는데 두 분의 부처님 보호 각 치고는 너무 좁다. 더욱이 이 부처님은 입불 만 두분이라 이불 병좌상은 있으되(대략 마애불로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조성) 이불 입상은 보지 못했으므로 본디 삼존불로 조성 됐지만 1기가 분실된 경우 아니면 다른 한 분을 모셔온 경우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른쪽의 큰 석불은 광배까지 한 개의 돌로 조성된 것으로 보이듯 뒷면의 돌 두께가 넓다 모든 광배는 파손이 심해 두 광 부분에 흔적만 있고 눈이 움푹 파인게 흠으로 남는다. 우단편견으로 빗살무늬의 옷 주름이 간략하고 소박하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으나 손가락이 파손되고 오른손의 모양은 잘 남아 있다. 손바닥을 펴서 아래로 내린 것은 여원인이 분명한데 오른손 모양 때문에 통인으로 보기 어려워 아직 수인이 정착되지 못할 때 초기의 작품인가? 매몰된 흔적이 분명한 석불, 지금은 그냥 평범한 돌 위에 서 계신다. 처음에야 멋지고 화려한 연화대에 서 계셨을 텐데 세월의 흐름에 세상의 변화에 시달리고 부딧겨서 깨지고 닳아졌지만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그 모습 장하십니다. 그 옆은 작은 부처는 육계가 뚜렸하다. 오른손이 파손 됐으나 왼손은 가사 자락을 멋지게도 걸치고 계신다. 왼발까지 일자형으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이 오른발에 와서는 멋진 변화를 일으키며 사선으로 마무리된다. 이 석불도 연화좌대의 형태만 다 깨진 채로 남아 있고 새로운 방형 돌 조각에 찬 바람이 이는 산야에서 발 시러 울까 걱정되는 부처님이다. 모로 단청 정도나 될까. 작은 보호 각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한다. 부인과 함께 고향을 찾은 유형이 남고 오늘 하루 길 안내며 온갖 수발 다 들어서 우리 답사 길을 편안하게한 문사정의 곽상주 이종찬 두 분과 아쉬운 작별을 한다. 오늘 너무 고마웠습니다. 다음에 연이 닿으면 또 만날 날이 많기를 바라면서 서두에 기록한 지옥의 고속도로로 향한다. 훗날 이야기로는 수능이 끝나서 고3들 위로 여행이 많아 그리 됐다 하나 나는 이번 달만 정읍 방문이 세 번째다. 그냥 지나치기도 했지만 항상 서울 도착이 늦다. 고속도로가 막히는 까닭이다. 서울의 지하철은 평일은 도착지 1시까지 운행하지만 휴일은 12시 자정 까지다. 그러니 항상 막차를 타기 위해서 마음을 조려야한다. 아슬아슬하게 막차 타는 스릴을 즐기는 걸까? 여행과 사진이 좋아서 일까?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고픈 마음이 커서일까? 어김없이 주말이면 떠나는 여행, 이래서 내 인생은 막차여행이다. 가을 밤 하늘엔 별이 없다 도심의 탁한 공기가 다 별을 꽁꽁 숨겨 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