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격조 높은 예술은 신앙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준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나타나는 천국의 영광을 살펴보면 요즈음 많은 축하카드속에 등장하는 근엄하고 얌전한 조용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아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예수님은 희기가 흰 양털 같고.... 그의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10장을 보면 천국의 영광에 대해 불타는 숫불, 영화로운 광채, 요란한 소리, 성전에 가득한 구름, 신기한 광경과 동작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청각입니다.
성경은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96년은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147, 149, 150편은 신자들에게 악기를 연주해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어와 음악이 합쳐지면 언어만 있을 때 보다 두뇌에 더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장경동 목사님 집회에 1/5은 음악이 있는 것이 이 이치인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작곡가 헨델의 경우 자신의 표현으로 '초월의 코드'를 감지 했습니다.
샤프가 5, 6, 7, 8개가 붙으면 그는 모두 천국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리고 특정 코드를 사용해서 다양한 느낌을 살려냈습니다.
긴박감이나 질투심을 그릴 때는 G 단조
애틋하고 구슬픈 느낌을 만들어 낼 때는 E 단조
밝은 햇빛과 푸른 초장이 연상되는 분위기를 살릴 때는 G 장조
침울하고 낙심된 느낌을 유발할 때는 F 단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가장 잘 변화되고 도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루터의 이런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2. 후각
우리는 이 냄새가 우리의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냄새를 내게 하는 향이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모세에게 향품의 헌물을 모아 냄새 좋은 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피워야 했습니다.
엘리와 솔로몬은 향을 사르는 일이 중단되지 않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30장에서는 향기로운 향을 만드는 구체적인 지침이 나옵니다.
말라기서에서는 "해뜨는 곳에서 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고 깨끗한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신약을 접어들면서 특히 종교개혁을 하면서 우리 개신교는 아주 유익한 활동까지도 신앙과 분리를 시켜버렸습니다.
너무 많이 잘라버린 결과 손가락 덧나는 것을 두려워서 팔뚝까지 잘라내는 것과 같은 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실체를 일깨워주는 요소로 지금까지 우리가 남겨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설교, 성경공부, 기도, 성찬의 상징, 찬송 등입니다.
우리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기회의 광활한 박물관 안에 살지 않고 한 쪽 좁은 구석에 스스로 갇혀 지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이 향이 우리 교회에 지금 필요한지 모릅니다.
건물이 오래되어서 그런지 뭔가 좋지 않은 냄새가 괴롭히고 있습니다.
3. 촉각
이것은 만짐으로서 느껴지는 영성의 색깔입니다.
천주교나 정교회의 예배를 보면 입맞춤이 자주 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 제단, 거룩한 기명등에 입맞춤을 합니다.
왜냐하면 입술을 대는 것은 그 대상의 소중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것이 옳다고 우리가 따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촉각이 영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슴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다 더 진지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의 소원을 아뢰자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대전 중문침례교회의 예배실황을 보면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한결같이 목사님이 맨트를 합디다
할렐루야 오늘도 참 좋은 날 성스러운 주일 아침에 우리 주님의 전에 찾아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포옹하면서 인사하실 때 참으로 반갑습니다. 잘 나왔습니다.라고 하십시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나는 정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촉각의 영성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촉각의 영성이 단순히 인간의 감정에서 촉발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런 촉각을 사용한 영성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8:24입니다.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피를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바르는 것은 저들이 듣는 것, 행하는 것, 움직이는 것 모두를 정켤케 하여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기 위한 결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촉각의 영성의 색깔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다짐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촉각이라고 하는 영성의 색깔의 종류입니다.
4. 시각
우리 기독교의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합니다.
사실 구약의 하나님은 전혀 그 모습을 드러내어 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하면서 경배하면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으로 조각으로 동상으로 만들어서 그 앞에서 정말 경건하게 기도도 드리고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하는 계명을 엄격하게 지켜서 강대상에 십자가를 두는 것 가지도 반대를 합니만
현실을 보면 교회의 종각위의 십자가, 십자가 빼지, 십자가 목걸이 등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기독교라는 것을 또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자기도 알고 남도 알게끔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경건해 집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의 영성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예배당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건물을 보면서도 마음에 경건함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구 소련시절 아름답게 지어진 정교회 성당을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비록 종교의 자유는 없어서 교회에는 못나갔지만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다짐을 함으로 신앙이 유지되었다는 말을 들어봅니다.
그래서 전도학의 경우 예배당 건물이 바로 전도다 라고 하는 말까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의 영성인 것입니다.
5. 미각
하나님은 미각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단짠신쓴의 맛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소금의 짠맛을 통해 우리들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하면서 우리는 포도즙과 떡을 먹으면서 맛을 느낍니다.
포도즙을 통해 주님의 피 흘리심을 느낍니다.
떡을 통해 우리를 위해 찢겨진 주님의 몸을 생각합니다.
미각은 기도에도 사용되어지는데
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연상시킵니다
쓴 것은 응답이 없는 기도를 연상합니다.
이 모두가 미각이라는 영성을 통해 접근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감을 통해 감각으로서 하나님께 어 가까이 나아가면 더 아름답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오감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각은 우리를 속 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태표적인 것이 청각을 통한 잘못된 영성의 경우입니다.
오늘날 찬양집회가 많이 있습니다.
뜨겁게 열정적으로 찬양합니다.
아이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집니다.
앞에서 그 순간 선교사로 헌신할 사람, 주의 길로 갈 사람하면서 결신자를 찾습니다.
아이들은 울고불고하면서 손도 들고 나가서 안수도 받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 참된 진실된 헌신과 결심이 있는 줄 압니다만 제 가 아는 범위내에서 95% 이상은 감각에 속은 잘못된 결단입니다.
그렇게 결신한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음악의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말입니다."
앰프가 채 식기도 전에 그녀의 신앙은 사그라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할 때 이런 마음으로 찬양하는 것 같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있다면 가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노래는 그저 노래일 뿐임을 하나님도 아신다"
내 생각은 딴 데 가있으면서 입으로만 주님 앞에 엎드리겠다고. 땅끝까지 주의 이름을 전하겠다고,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노라고 찬양합니다.
마치 자장면 한 그릇을 시키는 것 만큼이나 무감각하게 찬양합니다.
성도 여러분 !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감상에 애착이 스며들 때 자연주의자들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정교한 성전이나 아름답게 그려진 성상의 감상에 애착이 개입되면 감각주의자들도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