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
(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
(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통도사(通度寺:佛寶사찰)·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부속 말사(末寺)는 75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
(藥水庵)·원당암 등이 있다.
해인사 목조희랑대사상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치인리(緇仁里) 해인사박물관에 있는 희랑대사의
진영목상(眞影木像). 1989년 4월 10일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82cm, 재료는 나무이다.
해인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시작된다.
희랑은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운, 당시의 해인사 주지이다.
몇 토막의 나무에 조각하여 잇고 베를 입혀 채색한, 한국에서는 희귀한 목조 초상
조각으로 930년(고려 태조 13) 이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체구는 등신대(等身大)에 가까우나 머리는 다소 큰 편이며 밑을 막아 복장
(伏藏)을 장치하였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으며, 자비로운 눈매와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의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다.
얼굴과 목 부분, 그리고 단정히 맞잡은 두 손의 모습에 나타난 사실적인 표현은 당시의
다른 조각작품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기법을 보여준다. |
해인사 고려각판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경각판(佛經刻板). 1982년 5월 22일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으로 총 28종 2,725장이다.
이들 불경 각판은 이미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대장경판(大藏經板)과는 달리 대장경판을
보관한 두 판고(板庫) 사이에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뒤섞인 채로 해인사
잡판으로 불리어 왔다.
그러나 정리 과정에서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전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는 등
문화재로서의 귀중한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1982년 총 54종 가운데 28종이 국보로
지정되고 26종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고려의 간경도감판(刊經都監板)·지방관판 등 관에서 판각한 것
이외에 해인사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판각한 것과 개인이 판각한 것 등이 있는데,
판각 연대는 고려 초에서 조선 후기에 걸쳐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으므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목판에는 《묘법연화경》, 《금강경》, 《화엄경》 등의 불교경전과 신라와 고려를
비롯한 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경전류에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이나 불교신앙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들이다. 대장경판과 함께 고려시대 판각기술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사 및
문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가야산성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修倫面) 백운동(白雲洞)의 가야산에 있는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 용기성(龍起城)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주위 1만 5935척, 높이 5척"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
언제 어떤 구실로 성을 쌓았는지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가야산 정상에서 계곡을 끼고 구축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백운동에서
용기사 터로 올라가는 계곡을 따라 1km 정도 되는 지점에 계곡을 가로질러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정상의 서쪽 능선을 따라 남아 있다.
수구(水口) 및 성문으로 되어 있는 통로가 있는데, 너비 4m, 통로 동쪽의 높이는 2.2m,
석축된 도로의 길이는 11m에 이른다. 성벽은 19m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통로 서쪽의 계곡 너머로 이어지는
성벽은모두 붕괴되어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 때 근처에 독용산성(禿用山城)이 수축됨에 따라 이 산성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퇴락하였다. |
팔만대장경판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
하였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m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95년 12월 석굴암·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
합천 영암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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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암사지 귀부 서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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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31호.
1964년 지정.
면적 3,812m2.
경남 서부의 가야산과 지리산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의 황매산(黃梅山) 남쪽 기슭에 있으며, 영암사라는 절 이름도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지만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탁본으로 남아 전하는 <적연국사자광탑비(寂然國師慈光塔碑)>(1023년 건립)의 비문을 통하여 고려시대 이곳에 영암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금당지(金堂址) ·
서금당지(西金堂址) ·
중문지(中門址) ·
회랑지(廻廊址) 등의 건물터와 3층석탑 ·
쌍사자석등 ·귀부(龜趺) ·석조(石槽) ·기단 ·계단 등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1984년 발굴조사 때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각종 와편(瓦片)과
토기편, 금동여래 입상 등이 발견되었다.
현존하는 유구(遺構)와 유물들로 보아 경남지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유서깊은
대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늦어도 9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등산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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