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이다.
한강과 과천 사이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관악산 공작봉(孔雀峰)기슭에 위치해 있다.
공작봉은 관악산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어내려 불끈 솟아올랐다가는 엎드리는 듯
줄기와 봉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면서
늠름한 군사들이 여러 겹으로 호위하는 모양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
43만평에 16만5천의 호국영령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지이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서울현충원을 상징하는 현충탑이다. 그 탑에 있는 헌시이다.
현충탑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희생정신을 추앙하면서
동,서,남,북 4방향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十(십자)형으로 된 탑이다.
이 탑의 앞쪽에는 오석평판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제단 뒤쪽에는 헌시가 오석에 새겨져 있으며
제단 앞에는 향로와 향합대가 놓여 있다.
탑의 좌우에는 화강암 석벽이 펼쳐져 있으며 좌측석벽 끝에는 5인의 애국투사상이,
우측석벽 끝에는 5인의 호국영웅상이 각각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탑의 내부에는 위패봉안관이 있고 위패봉안관 지하에는 납골당이 설치되어 있다.

학도의용군무명용사탑이다.
이 탑의 전면에는“무명용사영현”
후면에는“이곳에 겨레의 영광인 한국의 무명용사가 잠드시다”
단기 4288년 7월 15일 대한민국
단의 앞쪽 제단 전면에는 “학도의용군의 묘”라고 각각 새겨져 있다.
이 탑에는 6.25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김춘식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에 안장되어 있다.
6.25가 발발하여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자 약 5만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구국전선에 자진 참전하여 포항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7,0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시신이나 무덤 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이곳에 모셔진 48위는 당시 포항전투에서 괴뢰군 전초부대와 분투하다가 전몰한 학도의용군이다.

산들산들
초록빛을 머금은
나뭇잎이 바람따라 움직인다.
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웃는다.
언덕을 오르고 오른다.
차곡차곡 꽃혀있는
책들처럼
묘비들이 세워져있다.
조국을 위해 몸바치신
군인들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묘비에 새겨진 이름
한 글자 한 글자
스칠 때마다
군인 장병들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들려온다.
정다연양(서울송파중학교 2학년)의 시(詩)
'내 마음속의 현충원'이다.
17회 호국문예에서 중등부분 우수상을 받았다.



지장사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에 뛰어났던 도선(道詵)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도선스님이 북쪽으로 만행을 하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둘러보니 서기가 퍼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물이 샘솟는 명당이므로 토굴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갈궁사를 고려 공민왕 때 보인(寶印) 스님이 중창하고
절 이름을 고쳐 화장암(華藏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577년(선조 10) 왕이 창빈묘(昌嬪墓)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창빈의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것이다"
안진호스님은 자신이 편찬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서 사기(寺記)를 인용해
이같이 적고 있다. 사실 창빈의 묘는 1578년 즉 선조 즉위 11년 양주 장흥리에서
이곳 동작리로 옮겨졌다. 안진호 스님은 창건에 대한 여러 설을 언급하며 이 시기에
지장사가 중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던 것같다.
선조 때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과거시험을 준비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함께 공부할 때 측신(厠神)이 두 소년의 아랫도리를 움켜잡고 ‘대감’이라고
불러서 미래를 예언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화장사는 1663년(현종 4)에 중수를 하는 등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왔다.
영조 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伽藍攷)』에도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在銅雀里縣北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1862년(철종 13)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중건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운담(雲潭)과 경해(鏡海) 두 스님이 경파루(鏡波樓)를 새로 지었다.
1878년(고종 15)에는 주지 서월(瑞月) 스님과 경해 스님이 큰방 등을 수리하였다.
1893년(고종 30)에는 화주 경운(慶雲)·계향(戒香) 스님이 불상을 개금·개분하고
구품탱·지장탱·현왕탱·독성탱·산신탱을 봉안하였고, 1896년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화주 풍곡(豊谷) 스님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단청하고
후불탱·신중탱·감로탱·신중탱·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에 따라 봉은사의 말사로 편입이 되었다.
1920년에는 주지 원옹(圓翁)스님과 명진(明眞)스님이 큰방을 수리하였고,
1936년에는 주지 유영송(劉永松) 스님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하였다.



옛날 한강에 사는 한 어부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 불상이 나타나 빛을 보게 해달라고 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어부가 그곳에 가보니 철불상이 녹슨 채 있었다.
어부는 그 불상을 가져와 깨끗이 닦아 집에 모셔두었다.
그러나 그후로 고기가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계속되었다.
어부는 불상을 집에서 가까운 화장사로 옮겼다.


능인보전(能仁寶殿)에는 철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철불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서 유행했던 것으로
지장사 철불 역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몸에 비해 비교적 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이 불상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당당하게 앉아 있는 자세로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선이 강조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면서 갸름하며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코, 입 등이 표현되어 있어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두고 아래쪽으로 향하게 한 반면에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결가부좌한 다리 중앙에 두고 있는 항마촉지(降魔觸地)의 손 형태를 하고 있다.
왼손 위에 약합(藥盒)을 쥐고 있어 약사여래(藥師如來)로 여겨진다.
약사여래는 모든 중생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부처로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신앙을 받았던 것이다.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지장사가 자리한 곳을 두고 일찍이 이승만 대통령이 들렀다가 남긴 말이다.
이같은 일화가 전할만큼 이곳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숭만대통령이 이 지장사를 방문해 이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6.25전이후 정부는 사찰 소유의 땅 39만평을 수용해 오늘의 현충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국립묘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유가족들이
호국영령을 위해 기도하는 사찰이 되었다.
그 뒤 1983년에는 혜성(慧惺)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다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