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엄마는 길남 씨의 대답이 영 못마땅한 눈치다.
"근께 소출의 절반을 더 가져가겠다?"
토방에 오도카니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길남 씨는 더 말해 무엇하겠냐는 표정이다.
"내 그렇게는 못하겠소. 안 그래도 객지에 있는 우리 아들놈이 쌀 가지러
어제 내려왔는디 까딱하다 빈털터리로 보내게 생겼당게."
엄마는 두 눈을 부라리고 길남 씨를 쳐다본다. 아버지가 죽고 길남 씨에게
벼농사를 맡긴 지도 3년이나 된다.
"송센 죽을 때 나한테 뭐라고 했소? 땅을 묵히면 안 된다면서 농사 전부 떠넘길 때는 언제고……. 물꼬를 터도 배수가 안 되는 땅을 사겠다는 임자라도 나타났는가 보제?"
길남 씨는 반쯤 태운 담배를 마당으로 탁 뱉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누렁이가 마당에 코를 박고 무슨 냄새를 맡다 길남 씨의 커다란 제스처에 움찔 놀랐는지 크응, 으르렁댄다.
"이 잡것이……."
길남 씨는 오른발을 치켜들어 개를 저만치 밀어내고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저런 도둑놈의 심보가 어디 있당가. 야, 내 야그 좀 들어봐라. 무식한 여편네 몰래 빼돌린 쌀만 해도 서너 가마니는 되겄다. 올해 무슨 흉년이 들었다고 우리 몫이 고작 이것밖에 안 되냐?"
엄마는 마당 귀퉁이에 차곡차곡 쟁여진 쌀 포대를 보면서 울상이다. 좀전
길남 씨가 경운기로 부려놓고 간 것들이다. 논 2천평에서 나온 소출의 절반이 쌀 다섯 포대. 하지만 내년부터는 서너 포대로 줄어들 형편이다. 길남
씨가 힘이 부친다며 자기 몫을 더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 길남이 아재 나이도 생각해 봐야제. 그 어른 벌써 환갑이요. 자기
농사 짓는 것도 힘들 텐데. 길남 아재 말대로 해줘요."
엄마 심경도 간파하지 못하고 나는 길남 아저씨 편을 든다.
"오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지 마라. 그랬다간 저 양반이 통째로 우리논을 말아묵을 거여. 넌 모르겄지만 여름에 양수기로 물 댈 때 들어간 전기세도 몽땅 우리 몫으로 돌리지 않았겠냐. 하여튼 도둑놈의 심보, 정말 환장하겠다."
나도 안다. 8월달 전기세 고지서가 집으로 2통 날라들었다. 글자 해독을 못하는 엄마는 우편물이 배달되면 무조건 내 휴대폰 번호를 누른다. 전화 거는 법은 예전에 내가 알려줘서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전기세와 전화세, 의료보험료 고지서는 식별을 하지만 똑같은 종이쪽지가 두 장 날아온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조금 있자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길남 씨가
틀어놓은 게 분명하다. 집 옆에는 길남 씨의 축사와 창고가 있다. 창고 안에는 모판과 농기구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고, 곡식 종자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창고 외벽에 걸려 있다. 라디오에서는
매일같이 노래가 새나온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규칙적인 시간에 라디오를
켜 놓는다는 사실을 부지불식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노랫소리는 가축들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신호인 셈이다.
축사는 창고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암소 두 마리가 있는 우사와 강아지
다섯 마리를 키우는 견사(犬舍), 염소와 닭의 공동 우리가 비슷한 공간을
꿰차고 있다. 길남 씨는 어떻게 알고 염소와 닭을 한 공간에 키울 생각을
다 했을까. 처음에는 그게 무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염소의 드센 행동에 닭들이 기를 못 펴고 살 텐데, 알고 보니 전연 그게 아니었다. 소 닭보듯 닭
소보듯, 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염소와 닭의 행동은 일종의 묵계처럼 서로의 간섭에서 배제되고 있는 듯했다.
그 우리에는 오리도 한 마리 있다. 순백의 깃털에 우람한 체구를 가진 녀석이지만 처음부터 순탄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다. 애당초 터줏대감으로 있던 닭들의 자리에 오리 한 마리가 들어올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오리는 공동 우리에 들어온 첫날부터 암탉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내가 지켜볼 때는 항상 물만 먹고 사는 것 같은데 닭들의 먹이를 축내기라도 한 것일까. 며칠 암탉들의 공격을 받은 오리는 털이 하나씩 뽑혀져나가고 속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닭과 오리가 앙숙이 될 수도 있구나 깨달았다.
한달 만에 고향집을 찾았을 때 나는 오리가 닭들의 공격을 받아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어느날 아침, 먹이를 주기 위해 축사로 와서 싸늘하게 식은 오리 사체를 보고 실망해 할 길남 씨의 표정을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그 오리는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다. 오리가 다가가면 암탉들은 저만치 달아나기에 바빴다. 대관절 이 우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동안 우리 앞에서 떠나지 않고 오리와
닭들을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길남 씨가 틀어 놓은 음악이 들리면 가축들이 즉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곤하게 자고 있던 암소가 벌떡 일어나 우사 밖으로 목을 길게 내빼고
배 고프다며 보챈다. 끼리끼리 모여 있던 염소와 닭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앞다투어 문 쪽으로 간다. 길남 씨는 언제나 개밥부터 먼저 준다. 개 사료는 창고 안에 들어 있다. 창고 문이 삐거덕 열리면 강아지들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침을 질질 흘린다. 한해 5천평이 넘는 농사를 짓지만 가축
사육에서 벌어들이는 수입도 쏠쏠한 길남 씨다. 그의 사육 수완은 상당히
특이해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떤 가축이든 새끼 때부터 키우는데 꼭 두
마리를 산다. 그것도 모두 암놈이다. 우사 안에 있는 암소도 송아지 적부터
이곳에서 컸다. 3년 정도 됐나. 새끼 때 내가 예뻐해 준 걸 아직까지 기억하는 모양이다.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날 반기니 말이다.
그 송아지가 커서 이미 새끼를 두 마리나 낳았다. 교배의 주기를 잘 맞춘
건지 두 마리의 암소가 5개월 여의 차이를 두고 번갈아 새끼를 깐다. 한 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나 몇 달 동안 잘 커서 팔려 나가면 또다른 암소가 출산의 고통을 맞이하는 것이다. 길남 씨는 소의 산후 조리를 위해 쌀죽을 쑤면서 '요것들이 번갈아 날 고생시키는구먼' 행복한 비명을 질러댄다.
암소들은 자기네들이 쌍둥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어쩔 때 보면 자기 새끼보다 서로를 위해주는 것 같다. 새끼가 팔려 나가고 며칠 되지 않아서 그들은
금새 생활의 활력을 찾는다. 그럴 때 보면 피붙이보다 서로에게 더 끈끈한
정을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소들의 먹이가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우사로
가져간다. 가령 과일 껍질이라든가 채소 부스러기 같은 거 말이다. 암소들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새끼 때부터 그러더니 다 커서도 틈만 나면 서로의 몸을 핥아주고 부둥켜안고 자기도 한다. 개중에 한 녀석은
이름까지 생겼다. 얌순이. 물론 길남 씨가 붙여준 것이다. 얌전하고 순하다는 의미일 게다. '우리 얌순이 잘 있었는가.' 축사에 오면 길남 씨가 제일
먼저 내뱉는 말이다.
염소들은 대가족을 이룰 만큼 많다. 새끼 흑염소가 무럭무럭 커서 3년 동안
깐 자식들이 스무 마리 가까이 된다. 하나쯤 돌연변이로 하얀 염소가 나올
만도 한데 이 공동우리 안에는 모두 검은 염소뿐이다. 염소 가격이 영 개운치 않은 탓일까. 길남 씨가 염소를 판 적이 언제 있었던가 싶다. 할아버지
염소부터 손자 염소까지는 덩치와 뿔의 크기, 턱에 난 수염으로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다. 이 우리에는 숫염소가 한 마리 있는데 덩치가 워낙 커서
자기를 낳아준 어미만 빼고 모든 염소들을 제압해 버린다. 먹이도 독식하고
교미철이 다가오면 무시무시하게 큰 뿔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박아댄다. 그래서 길남 씨는 이 거칠고 막가파 염소를 저만치 떨구어 묶어 놓았다.
가축들의 먹이를 다 주고 길남 씨는 라디오를 후닥닥 끈다. 먹이주기는 대충 십 분이면 끝난다. 소들의 겨울나기 먹이는 어제 길남 씨가 반나절 동안
경운기로 나른 짚들이 차지할 것이다. 우사 옆으로 짚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짚단은 겨울 내내 막사의 방풍 역할도 톡톡히 할 것이다. 염소들의
먹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길남 씨가 이른 아침 산으로 가 베어 온 동백나무 잎사귀와 푸성귀 따위가 될 것이다.
"어이 길남이, 안 바쁘면 나랑 막걸리 한잔 하세."
아랫집 재동이 아저씨가 담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말한다. 고희를 진작
넘긴 재동 씨는 서울에서 살다 이태 전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내가 어릴 적
봐왔던 재동 씨는 고향을 등진 지 이십오 년 만에 아주 귀향해 버렸다.
그가 귀향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헌집을 입식 가옥으로 개조한 것이다. 어찌나 지붕이 높은지 마당에 서면 예전에는 훤히 보였던 마을의 논과 집들이
전부 가려질 정도였다. 마을에서 가장 꼭대기집에 살고 있는 우리집 마당에
서면 널찍한 하늘과 흰 구름만 내다보일 뿐이었다. 나는 숨통이 조여 올 만큼 답답하다고 느꼈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재동 씨의 가옥 개조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우리집 마당가에 심어진 감나무와 유자나무 가지들이 재동네 지붕 높이만큼 휘어져 있다고 톱으로 그 나무들을 베어 버리는 데에도 흔쾌히 승낙할 정도였으니까.
재동 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갑내기다. 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들의 친분은 아주 두터웠다. 오죽하면 재동네 전답 또한 우리네와 이웃하고 있을까. 재동 씨가 서울로 떠날 때 아버지는 30만원을 건네주고 그의 두 마지기 밭을 사들였다. 경사가 상당하고 잔돌들이 많은 재동네 밭에서 거둬들인 곡식은 적었지만 아버지는 피땀 흘려가며 보리 한알
콩 한 꼬투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엄마는 길남 씨에게 논농사를 맡겼지만 밭농사는 손수 지었다. 사실 시골
노인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좀이 쑤셔서 더 빨리 병이 도진다. 아무래도 논농사보다 손이 덜 가는 밭농사가 엄마 나이에 딱 맞는 작업
환경일 테지만 농약을 치거나 리어카로 곡식을 운반할 때는 남자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재동 씨는 아버지의 부재를 완벽하게 메웠다. 그 대가로 예전 자기 소유의 밭을 거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흔이 넘은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인지 재동 씨는 너른 땅을 많이 묵혀 놓았다. 아버지의 정성을 생각하자면 턱없이 모자란 농사였다. 재동 씨는 아버지가 죽고
일 년이 되어 귀향했지만 아버지의 부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늙으면 다 저럴까 싶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가 서울로 가고 귀향하기까지 고향을 몇 번이나 찾았던가. 내 기억으로 그의 부모님 산소 벌초까지
아버지가 한 걸로 봐 명절 때조차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쏟았던 두터운 정을 재동 씨가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는 귀향해서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슬퍼했어야 했다.
"재동이 아재가 뭔 일이당가요? 대낮부터 술타령이게."
또 무슨 바깥일이 있는지 길남 씨는 경운기 시동을 걸다 만다.
"인자 추수도 끝났고 한턱 낼 일만 남았구려."
"오메, 재동이 아재 말하는 것 좀 보소. 공판 날짜 기다리는가 벼."
재동 씨는 담벽에 붙어 서서 두말 하면 잔소리라는 듯 히죽 웃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겠다 이 소리당가요? 그라믄 오늘 막걸리 안 얻어 묵을라요."
길남 씨는 그만 난색을 한다.
"허허, 자네 앞에서는 농담도 못한당게. 그게 아니고 긴히 자네한테 할 야그가 있어서 그라네. 속히 와 보소."
길남 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재동 씨는 얼굴을 감춘다.
점심을 먹고 나는 천둥지기 논으로 갔다. 고향에 오면 으레 찾아가기 마련인 일종의 산책 코스이기도 했다. 단 하루 휴식을 취하기 위해 광주에서 두
시간이 넘게 승용차를 타고 귀향하지만 정기적으로 해 온 산책을 무시해 버릴 만큼 고향 사랑이 부족한 건 아니다. 열 마지기 남짓한 우리논은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에 있다. 고깃배 형상을 한 긴 마을을 지나고 경지정리가 잘된 논들을 지나면 강처럼 길고 폭이 넓은 하천이 나온다. 하천 위에 놓인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천수답이 시작된다. 천수답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곳에 오십 평생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점철된 우리논이 있다. 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건조한 땅이지만 정 중앙에 둠벙이 하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비가 오거나 마을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야지 모내기를 할 수
있는 근처 논과는 달리 가뭄에도 항상 마르지 않는 둠벙의 물 덕분에 아버지는 평생 그 땅의 일꾼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어릴 적에는 키를 넘어 둠벙의 물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는데 커 가면서 발도 담그고 내 얼굴도
들여다보면서 미소짓곤 했다. 이제 둠벙은 아버지가 죽기 일년 전 면사무소
직원들이 설치해 놓은 관정이 대신해서 사라지고 없다.
천둥지기 논 옆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놓여 있다. 일손을 잠깐 멈추고 새참을 먹을 때 아버지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곤 했다. 고된 하루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도 바위는 아버지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낮고 널찍한 바위들을 괴고 있는 두 개의 주춧돌……. 어릴 적에는 이 바위에 대한
의구심이 참으로 많았다.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믿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듯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그리고 찌그러짐없이 널따랗고 둥근 형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바위에 앉아 아버지의 작업 현장을 지켜보다가도 의문점은 날로 깊어가기만 했던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그 바위들이 고인돌이라는 사실을 알고 적이 놀랐다. 아버지도 그 바위들이 옛 족장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11월 초순, 추수가 끝난 들판에 우수가 짙게 깔려 있다. 넓은 평야에 점점이 박혀 있는 염소들이 벼의 그루터기에서 자란 풀들을 뜯어먹고 있다. 어쩌다 짚단이 쌓여 있는 논들도 보이지만 예전과는 달리 소를 키우는 집들이
많지 않아 짚들은 모두 거름으로 쓰이기 위해 논바닥으로 깔아졌다. 멀리서
보면 꼭 오두막집 형상을 하고 있는 그 짚단을 놀이터 삼아 보낸 시절이 생각난다. 또래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저마다 볏단 하나씩을 방패삼아
술래인 내 쪽으로 돌진한 적이 있었다. 한 아이가 먼저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모방한 것 같다. 술래인 나는 숨은 아이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볏단으로 가려져 있어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놀라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상심하니까 말이다. 신의 가호라도 있길
빌면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데 난데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놈들아! 짚단 다 뭉개진다."
아버지는 하천 위,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던 어린 나에게 구세주로 다가온 아버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우리 논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돼서야 우리논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 인생과 궤를 같이 한 열 마지기의 땅은 알고 보면 무척 초라하다.
S자 형태로 휘어진 논은 기계로 모를 심고 벼를 벨 수 없어 가장자리 쪽은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아버지는 이앙기나 콤바인이 들어오기 하루
전 논가에서 2미터 가량 안쪽으로 모를 심고 벼를 베어 놓았다. 어떤 해는
기계가 들어오지 않아 아버지 혼자 끙끙대며 벼를 베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어가고 더 이상 품앗이가 힘들어졌을 때 아버지는 '우리논도 경지정리를
해야제?' 하면서 엄마를 부추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애당초 경지정리가
가능한 땅도 아니어서 아버지 입장은 더욱 서러웠다.
마을 언덕배기에 서면 천수답이 훤히 보인다. 점심 때가 돼도 아버지가 논에서 안 돌아오면 엄마는 언덕배기로 가 아버지의 동태를 살펴보라고 했다.
나는 길남 씨의 축사가 끝나면 시작되는 언덕배기로 한달음에 달려가 우리논 쪽을 본다. 아버지는 논옆 바위에서 쉬고 있다. 내가 볼 때 아버지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귀가하기 전 항상 바위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듯 골똘히 하고 있는 걸까. 아버지의 시선은 하천 저쪽 너른 평야를 향하고 있었다.
죽기 이틀 전에도 아버지는 바위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그날은 집에서
논으로 리어카를 이용해 모판을 실어 나르던 중이었다. 열 번을 왕복해야
끝낼 수 있는 고된 일이었다. 리어카 바퀴 굴러가는 속도로 보아 반나절은
고사하고 하루종일 해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 두 번을 실어 날랐는데 아버지는 힘이 부친다며 잠깐 쉬자고 했다. 나는 모판을 논둑을 부려놓고 빈 리어카를 끌고 집으로 왔다. 점심 먹을 시간이 돼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언덕배기로 가서 보니 아버지는 바위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는 듯싶었다. 해질녘 귀가한 아버지는 엄마에게 이상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점심 때 집에 와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웬 모르는 사람들이 막걸리와
떡을 한상 가져와 포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먹다 남은 음식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몸이 너무 안 좋아 읍내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와 시티 검사를 한 결과 간암 말기로 판명되었다. 암 세포가 뼛속까지 침투해 항생제와 항암제 치료마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우리 가족은 조용히 아버지의 죽음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두 시간 여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오니 엄마가 없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누렁이가 마실 갔다가 오는지 나보다 5분 늦게 마당으로 들어선다.
누렁이 입에 웬 뼈다귀가 하나 물려 있다. 녀석은 그걸 마당가 개 밥그릇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또 아랫집 재동네로 가서 훔쳐온 것일 게다.
재동 씨는 요즘 몸이 부실하다며 보약을 먹고 매일같이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 집에는 채식을 하는 가축만이 있으므로 고기 뼈다귀들은 죄다 우리
누렁이 차지다. 처음에는 생선의 뼈라든가 돼지 비곗덩어리 따위를 요리한
즉시 집으로 가져오더니 요즘에는 시치미를 뚝 떼듯 그것들을 며칠이고 숨겨놓는다. 아마 날마다 고기를 먹는 자신을 엄마가 싫어할 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후각이 어찌나 밝은지 누렁이는 고기 냄새를 맡고 즉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무튼 녀석이 집에 없다면 십중팔구 고깃덩어리를 훔치기 위해 재동네로 내려가 있다. 그러다가 재동 씨한테 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괜히 누렁이가 걱정이 된다.
길남 씨와의 술판은 벌써 끝난 걸까. 마당으로 내려와 재동네 거실로 나 있는 뒷문을 살핀다. 아랫집은 잠잠하다. 길남 씨는 보이지 않고, 벌써 한잔
하고 취기가 달아올랐는지 재동 씨만이 거실에 널브러져 자고 있다. 뭔 얘기를 나눈 걸까. 요즘 둘 사이가 썩 좋지만은 않던데…….
엄마 때문이다. 폭삭 늙어 버린 엄마는 나약한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은 재동 씨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쪼르르 아랫집으로 달려가기부터 한다. 평소에도 날 붙잡고 '집에 남자가 없는 설움이
이다지도 크냐' 하면서 울먹이기까지 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엄마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재동 씨에게 모든 걸 의지하는 것뿐이리라.
방으로 들어오니 엄마가 차려 놓은 밥상이 있다. 절임배추와 시금치 나물,
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가 양은냄비 속에 가득 들어 있다. 자식이 뭔지 어제 내가 내려오겠다고 전화로 알리자 부랴부랴 준비한 것들이다. 평소 엄마의 반찬은 시래기 국과 기껏해야 나물 한두 가지다. 정성 들여 만든 찬거리도 모자라 엄마는 광주로 올라갈 때 내 손에 쥐어주려고 보약과 쌀까지 준비해 놓았다.
밥을 한 숟갈 뜨는데 축사 쪽에서 수탉의 우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어찌나 큰지 귀가 멍멍해 죽을 지경이다. 닭이 홰를 치는 새벽 시간도 아닌데
뭔 일인가 싶다. 아마 미친병에 걸렸거나 같은 우리에 살고 있는 염소와 불화를 겪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리의 신데렐라 변신은 결국 수탉의 과잉보호인 것으로 나타났다. 두 시간
동안 우리를 관찰한 결과 오리와 수탉은 거의 붙어 다녔다. 먹이를 빼앗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저만치 떨어져 있는 오리 곁으로 암탉들이 모여들라치면 수탉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들을 쫓아 버렸다. 이제 수탉은 오리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수탉이 오리를 보호하기로 작정한 건 순전히 본능 때문일까, 연민 때문일까?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녀석들을 보고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점심을 먹고 입가심으로 어제 내가 사온 귤을 까먹고 있는데 재동 씨가 대문을 밀고 나타난다. 선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재동 씨의 손에 까만 봉지가 들려 있다. 내가 인사하는 것도 모르고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누렁이가
개집에서 나와 재동 씨를 반긴다. 봉지 안에 든 고기 냄새를 귀신같이 맡은
모양이다. 다행히도 개 밥그릇에 있던 뼈다귀는 누렁이가 제 집으로 가지고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뼈다귀를 봤다면 재동 씨가 누렁이에게 고기
부스러기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엄마 아직 안 왔냐?"
까만 봉지를 개 밥그릇에 내려놓고 재동 씨가 돌아서며 날 본다.
"논에서 돌아오니까 없던데 어디 가셨어요?"
내가 묻자 재동 씨가 화들짝 놀라며 반문한다.
"논에는 왜 간 겨?"
"그냥 운동 삼아 간 거죠."
"니도 길남이를 미워하냐? 그래서 논에 간 거여? 길남이가 느그 논을 거저
묵을려고 달려든다고 보는겨?"
가만 보니 재동 씨는 우리집 속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 또 엄마가 길남
씨의 횡포를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친 것일 게다. 안 그래도 부풀려서 말하는 엄마의 입장은 재동 씨에게 얼마만큼 와전이 되었던 걸까. 나는 한편으로 그게 걱정이 된다.
"아까 내가 길남이한테 얘기 다 했다. 느그 엄마가 땅을 묵히는 한이 있더라도 소출의 반 이상은 못 준다고……. 그래 길남이가 말하대. 땅을 묵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구. 그 양반, 요즘 읍내 병원에 다닌대. 이런저런 농사일로 병이 도진 모양이야. 생각해보면 안 됐제. 니도 알다시피 벌써 환갑이 되지 않았냐. 길남댁이 그랬단다. 느그 논 짓지 말라고. 사람이 다 죽어가게 생겼는디 그깟 농사가 문제냐고 말여."
재동 씨는 마치 자신의 처지가 그러는 것마냥 긴 한숨을 토해낸다.
"그래서 길남 아재는 어떻게 하겠대요? 당장 우리 농사 포기하겠대요?"
길남 씨의 행동을 횡포라고까지 비하했지만 엄마의 속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사실 길남씨말고 우리 논을 일굴 농사꾼은 없다. 마을 휴경지는 매년
늘어나고 있는데 비가 와야지만 모를 심을 수 있는 천둥지기 논을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하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2천평이나 되는 땅을 마냥 묵혀둘
수는 없으리라. 농촌에 살면서 쌀을 팔아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엄마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처음부터 농촌 현실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남씨 의견에 순순히 따라야 했는데 그의 신경을
건드려 놓았으니 이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리라. 안 그래도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 길남 씨가 5년째 이장직을 맡고 있지 않은가. 엄마는 길남
씨의 야코를 죽여 그의 단호한 입장을 일단 무마시키겠다는 계산이었는데,
되려 당신 꾀에 당신이 넘어간 것이다.
"아직 확실한 건 몰라. 길남이 성질도 보통이 아닌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느그 엄마한테 길남이 입장 얘기하면서 다시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만…….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 길남이가 괜히 그런 것도 아닐 테고……. 길남이 처지도 생각해 줘야제. 살아생전 느그 아버지와 무척 친했다며? 설마 느그가 미워서 그랬겠냐?"
아버지는 길남 씨보다 길남씨 부친과 더 각별한 사이였다. 길남씨 부친이
이른 나이에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눕자 아버지는 길남네 농사를 도맡아 지었다. 김매기와 볍씨 뿌리기, 퇴비주기, 모심기……. 아버지의 손길은 길남네
농사 전역에 미쳤다. 그럴 때면 품앗이 형태가 아닌, 꼭 일당을 받아왔다.
길남 씨는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시 생활을 좀 했다. 자신이 처한 환경도 간파하지 못한 채 큰 인물이 되려면 무작정 도시로 나가야 된다는 게
그의 청년시절 개똥철학이었다. 그래서 건진 게 있다면 집안일이나 농사일보다 항상 몸단장이 우선인 그의 마누라, 길남댁뿐이었다. 마을에서 텔레비전이 하나밖에 없었던 시절 길남씨 집에 가면 젊은 길남댁은 항상 거울을
보면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 역겨운 화장품 냄새가 진동을 해 나는
코를 막으로 <마징가 Z>와 <은하철도 999>를 봤다. 길남댁은 환갑이 다 된
요즘에도 화장품을 얼굴에 덕지덕지 처바르고 외출을 한다. 길남 씨는 중풍에 걸린 아버지가 죽자 마누라 손을 강제로 잡아끌고 진정한 농사꾼이 되기로 작정했는지 아주 귀향해 버렸다.
당시 아버지는 오리를 키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리 사육은 당시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오리들을 집밖으로 내 몰면 녀석들은 근처
개울가와 언덕배기를 배회하고 저녁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볼 때는 정말 쉬운 가축 사육이었다. 농사철에는 길남네 창고와 축사가 있는 논(예전에는 그곳이 논이었다)에 하루종일 풀어놓기도 했다. 길남씨 부친이
그러라고 한 모양이다. 논에 서식하는 해충을 오리가 잡아 먹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오리에게 먹이를 주는 광경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녀석들이 집 밖에서 식사를 해결한다고 믿었고, 또 사실이 그랬다.
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 꼭 오리를 한 마리 들고 길남네를 찾았다. 중풍에
걸린 길남씨 부친에게 몸보신하라며 그걸 건넸지만 여름 한철 오리들의 서식처를 제공했으니 아마 그 대가였을 것이다. 그럴 때면 길남씨 부친보다
길남 씨가 먼저 오리 고기를 맛보았다. '아따, 중풍 걸린 사람이 오리 고기는 무슨……' 하면서 말이다. 꼬끼오! 이제 수탉의 울음소리는 아까보다 더
크고 우렁차다.
재동 씨가 가고 조금 있자니 엄마가 왔다. 누렁이는 그만큼 먹었으면 됐지
엄마가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냉큼 뛰어가 뭐든 내 놓으라고 폴짝폴짝 뛴다. 주인의 갑작스런 출현에 목이 메일 만큼 반가운가 보다. 개 밥그릇을 보니 재동 씨가 가지고 온 고기 부스러기는 손도 안 대었다. 그동안
제 집에 들어가 커다란 뼈다귀를 실컷 핥은 모양이다.
"어디 다녀왔어요?"
뭔 좋은 일이 있었는지 연신 싱글벙글인 엄마를 보고 나는 묻는다.
"길남네 좀 갔다 왔다."
엄마는 멍석 위에 널어 놓은 엿기름 가루를 손으로 헤적인다. 겨울이 오면
하루 걸러 식혜를 만들 만큼 많은 양이다. 좀 전에 길남 씨와 화해하라고
일러 주었다는 재동 씨의 말이 떠올랐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뗀다.
"거긴 왜요?"
"길남이가 오리를 잡아 놓았더라. 덕분에 오리고기 잘 먹고 왔다."
"오리요?"
"그래. 저기 막사에 오리 한 마리 있는 거 잡았대."
엄마는 축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 머리는 쇠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다. 가만히 서서 애꿎은 멍석을 발로 지근지근 밟아댈 뿐이다. 이제 수탉의 울음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길남이가 우리농사 계속 짓겠단다. 나도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니 생각은 어쩌냐?"
엄마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축사로 달려갔다. 그깟 농사야 길남 씨가 짓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얌순이가 우사 밖으로 목을 길게 내빼고 반기지만 난 녀석의 머리를 외양간 안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염소와 닭의 공동우리. 여느 때처럼 염소와 닭들은 끼리끼리 모여 졸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일제이 깨어난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출입문 쪽으로
우르르 달려든다. 먹을거리라도 가져왔다고 느낀 모양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수탉 옆에 붙어 있을 오리를 살핀다.
역시, 오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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