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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애(於蘭愛)
정의송 작곡
김다현 노래
(17) 김다현-어란애-[원곡정의송] - YouTube
매봉에 초승달이 떠오르는 밤이면
여낭터에 산새소리 고요히 우네
가슴속에 한가득 오직 내 나라
님의 곧은 그 절개 어이 헛되리
파도치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청순한 님의향기 천년만년 흘러 흘러라
갈매섬 저녁놀이 붉게물든 밤이면
만호바다 격랑소리 메아리 치네
끓어오른 분노를 바다에 던진
님의 곧은 그 충정 어이 헛되리
넘실대는 물결위에 고이고이 떠가라
님을향한 모종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네
청순한 님의향기 천년만년 흘러 흘러라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해남 여성의병 ‘어란’
그토록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선선하니 가을이다.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대단하다.
유난히도 요란스러웠던 21년의 여름은 코로나19의 그에 따른 여파와 부동산 정책의 실패의 경제적 혼란, 세대간의 갈등 등이 기억될 것이다. 그 어느 것 하나 논란이 되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이지만, 역사 이래 가장 세금이 많이 걷히고, K-방역이라는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위기의 시대, 위험은 대비하고, 기회는 살리는 것이 현명의 일이다. 여러 사회적 담론 중에서도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란이 여전하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진즉부터 그랬어야 할 양성평등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은 어떤 형태로는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여성의 권리와 존중이 더 향상되어야 할 일이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은 금물이다. 임진전쟁에서 활약한 남도의 의병장들을 소개해왔다. 그런데 조선사회에서 의병장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거의 남성들 중심이었다. 사실 전근대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또한 중요 역할을 남성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난의 전쟁 앞에서 남녀는 따로 없었다.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들은 남성과 여성이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가 모두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명망가 중심의 의병이야기에서 이름없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해남의 여성 의병이었던 호국 여인 ‘어란'의 삶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해남의 호국 여인 ‘어란’을 아시나요?
명량대첩 이튿날인 1597년 9월 17일, 해남의 어란 마을 앞바다에 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를 본 한 어부가 여인의 시신을 근처 소나무 밑에 묻어 주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여인의 무덤 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히고 넋을 위로했다. 지금도 매년 정월 초하루가 되면 동네주민 모두가 정성스러운 제사를 지내고 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도 “하늘이 내린 승리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해전사에서도 전무후무한 기적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러한 승리는 단순히 운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지략과 전술, 그리고 첩보에 의한 사전 준비로 인해 얻은 승리였던 것이다.
▲해남 어란마을 전경(전남 해남군 송지면)
이순신은 군인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지만, 백성이나 의병들에게는 따뜻하고 각별하였다. 덕망이 높았기에 군영 인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백성들 역시 자발적으로 이순신을 따르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백성들은 우리 수군의 승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자발적으로 수집하여 제공하였다. 이순신은 특히 명량해전을 앞두고 날씨는 물론 지형까지 세밀하게 점검했다. 울돌목이라는 특수한 해저지형을 파악하여 전쟁에 어떻게 활용할지 미리 구상해 놓았고, 밀물과 썰물의 시간대까지 해남과 진도의 바닷가 백성들로부터 수집해 놓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우리 수군의 전력은 매우 열악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뜻하지 않는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보면, 명량해전을 이틀 앞둔 시점인 1597년 9월 14일에 육지를 정탐하고 온 임준영이 보고하기를 "김해인이라는 여성이 포로 김중걸에게 9월 16일에 왜적의 대규모 출전 기밀을 알려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김해인'이 해남의 호국 여인‘어란’이다. ‘어란’은 일본군의 배에 갇혀 있는 김중걸이라는 포로를 일본군 장수였던 칸 마사가게에게 풀어주라고 간청하고, 자신이 입수한 기밀을 김중걸을 통하여 이순신에게 전달하였다. 그 기밀은 일본군들이 이순신에 대한 공격을 실행하려는 시간과, 일본군 함대가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중걸을 통해 정탐한 정보를 임준영이 이순신에게 전달하자, 이순신은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백성들에게 모두 육지로 올라가 있으라” 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이순신은 이 첩보를 바탕으로 울돌목의 특수한 지형과 바닷물의 조수 흐름을 현지 백성들과 또한 자원하여 싸운 그 지역 의병들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분석하여 전략과 전술을 세웠던 것이다. 만일, 그 때 전력상 형편없는 열세 상황에서 ‘어란’이 전해준 일본군의 군사정보와 출전기밀이라는 정보를 몰랐더라면 명량대첩은 실현 불가능하였을지 모른다. ‘어란’이 포로로 잡힌 김중걸에게 전달한 일본군의 군사력과 출전기밀은 그만큼 매우 정확하고 세밀한 정보였다. 명량대첩이 승리로 끝난 다음 날인 1597년 9월 17일에 ‘어란’은 바다에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어란’의 삶은 자신의 희생으로 나라를 살릴 수가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의병의 삶 그 자체였다. 해남지역의 지역민으로서, 조선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어란마을 입구에 있는 ‘명량해전과 어란여인 이야기’
아쉽게도 절벽에서 투신하여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는 않다. 하지만 부모와 형제들이 전란 중에 다 죽임을 당해 돌아 갈 곳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 작게는 가족에 대한 복수도 있지만, 크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걸고 해 냈으니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목숨을 던져 충절을 다했다. 해남에 새겨진‘어란’의 자취를 찾다 ‘어란’이라는 인물이 과연 실존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해남 곳곳에는 호국 여성 ‘어란’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물이 있다. ‘어란’은 마을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바위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그곳은 명량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여자가 떨어져 죽은 곳이라 하여 여낭터라고 하고, '여낭치'라고 부르고 있다. 호국 여성 ‘어란’이 떨어져 생을 마감한 낭떠러지인 여낭터에는 일제강점기에 해남에서 거주한 일본인 후손들의 모임인 ‘해남회’에서 2013년에 어란 상과 비석을 세웠다. 또한 ‘어란’이 투신한 다음 날 한 어부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여 소나무 밑에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묘를 썼다고 한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이름 없는 무덤이 여낭터 근처에 있어 명절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벌초를 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군부대가 마을로 들어온 후 무연고 묘로 처리된 후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 어민들은 여낭터 근처에 '석등롱'을 세워 놓았다. '석등롱'은 나라를 지켜 낸 ‘어란’의 혼령을 위로함과 동시에, 바닷길을 오가는 선박을 지켜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즉, 배의 안전에 필수적인 등대 불을 밝혀 어두운 밤바다를 지키게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석등롱'은 훼손되어 없어졌고, 받침대인 헌 등대 형태로 흔적만 남아 있다. 이렇듯 호국여성 ‘어란’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이순신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여 공을 세웠고, 죽어서는 어둠 속의 빛으로 다시 살아나 후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석등롱 아래에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에서 호국 여성 ‘어란’을 기리기 위해 2012년에 <‘어란’여인 이야기>라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어란마을 앞바다에 있는 석등롱
‘어란’이 주는 현재의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남성들이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선 사례는 많다. 하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나라가 어려울 때 의병에 참여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이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국 여성 ‘어란’은 질곡 같은 사회구조와 참혹한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뛰어넘은 자랑스러운 여성 의병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어란’의 의병활동과 관련하여 사실 유무와 관련한 논란이 있다. 사료와 근거의 부족으로 ‘어란’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란'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1898~1988)의 유고집을 근거로 한다. ‘문록·경장의 역’이라는 부제가 붙은 유고집이다. 그리고 최근 연구 성과에 따르면 해남의 어란의 지명과 일치하는 근거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는 차후에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해남 여성의병‘어란’은 지명인 어란 마을과 이름이 같다. ‘어란’은 난초를 뜻한다.
사군자 중 하나인 난초는 겉은 부드럽지만 속내는 강한 외유내강의 덕목에 빗대어 많이 쓰인다. 난초를 뜻하는‘어란’이란 이름은 그녀의 행적과 가장 잘 부합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몸으로 적의 일급비밀을 알 내어 이순신에게 전달한 여성의병 ‘어란’은 그 이름처럼 외유내강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여성이었다. 전쟁 앞에서 여성도 호국의병으로 나섰던 ‘어란’을 기억하는 것은 오늘날의 여성운동에도 시사점을 준다,
여낭터와 어란여인[於蘭女人]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여낭터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
개설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명량해전(鳴梁海戰)[1597]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 왜군 수군 대장의 애인인 어란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2016년 4월 28일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1508-26에서 채록하였으며, 구술자는 김학채[남]이다. 2017년 해남군에서 펴낸 『설화로 꽃피는 땅끝해남』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왜군들이 조선 수군을 점멸시키기 위하여 회의를 하였다. 왜군 수군 대장에게는 어란이라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어란은 왜군의 애인이었지만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와 있던 김중걸(金仲傑)에게 왜군의 계획을 알려 주었다. 어란의 도움으로 풀려난 김중걸은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에게 왜군의 계획을 알렸고, 김중걸을 믿고 전술을 짠 이순신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수군은 승리했지만 어란은 “나의 애인이 죽었는데 내가 살아봤자 더러운 년이다.”라고 말한 후 벼랑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기를 잡던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발견하여 만호 바다와 우수영(右水營)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묻어 주어 주었다. 사람들은 어란이 묻힌 곳을 ‘여낭터’라고 불렀다. 여낭터는 지금의 어란리 서북쪽에 있는 낭떠러지이다. 어란 주민들은 어란을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여낭터에서 제(祭)를 지내고 있다.
모티프 분석
「여낭터와 어란 여인」의 모티프는 ‘명량해전의 숨은 주역’, ‘어란리 당신의 좌정 내력’ 등이다. 「여낭터와 어란 여인」은 ‘왜군 수군 대장의 애인이었던 어란의 충절로 명량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였다.’라는 중심 플롯과 ‘어란리에서 어란 여인을 당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보조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란리의 당에서 모시고 있는 신격은 할머니이다. 당신으로 좌정하게 된 내력이 정확하게 전해 오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낭터와 어란 여인」에서는 어란이라는 여인이 당신으로 좌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낭터와 어란 여인」에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어란리의 역사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어란리의 당에서 모시고 있는 신격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지역 주민들의 의식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난중일기(亂中日記)』
오세정, 『설화와 상상력』(제이앤씨, 2008)
해남문화원, 『설화로 꽃피는 땅끝해남』하(해남군, 201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어란지애』 곡 발표에 대한 유감
지난 8월18일 저녁
해남읍 농협 하나로 마트2층 에서는 임진.정유 재란 때 충무공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군 133척의 배를 울돌목 에서 격추시켜 명량대첩의 승리를 갖게 한 일등공신 어란 여인에 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어란 주민들과 200여명의 뜻있는 분들이 모인 가운데 어란지애 라는 곡 발표회가 있었다. 이 노래는 작곡가이자 가수인 정유송이 작사 작곡 했으며 이수경 신인가수가 노래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어란 여인을 기리기 위해 400여 년 동안 석등을 세우고 사당을 지어 충절을 기린 어란 주민들은 어란 지역명이 가사에 들어있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까지의 지역을 홍보하는 노래 가사에는 그 지역명이 반드시 들어가 있다. 이웃 마을 ‘마량에 가고싶다’가 그렇고 ‘내장산’이 그렇고 ‘팔공산’이 그렇고 ‘산동애가’가 그렇고 ‘가고픈부산송도’ ‘해남아가씨’등등 모든 노래가 그렇다. 그런데 이 곡에는 어란 지역명이 한 군데도 없다. 그리고 가사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왜장 [구루시마 미지후사가] 와의 사랑을 못 잊어 단 하루도 님 없이 살 수 없어 그 님을 따라 투신 한다는 내용의 가사이다. 어란 여인의 충절을 표시 한다고 2절에 ‘나라위해 져버린 가슴 아린 그 사랑’ 이라고 가사를 넣었는데 이 또한 전체 내용으로 보아서는 사랑했던 왜장 [구루시마 미지후사가]가 일본이라는 자기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져버린 것을 어란여인이 가슴 아파한 내용으로 묘사되는 아주 미숙한 작사이다. 과연 어란 여인은 그러했을까? 왜장과의 사랑을 못잊어 투신했다고 보기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포로 김중걸을 석방 시켜 군사기밀을 첩보 활동 한 후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한 후 몸을 던져 투신 한 그 분에 대한 모욕이다. 지금까지 어란 여인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여 [호국여인 ‘어란’ 자료집] 을 펴낸 박승룡 회장님의 자료집 101페이지에 보면 일본인 사와무라 유고집 48, 49페이지에서 어란여인과 칸 마사가게 사이를 애인 관계로 묘사 하고 있다. (어란은 명량 해전에서 애인 칸 마사가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에는 충성 했지만 인간적인 양심의 자책으로 다음날 달 밝은 밤에 명량해가 보이는 서쪽 바다에 투신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어란’이 투신한 이유는 불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도 어란이 투신한 이유는 불분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어란 여인과 구루시마 미지후사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사랑으로 추측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고귀한 희생을 사랑 타령으로 노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수운 일인가?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충절하신 그 분에 대한 우리 후세들의 자세가 아니다.
왜장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못 잊어 투신할 정도의 애정이었다면 포로로 잡혀있던 김중걸을 석방시켜서 특급비밀 군사정보를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전달 했겠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정유년 9월7일에 왜군이 어란포에 침입한 것으로 되어있고 그달 16일에 명량 해전을 위해 우수영으로 총 공격을 개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란여인과 두 사람이 만난지는 불과 9일간이다. 어란여인과 구루시마 미지후사가 두 사람이 9일 동안에 있었던 두 사람간의 일본인이 추측한 애정을, 삼류 소설 쓰듯이 노래가사로 써서 그것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발표 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 역사상의 명기들과 여인네들처럼 나라를 위한 고귀한 헌신과 희생 이었으리라. 이러한 충절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왜장과의 사랑타령으로 그 분을 모욕해서는 안된다. 어란여인과 구루시마 미지후사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어란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여인 이었는지 아니면 관기 였는지 또는 첩보 전략에 능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첩자였는지가 불 분명하다. 우리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어란 여인을 노래해야 한다. 왜장과의 사랑을 못잊어 왜장 없인 살수가 없기에 그 품에 살고파 그 왜장을 따라 죽은 여인을 기리기 위해 노래한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이 가사의 노래를 우리가 부르고 보급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샘이다. 그리고 해남인 들을 욕먹게 하는 노래가 된다. 나아가 한국인 들을 욕먹게 하는 노래가 된다. 이 노래를 만든 이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노래 가사를 지었는지 심히 유감이다.
2022-08-2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