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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 수덕사와 예당호수 출렁다리를 다녀와서!
▼15일 이른 아침 음력 동짓달 열아흐렛날의 달이 종로3가 어학원 상공에 떠있습니다.
행담도휴게소는 서해안 고속 도로를 이용하는 이용객 중 연간 1,000만명
이상이 들러 가는 공간이다. 서해 대교를 이용하는 차량은 상행선과 하행선
양방향 합계 하루 평균 10만 대에 이른다. 행담도휴게소에 근무하는 운영
업체의 직원 수만도 500여 명에 이른다. 행담도휴게소의 음식 코너는
한식·일식·중식·양식을 자유롭게 골라 먹을 수 있는 그린테리아 등 전문 음식
매장이 운영 중이고, 커피 등 식음료 전문점과 고속 도로 휴게소의 전통적인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주유소와 LPG 충전소,
전기 자동차 충전기가 설치되어 있고, 전국 고속 도로 휴게소 중 유일하게
24시간 견인이 가능한 차량 정비소도 운영 중이다. 주차 시설은 휴게소
전·후면 및 지하 주차장을 포함하여 1,600대의 동시 주차가 가능하고 할인
매장 주차장까지 포함하면 2,060대의 동시 주차가 가능하다. 한편 행담도
휴게소에는 충청남도 홍보관과 서해 대교 관리소도 있다.
수덕사(修德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79(사천리 20)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왕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
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년 만공
(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극락전
(鳳停寺極樂殿, 국보 15))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
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03)이 있다. 그리
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
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
(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
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
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3),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
유물(보물 1381), 수덕사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181), 수덕사
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192), 수덕사 소장 소조불상좌상
(충남문화재자료 384)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아래 이야기는 지기님께서 재론의 여지없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감명깊게 들었기에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마음으로 관련글을 올립니다..
김일엽(金一葉)속세를 떠나 선승이 되다
조선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일엽은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백성욱이다.
백성욱은 식민지시대 불교 중흥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불교인이다.
1920년경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
였다. 김일엽의 자서전인 [청춘을 불사르고]에 따르면, 김일엽은 백성욱
을 그가 불교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할 무렵에 만났고 그로부터 7~8개월에
걸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백성욱은 두 사람
사이의 인연이 다하였다는 편지만을 남기고 떠났다. 사랑했던 백성욱이
돌연 떠나버리자 김일엽은 극심한 심적 충격을 받았다.
백성욱과 헤어져 방황하던 김일엽은 이미 불교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상태
였다. 어려서는 기독교가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지만, 이제 시련의 상
처로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불교였다. 백성욱과 헤
어진 뒤 1929년 재가승인 하윤실과 곧바로 재혼한 것도 이런 생각에서 비
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 신자였던 남편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은 그녀의 영혼에 큰 자극을 주는 인물이 못되었다. 그녀
는 다시 한 번 결혼을 깨버렸다. 세속에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없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온전히 불교로 향하고 있었다.
김일엽은 이혼 이후 수덕사에 머물면서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 준비를
하였다. 이후 그녀의 삶은 수도승으로서의 삶이었다. 직지사, 서봉암, 마하
연을 거쳐 1935년 서울 안국동 불교여자선학원에서 수행하면서 용맹정진
하였다. 아울러 세속과 모든 인연을 끊을 것을 선언했다. 김일엽을 불교계
로 이끈 만공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한 대선사이다. 김일엽은 1933
년 만공의 문하에 들어가 “일엽이 연꽃처럼 되었고 성품도 백련과 같으니
도를 이루는 비구니가 되었도다”라는 법문을 하사받고, 완전히 속세를 떠
났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와 같이 민족개조라는 커다란 뜻을 가지고 여성
의 자각을 부르짖은 1920년대를 대표한 문학가이자 신여성이다. 남성으로
부터의 해방, 부모로부터의 해방, 기존 가부장적 윤리로부터의 해방이 그녀
가 부르짖은 여성해방의 기본 골자였다. 봉건적 유습이 여전히 남아 있는
1920년대에 사회를 향하여 신문지상을 통하여 정신적 정조관이 더 중요
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김일엽.다시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욱 구체
화시키며 인물들을 통하여 그것을 실천시켜나간 김일엽. 그러나 마지막에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불심이었다.
나혜석 (羅蕙錫)과 수덕여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
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또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1896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이고 호는 정월(晶月)이다. 부친 나기정(羅基貞)은 대한제국
때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시흥군수를 지냈으며 일제시대 때는 용인군수
를 역임하였다. 나혜석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913
년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 둘째 오빠 나경석
(羅景錫)의 권유로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하여 화가
로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빠 나경석은 자신의 친구 최승구(崔承九)를
나혜석에게 소개하였다. 이미 본국에 조혼(早婚)한 아내가 있었으나 최승구
와 나혜석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1916년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한
후에는 나혜석의 인생관은 돌변하여 모든 희망을 예술에 걸게 되었다.
1919년 그녀가 일본 유학시절 발발한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3월 25일
이화학당 학생 만세 사건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나혜석은 모순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교토제국대학을 다니던 친일파 김우영(金宇英)의 6년
구애를 받아들여 1920년 4월 서울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21년
3월에는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유화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전람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26년 남편 김우영과 함께 3년간의 유럽 일주 여행 도중 천도교 신파의
우두머리였던 최린(崔麟)을 만나게되고 김우영과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최린은 나혜석과 불륜의 관계로 발전하고 결국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였다. 결혼생활 실패 후 화가로서의 삶에 더욱 매진한 나혜석은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정원'으로 특선하고 이 작품으로 일본에서도
제국미술원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35년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된 소품전의 실패와 아들 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불교에 심취한다. 승려생활을 매력을 느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교에 심취했으나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한때 청운양로원에 의탁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12월 10일 시립 자제원
(慈濟院)에서 사망하였다.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회화작품으로는
《나부1928》, 《선죽교 1933》가 있다.
출처:(두산백과)
수덕여관은 화가 이응로선생의 사적지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이응로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史)이다. 김규진
(金圭鎭)의 문하생으로 일본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敎]를 졸업하였다.
1925년 이후 주로 사군자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8.15광복 뒤에 단구
미술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48년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대한미술인협회에서 상임위원 등을 지내다가 1958년 파리로 가서
정착하였다. 1963년 살롱 도톤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이름이 알려
지기 시작하였다. 1968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수상
하여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되었다. 대표작에 《콤포지션》 《작품》 등이 있다.
수덕여관은 이응로가 1944년에 구입하여 6·25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수덕여관 앞 바위 조각은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 산천에서 삼라
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덕숭산(德崇山)
높이는 495m이다.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한다. 차령산맥
줄기로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지점에 있다. 높지
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
부터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려 왔다. 문화재로는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수덕사대웅전(국보 49)과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修德寺盧舍那佛掛佛幀:보물 1263)이
유명하다. 수덕사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산 아래에는 덕산
온천(德山溫泉)이 있어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그 밖에 승려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 입적했
다는 비구니 도량 견성암(見性庵)이 있고, 산 정상에는 수덕사와
1,020개의 돌층계로 이어지는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1973년
3월 덕숭산과 인근 가야산(伽倻山:678m)
일대가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예산 수덕사 만공탑 [禮山修德寺滿空塔]
근대기 한국 불교계의 고승인 만공(滿空, 1871~1946)을
기리기 위하여 1947년 세운 탑으로, 수덕사重隱) 스님이
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탑은 높이 3.1m, 폭 2.41m이다.
육각형 지대석(址臺石) 위에 원형 굄돌을 놓고, 굄돌 위에 세
개의 다각형 기둥을 세운 다음 각 기둥 사이로 세 개의 직사각
형 검은색 오석(烏石)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보름달처럼
둥그런 조형물인 구체(球體)를 올려놓았다. 탑 정면 오석
에는 한글로 ‘만공탑’이라고 새겼다. 왼편 오석에는 ‘世界一花
(세계일화)’, ‘百艸是佛母(백초시불모)’라는 만공의 친필을,
오른편 오석에는 만공의 간단한 행적을 적은 글과 그가 남긴
법훈(法訓; 교훈이 되는 법문)을 새겼다. 탑 주위로는 난간석
이 둘러져 있는데, 이 난간석은 1968년 이후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불교 교리와 만공이 추구한 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로, 탑 윗부분의 구체는 불교의 절대진리로서
의 원(圓), 세 개의 기둥은 불·법·승의 삼보(三寶), 육각기단
은 육바라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덕숭산문(수덕사)의 전통
에 따라 사리는 모셔져 있지 않지만 승탑(僧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탑), 즉, 사리탑 역할을 대신하는 탑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 승탑(사리탑)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여 현대적 조형감각
으로 조성한 최초의 현대적 승탑 계열 조형물로, 1998년
해인사 입구에 조성한 성철 스님의 승탑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경향
의 종교미술품임에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새로운 기법과 형식
을 받아들여 제작한 실험적 작품이다. 하지만 탑과 비를 하나
로 구성한 일체형 승탑이라는 점에서 조선 후기 승탑의 특징
을 채용한 부분도 있다.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기념비적 불교
미술품이자 새로운 양식의 승탑 출현을 예고한 근대기 사찰
조형물로서 가치가 높다. 2011년 8월 24일 등록문화재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정혜사 [定慧寺]
정혜사(定慧寺)는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있는 수덕사의 산내
암자이며, 비구승[남자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이다.
수덕사 홈페이지 또는 안내도 등에 정혜사라고만 표시되어 있으며
자세한 설명이 없다. 정혜사는 능인선원이라고도 하는데
선방이기에 선원이라 한다.
정혜사는 백제 때인 599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에 만공선사가 중수하였다.
정혜사는 비구승들의 선방이다. 약 30명의 승려가 하안거
[음력 4월 15일~7월 15일]를 한 후에 3개월 쉬고, 동안거
[음력 10월 15일~1월 15일]를 한 후에 3개월 쉰다. 안거
90일을 대체로 100일 참선이라고 말한다. 윤달이 든 윤년
에는 일정이 약간 변한다. 이렇게 1년 내지는 2년간 참선을
한 비구승들은 타 지역의 선방으로 옮긴다. 대체로 이러한
일정을 소화하는 선방이 정혜사이다. 한편, 정혜사 아래에
있는 견성암은 비구니[여자 승려]
약 40명이 참선하는 선방이다.
정혜사는 선방이기 때문에 주소 공개를 안 하며 수덕사의
주소로 통용된다. 덕숭산에 있는 정혜사는 수덕사 경내에서
견성암과 정혜사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아스팔트로 좁게 포장
된 고부랑길을 약 30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덕숭산 정상으로
가는 주 등산로를 이용해서 갈 수도 있다. 1080계단을 약
30분 걸으면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안거[하안거,
동안거] 기간에는 문이 잠겨 있어서 경내로 들어갈 수 없다.
고부랑길은 항상 접근할 수 있는 길이다. 정혜사는 수행하는
선방이기에 일절 외부인 출입 금지가 원칙이다. 또한 안거 기간
에는 일절 면회도 안 되고 외부음식 반입도 안 되며 TV·라디오·
신문·잡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정혜사는 정혜사 현판 건물, 능인선원 현판 건물, 관음전, 산신각,
만월당, 그리고 요사 몇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에는 자연석
위에 얹힌 석탑 2개가 남매탑[쌍탑]으로 조성되어 있다. 관음전
은 남향인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다. 정혜사는 산내 암자
이면서 선방이기 때문에 주지는 없고, 선원장이 있다.
▼예당호수 근처 택지중간에 위치한 곳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겸한
뒷풀이 식당 between에서 원정산행 동호회의 지난 1년간의 산행여정을
되돌아보는 의미있는 송년회가 뒷풀이에 겸해져 사뭇 달아오르는 분위기였습니다.
예당호 출렁다리
충남 예산군 예당호에 위치한 출렁다리로, 2017년 6월에 착공해
2018년 말에 완공됐다. 출렁다리는 보통 다리 양쪽에 연결된 강선
에서 줄을 내려 상판에 연결하는 현수교 방식으로, 사람들이 통행할
때마다 출렁거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예당호 출렁다리는 2019년 4월 6일 개통식이 열린 뒤 민간 개방이
이뤄지고 있다. 높이 64m의 주탑에 길이 402m·폭 5m 규모로,
성인 3150명이 동시에 통행할 수 있으며, 규모 7의 강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내진 1등급으로 설계됐다. 출렁다리에는 발광다이오드
(LED) 조명이 설치돼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으며, 출렁다리와 이어
지는 산책길(5.4km)도 조성돼 있다. 아울러 출렁다리 주탑에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어 예당호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 설치된 보행전용 출렁다리로는 청양의 천장호
출렁다리(207m),원주 소금산 출렁다리(200m),파주 감악산
출렁다리(150m) 등이 있다.
(출처: 예산군)
▼16:30분경 예당호수변을 출발 오산휴게소를 경유 종로3가에
도착 집에 돌아오니 20:40분이었습니다.
수덕사의 여승
김문응:작사
한동훈:작곡
송춘희:노래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2019-12-16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