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36명으로 개교한 부안여고 이야기
4·19혁명은 200여 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를 남기는 피의 대가로 3·15부정선거는 무효화 되고 독재자 이승만은 하야에 이어 하와이로의 망명, 그리고 능력은 없으면서 권력욕이 지나쳤던 이기붕 일가는 천지사방 숨을 곳이 없으므로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 골방에서 ‘귀하신 몸’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으로 비극적인 가족의 집단 자살을 감행하여 끝이 났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에서 온갖 만행을 자행했던 최인규, 곽영주, 이강학, 임흥순 등이 사형을 당하거나 줄줄이 서대문 형무소로 들어감으로서 일단락은 되었으나 정국의 혼란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 무렵에 전 이사장 김태수씨 집에 들렀더니 이 어른이 집에서 기르는 개를 “쌍규야! 쌍규야!”하고 부르기에 내가 쌍규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나중에 태웅이 왈 하나의 규는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 한 최인규의 규고 다른 하나는 동진면 사람 아무개의 이름자 규라고 하여 깔깔거리며 웃은 일이 있었다. 동진면 규자 이름의 아무개는 이웃 사촌간과는 말할 것도 없고 부자간에도 재판한 분이며 작은마누라 잘 얻기로도 소문난 바로 그 사람이다. 태수씨 자신도 비록 타의이긴 하였지만 그 쌍규 중의 한 사람인 자유당정권의 내무장관 최인규의 놀음에 끼어들었다가 반민주적 행위자가 되어 공민권까지 박탈된 것을 자학하는 심정이 그 강아지의 이름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학교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낭주학회 법인이사장 김태수씨가 자동 해임되고 신동근(辛東根)씨가 이사장이 되었다. 이사장 백주께서 3·15 부정선거에 관여하였다 하여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에 걸렸기 때문이다. 신임 신동근 이사장은 당시 곰소에 있는 <남선염업주식회사>의 사장으로 건실한 실업가였다. 당시 너무 노쇠하여서였는지 그 조카 젊은 실업가 신형구(辛炯九)씨를 이사장의 직무대리인으로 지명 운영하였다.
4·19민주혁명이 일어난 이해 음력 7월 7석 날은 우리 어머니의 회갑날이었으나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께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손가락에 금가락지 한 짝도 끼워드리지 못했으니 옹졸하고도 못난 자식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회갑도 쇠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궤연이 있지 않느냐!” 하시며 아무것도 하지마라고 하셨지만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다. 집안 형편이 어렵고 상중임을 빗대어 마을의 노인들에게 국수를 삶아 점심 대접하는 것으로 때워버렸으니 참으로 면괴스럽다. 그 후로 20년을 더 사시고 가셨는데도 나는 용돈 조금씩 드린 것이 고작이었으니 이제 와서 백 천 번을 뉘우치는 풍수지탄(風樹之嘆)이 무슨 소용인가.
봄에 막내 동생 형부(炯溥)가 전주고등학교에 합격되어 전주로 갔다. 아버지도 안계시고 형님은 그 학비를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 셋방살이에 쥐꼬리만한 월급봉투에 매달려 살고 있는 내가 감당하여야 하였다. 당장 등록금과 책값 교복 값이며 하숙비를 마련할 돈이 없어 “나중에 더 좋은 것으로 해준다.” 하고 아내를 어르고 달래어 결혼기념 닷 돈짜리 금가락지를 팔고 월급에서 얼마간을 가불하여 해결했는데 나는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아내에게 진 그 결혼반지의 빚을 갚지 못하여 가끔 타박을 듣곤 하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이 무렵의 내 생활은 언제나 가불 생활이었는데 조카딸 은숙(銀淑)이도 우리 학교에 입학이 되어 그 수업료를 내 월급에서 제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었다. 다행인 것은 타고난 천성이 순실하고 착한 동생은 어떻게든지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가정교사를 하면서 어렵게 학교를 마쳤는데 집안 형편을 잘 알아서인지 대학 진학은 아예 포기하여 버리고 공군 하사관학교에 지원 입대하여 장기복무를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였으니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가난한 흥부네 집처럼 삼신할머니와는 친하였는지 큰집에서는 1960년 6월에 현철(顯喆)이가 태어나고 우리 집에서는 7월에 셋째 우철(宇喆)이가 동중리 백장옥이네 집 셋방에서 태어났다. 아내는 다른 재주는 없어도 아이 낳는 재주는(?) 남보다 뒤지지 않아서 꼬박꼬박 두 살 터울로 아들만 이어 셋을 낳고도 이어서 딸과 아들을 낳았으므로 가난한 월급쟁이 마누라로 혼자서 다섯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때 민철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소풍을 가는데 학부모가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니까 둘째 아이는 걸리고 갓난애기 우철이는 업고 점심도시락과 기저귀 보따리는 들고 기우뚱 갸우뚱으로 갔다가 올 때는 돈이 아까워서 택시도 못타고 소나기까지 흠뻑 맞았으니 그 몰골이며 힘겨움이 오직 하였겠는가. 그 시절엔 여인들이 그렇게 살았어도 힘겹다거나 고생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때 학교법인에서는 여중 안에 병설로 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준비하여 왔는데 1961년 학년 초가 지난 3월 4일에야 인가가 나서 학생을 모집하려 하니 이미 진학할 사람은 다한 뒤여서 한 학급의 학생모집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협의를 거듭 한 끝에 내가 자청하여 부안여중 7회와 8회 졸업생 중 진학을 하지 않은 아이들의 집을 자전거로 찾아다니며 설득, 권고하여 모집한 인원이 36명이었다. 우선 그 인원으로 4월 5일에 부안여자고등학교가 개교되고 내가 그 담임까지 맡았다. 그때 4월 5일이 식목일이지만 개교와 더불어 입학식을 했는데 후에 개교기념일을 식목일과 겹친다 하여 4월 4일로 변경한 것이다. 이 36명의 첫 입학생들은 중학교 때도 내가 담임을 하였기 때문에 누가 진학을 하고 안하고는 물론이요 학생 하나하나의 개성과 집안 형편이나 환경까지도 훤하게 알고 있어서 아이들도 나를 좋아하여 따르고 나 또한 정이 깊어서 지도하기도 수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대부분이 가난하였다. 집안이 윤택한 아이들은 이미 전주로 진학을 하였고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워서 외지로 못가고 있다가 부안여고가 설립되어 입학을 한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 지금 미국에서 부부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혜경(李惠卿) 목사나 파주에서 공직생활을 마치고 단란한 노년을 맞고 있는 김정균(金貞均)은 중학교 때 공부도 잘 했던 아까운 학생이어서 그 부친을 설득하기 위하여 수차 방문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았으며 부안의 3·22민주항쟁을 이끌다 월북한 김태종씨의 막내딸 김선(金璇)은 부안여고가 그때 설립되지 않았으면 오늘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 애들의 앞길을 여는데 내 작은 힘을 보탠 것 같아 조금은 흐뭇하다.
36명으로 학교의 문을 연 부안여고는 학생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이 부안여중에 더부살이로 시작한 것이다. 교장, 교감 등 모두가 겸임이었으나 나는 담임이어서 이때부터 실질적인 부안여고 교사였으므로 나 혼자서 부안여고를 짊어진 셈이었다. 36명의 학생 중에는 이사장 김태수 씨의 막내딸 김초성(金草星)이 끼어 있었다. 지금은 약국을 하면서 잔잔하고도 구수한 수필로 감동을 주고 있는 수필가 초성이는 그때 누구나 당연히 전주여고쯤으로 진학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한사코 허락하지 않고 한 달 이상을 기다려 늦게야 문을 연 부안여고 제1회 입학생이 되게 하였다.
부안여중의 7회생과 8회생 선후배가 혼합되었고 형편이 어려워 도시로 나가지 못한 학생들이라서 좌절감과 열등감이 있는 아이들이 많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었다. 그랬어도 도중에 전학을 간 학생이 3명이고 자퇴 등으로 탈락한 학생 또한 5명이어서 28명이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2회부터는 안정이 되기 시작하였으며 차차로 지원자가 넘쳐나 5년 후에는 계속하여 학급을 증설하여야 했고 개교 13년 된 해에는 15학급으로 커져 여중과 여고가 좁은 캠퍼스 안에서 북적대기에는 너무 좁아서 석동산(席洞山)의 북쪽 기슭을 깎아 고등학교 교사를 신축하여 1974년 10월 19일에 중, 고가 비로소 완전 분리되어 이전 하였다. 이때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책걸상을 비롯한 교재교구들을 머리에 이고, 마주 들고, 어깨에 매고 숲정이 여중학교 더부살이 구교사에서 석동산 밑 신축교사까지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하루종일 하는데도 힘겨운 줄을 몰랐었다.
당시 학교를 신축하기 위하여 김태수 이사장이 교장과 교감, 김용태 서무과장을 대동하고 유성에 있는 유성여자중고등학교를 둘러보러 갔었다. 이때 이 학교는 부안 하서출신 홍광표(洪光杓)라는 분이 대전에서 주조장으로 돈을 많이 벌어 육영사업을 시작한 때였다. 학교의 위치도 좋고 학교도 잘 지었으며 모든 시설이 훌륭했는데 홍 이사장은 우리에게 점심대접을 하면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는 일이 어려운 과제라고 애로를 말했었다. 그리고 왜관으로 가서 천주교 수사(修士)들의 숙소를 찾아가 그곳에 있는 독일인 신부(이름은 잊었음)를 만나고 왔다. 그 독일인 노신부님은 학교건축으로는 이름 있는 분이라고 했었다. 그 후 그 신부님이 석동산 밑 신축부지까지 와서 부지를 직접보고 설계하여 학교를 지었는데 설계대로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일부를 수정 변경하여 지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의 주선은 모두 서무과장 김용태 씨가 하였다. 이 분은 독실한 천주교인인데 정직하고 성실한 분으로 어려운 때에 김태수 이사장을 헌신적으로 도와 학교가 본궤도에 오르도록 애쓴 분이다.
이때 건축공사 시공업자 선정을 둘러싸고 이사장과 교장의 갈등이 한동안 깊었으나 결국 이사장의 뜻대로 왜관의 신부님이 지정한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업자들이 와서 건축공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