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 휴일
그 날이 손이 없는 날인지 길일인지 강남의 한 예식장 앞은 결혼식 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예식장 앞 도로 가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대형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각층의 예식 홀에선 뻥튀기 해내듯 새로운 부부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혼배성사를 했던 내 결혼식 때와 사뭇 다른 풍경이 낯설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아수라장 같은 식장을 슬며시 빠져나와 어슬렁거리다 길모퉁이 좌판에 눈길이 갔다.
『밤 깎는 기계』
그 앞에는 구수한 입담과 함께 힘들이지 않고 밤 껍질을 깎는 아저씨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제사나 명절 때 밤을 깎을 때마다 오묘한? 각이 나오지 않아 애쓰던 남편의 밤 깎는 실력 때문에 아예 껍질이 벗겨져 진공 포장된 밤을 사다 썼다가, 그 날 저녁 뉴스에 나온 표백제에 담갔다가 판다는 '밤 사건' 보도에 아연실색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저씨는 힘 안들이고 밤을 잘 깎았다.
밤을 깎는 손사위를 보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음악이었던"호두까기인형" 이 떠오르며, 풀루트 선율이 맞춘 '중국 춤, 빠르고 경쾌한 리듬의 '러시아 춤' 화려한 연주로 호화로운 분위기를 돋우는 '꽃의 왈츠 등, 잠깐동안 선율에 맞춘 춤사위를 보는 듯 환상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아저씨 앞에 마주앉아 잠깐 조수노릇 좀 하겠노라고 기계를 받아 들었다.
보기에는 쉽게 깎이던 밤이, 뜯기기도 하고 패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쉽게 깎였다.
중요한 각만 살린다면 성공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지나가다 모여든 사람들의 응원을 받아 다시 시도한 밤 깎기는 나름대로 성공했고 어설프게 깎는데도 모양이 나오는 초보 조수의 밤 깎기 도전 덕에 아저씨는 기계 몇 개 팔고 나는 한 웅큼의 깎은 밤을 얻었으니 둘 다 손해본 장사는 아닌 것 같다.
삭막하다는 서울 한복판에서 구수한 입담에 훈훈한 인심까지 얻고 돌아오는 셈이었다.
곧 돌아오는 시아버님 기일에 내가 손수 깎은 밤으로 제사를 올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버님이 혹시 아신다면 아들인 남자가 안 깎고 여자인 내가 했다고 큰기침 한번 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님! 혹시 아셔도 맛있게 드실 거죠 ? 저 다 알아요.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라고 하던걸요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새댁시절이라 아버님 팔장 한번 못 잡아 본 것이 아쉬워요.
지금 같은 넉살이면 요샛말로 뿅! 가게 해드릴텐데요.
아버님 ! 사랑합니다.
*혼배성사 [婚配聖事] ≪천주교식결혼≫ 남녀가 일생 동안 부부로서 인연을 맺고, 그 본분을 잘 완수할 수 있도록 부부의 사랑을 축복하고, 가정 생활에 필요한 은총을 베푸는 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