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byfox : 미국온지 십년째.... 약사가 되기까지.... [38] | |
28114| 2007-11-24 | 추천 : 16| 조회 : 21684 |
인생은 마치...... 커다란 시계 바늘이 째각째각 돌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처럼 십년을 주기로 나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한다.
전혜린이 그랬던가? 절대로 평범해지지 않겠다고....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 평범한 십대 시절을 보내며 절대로 평범해지지 않겠다고 했었다, 나는. 어차피 한번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굵고 짧게, 그리고 내 의지대로 살아 보겠다고 했다.
순전히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가방 두개를 끌고 오게 된 미국. 그래도 영어는 웬만큼 자부했었는데 hearing 이 안되어서 yes/ no 도 할 수 없었던 울지 못할 사정.... 한국에서 간호사 면허증이 있었던게 다행이어서 열심히 공부해 몇달 만에 합격하고 갖게 된 직장 그리고 또다시 수없이 언어때문에 받았던 상처들.....
Language barrier 의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그 것을 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긴지를 미리 알았다면 어쩌면 난 중간에서 포기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바보 천치처럼 몰라서 여기까지 와버린 건 아닌지....
간호사 생활 2년을 하니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서 의대를 갈 요량으로 무작정 학교에 등록해버렸다. 어떻게 하다가 의대는 못가도 그나마 학교를 가니 영어는 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때가 2000년이었고 내가 pre-med 를 거의 마친 2002년 은 의대보다는 약대가 여자에게 더 낫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의사도 좋긴 하지만 약사도 나름 괜찮은 직업이라 약대쪽으로 전향 해버렸다. 예전과는 달리 모든 질병이 거의 약으로 치료되고 medication management 가 장기적으로 필요한 질병이 많아 약사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특히 내가 약대를 지원했던 2003년은 그전까지 있었던 학사 출신의 약사 과정을 모두 없애고 pre-pharmacy - doctorate of pharmacy로 미국의 모든 약사과정을 일률화 해버렸다.
미국에 온 것만큼이나 약대에 들어간것도 얼떨결에 들어갔었다. 아직 pre-pharmacy 과정이 11 크레딧이나 남았는데 연습삼아 pcat 을 보고 원서 마감일을 넘어 원서를 넣은게 어떻게 admission committee의 눈에 띄었었나 보다. 얼떨결에 학장과 전화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입학 허가서를 받아 부랴부랴 11 크레딧을 받고 이사를 하고.....
그리고 4년동안 죽을 각오를 하고 공부를 했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4년이 아닐까 싶다. 날마다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교과서와 study, tirals 등을 읽고 verbal defense 나 스터디 등을 준비하고 시험을 준비하고 ..... 3학년 일학기는 가장 힘들었던 학기인데 숙제와 시험, 그리고 쪽지 시험이 하도 많아서 세어보니 일주일에 17번의 쪽지 시험과 시험을 본적도 있다. 아마 하루에 세시간 자면 많이 잤던 주였을 거다. 이렇게 평소에는 공부하다가 금요일과 토요일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하고.....
이러다 보니 미쳐 버릴 것 같아 운동도 하고 그전부터 쳤던 피아노 레슨도 다시 시작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동을 하거나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긴 하는데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어서 그런지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면 약사가 되어야지 했지만 실제적인 role model 이 없었기 때문에 과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 암암했던 시절.... 남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많은 연줄이 있어서 이것저것 시험정보도 받고 학교 후의 계획까지 조언을 받은이가 태반인데 참으로 암담했었다.
그러다 drug information 실습에서 알게된 preceptor 가 레지던시를 하라고 적극 권장하는 바람에 또 얼떨결에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미국 약사 연합회까지 날아갔던 작년.... 뚜렷하게 계획은 없으면서 일단은 레지던시를 따고 보자는 생각에 열심히 letter of intent 을 쓰고 개인 CV 를 쓰고 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보고 .... 그리고 결국 이 병원의 레지던시 프로그렘에 matching 이 되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레지던시 경쟁률이 거의 10대 1이 태반인데..... 약대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만 레지던시에 되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이 레지던시는 아직까지 optional 이지만 큰 병원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거의 requirement 로 되어가기 때문에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영화보다 더 찬란한 내 인생..... 아마 소설을 써도 이렇게 더 극적이고 극적인 전환점은 없을 것이다. 솔직히 공부하는게 너무 지겨워서 레지던시는 이번 일년만 하고 그만 두려고 했는데 간호사 경험이 있어서 그래도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중환자실 로테이션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 preceptor 켈리, 2년차 레지던트 과정에서 critical care specialty 를 한..... 5 피트도 안되는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당당함. 그 누구도 하다못해 neuro surgeon 도 그녀의 의견엔 반박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대답이 항상 final 이 되는 걸 보면서 specialty 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래 해보는 거다. 끝까지 해보는 거다.
미국에 온지 십년이 되었지만 심심하다고 생각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내인생은 항상 일투성이었고 숙제 투성이었고 시험 투성이었다. 특출나게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어서 항상 미국인보다 몇배 더 노력해야했고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혼자의 힘으로 학비와 생홥비로 충당해야 했기에 말 그대로 시간에 쪼들렸었다.
너무나 길고도 힘들며 외로웠던 터널..... 태평양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나마 나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것이 있다면 잘 나온 성적표와 내가 간호해주었던 환자들의 격려.... 자신들은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내인생에 생기를 넣어 주었던 그네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고 그래서 난 내가 선택한 길이 좋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 나.....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힘들게 고민하지 않고 결정해버렸다. 다음주 난 또 라스베가스로 간다. 42번째 약사 연합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고 또다른 희망과 option을 위해.
|
첫댓글 정말 멋진 의지를 가진 사람이 쓴 글이라 생각되어 옮깁니다. 독하면 성공한다고 하죠? 이것이 마지막이다 강에 뛰어내리겠다고 결심하고 덤비는 사람들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생각을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죠.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