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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漢江)
▼한강의 겨울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서울특별시를 동서로 흘러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본류의 길이는 514㎞로 우리나라에서 압록강·두만강·낙동강 다음의 네 번째이고, 유역 면적은 2만 6,219㎢로 압록강·두만강 다음이다.
강원도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은 남류하면서 금강천(金剛川)·수입천(水入川)·화천천(華川川)과 합류하고, 춘천에서 소양강(昭陽江)과 합류한다.
그리고 다시 남서로 흘러 가평천(加平川)·홍천강(洪川江)·조종천(朝宗川)과 합친 다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한다.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대덕산(大德山)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남류하면서 평창강(平昌江)·주천강(酒川江)을 합하고 단양을 지나면서 북서로 흘러 달천(達川)·섬강(蟾江)·청미천(淸渼川)·흑천(黑川)과 합친 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한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류한 한강은 계속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王宿川)·중랑천(中浪川)·안양천(安養川) 등의 소지류를 합류하여 김포평야를 지난 뒤 황해로 들어간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대수(帶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는 아리수(阿利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건국설화에는 한수(寒水)로 되어 있다.
한강의 명칭에 ‘漢’이라는 글자를 쓴 것은 중국 문화를 도입한 이후의 일이다. ‘아리’, 즉 ‘알’은 고대에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한반도 중앙부의 평야지대를 흐르는 한강 하류 지역은 고대부터 문화 발달의 터전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쟁패의 요지였다. 특히, 조선이 한성(漢城)에 도읍을 정한이래 한강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이 커져 마치 인체의 핏줄과 같은 구실을 하여왔다.
2018년 강원도 방면의 한강 102.20㎞가 국가하천으로 승격되었다.
유역의 대부분은 경기육괴(京畿陸塊)에 속하며, 남한강 유역의 일부만 옥천조산대(沃川造山帶)에 속해 있다. 경기육괴는 주로 시생대와 원생대의 각종 변성퇴적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생대 쥐라기의 화강암이 이를 관입한 상태로 나타난다. 화강암은 서울과 춘천 지역에서 암주(岩柱)의 형태로 소규모로 노출되어 있지만 횡계에서 원주를 거쳐 이천에 이르는 지역에는 연속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옥천조산대는 주로 조선누층군과 평안누층군의 퇴적암으로 이루어졌다. 정선·영월 지역의 무연탄은 평안누층순에 매장되어 있고, 고씨굴과 고수동굴을 비롯한 카르스트지형은 조선누층군의 대석회암층군에 형성되어 있다. 단양·제천·영월 지역에는 이 석회암을 배경으로 시멘트공업이 발달했다.
한강의 하계망은 전체적으로 많은 지류가 주요 본류에서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어나간 수지상(樹枝狀)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구간에 따라서는 곧바르게 뻗은 유로도 나타난다.
골짜기와 함께 유로가 반듯하게 뻗어 있는 전형적인 예는 청평과 양수리 간의 북한강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골짜기와 유로는 지질구조선을 따라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팔당협곡 하류의 한강 본류에서도 마포에서부터 임진강과 만나는 하구 부근까지 유로가 바르게 뻗어 있다. 한편, 남한강과 북한강 중상류의 본류 및 지류에서는 물이 심하게 구불구불 흐르는 감입곡류하도(嵌入曲流河道)가 널리 발달되어 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의 청령포(淸冷浦)에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북한강의 지류인 홍천강(洪川江)의 하류부도 감입곡류를 심하게 한다.
감입곡류하천은 대개 좁은 골짜기를 흐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로 변동을 적지 않게 한다. 청령포에서는 유로가 변동한 뒤에 남겨 놓은 구하도(舊河道)도 볼 수 있다. 골짜기가 곧바로 뻗어 있으면 도로의 건설에 유리하다. 심하게 구불거리면 경치는 좋지만 도로의 건설뿐만 아니라 장마철의 유실로 인해 관리에 어려움이 따른다.
팔당 하류에 있는 한강 본류의 연변에는 넓은 범람원과 함께 일련의 하중도(河中島)가 발달되어 있다. 김포평야와 일산평야는 한강을 끼고 발달한 범람원으로 이루어진 평야이며, 농업용수는 한강물을 양수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들 평야는 해발고도가 5∼7m 정도에 불과하여 배수시설이 확충된 오늘날에도 집중호우가 내리면 물에 잠기는 논이 넓게 나타난다.
그리고 한강 하류의 범람원에서는 자연제방과 배후습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뚝섬은 전체적으로 한강의 자연제방이고, 지금은 대부분 시가지로 개발되었지만 이에 인접한 중랑천 하류의 장안평은 배후습지였던 곳이다.
장안평은 고도가 뚝섬보다 3m 내외나 낮아 집중호우가 내릴 때는 침수 피해를 면하지 못한다. 한강 하류에는 당정리섬·미사리섬·잠실섬·저자도·중지도·여의도·밤섬·난지도 등 하중도가 많았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가지의 개발을 위해 육지로 연결시키거나 골재 채굴과 관련하여 침식을 받아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큰 하중도로는 여의도만 남게 되었다. 한편 미사리는 샛강에 조정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육지와 이어졌다.
한강은 조차(潮差)가 큰 경기만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하구에서 약 20㎞ 떨어진 제1한강대교까지 조석의 영향이 미쳤다. 김포에 수중보가 건설된 이후에도 만조 때는 난지도 부근까지 강물이 역류(逆流)한다.
과거에 어선이나 조운선이 강을 거슬러 올라올 때는 역류하는 밀물을 이용하였다. 첨두홍수와 만조가 겹칠 때는 홍수의 피해가 증폭된다.
한강은 하폭이 좁았고, 곳곳에 모래톱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으며, 여울이 마포 부근까지 나타났었다. 그러나, 특히 1970년대부터 골재가 엄청나게 채굴되고, 1981년부터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넓어지는 한편 양안에 고수부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의 건물은 주로 한강의 모래와 자갈로 지어졌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어 기후에 있어서는 북부 지방과 남부 지방의 점이적 성격을 띤다. 또한, 태백산맥에 인접한 상류 지역과 황해에 인접한 하류 지역 사이에는 지형적 영향으로 기온과 강수량에서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연평균기온은 10∼11℃로 남부 지방에 비하면 낮고 북부 지방보다는 따뜻하지만, 같은 위도의 동해안 지방에 비하여 낮은 편이다.
상류의 산간지대와 하류의 평야지대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 서울은 11.6℃이고 춘천은 10.5℃로 북한강의 경우 하류에서 상류로 갈수록 낮아진다. 남한강은 북류하고 있어 상류가 하류보다 따뜻하지만 위도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1월 평균기온은 -8∼3.5℃ 내외로 남한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며, 평균 최저기온은 춘천이 -10.2℃, 서울이 -7.4℃이다.
저극기온(低極氣溫)은 춘천 -31.6℃(1927.12.29.)의 기록이 있으며, 측후소분실의 측정치로는 김화에서 -33.4℃(1942.1.5.)가 기록되었다. 최근에는 양평에서 -32.6℃ (1981.1.5.)가 기록되었다. 8월 평균기온은 25℃ 내외이고, 일최고기온은 춘천이 39.5℃(1924.8.9.), 서울이 38.2℃(1943.8.24.)였다.
그러나 측후소분실의 관측치로는 양구·단양·제천·홍천·정선 등의 상류 내륙 지방에서 40℃ 이상의 고온이 기록되어, 경상북도·충청북도의 내륙 지방과 함께 우리 나라의 서극(暑極)을 이룬다.
연교차는 서울 28.9℃, 춘천 29.1℃, 홍천 33.5℃, 양평 32.2℃, 영월 31.2℃로서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보인다. 중류·상류 지역의 연강수량은 1,200∼1,300㎜ 내외로 우리 나라 제2의 다우지이다.
이것은 중·상류 지역이 서풍 내지 남서풍의 바람맞이 사면에 해당하여 산간 지방으로 갈수록 지형성 강우가 되기 때문이다. 지방별로는 산악형인 가평이 1,446.2㎜, 청일이 1,332.4㎜이고, 구릉형인 수원이 1,334.6㎜, 용인이 1,278.9㎜이며, 분지형인 서울이 1,364.8㎜, 청운이 1,503.5㎜ 등이다. 특히, 하계 집중률이 커서 북한강 유역은 60% 이상, 남한강 유역은 50∼60%를 보인다.
여름 최대 강수 지역은 가평 일대로 6∼8월의 강수량이 941.0㎜이고, 최소 강수 지역은 영월 일대로 508.3㎜이다.
여름에 집중되는 비는 때때로 집중호우로 내린다.
1일 최대 강수량은 서울이 354.7㎜ (1920.8.2.), 제천이 355.0㎜(1936.8.10.), 홍천이 351.2㎜(1936.8.27.), 가평이 342.0㎜(1931.8.19.) 등이다. 1시간 최대 강수량은 서울에서 118.6㎜(1942.8.5.)를 기록한 바 있다.
북한강 수계에 많은 댐이 건설된 이후, 넓은 인공호 때문에 수분 및 열수지(熱收支)가 변화되어 한강 연안의 기후가 많이 변화하였다.
남한의 한극은 한강 상류 산간 지방의 양구·인제·김화 등지에서 나타났으나, 최근에는 춘천·양평 등에서 빈번히 기록되고 있다.
춘천호를 비롯한 많은 호수에 이웃한 춘천의 경우, 춘천댐이 완공된 1965년 이래 의암댐·소양강댐 등이 건설되면서 서리 일수와 안개 일수가 증가하였으며, 겨울 기온이 낮아지고 여름 기온도 서늘해졌다.
넓은 인공호의 건설로 풍계(風系)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국지적인 바람에 대한 연구는 아직 없다. 일반적으로 호수 연안에서 나타나는 호풍(湖風)이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호수면에서의 증발량 증가는 안개 일수와 운량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서울의 경우 1931∼1960년 사이의 평균 강수량 1,259.2㎜에서 1961∼1990년 사이의 평균치는 1,369.8㎜로, 가평은 1931∼1960년 사이의 1,253.1㎜에서 1961∼1990년 사이에는 1,296.4㎜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평균 강수량의 증가가 호수면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강은 육상식물·수중식물·식물성플랑크톤·부착조류(규조·녹조·남조 등) 등을 생산자로 하고, 동물을 소비자, 박테리아·곰팡이류를 분해자로 한 거대한 생태계를 이룬다.
한강 생태계는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을 행하면서 평형상태를 이루어 수천 만년 존속해오는 동안, 기능면에서 생물이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한강의 생물들이 주체성을 잃으면 한강 생태계는 붕괴되어 사막화되고 말 것이다.
유사 이전 우리의 조상들이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한강 생태계는 오늘날과는 달리 일부 소택지(沼澤地)를 제외하면 원시림으로 덮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식하는 동물도 다양하고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흘러 이러한 환경에 적합한 어류·패류·곤충류·조류 등이 오늘날보다 풍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산림 벌채, 마을의 형성, 농경지 개간, 목축업과 광산 개발, 인구 증가, 도시의 형성, 교통 수단의 발달, 하천 형태의 변화 등이 연쇄 반응하여 생태계에 변화가 유발되었다.
하천의 유량은 줄고, 토사의 반입으로 하상이 높아졌으며, 수질은 악화되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동물·식물도 양적·질적으로 크게 변모되었다.
1981∼1985년 사이에 한강유역에서 관찰된 조류는 56종 1만 6317마리였다. 수금류(水禽類) 중에서는 청둥오리·쇠오리·고방오리·흰죽지·흰뺨검둥오리·비오리 등이 우세하였고, 육상종으로는 참새가 우세하였다.
팔당호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잠수성조류(潛水性鳥類)와 잡식을 하는 수면성조류(水面性鳥類)의 비율이 49 : 51이지만, 팔당호∼김포 사이와 팔당호∼가평 사이의 비율은 13 : 87이다.
이는 수질오염이 심한 곳에는 잠수성조류가 적게 찾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편 한강에는 국제보호조류인 따오기·두루미·검은목두루미·재두루미·고니·큰고니·먹황새 등도 찾아온다. 어류는 103종이 보고되었다.
1급수에는 버들치·금강치 등이 우세하고, 2급수에는 피라미, 3급수에는 붕어·잉어 등이 우세하다. 유사 이래로 버들치 구역과 갈겨니 구역은 축소되었으며, 피라미와 붕어의 구역은 확대되었다.
1400∼1800년대 중엽에 발간된 고서에 의하면, 한강에서 싱어[細魚]·웅어[葦魚]·열목어[餘項魚]·은어[銀口魚]·붕퉁뱅어[白魚]·누치[訥魚]·잉어[鯉魚]·붕어[鯽魚]·왜매치[菊息魚]·두우쟁이[眉叟甘味魚]·농어[鱸魚]·쏘가리[錦鱗魚] 등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보호가 요구되는 희귀종은 칼상어·열목어·은어·연준모치·눈불개·모샘치·어름치·가는돌고기·달납줄개·두우쟁이·꾸구리·돌상어·흰수마자·밀자개·종어·황쏘가리 등이다.
중류·하류 지역에서 1985년까지 보고된 조개류는 21종이다. 다슬기 무리는 1·2급수에 서식하며, 재첩·쨈물우렁이·왜우렁이·논우렁이 등은 3급수에서 서식한다.
팔당호가 건설되었을 때 피면자유생(被面子幼生)이나 담륜자유생(擔輪子幼生)이 하류로 쓸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민물담치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수도관을 막았던 적도 있다.
특히, 토끼조개·두드럭조개·곳체두드럭조개 등은 보호되어야 한다.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곤충은 133종에 달한다. 하루살이·날도래·강도래 등의 무리가 전체의 71.4%를 차지한다.
1급수에는 하루살이 무리, 2급수에는 강도래·날도래 무리, 3급수에는 모기붙이 무리가 각각 우세하다. 수서곤충의 대부분은 유충시기를 물에서 보내며, 부착조류를 섭취하고 어류에게 먹힌다. 한강 유역의 식물은 868종으로 강변의 대표종은 148종인데, 그 중 초본은 88종, 목본은 60종이다.
산지의 대부분은 소나무나 참나무속의 목본이 우세하지만 극상(極相)에 이르면 대부분이 참나무속의 나무로 덮일 것이다. 주목되는 산지식물은 오대산 월정사 일대의 전나무숲과 분비나무, 가평군의 잣나무숲, 소백산 고산 지대에 분포하는 주목 군락, 단양군 매포읍 영천리 일대의 측백나무 군락 등이다.
한강 유역에서 전개된 인류의 역사는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까지 한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보고된 곳만도 서울 면목동 유적을 비롯하여, 서울 암사동·가락동·역삼동 유적, 경기도 여주시 단현동, 가평군 청평리, 양주시의 검터·두촌·마진·마재 유적, 양평군 양근리·교평리·앙덕리·매탄 유적 등이 있다.
또한 남한강 유역에는 충청북도 제천시 창내·명오리·점말 유적, 단양군 수양개·금굴·상시리 유적 등 상당수에 이른다. 특히, 남한강 유역에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인류 문화가 일찍부터 한강 유역에 나타난 것은 그 뛰어난 자연환경 조건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지금까지 140여 곳에서 조사, 보고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울 암사동 유적, 미사리 유적, 강원 춘천시 교동의 동혈(洞穴) 유적과 내평리 유적, 인천 강화군 삼거리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을 통하여 신석기시대 선주민의 생활 모습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먼저 토기로는 밑이 뾰족한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되었는데, 저장·조리·취사 등의 용도에 따라 몇 가지 종류가 있었다. 주거로는 움집(竪穴住居址, 암사동유적)·동혈(교동유적)과 부석주거지(敷石住居址) 등이 있고, 분묘로는 동혈(교동유적)·석총(石塚, 시도패총유적)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생활의 기본은 수렵·어로·채집·농경 등이었다.
수렵은 구석기시대 이래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화살촉 등 새로운 도구가 나타나게 되었고, 어로 활동에 있어서도 낚시 어법, 작살·창 등을 사용하는 자돌 어법(刺突漁法), 그리고 어망법(漁網法) 등이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식물 채집 활동도 다양하게 강화되어 나갔을 것이다. 연석(碾石)·석부(石斧) 등이 그 직접적인 증거이며, 암사동 유적에서는 저장 시설도 보인다.
신석기 문화에 뒤이어 나타난 청동기 문화를 건설한 주민이 곧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접 조상들이었다. 만주 지역, 특히 요동·간도와 한반도 일대에 걸치는 우리 민족의 청동기 문화는 무문토기문화로 특징지어지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한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는 한반도 동북방(함경남북도)의 민무늬토기·구멍무늬토기 문화와 서북방(평안남도·황해도)의 팽이모양토기문화의 영향 속에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한편으로는 한반도 남부 지방으로 문화를 전파하는 교량구실을 하였다. 한강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서기 전 7세기 이전에 성립하여 서기 전 3세기 말 내지 서기 전 2세기 초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한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유적은 지금까지 30여 곳이 발견, 조사되었다. 이에 따르면 청동기인들은 하천이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의 경사면에 작은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생활 기반은 농경·어로·목축 등 가능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지만, 특히 농경이 크게 확대된 듯하다.
한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은 그 수가 매우 적으며 출토지도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세문경(細文鏡)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청동기는 일상생활의 실용품이 아니라 소수 유력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상징적 재물이었으며, 농경기구는 새로운 형식의 농경석기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무덤은 고인돌·석관묘(石棺墓) 등이 있는데, 특히 고인돌은 한반도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가장 특색있고 대표적인 묘제로 나타난다.
한강 유역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청동기 문화의 파급은 공동체를 분해시키면서 일부 권력층을 대두시켰고, 공동체 상호간의 항쟁이 야기되면서 원초적인 형태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소위 성읍국가(城邑國家)가 그것인데, 한강 유역에는 진국(辰國)이 성립되어 서기 전 4세기경에는 중국에도 알려질 정도로 성장하였다.
서기 전 3세기 말∼서기 전 2세기 초에는 한반도에 철기 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국가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들 상호간에 정복전쟁이 벌어지면서 그 결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형성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는 부여족(扶餘族)의 이동과 분파 과정에서 형성된 부여계 유이민 집단이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정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 유이민 집단은 인근의 정치 세력과 서로 경쟁하면서 연맹체를 형성하고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농경 정착 생활에 적합한 한강의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하여 생산면에서의 풍족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주위 세력들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정착은 한강 유역에 산재되어 있는 백제 토성(土城)이나 고분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역시 이 부근에서 발굴된 철기 문화의 유물과 농경생활의 흔적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기 전 18년에 시조 온조(溫祚)가 도읍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나 한성(漢城) 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다.
그러나 대체로 한강 남쪽의 몽촌토성(夢村土城)·춘궁리(春宮里)·교촌(校村) 일대가 백제의 중심지였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석촌동(石村洞)고분의 적석총, 양평군 문호리·양수리, 남양주시 금남리의 적석총유적 등이 동가강 유역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과 직결된 형식을 띠고 있다.
그 밖에 가락동·중곡동 등에 산재한 석실분(石室墳)·토광묘(土壙墓) 등이 북방에서 남하한 문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 주인공들이 부여계 유이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한강 유역 경략은 백제국의 성립 및 발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대에 이미 북으로 예성강, 남으로 안성천, 동으로 춘천에 이르는 강역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즉, 이때 이미 한강 유역 일대를 거의 포괄한 셈이다. 그 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리적 여건과 철기 농경문화에 의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고이왕 때에는 내정을 정비하였고, 근초고왕·근구수왕 때에는 정복사업을 펼쳐 남으로 마한을 병합하였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와 싸워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하였다.
근초고왕 이후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고구려는 미천왕 때 한반도 서북부를 장악한 이후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강 유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고, 백제도 국운을 걸고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고구려의 광개토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북경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탈취하였으며, 396년에는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아리수(阿利水 : 지금의 한강)를 건너 백제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한강 이북 지역을 잃은 백제는 그 회복에 안간힘을 기울였으나 오히려 뒤이은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475)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여 끝내 500년 가까이 중심 무대였던 한강 유역을 잃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며, 한강 유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 지역의 경영에 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뿐 아니라 신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위협이 되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양국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551년에는 두 나라가 공동으로 북벌을 감행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았고 백제가 하류 지역을, 신라가 상류 지역을 각각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 뒤 불과 2년만에 신라는 백제가 회복한 지역마저 공략하여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으로 직접 중국과 통하는 해로를 얻게 되었고, 또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고구려·백제 양국을 억누르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특히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고 강력한 군단을 배치하는 등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충주 지방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두어 한강 유역의 경영에 전력을 쏟았다.
그 뒤 고구려·백제 양국과 격렬한 전쟁을 계속하던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다시 당 세력마저 구축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신라의 이와 같은 발전의 일차적 기초는 역시 한강 유역이라는 중요 지대를 확고부동하게 점유, 활용한 데에 있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개관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의 한강 유역은 그 득실이 곧 각국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우선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백제의 초기 수도라는 사실 이외에, 삼국간의 군사적 쟁패지 또는 삼국통일 완수를 위한 당군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 데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한강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 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 개발의 전초지가 되었던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 한강 유역에는 한주(漢州)와 삭주(朔州)가 설치되어 있었고, 5소경 가운데 중원경(中原京 : 충주)·북원경(北原京 : 원주) 등 2개가 두어졌다. 신라의 중심지인 경주가 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던 관계로 자연히 이 지역의 정치적 중요성은 예정에 비해 감소되어 갔다.
그러나 군사적 중요성은 여전하여 다른 주와는 달리 한주에는 남천정(南川亭)·골내근정(骨乃斤亭)의 2개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강 유역이 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말기에 태봉(泰封)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그 뒤를 이은 고려가 개경을 수도로 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한강 유역의 호족(豪族)들이 대부분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협조하였고, 이들은 이후 고려의 중추적인 귀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왕규(王規)의 광주왕씨(廣州王氏)를 비롯하여, 서희(徐熙)의 이천서씨(利川徐氏), 강감찬(姜邯贊)의 금주강씨(衿州姜氏), 윤관(尹瓘)의 파평윤씨(坡平尹氏), 이자연(李子淵)·이자겸(李資謙)의 인주이씨(仁州李氏)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고려의 지방 제도를 보면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한강 유역은 양주목(楊州牧)과 광주목(廣州牧)의 관할 구역이 되었고, 남한강 유역은 충주목(忠州牧)의 관할이 되었다.
다시 995년에 10도제(道制)가 실시되자 한강 유역은 관내도(關內道)에 들고, 남한강 유역은 중원도(中原道), 북한강 유역은 삭방도(朔方道)에 들게 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 5도(五道)·양계(兩界)의 지방 제도가 확립되면서 한강 유역은 양광도(楊廣道), 남한강 유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속하였다.
한편, 문종 때에는 양주에 서경(평양)·동경(경주)과 더불어 삼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지방행정상 한강 유역의 북부 지방은 남경이, 남부 지방은 광주목이 관할하였다. 남경은 곧 폐지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재건되고 궁궐이 신축되었다.
이러한 남경의 설치 및 재건의 동기는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몽고의 침입과 고려 말 왜구의 창궐로 말미암아 국난타개를 위한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면서 한강 유역의 남경이 크게 주목되기에 이르렀으며, 천도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382년(우왕 8)에는 한양으로의 천도가 단행되었으나 불과 5개월만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실질적인 한양천도는 조선이 건국된 다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500여 년 동안 한양을 끼고 도는 한강은 그 하류에 굴지의 곡창지대가 있는 것뿐 아니라, 풍부한 수량과 지류 때문에 조운(漕運)이나 기타 수상교통이 크게 발달하여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커다란 기능을 발휘하였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전근대에는 자연 수상교통에 의지하게 되었고, 이 점에서 한강은 천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운이란 조세로 징수한 미곡·포목 등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제도로, 조선 왕조는 각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미를 인근의 강가나 해안의 조창(漕倉)·수참(水站)에 쌓아두었다가 이를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이때 한강 상류로부터는 경상도·강원도·충청도와 경기도의 조운이 모여서 용산 강안에 있는 강창(江倉)에 집결되었다.
또한 하류로부터는 북으로 황해도, 남으로 충청도·전라도의 조운이 모여 서강(西江) 연안의 강창에 수합되었다. 한편, 한강은 세곡 이외에도 서울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지방 농장에서 거둔 소작료가 운반되어 오는 교통로였으며,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 용품, 즉 미곡·땔나무·어염·수공업 제품·광물 등도 또한 이곳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이처럼 수운교통에 절대적 존재였던 한강은 반면에 육상교통에 있어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한성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있는 간선도로는 9개였는데, 그 중 6개 도로가 한강을 건너야 하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는 강변 곳곳에 진(津)이나 도(渡)를 설치하여 강을 건널 수 있게 하였으며, 국왕이 도강할 때에는 부교(浮橋)를 가설하기도 하였다.
이들 진에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세곡·소작료·생필품 등이 쌓이게 되었다. 한편 물화의 집산이 활발해지자 일찍부터 한강변에는 많은 상인들이 몰려 들었고, 운수업과 상업 등에서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경강부상(京江富商)이라는 사상층(私商層)이 크게 대두하여 용산·마포·서강·동작·서빙고·송파·뚝섬 등지를 중심 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는 시전의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소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는 시전상인을 누르고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이들 경강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상품을 매점하고 가격을 조장하였으므로, 한양에서는 수시로 쌀값이 폭등하여 소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이들은 미곡 이외에도 한강 상류로부터 운반된 시목(柴木)과 재목(材木) 등을 공급하였고, 30여 개의 빙고(氷庫)를 가지고 있으면서 얼음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강변의 상업이 번성함에 따라 강변 곳곳에 상업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는데, 용산·서강·마포항의 규모가 가장 컸다.
동빙고·서빙고는 매빙업이 성행하였으며, 두모포(豆毛浦)·뚝섬은 목재와 시탄(柴炭)의 집산지였다. 강남 쪽에서는 송파가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미곡·목재·토산품 등의 집산지로서 유명하였다.
한편, 한강은 국난시에 수도 한양을 보호하는 자연적 요새의 기능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립(申砬)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한양을 포기하고 파천하였다.
물론, 수도 방비책이 세워져 한강변을 사수하고 있었으나, 왜군 일부는 남한강을 건너 서울의 동쪽으로 진격해 왔고, 한강변에 도착한 다른 왜군 부대도 별 저항 없이 강을 건넜다.
이 천혜의 저항선을 포기한 조선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압록강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열을 수습한 조선군은 한강변을 공략하여 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강변의 천혜의 방어 조건도 일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남한강전투 등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그 전세를 흐트러뜨리는 전과가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고, 끝내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의 강화조약을 맺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 말기에 한강은 서양열강과 부딪치는 첫 접촉점이었다.
고종 초의 천주교 박해가 문제가 되어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에는 미국에 의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그 뒤 운요호사건으로 마침내 1876년 개항을 한 조선에는 개화의 물결이 밀려 들어왔다. 1890년경부터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용산·마포 일대에 거주하면서 양곡상·목재상 등을 운영하였고, 1888년 에는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다.
1900년에는 한양에 전차와 철도가 놓였으며, 한강에 철교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강변에 몰려든 이러한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끝내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한강은 다시금 비운의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강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삼국시대에는 삼국 간의 분쟁 대상이 되었던 요지였고, 고려·조선 시대에는 근기지역(近畿地域)으로서, 그리고 국토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던 것이다.
한강 유역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조사, 보고된 곳으로는 서울 면목동·암사동·역삼동·가락동, 경기도 여주의 단현리, 가평 청평리, 양주 검터·두촌·마진·마재, 양평 양근리·교평리·송학리·앙덕리·매탄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대부분 채집된 것이기 때문에, 간혹 신석기의 파손품이나 미완성품 또는 자연석을 구석기로 오판한 것이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에서 알려진 구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1978년에 발견되어 1979년부터 6차에 걸쳐 발굴된 전곡리 유적이다. 이 유적은 철원 방면에서 추가령지구대를 따라 남하하는 한탄강이 V자 모양으로 곡류를 이루어 감싸고 도는 현무암대지 위에 분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나 유럽의 전기 구석기의 특징적인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삭편석기(削片石器)와 더불어 초퍼(chop-per)·초핑툴(chopping tool)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남한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은 1980년에 조사된 충청북도 제천의 점말동굴을 비롯하여, 충주댐 건설에 따라 1982년부터는 수몰지구가 된 제천 사거리·명오리, 단양 수양리(수양개)·금굴·상시리 등에서 조사, 보고되었다.
이 가운데 제천의 사거리유적에서는 다량의 타제석기가 출토되었고, 이와 함께 모루돌[臺石]·돌망치·격치[剝片]가 다수 출토되어 이곳은 석기 제작소일 가능성이 높으며, 같은 층에서 흑요석(obsidian)제 격지도 출토되었다.
또한, 이 유적에서는 강자갈을 이용하여 집을 지었던 흔적으로 기둥구멍자리가 확인되었는데, 집자리의 넓이는 10㎡ 정도로서 사냥용 집(hunting camp)이라고 보고되었다.
명오리 유적은 해발 92m에 위치하며, 주먹도끼·박편석기·긁개·찌르개[尖頭器]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긁개가 가장 많다. 이 유적의 편년은 중기 구석기 후기, 즉 서기 전 5만∼4만년 사이로 추정된다. 단양의 수양리 유적은 해발 132m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층에서는 흑요석 석기, 하층에서는 아슐리안(Ache'ulean) 전통을 받은 무스테리안(Mouste'rian)문화의 특징을 가진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 역시 석기 제작소로 추정된다. 금굴 유적은 해발 135m에 위치하는 석회암동굴 유적으로 전기 구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시기의 층위들이 연속되어 있다.
상시리 유적은 가파른 바위벽 밑에 위치한 석회암 바위그늘유적으로 동물화석·골기(骨器)·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동물화석은 비단털쥐·꽃사슴·들염소·말사슴·멧토끼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골기로는 긁개·자르개·밀개 등이, 석기로는 초핑툴·찍개·망치 등이 출토되었다. 제천의 점말동굴 유적은 해발 430m에 위치한 석회암동굴로서, 각 층에서 노루·사슴·오소리·족제비·여우·표범·너구리 등 많은 동물화석과 인골 화석이 발견되었다.
한편, 4,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석기가 많이 출토되지 않아,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한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 강이나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신석기인들이 어로와 농경을 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어 있어 신석기인들의 거주지로서 아주 적합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약 7,000여년 전부터 이 지역에는 신석기인들이 생활하였고, 그 흔적으로 신석기시대의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많다.
그 유적으로는 집자리유지(住居址)·분묘·조개무지 등이 조사, 보고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집자리유지가 가장 많다. 집자리의 형태는 수혈주거지·부석주거지·동굴주거지 등으로 구별되는데, 수혈주거지의 대표적인 곳은 암사동 유적으로 여러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20여 채에 달하는 집자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석기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취락이 이곳에 형성되어 공동생활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직립구연부(直立口緣部)에 첨저(尖底) 바닥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있는데, 토기의 표면에는 이[齒]가 하나 또는 여러 개로 된 시문구(施文具)로 긋거나 눌러서 새긴 빗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 토기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平行密集斜短線文)·열점문(列點文)·사선문(斜線文)이 주로 새겨져 있고, 기복부(器腹部)에는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또는 옆으로 새긴 이른바 어골문(魚骨文)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 토기의 색깔은 적갈색이 대부분이나, 황갈색·회갈색·회흑색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노천요(露天窯)에서 구운 탓으로 불길이 고루 미치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이곳에서는 토기 이외에 연석(碾石)·석촉(石鏃)·타제석부(打製石斧)·마제석부(磨製石斧)·고석(敲石)·괭이·돌낫·보습과 토제(土製) 및 석제 어망추(漁網錘) 등이 출토되었다.
부석주거지는 강원도 춘천 내평리 유적에서 조사된 것으로, 황갈색 사질생토 위에 동서 12.3m, 남북 4m 크기로 서쪽에는 큰 돌을 깔고 동쪽에는 25∼30㎝ 정도의 작은 돌을 정연하게 깔아놓았다.
여기에서 발견된 토기는 구연부가 직립하거나 약간 외반(外反)하고, 저부(底部)는 환저(丸底)와 첨저뿐이며, 태토(胎土)는 사질토(砂質土)에 모래를 섞은 것과 점토에 모래를 섞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색깔은 적갈색 또는 황갈색이며, 부서진 파편을 보면 윤적법(輪積法)으로 점토테를 쌓아올려 만들었는데, 안쪽은 테가 잘 붙도록 손가락으로 눌러 붙여놓았다.
무늬는 암사동의 것과 같은 어골문 이외에도 사선문이 보인다. 석기로는 마제석부와 타제석부, 숫돌[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강화도 삼거리지석묘의 발굴 당시에 부석주거지 1기가 조사되었는데, 그 전체적인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크고 작은 석괴(石塊)를 깎아 만들었다. 이러한 부석주거지는 한강 유역의 일부 지역에서 그 지방의 특성에 맞게 축조된 주거 양식으로 생각된다.
한편, 동굴주거지는 춘천시 교동의 한 예가 알려져 있다. 이 동굴주거지는 토기가 모두 소형이고, 토기에 비하여 석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인골이 나온 점으로 보아 분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강 유역에 있는 신석기시대의 조개무지로는 경기도의 별망(別望)·시도(矢島)·오이도(烏耳島) 패총 등이 확인되었다.
별망패총은 표토층·조개층(상)·조개층(하)·점토층 등 4개 층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조개층(하)과 점토층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는 첨저형으로 표면의 3분의 2 정도에만 평행밀집사단선문·사선문·어골문 등이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석기로는 마연(磨硏)한 합인석부편(蛤刃石斧片)과 숫돌이 출토되었다.
시도패총은 표토층·조개층·흑색 부식토층·생토층 등으로 자연 층위가 나타나 있으며, 이 가운데 조개층과 흑색 부식토층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연부와 기복부의 문양 구성을 알 수 있는 대형의 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다수는 토기 표면의 3분의 2에 어골문을 새겨놓았다. 석기로는 석촉·연석봉(碾石棒)·석도(石刀) 등이 발견되었다.
오이도패총은 1950년대에 발견된 이래 여러 차례 조사가 실시되어 상당수의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다. 그 대부분은 토기 표면의 3분의 2 정도에 어골문을 새긴 것들이며, 구연부와 기복부에 서로 다른 무늬를 새겨넣은 것도 있었다. 한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문화는 한반도 동북방의 무문토기·공렬토기(孔列土器)와 서북방의 홍도(紅陶)·첨저형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이 두 지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하여 한강 유역에서 독특한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으며, 한편으로는 이곳을 거쳐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한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집자리와 고인돌·석관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집자리유적은 동북 지방 계통의 무문토기·공렬토기 문화와 서북 지방의 홍도·첨저형토기문화가 아직 접촉을 가지지 않은 전기와, 두 계통의 문화가 접촉하는 중기, 그리고 한강 유역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는 후기의 것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전기에 해당하는 집자리유적으로는 파주 교하리·옥석리, 서울 역삼동, 여주 흔암리, 제천 양평리, 강화 삼거리 유적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구릉에 위치한 장방형움집으로 바닥은 진흙을 깔거나 다졌으며, 바닥의 가운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화덕자리[爐址]와 기둥구멍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 집자리유적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발형토기(鉢形土器)·고배형홍도(高杯形紅陶)·팽이형토기 등의 토기와 그물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그리고 마제석촉·석부·숫돌·갈돌·대패날·돌망치 등 석기가 출토되었다.
중기의 집자리유적은 여주 흔암리, 하남 미사리, 서울 가락동, 춘천 신매리 등의 움집[竪穴住居址]으로, 전기의 것보다 규모가 크며 동북 지방 문화의 계통인 갈색마연토기(褐色磨硏土器)가 출토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팽이형토기·홍도·고배형홍도 등의 토기와 어망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그리고 석부·마제석촉·원형석기·숫돌·갈돌·석봉 등 석기, 그 밖에 동물뼈·보리·조·수수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후기의 움집은 남양주 수석리, 서울 가락동 등에서 발견된 것으로, 원형이나 말각방형(末角方形)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또한 무문토기·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내외반구연무문토기(內外反口緣無文土器) 등 다양한 토기와 그물추·방추차 등의 토제품, 석부·마제석촉·유구석부(有溝石斧)·공이·숫돌·낫 등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고인돌무덤은 강화 삼거리·부근리, 파주 옥석리 등의 탁자식과 서울 원지동의 남방식고인돌이 있다. 남한강 유역에는 제천 황석리·계산리·진목리·사기리, 양평 상자포리 등에서 남방식고인돌이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제천 황석리에서는 인골 1개체분이 발견되어 당시의 사람에 대하여 조사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지석묘에서는 무문토기·공렬토기·홍도 및 마제석검·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석촉·환상석부(環狀石斧)·돌도끼·곡옥(曲玉)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석관묘는 춘성 대곡리와 단양 안동리 등에서 조사되었는데, 여기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지석묘에서와 비슷하나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는 점이 다르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한강 유역은 서기 전 18년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한 이래 475년 웅진(熊津 : 공주)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는 가평 마장리 야철주거지와 양평 대심리 철기유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철(砂鐵)을 녹여 선철(銑鐵)을 생산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이곳이 자급자족의 경제생활과 방위력을 가진 집단 취락지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고분으로는 고구려의 기단식적석총(基壇式積石塚)과 축조 방법이 비슷한 2, 3세기경의 서울 석촌동 적석총을 비롯하여, 방이동의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 가락동의 토광묘가 있으며, 이 밖에 춘천 지방의 석실묘 및 제원 양평리·도화리의 대형 적석총 등이 있다.
이들 초기 백제의 고분은 처음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다가 점차 백제 고유의 양식을 갖추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한강 유역에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성곽으로는 풍납동토성·몽촌토성·아차산성(阿且山城)·이성산성(二聖山城)·남한산성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초기 백제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지형·위치·구조 등으로 보아 몽촌토성이다.
몽촌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밖에 해자시설(垓子施設)을 한 흔적을 보아 도성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4세기 말부터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475년(장수왕 63)에 이르러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당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영한 흔적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뒤 고구려는 551년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할 때까지 77년간 이 지역을 경영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문화유적은 서울의 아차산성과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 있는 정도이다.
고구려에 뒤이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으며, 이 시기에 건립된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 적성비(赤城碑)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로는 각처에서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이 제작되었다. 몽고의 침입을 당하여서는 한강 유역의 한양산성(漢陽山城)과 처인성(處仁城)이 격전지가 되었는데, 특히 처인성은 김윤후(金允侯)가 몽고장수 살리타(撒禮塔)를 사살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 천도가 이루어짐으로써 한강 유역은 명실공히 한반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도성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궁궐이 세워지고 도성의 사방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축조되었으며, 북쪽과 남쪽에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정비되었다. 조선은 유교국가였으므로 불교 유적은 적은 편이나, 세조 때 만들어진 원각사탑(圓覺寺塔)과 여주의 신륵사탑(新勒寺塔)이 남아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는 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남한산성과 행주산성을 증개축하여 보장지(保障地)로 삼았으며, 특히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45일간 피난하여 있었으므로 행궁지(行宮址) 등 건물지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성곽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어, 북한산성과 함께 산성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학적 측면에 있어서의 강은 일반적으로 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통하여 사유되고 작품화된다. 이러한 물의 상징적 의미는 고대에 있어서는 생명의 근원, 영원성, 풍요 등으로 표상되어 신비와 영험(靈驗)의 대상으로 숭앙되었다. 한강의 경우도 이름 자체가 말하여주듯 ‘큰 강’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삼국사기』(권32·잡지) 제사조의 기록을 보면, 한강(漢山河)은 전국의 명산대천에 등급을 매겨 대사·중사·소사로 나누어 매년 제사를 드리는 국가적 차원의 의례에 있어서 중사(中祀)에 편입되어 있는바, 고대로부터 중요한 사유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한강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대당(對唐) 교통로와 물적 기반의 확보를 위하여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 요충지이기도 하다.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溫達)이야기〉는 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고구려·신라 사이의 영토 쟁탈전이 한 제재가 되어 이루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곧, 이 지역 영토 회복에 나선 온달은 사력을 다하여 싸우지만, 한강은 결국 강을 건너는 도중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되는 설화적 이야기의 중요한 작품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의 〈도미(都彌)이야기〉 역시 자세한 강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포악한 백제왕의 횡포로 인하여 두 눈이 뽑힌 채 추방당하는 도미나 그를 찾아 백제 땅을 탈출하는 그의 아내가 배를 이용하는 곳 또한 한강으로 이해될 수 있어, 한강이 이 유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설화의 공간적 배경을 이루고 있음을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역사소설가 박종화(朴鍾和)는 이 〈도미이야기〉를 근간으로 소설화한 작품 〈아랑의 정조(貞操)〉(1937)를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지명과 함께 한강이 등장하여 보다 극적인 줄거리를 이루는 데 크게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강은 또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문학작품에 등장한다. 새로운 왕조의 창업과 새 도읍 한양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송축가적 성격의 노래들이 다양하게 지어지면서, 한강은 바로 국가적 차원의 중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악장문학으로 불리는 정도전(鄭道傳)의 〈신도가 新都歌〉에서 “알○ 한강수여 뒤흔 삼각산이여/덕중(德重)신 강산 즈으메 만세를 누리쇼셔.”로 노래되거나, 경기체가인 권근(權近)의 〈상대별곡 霜臺別曲〉과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 華山別曲〉에서 "華山南 漢水北 朝鮮勝地(千年勝地)" 등으로 노래되는 가운데 등장하는 삼각산과 짝이 되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승(形勝)을 이루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강의 상징적 의미는 또한 김상헌(金尙憲)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고국산천을 나고쟈 랴마/시절이 하 수상니 올동말동 여라.”와 정철(鄭澈)의 시조 “이몸 허러내여 낸믈에 오고져/이믈이 우러녜어 한강여흘 되다면/그제야 님그린 내병이 헐법도 잇니.”, 그리고 무명씨의 사설시조 “춘풍장책 상잠두여……종남한수 금대상련여 구원 기상이 만천세지무강이로다.” 등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시로 노래된 것 가운데에서는 조위(曺偉)의 〈남천과한강 南遷過漢江〉에서 “시름 속에 돌아오니 하늘도 아니 보이더니/종남산 지척에서 내[烟]와 구름 바라보네/세 해 동안 저 변새에 외론 신하 그 눈물이/오늘 이 강 위에선 더욱 아득하여라모(眊○歸來不見天 終南咫尺望雲烟 三年塞下孤臣淚 今日江頭倍黯然).”로 노래된 것이 있다.
또한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 涪溪記聞』에 일화와 함께 전하는 윤결(尹潔)의 “삼월 장안에 온갖 풀 향기롭고/한강의 흐르는 물은 양양하구나/성대의 무궁한 뜻을 알고자하거든/왕손의 춤추는 소매 긴 것을 보아라(三月長安百草香 漢江流水正洋洋 欲知聖代無窮意 看取王孫舞袖長).”로 노래된 것 등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강의 상징적 의미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차차 원초적 사유나 이념적 상징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보다 정취화된 차원에서 문학작품에 도입된다. “한강수라 맑고 깊은 물에/풍덩실 빠져 애고 나는 못 죽어”로 시작되는 유명한 민요 〈한강수타령〉은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같은 〈한강수타령〉이면서도 주로 평택 일원에서 불리는 “한강수 푸른 물아/너는 어찌 늙지 않어/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데·……에헤야 무정할손/사람만이 늙는구나.”에서는 강물이 상징하는 영원성이 늙기 쉬운 인간의 순간성과 대조되어 무상한 삶의 정서가 애절하게 노래되고 있다.
그리고 경남 지방 일대의 〈모내기노래 移秧謠〉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한강수에 모를 부어/모찌내기 간감하다/하늘에다 목화심어/목화따기 난감하다.”에서는 ‘한강에 돌던지기’라는 속담을 상기시키는 광활하고 심원한 강의 대명사로 상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조 “님니별 든날 밤에 나는 어히 못죽었노/한강슈 깁흔물에 풍덩실 지련만/지금에 사라잇기는 임보랴고”에서의 한강 역시 이와 동궤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 밖에도 민요 〈아리랑타령〉·〈수영요 水泳謠〉 등에서도 한강은 이와 같은 정취화된 상징물로서 중요한 작품의 제재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한강은 이제 객관적 대상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고 문학작품에 도입되기에 이르는데, 이 경우 한강은 시적 정서의 매개물 또는 풍류의 배경이라는 단순한 소재적 차원에서만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문학작품 가운데 먼저 한시로는 이규보(李奎報)의 〈한강 漢江〉, 이곡(李穀)의 〈송한양정참군 送漢陽鄭參軍〉, 홍일동(洪逸童)의 〈임자심이 나를 한강놀이에 초대하기에 강중을 초청하고 홍무정운을 쓰며 任子深邀我遊漢江招剛中用洪武正韻〉, 서거정(徐居正)의 〈한도십영 漢都十詠〉 가운데 〈목멱상화 木覓賞花〉·〈마포범주 麻浦泛舟〉 등을 들 수 있다.
이곡이 〈송한양정참군〉에서 “봄물이 반 삿대로 부풀어지면/조각배로 한강에 돗대 두드리려네(待得半篙春水生 扁舟一扣漢江枻).”라고 읊은 한 구절이나, 서거정이 〈목멱상화〉에서 “옥부용을 꽂아 세운듯한 화산/금포도를 물들여 낸듯한 한강(華山揷立玉芙蓉 漢江染出金葡萄)”이라고 읊은 한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시조 작품의 한 예로는 “남산에 눈날니 양은 백송골이 댱도듯/한강에 양은 강성 두룸이 고기를 물고 넘노듯/우리도 남의 님 거려두고 넘노라 볼ㄱ가 노라.”를 들 수 있다.
특히 가사 작품 가운데 허강(許橿)의 〈서호별곡 西湖別曲〉은 서빙고 부근에서 배를 타고 마포 서강으로 내려오는 동안의 한강 풍경과 운치를 노래하되, 중국의 옛 일을 이끌어내어 그곳 풍물과 비겨서 표현한 풍류 문학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 밖에도 여러 문집과 시화(詩話)·야담류의 책 등에 한강과 관련된 일화와 시편들이 많이 전한다.
한편,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강은 외적 방어의 중요한 지세로서, 수도 최후의 전선을 형성하는 전장(戰場)으로 문학작품에 등장하게 되기도 한다. 『임진록 壬辰錄』·『난중잡록 亂中雜錄』·『재조번방지 再造藩邦志』·『묵재일기 默齋日記』 등에 등장하는 한강이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한다.
전쟁을 겪으면서 한강은 핏물의 강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왕이 피난하게 되어 밤에 한강을 건너는 급박한 상황이 제시되면서 민족적 수난을 지켜보는 시련의 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러한 한강의 모습은 20세기에 불어닥친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를 제재로 한 문학작품들 속에서 다시 한번 비애를 간직한 강으로 드러난다.
이른바 ‘끊어진 한강철교’로 상징되는 동족상잔의 비극과 이후의 남북 분단으로까지 확대되는 뼈아픈 현실을 간직하고 있는 슬픈 숙명의 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강용준(姜龍俊)의 〈한강방어전기 漢江防禦戰記〉(1965)라는 소설에는 남하하는 북쪽 탱크에 거의 맨몸으로 돌진하다 총알받이가 된 중대장 대위가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있다.
즉 “그래서 한강을 보자. 이 눈으로. 그리고 증언을 하자……언덕을 다 올라갔을 때 그러나 오늘 한강은 그저 시커멓기만 했다……지금 한강은 그저 수렁처럼 시커멓기만 하다. 그래서 2백만 시민은 그들의 자양(滋養)을 잃었다.”라는 구절이 있는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한 강의 이미지를 극명하게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엄청난 상실과 민족적 분단 현실을 초래한 전쟁 체험의 비애가 한강을 통하여 문학작품 속에 형상화된 예들은 이후 우리 전쟁문학의 한 중요한 제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1960년대이래 우리 나라의 고도성장 역시 한강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한강의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지속적인 경제개발 정책과 국민적 의지가 차차 결실을 맺어 이루어진 산업화 시대의 도래를, 그러나 문학작품들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의 이면에 잠재된 병폐와 인간적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는 차원에서 한강을 문학적 제재로 도입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황금찬(黃錦燦)의 시집 『오후의 한강』(1973)과 『한강』(1979), 배태인(裵泰寅)의 시집 『나의 한강』(1977), 이근배(李根培)의 서사시 〈한강〉(1985), 그리고 손장순(孫章純)의 소설 〈우울한 한강〉(1968)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개별 작품의 실제를 살펴보면, 황금찬은 〈오후의 한강〉에서 “한강은/사랑의 강/언어의 살결보다/희던 강물//20세기의 문명은/저 테임즈강이며, 세에느강/그리고 나일강에 피던/꽃을 았아갔다.”라고 노래하였고, 또한 배태인은 〈나의 한강〉에서 “묵중한 자유의 술잔을/머리맡에 띄워놓고/숨가쁜 침묵으로 버티고 있는 나의 한강아!”이라고 노래하였다.
그리고 손장순은 〈우울한 한강〉에서 “한강은 여전히 따분하고 고리탕탕하게 흐르고 있다. 마치 늪속의 썩은 물처럼……거기엔 부정해 보았댔자 더욱 명백해지는, 정녕 그녀가 태어난 고장의 강물이 느릿하게 끝없이 흐르고 있다.”라는 서술적인 묘사를 하였다.
특히, 5,000여 행에 달하는 이근배의 장편서사시 〈한강〉은 8·15 이후의 강의 역사와 민족적 현실을 웅변적으로 노래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것인데, “한강/내일로 흐르는 강/호랑이처럼 내닫고/용이 되어 오르는 강/꺼지지 않는 불꽃의 강/우리들의 비원(悲願)인/통일을 실어오는 강//오오 일어서라/천둥처럼 지축을 흔들고/가슴에 담은 산같은 기쁨 터뜨려/이 땅에 가득하리라/종소리가 되리라/목숨이 되리라.”라는 끝 부분에서 보듯,
한강은 오늘날 다양한 삶의 현실과 민족적 기대를 총체적으로 내포한 상징적 강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있다 하겠다. 요컨대,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한강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징적 의미와 영욕(榮辱)을 표상하는 민족의 강으로 줄기차게 형상화되고 있다 하겠다.
한강을 주제로 한 민요로는 〈한강수타령〉과 〈한강시선(漢江柴船)뱃노래〉가 있다. 〈한강수타령〉은 한반도 중부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흐르는 한강을 노래한 민요이다. 한강은 수량이 풍부하여 일대의 농업지대에 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수운을 이용한 교통로가 됨으로써 강변에는 많은 고을을 형성하게 하였다.
또, 한강은 수도 서울로 공급하는 각종 물자가 집적되고 시장이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생업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민족사의 많은 애환을 지니고 있어 민요로까지 등장한 것이다. 또한, 〈한강수타령〉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민요로 서민의 애환, 특히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유희요(遊戱謠)이기도 하다.
형식을 보면 〈한강수타령〉은 일반 민요가 4·4조로 구성되고 있는 데 반하여 3·4·5·6 등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고 자유로운 시형(詩形)을 택하고 있다. 노래는 분장식(分章式)으로 창자(唱者)의 즉흥성과 능력에 따라 연창(聯唱)으로 창작하여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후렴이 있어 노래의 끝 또는 시작할 때 반복해서 불린다.
〈한강시선뱃노래〉는 어부의 생애의 어려움을 노래하거나, 고기잡이의 즐거움을 노래한 뱃노래의 하나로 어업 노동요의 성격을 가진다.
배를 젓는다는 것은 역시 힘겨운 일이며 힘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후렴이 들어간다. 따라서, 처음 앞사람이 선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여러 사람이 뒷소리를 받으며 노젓는 속도를 똑같이 맞춘다.
일반적인 뱃노래에서 보듯 선소리는 선율이 복잡하여 사설의 내용이 다양하며, 뒷소리는 단순한 선율에 같은 사설을 반복한다.
또, 〈한강시선뱃노래〉는 고유의 음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모두 완전4도, 단(短)3도, 장(長)2도, 즉 서양의 음악 계명으로 미·라·도·레·미의 5음을 사용하나, 뒷소리는 음역(音域)이 좁으며 2개의 소리만으로 이루어진다.
〈한강시선뱃노래〉는 뱃사람들이 무사히 다녀오도록 용왕에게 제를 지낸 뒤 닻을 감으면서부터 시작되는데, 대부분 노젓는 작업을 위하여 부른다.
어부들이 돛을 달고 노를 저어서 바다로 나아가 잡은 고기를 받아 싣고 한강 하류 강화 지역에 이르면 다시 뱃노래가 시작된다. 이때 노 젓는 노래에 접어들면 임경업장군기를 달게 된다.
그때쯤은 거친 바다가 아니고 한강이기 때문에 별로 힘이 들지 않은 데다가 나이 많은 선원들이어서 예로부터 전승된 이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
배가 고기를 싣고 마포에 이르기 전에는 선상배치기노래가 한바탕 일렁인다. 호적·꽹과리·징·북이 등장하여 춤으로 흥을 돋우는데, 마포 포구에서는 선주와 아낙네들이 술동이를 이고 반갑게 마중을 나온다.
배가 포구에 닿아 임경업장군기와 봉기를 앞세우고 선주집을 향하면 마중 나왔던 마포 사람들까지 한바탕 어울린다. 또, 선주집을 떠나 강화에 이르는 동안 똑같은 노래와 놀이가 진행되는데 역시 선상배치기와 지상배치기가 있다.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안도감과 마을 사람들의 환영이 교차되는 귀향에서 다시 놀이가 진행된다.
지상배치기에서 부르는 가락은 다른 소리와 마찬가지로 앞소리는 사설로 엮어지고 뒷소리는 군소리로 받는 것이 흥미 있다. 한강시선은 마치 거북선 모양으로 앞이 넓적한 한선(韓船)이었다.
강화에서 마포를 오르내리던 상역선(商易船)으로 한때 풍성한 한강의 교역을 회상시켜주는 것으로, 한강 연안의 어부들에 의하여 독특한 노래가 생성되어 이어져왔던 것이다.
미술 작품을 보면 먼저 한강변의 실경을 그린 작품으로, 중종 때 중국 사신에게 그려준 〈한강유람도 漢江遊覽圖〉가 있다고 하며, 특히 18세기에 들어 정선(鄭敾)의 한강변 경승을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유명하다.
정선은 한국 회화사상 그의 역량을 가장 잘 발휘한 화가로, 직접 방문한 금강산·영남·한강·한양 등의 산천을 그리는 진경산수라는 독특한 화풍을 완성시켰다.
그의 한강변 진경산수로는 〈압구정도 狎鷗亭圖〉(서울 강남구 압구정동)·〈구담도 龜潭圖〉(단양읍 장회리의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양팔경 중의 하나로 우뚝선 구담봉 아래 강물이 못을 이룬 절승의 진경)·〈선유봉도 仙遊峯圖〉(지금은 없어진 영등포양화대교 남단에 있던 봉우리)·〈양화진도 楊花津圖〉(영등포양화나루)·〈이수정도 二水亭圖〉(강서구 염창동 강변)·
〈개화사도 開化寺圖〉(강서구 개화동약사사 전경)·〈송파진도 松坡津圖〉(송파구송파나루)·〈광진도 廣津圖〉(광장동광나루)·〈낙건정도 樂健亭圖〉(고양시 외성동 龍汀)·〈귀래정도 歸來亭圖〉(고양시 외성동)·〈안현석봉도 鞍峴夕烽圖〉(한강 남쪽에서 무악봉의 봉화를 그림.)·〈목멱조돈도 木覓朝暾圖〉(한강 남쪽에서 남산의 해돋이를 그림.)·〈행호관어도 杏湖觀漁圖〉(고양시 행주산성)·
〈공암층탑도 孔嵒層塔圖〉(강서구 가양동 옛 양천현의 공암나루) 등이 있으며, 정형산수(定型山水)로는 〈황려호도 黃驪湖圖〉(남한강여주)가 있다. 그 밖에 한강을 그린 그림으로 화가와 연대는 알 수 없어도 16세기 말의 견본담채(絹本淡彩)의 〈독서당계회도 讀書堂契會圖〉가 있다.
이는 현재 성동구 옥수동에 있던 독서당을 그린 것으로, 이이(李珥)·정철·유성룡(柳成龍) 등 가정생(嘉靖生) 동배들의 계회를 그리고 있다. 그 전경(前景)은 토파(土坡)·강안(江岸) 등인데 모두 농담의 묵법으로 그리고 있다.
또, 1600년 명장(明將) 만세덕(萬世德)을 서울 근교에 안내하던 이모(李某)의 사경(寫景)이 전하고 있는데, 이는 한강 남안에서 삼각산과 남산의 잠두방향을 실사하고 있다.
또, 특이한 그림으로는 〈노량진주교급행궁도 鷺梁津舟橋及行宮圖〉가 있다.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 이신(爾信)의 그림으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산(華山 : 수원) 현륭원(顯隆園)에 참배하러 갈 때 노들강(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건너는 능행도(陵幸圖)이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노들나루터에 가설되었던 배다리의 규모와 형태를 알 수 있다.
한강변 나루터를 무대로 한 민속놀이로는 송파진과 송파시장에서 연희되었던 송파산대놀이가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반주음악에 맞추어 춤이 추가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따르는 탈놀음의 일종이며, 산대도감(山臺都監) 계통극(系統劇)의 중부형의 한 분파이다.
송파산대놀이는 송파 지역이 한강변 5장의 하나로, 수운으로는 강원도까지 내왕하고 육운으로는 마행상인(馬行商人)들까지 많이 내왕하여 조선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 다섯 중 하나였던 송파장(松坡場)이 섰던 곳으로, 상업 근거지로서 부촌이었기 때문에 정착할 수 있었다. 즉, 송파산대놀이가 유지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연희되고 계승될 수 있었다.
약 200년 전부터 송파산대놀이가 창성하였으나, 중도에 쇠진되었던 것을 1900년 초부터 다시 송파에 거주하는 허윤(許鈗)이 구파발 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을 초빙하여 재연하였다고 한다. 연희 시기는 정월 초·사월 초파일·단오·칠월 백중·한가위 등으로 장터에서 놀았다.
오전에는 줄 걸고 씨름 붙이고, 광대 줄타고 소리를 하고 놀다가 점심 후에 길놀이부터 시작하여 동네로 돌아와 탈놀음이 시작되는데 자정이 지나야 끝을 맺었다. 그러나 송파산대놀이는 1945년 광복 전후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6·25 이후 재건되었다.
1973년 5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송파민속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호수공원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서 정기적으로 연희되고 있다. 놀이는 가무극(歌舞劇)으로 이어지는데, 대체적인 표현은 주술적 변사진경의식과 민중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송파산대놀이에 쓰이는 음악은 길놀이에서 연주하는 행진 음악과 놀이판에서 연주하는 반주 음악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호적 한 쌍과 북·장구·바라로 편성되며, 후자는 북·장구와 피리 한쌍, 젓대·해금의 삼현육각으로 편성된다. 춤사위는 장단의 유형별로 나누어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타령장단의 깨끼춤과 걸음걸이춤, 굿거리장단의 허튼춤이 있다.
이와 같이, 한강의 예술은 한강의 지형적인 자연조건과 한강의 산업·교통적인 기능을 통한 인간활동이 전개됨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새로 창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근년에 들어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식전행사가 강상예술제(江上藝術祭) 등으로 한강에서 출발하여 펼쳐짐으로써 한강이 예술 활동의 무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더욱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한강이 자원으로서 갖게되는 가치는 대체로 유량과 수질에 의해 결정된다. 한강은 유량이 남한에서 으뜸으로 가장 규모가 큰 강에 해당된다.
유량이 많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강에 있어 유역 면적이 넓고 유역의 강수량이 많음을 뜻한다. 유역은 광주·소백·태백산맥으로 둘러싸여 그 면적이 압록강·두만강 다음이며, 중상류 지역은 연 강수량 1,200∼1,300㎜내외로 우리 나라 제2의 다우지이다.
조선 시대에 물자 수송을 위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던 한강은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국토 분단으로 강어귀를 통하지 못하면서 수로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어, 각종 용수 공급과 수력발전에 이용되고 있다. 1991년 기준 수자원 부존량은 33740백만t이고 수자원 이용량은 8207백만t으로 수자원 이용률은 24.3%이다.
그리고 1993년 기준 한강의 연간 용수 수효량은 10053백만㎥인데 비하여 용수 공급량은 10673백만㎥으로, 공급량이 부족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용수 수효량은 생활용수 3277백만㎥, 농업용수 2862백만㎥, 공업용수 830백만㎥, 하천 유지용수 3084백만㎥ 등으로 구성된다. 유량이 많다고 해도 그 양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못하면 강물을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가 없다.
한강의 유역 면적은 남한에서 가장 넓으나 세계적 하천에 비하면 좁고, 유역 연강수량의 60%정도가 여름철에 집중되어 유황(流況)의 기복이 심하다. 이러한 유황의 불안정성을 줄이기 위하여 댐을 만들어 왔다.
댐 건설은 생활용수, 관개용수, 공업용수 등의 각종 용수와 전력을 얻을 뿐만 아니라, 홍수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한강을 젖줄로 삼아야 하는 수도권 인구는 남한 전체의 절반 정도까지 차지한다.
많은 인구가 필요로 하는 용수와 전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댐 건설공사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에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여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기도 하였다.
한강에 의하여 광주산맥이 잘려 만들어진 골짜기에는 용수 확보를 위한 팔당댐이 1973년에 만들어졌는데 이 댐은 높이 29m, 길이 575m이고, 총 저수량은 244백만㎥이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도시화·산업화로 한강물에 대한 수효가 급증하고 각종 오염물질이 흘러들어 상수원을 팔당으로 이전하였다. 수도권 상수원인 한강에 있어 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유량뿐만 아니라 수질에도 달려 있다. 이에 취수구 상류의 수면과 인접 토지를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다.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인하여 공간 활동에 제약을 받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는 피해자가 생겨나게 된다. 탄천·중랑천·안양천 등의 지류가 서울 시계안의 한강으로 흘러들지만, 이들은 한강에 용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하수·폐수를 배출해내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 유로를 알기가 쉽지 않다. 지류에 설치된 하수처리장은 처리해야 하는 하수량에 비하여 처리능력이 떨어진다.
다목적댐으로는 1973년에 소양강댐이 높이 123m, 길이 530m, 총 저수량 2900백만㎥, 1986년에 충주댐이 높이 97.5m, 길이 447m, 총 저수량 2750백만 등으로 완공되어 홍수 조절(소양강댐 500백만㎥, 충주댐 616백만㎥) 용수 공급(소양강댐 1213백만㎥, 충주댐 3380백만㎥) 수력발전(소양강댐 200천㎾, 충주댐 412천㎾) 등의 역할을 한다.
또한, 화천댐은 홍수 조절(213백만㎥)과 수력발전(180천㎾)의 기능을 담당한다. 댐에 의한 홍수 조절 능력은 유역 총 강수량의 25% 정도일 뿐이어서 여름철 집중호우와 대조(大潮)가 동시에 나타날 때는 홍수가 발생한다. 이때 물은 자원으로부터 재앙을 가져오는 것으로 변하고 만다.
한강의 상류인 남한강과 북한강은하상의 경사가 급하고 협곡이 많은 수력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 수력발전 전용댐인 춘천댐(57㎾), 의암댐(45㎾), 청평댐(79.6천㎾), 괴산댐(2.6천㎾), 도암댐(82천㎾)등이 건설되었다.
또한, 팔당댐발전소의 시설 용량은 80천㎾이다. 한강 수계는 한국 수력발전의 약 70%를 차지하고, 이의 70%정도가 북한강 수계에 분포한다. 이 밖에도 생활 공업용수 전용댐으로 광동댐(26백만㎥)이 있다.
댐 건설은 그 규모에 비례해 강의 생태적 기능을 바꾸어 놓는다. 자연 상태의 강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많이 잃어버리는 셈이다.
잃어버렸던 것이 최근에 와서는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규모 시설은 그 만큼 더 환경에 부담을 주는 기술을 요구하고 이는 전체 사회에서의 기술 연계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강은 넓은 유역 면적과 긴 유로 연장, 인구 및 산업 생산면에서의 절대적 위치, 역사상 전략적 요충지인 점 등을 고려할 때, 여러 유형의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북한강-춘천권은 파로호·춘천호·소양호·의암호·청평호 등의 인공호수와, 이들 호반 주변의 남이섬·구곡폭포·등선폭포·팔봉산·공작산·용소 등의 명승·산악, 청평사·상원사·흥국사·혈거유지(穴居遺址) 등의 문화 사적이 즐비하여 하나의 밀집된 관광권을 이룬다.
춘천호·소양호의 내륙 수운은 이 관광권의 중심 도시인 춘천에서 양구·인제를 연결하여 설악 관광권으로 통하게 한다. 서울에서 북한강-춘천권과 설악산 사이의 간선 관광 루트는 경춘선·경춘국도와 소양호의 쾌속정 등이 있어 편리하다. 남한강-충주권은 단양을 중심으로 사방 40리에 펼쳐진 단양팔경(도담삼봉 등 일부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음.)이 있다.
또한 충주호의 내수면양식 및 탄금대·소백산·속리산·수안보온천·문경새재·화양동계곡·대청호 등이 있어 내륙 순환 관광권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곳은 삼국시대의 중원문화유산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수몰되어 안타깝다. 남한강-여주권의 중심은 신륵사를 비롯한 강변 유원지이다. 신륵사는 보물 7점이 있는 명찰이고 인근에는 영릉(英陵)이 있다. 여주·이천의 도자기 생산지도 각광받는 명소이다.
양수리-팔당권은 서울 근교의 1일 관광권으로서, 용문산·운길산·구곡사·상원사·금곡사·남한산성·광릉·정다산묘 등이 팔당호반 유원지를 둘러싸고 있다.
이 권역은 관광자원의 공급과 수요 측면에서 서울 근교의 야외 오락·스포츠 센터로서 개발이 풍부한 지역이지만, 상수원 보호지구·녹지지구·자연환경 보전권역·군사기지 등에 속하여 제한을 받고 있다.
한강 본류권은 집중적인 개발로 자연적 관광자원이 인공적 관광자원으로 대체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의한 한강 고수부지 시민공원이다. 과거의 유적지는 현대적 건물의 사이사이에 산재한다.
몽촌토성·풍납토성·암사동선사유적지 등과 양화진·염창·절두산천주교성지·광흥창지·노량진·서빙고·동빙고·이태원지·압구정지·광나루터·아차산성 등의 사적지, 국회의사당·63빌딩·서울종합운동장·석촌호수·어린이대공원·올림픽공원 등의 인공적 관광지가 있다. 한강 시민공원양화지구와 잠실지구 사이의 유람선 뱃길은 도시의 겉모양을 전망할 수 있다.
강물뿐만 아니라 하상의 골재와 강물이 흐르면서 만들어 놓은 지형도 인간이 이용을 해왔다. 한강은 하류의 폭은 좁고, 강 양안에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포인트 바(point bar)가 널리 발달되어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골재 채취로 포인트 바가 사라져 강은 넓어지고 깊어졌다.
팔당 하류의 한강은 또한 하천 양안에 범람원, 자연제방, 하중도 등의 다양한 지형도를 펼쳐 놓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아파트와 상가의 터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자원 이용은 한강의 생태적 기능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대규모의 개발에 의해 한강은 기적을 만들어 냈고, 기적을 낳았던 한강은 이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강의 인공화와 서울의 거대화로, 강에서는 본디의 모양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강물은 오염되어 있다. 한강과 강물이 만들어 놓은 지형이 단기적 시각에서 조급하게 개발되어 쾌적한 쉼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거대 도시 서울이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의 유입으로 용수의 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개발의 대상은 한강과 한강에 의해 형성된 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강의 개발은 주로 댐 건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수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댐이 만들어짐으로써 하천을 구성하는 여울과 소중 여울을 잃어 한강의 오염물질 동화기능이 약화되었다.
한강 수계에 건설된 10개의 댐으로 홍수의 피해가 줄어들고 용수와 전력을 얻지만, 강물의 흐름이 방해를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댐 건설이라는 개발이 불가피하지만 이로부터 강의 이물질 동화능력이라는 생태적 기능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강물이 흐르면서 펼쳐놓은 지형도 인간의 개발 욕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다.
골재 채취 이전의 한강은 모래톱이 넓고 맑은 물을 간직하고 있어 여름철 쉼터의 구실을 하였다. 1960년대 이후 장기간 서울과 그 주변의 건축물의 대부분은 이곳의 골재를 이용하였다.
하중도인 뚝섬·잠실·여의도·난지도 등도 여지없이 개발되었다. 뚝섬·잠실·여의도 등은 모두 주거지와 상업 지대로 바뀌었다. 난지도는 20년간 서울시 쓰레기 매립장의 구실을 다하고 있다.
지금은 밤섬만이 하중도 가운데 유일하게 철새 도래지의 옛 모습을 지켜내고 있다. 범람원과 모래사장이 대부분 아파트 단지로 변하게 된 개발은 1970년대의 강남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강남지역 개발은 잠실의 육속화 계획과 영동지구 개발로 대표된다.
1970년 잠실 하중도의 북쪽 흐름을 막는 공사로 시작된 잠실지구 개발은 100만평 이상의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주축으로 주변 340만평에 대한 구획 정리 사업을 실시하였다.
오늘날 이 지구에는 잠실종합경기장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어 있다. 영동지구개발은 1968년 이후 10여 년에 걸쳐 800만 평이 넘는 세계 구획 정리사상 유례가 없는 대공사였다.
이러한 개발에 따라 오늘날 이 지역은 서울의 중심 생활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경제우선주의적 개발정책은 한강에도 큰 영향을 미쳐, 1980년대에는 치수(治水)·미관·오염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다룰 계획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더욱 구체화되어 한강종합개발계획이 구상되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은 1982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준공하였다.
이 사업의 기본 목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에 대비한 도시 환경 개선, 시가지 팽창으로 각박해진 인간성에 유화감을 주고 하천 수호의 정신 함양 및 새로운 공간 창출, 공공성·공간성·광역성을 가진 건전한 시민 위락 공간의 확보, 본연의 한강 기능 회복과 잠재적 가용 자원의 경제적 개발·이용, 이수(利水)·치수의 안정성과 주변 지역의 환경 정비, 강변 도로 확장과 교통난 해소 등이다.
이 사업은 저수로 정비, 시민공원 조성, 올림픽대로와 하천 양안 분류 하수관로 및 하수처리장 건설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 사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저수로 정비는 행주대로∼암사동간 36㎞ 구간에 저수로폭 725∼1,175m, 수심 2.5m 이상, 저수호안(低水護岸) 57.5㎞, 수위 유지용 수중보 2개소, 유입 지천 하상 보호공 8개소 등의 건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민공원 조성사업은 한강 양안에 체육 공원 693만㎡, 시설 광장 9개소 310만㎡, 자연 초지 13개소 383만㎡, 잔디 식재 166만㎡, 축구장 24면, 농구장 25면, 배구장 33면, 정구장 13면, 자연 학습장 1개소 등의 강변공원을 만드는 사업이다. 올림픽대로는 자동차 전용의 도시고속화 및 강변관광도로로서 김포공항∼올림픽경기장 사이를 직접 연결하고 있다.
도로 연장은 암사동∼행주대교 사이 36㎞이며, 노폭은 17.4∼29m이다. 이 공사에는 2,070m의 노량대교를 비롯한 교량 5개소, 입체 교차로 11개소를 신설 또는 개량하였다.
분류 하수관로는 고덕동∼행주대교 사이 54.54㎞의 철근콘크리트 암거구조로, 한강 연안에서 배출되는 오수와 하수를 모아 3개 하수 처리장으로 보내는 하수 전용관로이다.
한강의 수질 보존을 위한 하수 처리장은 배수 구역별로 강북 지역의 난지하수 처리장이 1일 50만t(장래 100만t)의 1차 처리시설, 강남 지역의 안양 하수처리장이 1일 100만t(장래 200만t)의 1차 처리시설, 탄천 배수 구역의 탄천 하수처리장이 1일 50만t의 2차 처리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골재 자원의 개발, 치수, 동서 교통망 확보, 수질 개선, 시민 여가 공간 확보 등에 있어 부분적인 효과를 거두었지만 신중하지 못한 개발과 무분별한 인공화라는 비난을 면하기는 쉽지 않다. 모래나 자갈 채취로 깊어지고 넓어진 한강에다 유람선을 띄우기 위하여 수중보를 설치하였으나, 이는 강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90년 한강 홍수로 일산둑이 무너진 원인 중의 하나도 수중보 설치에 있다. 그리고 시민공원의 지나친 인공화도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편, 상류 지역의 관광 개발과 하류 지역의 거대 도시화 등은 한강으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구실을 하였다.
상수원 지역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독차지하는 호텔·여관·음식점·골프장 등의 위락·숙박 시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수도권 주민이 안심하게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만든다.
오염 정도는 대체로 하류로 갈수록 더해져 노량진동과 가양동의 BOD는 1989년 이후 약간 낮아졌으나 1991∼1995년 동안 각각 3㎎/1와 4㎎/1정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맹목적인 서울의 거대화에서 비롯되었다. 도시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생태계의 안정이 깨어지기 쉽고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속성이나 자정 능력이 제한될 확률이 커진다.
또한, 상품과 서비스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유통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여 짜여졌던 도시의 공간 구조에 쓰레기·폐기물의 수거라고 하는 유통의 또 다른 측면이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한강은 국제연합이 지정한 국제 하천 중 제3류 주요 하천으로 분류되어 있다.
국제자연보존연맹과 국제연합환경계획세계야생기금이 1980년 3월에 발전시킨 세계자연자원보존전략에 따라 국제 유역관리 대상하천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강 유역의 관리는 국제협력의 차원에 이르렀다.
오늘날 한강 유역이 우리 나라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추적 기능과 세계 경제의 전반적 재구조화 경향을 고려한다면, 미래의 한강은 훨씬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강 개발은 단순한 물리적 개발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자연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개발 철학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 즉 인간-환경 관계의 인식에서 개발과 보존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 앞으로는 사회 변동 추세에 따라 여가가 중요한 인간 존재의 기본 기능으로 대두될 것이므로, 국제 관광, 국민 관광, 시민 여가 활동의 여러 차원에서 골고루 접근하되, 쾌적한 주거 활동, 깨끗한 자연에 대한 주민의 기본 욕구에 1차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여가 활동 공간은 다양한 사회집단이 고루 접할 수 있도록 입안되어야 한다.
셋째, 한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풍부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따라서, 개발의 목표 설정이나 사업 설정 과정에서 야기되는 갈등의 해소에는 전통적 문화경관의 보전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끝으로, 각종 기반 시설과 이용 시설 개발을 위한 투자는 해당 지역의 개발 사업과 연계하여 소득 증대와 생활 편익 향상 등 지역 주민의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도록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