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권재술, 『우주, 상상력 공장』, 특별한 서재, 2022
선인장의 가시
가시 중에는 선인장의 가시는 가히 압권이라고 할 만큼 대단합니다. 그 수에 있어서나 날카롭기에 있어서나 다른 가시를 압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린의 목이 긴 것은 키 큰 나무의 잎을 먹기 위해서이고, 상어의 이빨이 날카로운 것은 고기를 잡기 위한 것이고, 오리의 물갈퀴는 헤엄을 잘 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물의 진화가 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고 하는 주장을 목적론이라고 합니다. 목적론은 인간의 사고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목적론의 내면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창조는 신의 목적과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뉴턴과 다윈 이후 근대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목적론은 점점 힘을 잃었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히 과학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목적론이 과학이라는 영역 안에 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245∼246쪽)
선인장의 가시도 어떤 목적으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런 목적으로 선인장의 가시가 만들어졌다면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선인장이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지구상에 초식동물들이 생기기 수백만 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인장이 수백만 년 뒤에 나타난 공룡, 기린, 들소들을 미리 걱정해 가시를 예비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무리 미래를 위한 준비 정신이 뛰어난 선인장이라도 수백만 년 뒤를 준비한다는 것은 놀라워도 너무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혹자는 ‘하느님이 하는 일인데 그 정도로 못 할까?’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병통치약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일에 하느님을 개입시키면 모두 해결됩니다. 그게 하느님의 존재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과학자들을 그런 방법으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 변해서 된 것이고, 잎이 그렇게 변함으로써 건조한 사막에서 수분의 증발을 막아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것도 선인장이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자기의 피부를 가시로 바꾸었다고 하면 목적론적인 설명이 됩니다. 선인장이 그런 의도로 가시를 낸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는데 다양한 변이를 통해 다양한 식물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피부를 가시로 변화시킨 선인장이 우연히 생겨났을 뿐입니다. 다양한 식물들이 있었는데 다양한 변이를 통해 다양한 식물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피부를 가시로 변화시킨 선인장이 우연히 생겨났을 뿐입니다. 생겨나고 보니 사막이라는 환경에 살아남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가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가시가 생기고 보니 수분의 증발을 막아줘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선인장이 가시를 냈지만, 사막이라는 환경이 아니라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이었다더라면, 선인장은 멸종했을 것입니다. 사실 추운 지방에 선인장이 없는 것도 사막에 선인장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인간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만약 석기시대의 사람이 지금 아기를 낳았다고 합시다. 물론 그 사람은 현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석기시대만 경험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지금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우리와 같은 교육을 받는다면 우리의 아이들과 구별이 될까요? 전혀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아이도 미분 적분을 어려움 없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DNA와 지금 사람의 DNA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246∼247쪽)
자연선택설은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생물 자신이 아니라 환경이 결정한다는 이론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선택받은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생물은 도태되는 과정을 거쳐 지금의 지구 생태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생명체의 형태와 기능은 물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이 이런 자연선택을 통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고,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이 진화론의 핵심입니다.(248∼249쪽)
이렇게 보면 지금의 지구 생태계는 우연과 우연의 연속이지 어떤 필연의 결과는 아닙니다. 다시 지구가 생긴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동물과 식물이 생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동식물은 물론 벌레와 같은 미물들도 매우 소중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이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그리고 빅뱅 이후 138억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저 먼 우주 어딘가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있어서 그곳에도 생명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이 지구의 생명, 그것이 비록 아메바 수준의 미물일지라도 지구의 생명과 같은 생명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지구의 넘쳐나는 생명이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것도 우주적으로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생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당신 의도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당신이 지금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은 당신의 의도라기보다는 당신의 결정이 당신이 직면한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달랐다면 당신은 지금과 같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249쪽)
<진화하는 국회의원>
이것도 다윈의 자연선택설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중략)
핀라드에서 자가융에 운전기사를 둔 국회의원이 어쩌다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국회의원이 다시 당선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핀란드의 국민은 국회의원은 자기들이 낸 세금이 그 국회의원 운전기사의 월급으로 나간다고 생각해서 다시는 표를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는 국회의원이 살아닙고, 운전기사를 둔 국회의원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과 핀란드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두 나라의 사회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회의원을 비난하지만, 사실은 그 국회의원들은 우리나라라는 환경에 잘 적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표를 준 국민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국민이 변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국회의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지역구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나라의 균형 발전에 애쓰는 것보다 당선에 유리한 한 애국적인 국회의원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베리아 호랑이와 인도의 벵골 호랑이가 다른 것이나, 핀란드 국회의원과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다른 것은 같은 이치입니다.(257∼258쪽)
일본 시모노세키의 한 어촌에는 ‘사무라이게’라는 특별한 게가 살고 있습니다. 이 게는 등 모습이 사무라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곳에는 사무라이 얼굴을 닮은 게가 많을까요?
다윈의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부가 어쩌다가 게를 잡았는데 사무라이 비슷한 등껍질을 한 게였다고 합시다. 사무라이를 존경하는 그 어부는 차마 그 게를 잡아먹지 못하고 다시 바다에 놓아주었습니다. 이런 일이 오래되다 보니 그 지역에는 사무라이 모습의 게는 살아남고 그렇지 않는 게는 잡아먹혀 버렸습니다. 나아가 더 사무라이처럼 생기면 생길수록 잡아먹힐 가능성이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게들은 점차 더 사무라이와 닮은 쪽으로 진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도 사무라이게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지금과 같은 부패한 모습으로 변해온 것입니다. 시모노세키 어촌의 게가 점차 사무라이를 닮아가듯이 말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시모노세키의 어부이고,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바로 사무라이게인 것입니다. 사무라이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듯이 우리나라 국회의원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잘못은 그 어부에게 있고,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을 뿐입니다. (259쪽)
진화의 주체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환경이 진화의 주체입니다. 환경이 변하면 생물집단도 변합니다.(중략)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모든 변화에도 진화의 이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259쪽)
여자의 치마가 길었다 짧았다 하는 것이나, 넥타이 폭이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것이나, 다 진화하는 모습입니다. 치마나 넥타이가 스스로 그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 때문입니다.(260쪽)
진화의 무기는 시간입니다.(264쪽)
<창조냐 진화냐>
이 세상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만든 것인가요? 이 누군가는 물론 신을 의미합니다. 이 논쟁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논쟁이자 지금도 계속되는 논쟁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은 논쟁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만, 사람들은 아직도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아마도 기독교인들일 것입니다.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자연을 보면 참 오묘합니다. 자연 풍광만 보아도 오묘한데 그 속에 사는 생물들을 보면, 그리고 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얼마나 다양하고, 오묘하고, 기이합니까? 나아가 생물, 아니 인간의 신체구조만 보아도 오묘함이란 놀라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오묘한 자연이 그냥 저절로 생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어떤 존재가 특별한 의도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독교인들에게 대자연의 신비함과 생명의 오묘함은 신의 존재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로 보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성경에,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창세기부터 지금까지를 성경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계산해보면 이 우주의 나이는 1만 년도 채 안 되는 6000여 년이라고 합니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최소한 40억 년이 넘고,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성경의 결론과 과학자의 결론이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창조론자들은 지구의 지층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노아의 홍수 때 한꺼번에 만들어졌고, 지구 나이를 측정하는 방사능 연대 측정법은 방사능 반감기가 옛날에는 달랐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우주의 나이도 초창기의 물리법칙이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에 지금의 물리법칙으로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6000년에 근접하는 시간이 우주의 나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여기서 이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주장이 과학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창조론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완벽하지 않기는 진화론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진화론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니, 진화론 뿐인가요? 모든 과학 이론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상대론도 양자론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론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직도 과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조론은 어떤가요? 창조론은 진화론과는 달리 틀릴 수가 없습니다. 틀려서는 안 되는 이론입니다. 창조론은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과정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일 수 있으나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론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자는 어떤 고정관념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과학이 아닙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신god’을 도입하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신은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한 만병통치약입니다. 신이 했다고 하면 어느 누가 의의를 제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지전능한 존재가 신인데 신이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을까요? 신이라는 존재를 가정하고, 그 존재가 전지전능하다고 정의하면 과학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신을 믿는 과학자일지라도 현상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과 마주치더라도 그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해서 이 지구에 현재와 같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났을까에 관한 의문을 가지고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과학자들의 작업에 진화론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론자들은 창조되었다는 불변의 가설에 맞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론이 과학의 교과서에 들어가 있을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창조론은 옳을지 모르지만 과학이 아니고, 진화로는 틀릴지 모르지만 과학이다.”라고 말입니다.(265∼268쪽)
천문학이란 지구가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알아가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이었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태양은 은하계 변방의 작은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문학은 우리에게 지구가 우주에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구가 이 우주에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 생명이 있는 행성이 지구뿐일까요? 당연히 우주 어디엔가 생명이 있을 것이고, 생명이 있다면 지능을 가진 생명이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중에는 우리보다 뛰어난 문명을 이룩한 존재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보지도 못한 외계인의 존재를 과학자들은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냥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우주를 관측하여 알아낸 많은 증거로부터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통해 도달한 믿음입니다.(271쪽)
<정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뇌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가 아닐까요? 기억은 존재하고 있던 것들에서 만들어지지만,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소유권이 그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모든 고통은 환상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순간 가시에 찔린 손의 통증도 사실은 뇌가 느끼는 느낌일 뿐이지 손의 아픔은 아닙니다. 뇌의 환상통일 뿐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이나 헤어진 애인에 대한 아픔도 헤어진 애인에 대한 아픔도 환상통입니다. 가버린 애인이나 잃어버린 자식이 아픈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애인이나 자식을 생각하는 내가 아픈 것입니다. 나의 뇌가 아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아니라 애인이나 자식의 아픔으로 느끼게 됩니다. 모두가 환상통일 뿐입니다.
모든 고통이 환상통이기에 역설적이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고통이 사물 자체에 있다면 사물을 제거해버리면 고통은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인간의 마음에 있기에 고통의 원인인 사물을 제거한다고 해도 뇌가 기억하는 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없앨 수도 없습니다. 모든 고통은 환상통이고, 환상통은 마음의 병이기에 없애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마음먹는 일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요?(309쪽)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니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이 아브라함에게는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아브라함이 들었다는 하느님의 음성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판단은 누가 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그 음성에서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했더라도 그것이 정말 하느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속삭임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판단은 결국 아브라함 자신이 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판단과 그 명령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결정한 것이므로 결국 책임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르트르가 이런 논증을 하는 배경에는 모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326쪽)
그렇다면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 나의 정신인 내 영혼이란 존재하는 것일까요? 내가 영혼이라는 존재를 잘못 정의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혼은 육체의 작용으로 생기는 그런 정신이 아니라 정신을 지배하는 더 상위적인 존재라고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할까요?
지금 내가 말하는 정신이란 육체, 더 구체적으로 뇌의 활동으로 생기는 현상입니다. 뇌가 없어지면 정신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육체에 기반을 둔 그런 정신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정신, 육체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정신, 그런 것이 정말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란 무엇일까요? 물질인 이 세상을 창조했으니 그것은 물질은 아닐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면서 만물을 창조했으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이 아닐까요? 육체가 없어도 존재하는 그런 정신,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이 아닐까요?
하지만 성경 말씀이 영혼이라면 그것이 우주적 영혼일 수는 있어도,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의문은 자꾸만 의문을 낳게 됩니다. 육체 없는 영혼, 육체 없이 하는 사랑처럼 공허합니다.(338쪽)
<인공지능의 영혼>
유발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의 특징을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믿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영혼’입니다. 물질 현상을 다루는 과학에서 보면 영혼은 분명히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기에 과학의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과학책을 들여다보면 운동량, 에너지, 힘 등이 나옵니다. 이들은 실체가 아니라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관념일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과학책은 이런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은 운동량이나 에너지와 같은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 물질이 아니면서, 그렇다고 관념도 아니면서 이 우주에 정말 존재하고 있는 그런 영혼 말입니다.(339쪽)
육체와는 무관하면서, 말하고 울고 웃고 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영혼이라고 한다면 인공지능이야말로 진정한 영혼이 아닐까요?
인공지능의 영혼인 프로그램은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과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인간의 두뇌와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인간의 두뇌인 뇌 신경망은 그것을 구동하는 다른 무엇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신경망 자체가 만들어내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신경망이라고 할 수 있는 전자회로가 있지만, 회로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회로를 구동시키는 프로그램이 별도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혼과 인공지능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을 영혼이라고 하면 인공지능의 영혼이 인간의 영혼보다 더 영혼스러운 영혼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육체에서 분리하기는 매우 어렵지만(불가능하지만), 인간지능의 영혼인 프로그램은 이 로봇에 심을 수도 있고 저 로봇에 심을 수도 있습니다. (340∼341쪽)
태초(太初), 태종(太終) 그리고 무(無)
<종교의 종말>
종교의 대상인 신은 정말 존재할까요? 제1장에서 논의한 것과 같이 신이 원자나 분자처럼 텍스트적인 존재라면 정말 존재하는지 학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텍스트적인 존재가 아니라 콘텍스트적인 존재라면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콘텍스트가 신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신의 존재는 신이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에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신도 종파에 따라서 신의 모습이 다르고, 같은 종파라도 믿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신은 실체적 존재라기 보다는 관념적 존재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존재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칼 세이건은 이러헥 말했습니다. “하늘에 앉아서 종달새의 수를 헤아리는 수염이 달린 백인 모습의 신은 참 어처구니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신을 우주를 다스리는 물리법칙의 집합체라고 한다면 그런 신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은 감정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중력 법칙에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420∼421쪽)
인간이 신을 믿는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심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현상의 원인을 찾으려 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아둔한 두뇌로 모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주는 광대무변하고 세상은 복잡합니다. 이런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도피처가 신입니다. 신은 정의상 무소불위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안 되면 신이 개입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면 되니까요.
과학이 끝나는 곳에 신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신의 등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말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과학자입니다. 과학자도 자기 마음속에는 신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논문에는 절대로 신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원시사회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어갔습니다. 이런 죽음을 보면 당연히 그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이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원인을 알 수 있었겠어요? 불가능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그 원인이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장난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원시사회에서 그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의 장난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귀신이 콧구멍, 귓구명으로 들어와서 역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귀걸이 코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그것도 부족해서 굿을 하지 않았을까요?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굿 대신 병원을 찾고, 코걸이 귀걸이 대신 백신을 맞고 치료제를 먹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파란만장이나 우여곡절이라는 말이 어떤 불행한 사람의 인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실패와 고통의 연속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엇에라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있는 것은 가족이나 친구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도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배척당하거나 배신당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의지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렇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나약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신이 정말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관계없이 신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 수 있습니다. 종교가 하는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내 앞에 어떤 여자 신도가 연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갈급한 마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교회가 없었다면 저런 고통을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신처럼 언제 어디서나 만나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인간, 특히 나약한 인간, 의지할 곳을 찾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저 사람의 간절함까지 폄훼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어떤 특정 종교나 종파는 수없이 나타나고 없어질 것이지만 종교는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420∼422쪽)
<우주의 종말>
몇천, 몇만 년 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수백억, 수천억 년 뒤의 이야기입니다. 이 우주도 결국 죽음을 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우주가 사라져도 다중우주고 있습니다. 그 다중우주도 결국에는 사라져버리겠지요. 하지만 급팽창 이론에 따르면 그 다중우주는 사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가 사라지는 날이 오게 될까요?
T.S. 엘리엇의 말처럼, 세상은 뱅bang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흐느낌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의 1925년 시 「허깨비 인간 The H0llow Men」에 나오는 ‘그대를 위한 왕국 for thine is the kingdom’의 마지막 구절로 이 장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끝나는 방식이라네
뱅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r a whimp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