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사랑은 교회 오빠였다. 이제는 너무 식상하고 진부해서 말 그대로 클리셰(cliche)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많은 이들의 첫사랑이 교회 오빠겠지만 내게도 14살 적 교회 오빠와의 추억은 어린아이가 달달 외우고 있는 그림책처럼 새겨져서, 여전히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고 두근거리게 되는 그런 일이다.
목사님 둘째 아들인 오빠가 큰 키로 멋지게 농구를 할 때면, 겉옷만 맡겨 줘도 영광이었다. 교회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백 걸음도 안 되게 가까웠는데, 오빠는 가끔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가며 ‘찹쌀~떡, 메밀~묵’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 들리면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는지. 기타를 치며 유행하는 복음성가를 부르면 내 눈에는 주님보다 교회 오빠였다. 그렇게 즐겁고 행복했지만, 18살에 교회를 옮기면서 보지 못한 그 오빠를 그 이후로 한번도 찾지 않았다. 우연히도 만나지 않았다. 미니홈피가 유행해도, 지금처럼 소셜네트워크(SNS)가 일상이래도, 구글 검색창에도 그 이름을 넣어 보지 않았다. 추억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기도 했지만,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끝없이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늘소년 김영준은 내 14살 추억 속의 교회 오빠가 20년도 더 지난 지금 이렇게 살고 있었으면 하는 바로 그 모습의 삶을 살고 있다. 누군가에겐 첫사랑이었을 목사님 큰아들, 교회 오빠가 이렇게 멋지게 살고 즐겁게 놀고 있음을 소개하게 되어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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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준 |
노래하는 교회 오빠 김영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다니는 교회는 갓난아이까지 포함해도 100명이 안 되는 작은 교회인데, 가수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방송국 아나운서도 있고, 한국노총 여성단체 지국장도 있고, 유명한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모두 교회에서는 친한 집사님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색하고 인터뷰 좀 하자고 하니, 유명한 분들이 많은데 왜 하필 자기냐고 물었다. 글쎄다. 젊은 총각과 데이트하고 싶은 아줌마의 사심일까? 그러나 아픈 아들을 대동하고 서울 노원역 백화점 지하 커피숍에서 만났다. 옆에서 혼자 팽이 돌리면서 노는 아들을 내버려 두고 분위기 있게 신앙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최근 EP 앨범 <하늘소년>을 내고 공연을 많이 하나 봐요. 그런데 각종 기관 소식지에서 자주 보여요. 집회 전문 가수인가요?
홍대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요청이 오면 집회에 가요. 여러 단체가 돌아가면서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집회에서 공연을 하는데, 오 집사님(한국노총 지국장)이 요청하셔서 이번 주에는 거기서 공연하고 왔어요. 아, 포이동 화재 1주기 기념 공연이 있어서 거기도 다녀왔어요.
전에는 달싸밴드로 활동했었는데 요즘은 솔로 활동만 하나요? 이참에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됐는지 좀 들려주세요. 음악과의 인연이랄까 뭐 그런 스토리.
학생 때 컨티넨탈싱어즈에서 활동했어요. 그 때 친구들이랑 NEOPOP(네오팝)이라는 밴드를 한 게 처음이죠. 그리고 나중에 그 친구들 중 몇몇이랑 달싸밴드를 시작했어요. 제 노래 중에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고 있는데 그걸 줄여서 ‘달싸’밴드라고 했지요. 보컬을 하던 친구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을 하고 싶다고 나갔어요. 그때 홍대에서 계속 공연 중이었는데, 이 대신 잇몸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으니까 곡을 쓰던 제가 그냥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또 괜찮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노래를 하게 된 거죠. 드럼을 맡았던 친구가 결혼하면서 음악으로 먹고살기는 힘드니까 결국 드러머도 나가고, 달싸밴드는 해체했어요. 지금은 컨티넨탈싱어즈 할 때부터 친구인 교회 강도사님이랑 둘이서 밴드 꼬꼬뮨을 만들었어요. 꼬꼬면 패러디 같죠? (웃음) Cooperate(협동하다)의 co(꼬)랑 꼬뮨(commune, 공동체)을 합쳐서 꼬꼬뮨이에요. 아직 건반이나 퍼커션이 없어요. 퍼커션 주자를 찾고 있고요. 포이동이나 정신대 할머니들 공연에는 꼬꼬뮨으로 가서 활동하고 있지요.
하늘소년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계기가 됐다거나 전환점이 됐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은 목표 지점에 꽂혀 있는 깃발 같아서 현재는 우왕좌왕하지만, 목표 지점을 확인하고 걸어갈 때면 결국 그 깃발 아래 갈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선생님한테 반항하다가 정학을 한 번 맞은 이후로 공부에 흥미를 잃고 헤매게 된다. 당시 컴퓨터를 하면 그래도 미래가 밝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산원에 다니게 되는데, 거기서 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메탈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우연찮게 음악을 하게 되고 홍대에서 공연도 하는 등 신나게 음악을 하던 차에 교회 안에 있던 잡지 <낮은 울타리>를 보게 된다. 문화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잡지인 터라, 메탈 음악은 사탄의 음악이라는 주장이 쓰여 있었다. 과감히 메탈 음악을 버리고 밴드도 나와 버렸다. 그리고 동생이 먼저 들어가서 활동하던 컨티넨탈싱어즈에 기타로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 거기에 있던 지휘자 형이 자신의 앨범 작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녹음 작업을 처음 하게 된 것이다. 누가 봐도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한 것처럼 보이는 이 걸음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하늘소년이라는 깃발 아래로 이끈 것이다. 바로 이 걸음걸이들을 뒤돌아보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섭리’다.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영국 IPC(국제장로교. 김영준과 내가 함께 다니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인 박득훈 목사가 이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다)에서 목사 안수도 받은 어엿한 목사이기도 하고 인디밴드계의 신인이기도 한 하늘소년 김영준의 다음 깃발은 무엇일까.
하늘소년의 사랑
음악을 들어 보면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향수 짙게 풀어내는 듯하면서, 사회적 이슈들을 담아서 풍자하고 있어요. 그래서 뭔가 아주 서정적인 그림책 같으면서 따뜻한 시민 활동가의 미소가 동시에 엿보이는 묘한 매력이 느껴져요.
CCM이라는 게 사회적인 이슈는 잘 품지 못하니까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학대학원 다니면서 배운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려고 노력 중이고요. 본디 저의 음악적 감성이 펑키한 발랄함과 서정성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정서를 내러티브로 풀어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죠. 그래서인지 디자인하는 친구가 제 노래를 스토리로 구성해서 20컷 만화로 그려 줬어요.
하늘소년은 핸드폰에 저장된 애니메이션을 한 장씩 넘기면서 노래들을 엮어서 구성한 스토리를 보여주었다.
(내레이션)옛날 옛적, 멀고 먼 어느 별에서 한 소년이 지구로 오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그 별의 왕자였는데, 지금은 기억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곡은 그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노래)
넓은 바다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
높은 하늘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소년
오랜 옛날 마법에 걸린 작은 왕자
기억 잃어 돌아갈 수 없는 슬픈 소년
파란 하늘 바라보면 마법이 풀려
다시 돌아갈 수 있어 누군가의 그 말에
그날 이후 일과가 되어 버린 하늘
시간 흘러 점점 지쳐 가는 하늘소년
이젠 남은 기억마저 희미해져 버리고
하늘 보는 것마저 조금씩 잊혀져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하지만
저 하늘 바라보면 가슴 뜨거워지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 내가 시작된 그곳
저 파란 하늘 너머 날아가는 꿈꾸며
- ‘하늘소년‘
김영준은 자기 스스로를 하늘소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자기가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것과 철이 안 든 소년 같아서라고 했다. 그런데 언젠가 교회에서 야외 예배를 드릴 때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노래를 부르는데 하늘소년보다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같았다. 나는 꽃과 대화를 나누던 어린 왕자나 여우와 친구가 된 어린 왕자도 좋지만, 여러 별을 돌아다니면서 하루 종일 계산만 하는 사람이나 매일 가로등만 켜고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는 어린 왕자가 더 좋았다. 생명 본연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이상한 사람이든 이상한 어른이든 늘 한결같았으니까. 그의 노래도 그렇다. 노래 구석구석 한국 사회의 이상한 모습, 아픈 모습을 한결같이 애정을 가지고 토닥여준다. ‘두꺼비 마을’에서는 100마리의 두꺼비와 100채의 집이 있는데, 27마리가 99채의 집을 갖고, 40마리는 집이 없다. 그리고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월세 줄게 전세 다오”하고 노래 부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에서는 “많이 먹으니 빨리빨리 키우고 / 돈 벌자니 약 먹여 키우고 / 사료 모자라 소가 소를 먹고 / 소가 사람을 먹고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네 / 다 죽고 먹을 소도 없다네 / 소들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 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정말 미안해”라고 노래한다. ‘고기를 좋아해서 정말 미안해’라니 너무 어여쁘지 않은가. ‘광우병 파동’이니 ‘미친 소 너나 먹어라’ 같은 거친 구호가, 어린 왕자의 입에서 나온다면 딱 이럴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가끔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들을 만날 때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남자의 첫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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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준 |
노래 가사 중에 사랑 이야기들은 다 본인의 경험이죠? 가사가 참 예뻐요. 첫사랑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우리가 노원에서 만났잖아요. (인터뷰 장소가 노원이었다.) 7년을 사귄 친구랑 주로 만난 데가 여기 노원역이에요. 군대 다녀와서 막 복학했을 땐데요. 그 때 학교에서 모집하는 CCM 밴드에 기타로 들어갔어요. 그 팀이 여름 수련회 같은 데 초청받아서 집회에 가게 됐는데, 건반 등 다른 연주 팀원을 더 구해 여학생 3명이 합류했어요. 그 멤버 중 한 명이었죠. 연습도 같이 하고, 지방에 집회도 같이 다니면서 친해졌어요. 사귀자고 맘먹었을 때는 집에 불러서 볶음밥도 해 주고, 과일도 썰어 주고, 케이크랑 초는 차마 쑥스러워서 못 하겠고, 꽃 사 주면서 사귀자고 했어요. (꺄오~, 소리가 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랬더니 다음날 그 여자 친구가 저한테 꽃을 주면서 오케이 했죠. 그 당시 같은 팀의 형이 이 친구를 3개월 동안 온갖 정성을 들이면서 작업 중이었는데, 그 형도 이름이 저랑 같았어요. 두 영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저를 선택한 거죠. (유후~, 이 소리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둘이서 캠퍼스 커플이기도 하고 집도 가까워서 늘 붙어 다닌 게 좋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둘 다 과에서나 어디서나 친구를 사귀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좋아서. (웃음) 제가 군대에서 상병 때, 어느 날 가을바람이 부는데 가슴을 뻥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시리고 외롭더라고요. 안 되겠다 제대하면 바로 연애를 하리라 그랬거든요. 그런 배경에서 시작한 연애인데다가 저의 첫 연애여서 만 7년, 햇수로 8년을 사귄 거죠. 결혼하려고 프로포즈도 했는데 제가 음악을 해야 하니까 결국 진로 고민 때문에 서로 엇갈렸어요. 제 노래 ‘confession’이 바로 그 여자 친구에게 바치는 노래예요. 당시 MD로 만들어서 녹음해서 줬죠. (크아~, 역시 감출 수 없는 감탄)
내가 정말 미안한 건 나 가진 것 모두 다 주는 그런 사랑 하지 못했던 거야
내가 정말 아파한 건 속마음과 다른 말로 널 슬프게 했었던 거야 음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 결심했던 마음은 희미해지고
이제 익숙해진 초라한 모습 다시 돌아갈 수 없나요 나 이제
그대 사랑 내 안에 다시 또 찾아와 메마른 나의 마음 위로해 줘 감사해
어린 나의 생각도 그대 넓은 사랑에 깊은 사랑에 가려 보이지 않게 돼요
이제 남은 시간들 그대 위해 날 비워 날 위해 그댈 채워 살아가길 원해요
지난 눈물을 닦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조건 없는 사랑 위하여 함께 살아가요
마지막 눈감는 날까지
- ‘confession’
앞으로의 계획은?
공연 여행을 할 계획이에요. 7월 마지막 주쯤에 제주 강정마을도 가고 원자력발전 반대 집회도 가고, 삶의 현장을 찾아가서 공연을 하려고요. 건반이랑 퍼커션이랑 보강해서 어쿠스틱 밴드로 돌아다닐 거에요. 전기도 필요 없고 짐도 가볍고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하려는 음악이랑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홍대에 공연하던 카페에서 매월 첫째, 셋째 주에 벼룩시장을 해요. 벼룩시장 후에는 공연이 있고요. 그 카페 주인장이 저랑 마음도 잘 맞고 의미 있는 일들을 여럿 계획하고 있어서 거기에 함께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를 시작해 보려고 해요. 5명 정도의 멤버로 준비 중인데요. ‘대안적인 교회 공동체’로 같은 지역에서 공동 거주하면서 수도권 도시 공동체로 시작하다가 장기적으로는 도농 교류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시작한 건 올해 초예요. 연구 공간 수유너머와 같은 공동체 모델을 여럿 보면서 연구하고 있어요. 일단은 문화 콘텐츠를 생산해 보자는 생각으로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고요.
과거 밴드활동을 할 때는 당장 곡이 필요하니까 막 만들곤 했는데, 이젠 그때처럼 쉽게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다중지성연구원에서 오철수 선생님한테 시를 배웠다고 했다. 그때 선생님이 투쟁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며 대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삶과 연관될 때 반응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단다.
시를 보면 절제할 때 나오는 힘이 있잖아요. 대중한테는 은유적이지만 시 같은 노래가 와 닿는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데 그 생각을 하니 곡을 쉽게 못 쓰겠더라구요. 그나마 가장 최근에 쓴 곡은 오철수 선생님이 원전에 관한 시를 하나 주셔서 그 시로 노래를 만들었어요.
너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어 내게
귀가 없다고 마음대로 했어 내게
너보다 오래 더 오래 여기서
일하고 사랑하고 꽃피고 노래한
나무에게 아이에게 꽃에게
영원한 미래에게 넌 묻지 않았어
봄바람 오는 소릴 듣고 오늘 꽃피고
봄바람 가는 소릴 듣고 내일 꽃지고
내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어 너는
입이 없다고 네 멋대로 했어 너는
저기 후쿠시마에서 바람은 불어오는데
저기 천년을 떠도는 바람은 불어오는데
너보다 오래 더 오래 여기서
일하고 사랑하고 꽃피고 노래한
나무에게 아이에게 꽃에게
영원한 미래에게 넌 묻지 않았어
- ‘넌 묻지 않았어’
하늘소년을 인터뷰하기로 하면서 시작부터 내 마음은 첫사랑 교회 오빠와의 추억을 더듬고 다녔다. 나랑 비슷한 이름을 가졌던 그 오빠는 본인이 열심히 만들었던 사인을 내게 주었다. 이 사인을 쓰면 언젠가 같은 사인을 보고 만나지 않겠냐며 웃었더랬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사인을 쓰지 않는다. 그 오빠는 목사님의 둘째 아들이었고, 그 목사님은 교회를 본인 소유로 하려던 과정에서 장로님들과 싸움이 났다. 결국 교회는 두 개로 쪼개지고, 서로를 비난하며 오랜 시간 동안 아팠다. 교회를 떠나던 날 혼자 얼마나 울었던지. 비극 속의 여주인공처럼 울었다. 지금은 커서 세상이 얼마나 아픔으로 가득한지, 싸움과 전쟁으로 얼마나 얼룩져 있는지 안다. 그래서 작은 바람이 있다면 부디 어딘가에서 내 첫사랑 교회 오빠가 멋있게 살고 있어 주길. ‘천년을 떠도는 바람 속에서’ ‘나무와 아이와 꽃에게’ 이야기를 걸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기를. 어린 왕자도 그러지 않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중략)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라고. 그 어려운 일 잘하며 살아가고 있기를. 나도 그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