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기념관에서 둔덕기성을 넘어서 거제대교를 건너 통영으로
20210929
남파랑길 27코스를 시작한다. 지난 번 26코스를 아침 이른 시각에 청마기념관 앞에서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여 청마기념관을 관람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이번에도 아침 이른 시각에 청마기념관 앞에서 27코스를 진행하여 결국 청마기념관과 생가를 관람하지 못하고 출발한다.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기념관은 다른 기회를 얻어 관람할 수밖에 없다.
이번 27코스의 중요 지점은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기념관, 둔덕기성, 견내량, 거제대교라고 생각한다. 둔덕기성에서 거제와 통영을 조망하며 신라시대의 석성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특히 고려 의종이 이 둔덕기성에 유폐되어 있었기에 폐왕성이라 불린다는 것과 복위운동을 전개하다 실패하여 살해되었음을 알았다. 청마기념관 위쪽에 공주샘터는 의종의 딸이 샘물을 길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임을 지난 26코스를 걸으며 알았었다.
또 하나,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고려가요 정서의 '정과정곡' 창작지를 거제도로 추정하여 둔덕기성 입구 앞에 '정과정곡' 시비가 세워져 있음도 새롭게 알았다.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거제로 이배된 정서가 유배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가는 때와,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폐위되어 의종이 거제로 유폐되어올 때, 정서와 의종이 거제 견내량 근처에서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때 정서는 원망과 하소연의 이 노래를 의종에게 불렀을 것이라는 향토학자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정과정곡' 시비를 둔덕기성 입구에 세워 두었다. 과연 '정과정곡' 창작지는 어디가 맞을까? 동래일까? 거제일까? 부산 수영구 망미동 정과정 유적지에도 '정과정곡' 시비가 1985년에 이미 세워져 있다.
남파랑길 27코스는 둔덕기성까지 걷기가 어려울 뿐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길과 평지를 걷는 길이어서 쉽다. 신거제대교 아래에서 견내량 건너 통영타워 전망대를 바라보며, 15코스를 걸을 때 신거제대교를 건너던 일을 추억한다. 언제였지?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거제대교에 올라섰다. 거제대교는 신거제대교와 나란히 통영과 거제의 견내량 위를 이어준다. 거제대교를 걸어가며 바다와 산과 마을을 조망하는데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견내량과 한산도 앞 바다, 조선 판옥선과 왜선의 대열이 환상된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에 따라 판옥선 대열이 왜선을 격침시키는 장면이 펼쳐진다. 해간도 섬에 승전의 깃발이 나부끼고, 승전의 북소리가 멀리 미륵산으로 울려 퍼진다. 걸어가는 길 앞 통영의 삼봉산이 이 환상을 내려보고 있다. 오전의 가을 햇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드디어 거제대교를 건너 거제와 작별한다. 거제 구간에서의 추억들이 명멸한다. 지난 6월 23일 거제도에 처음 발을 디딘 뒤 3개월이 지났다. 그 기간 동안 통영과 거제를 오가며 남파랑길 15코스에서 27코스까지의 거제 구간을 마침내 끝낸다. 거제여, 미처 만나지 못한 것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안녕! 거제대교 통영 입구 신촌버스정류장에서 27코스를 끝낸다.
출생기(出生記) - 유치환(1908~1967)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줏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사날밤 열 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사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 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班)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
정과정곡(현대어 풀이) - 정서(?~?, 생몰 미상)
내가 임을 그리워하며 울고 지내니
산에서 우는 접동새와 내 신세는 비슷합니다.
나를 모함하고 헐뜯는 말들이 사실이 아니며 거짓이라는 것을
아! 지는 달과 새벽별은 아실 것입니다.
죽어서 넋이라도 임과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 내 잘못이라고 우기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나는 잘못도 허물도 전혀 없습니다.
뭇 사람들의 말은 모두 나를 모함하는 말입니다.
사라지고 싶도다.
아! 임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아, 임이시여!
마음을 돌려 내 말을 들으셔서 나를 다시 사랑해 주소서.
둔덕기성은 맨 오른쪽 위 나무들이 촘촘히 자라고 있는 곳이다.
팽나무는 375년 묵은 오래된 古木이다.
앞에 보이는 산봉은 안치봉인 듯
처음에 둔덕기성이 안치봉에 있는 줄 알았다.
오른쪽 축사 지붕 뒤쪽에 나무들이 우거진 둔덕기성이 보인다.
오른쪽 뒤 산봉은 황봉인 듯하고, 그 왼쪽으로 내리벋는 산줄기 중앙에서 조금 왼쪽 뒤에 소나무 한 그루와 그 왼쪽에 소나무가 우거진 낮은 언덕이 둔덕기성으로 보인다.
둔덕기성이 있는 산봉 이름이 우두봉인 듯하다.
이곳에서 오른쪽 둔덕기성을 살피고 남파랑길로 내려선다.
왜 '정과정곡' 시비를 이곳에 세웠을까? 왕의 총애를 받던 정서가 고려 의종이 즉위한 뒤 참소를 받아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기간은 총 19년 6개월이었다. 동래에서 5년 10개월, 거제현에서는 13년 8개월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정과정곡'은 어디에서 창작했을까? 부산 수영구의 '정과정곡' 시비는 부산을 창작지로, 둔덕기성의 '정과정곡' 시비는 거제를 창작지로 보고 있다. 의종은 1170년(의종24년) 정중부 등이 무신란을 일으켜 거제도로 쫓겨와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여 살해되었으며, 정서는 무신란이 일어나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한 해 1170년에 귀양에서 풀려났다. 정서가 의종 임금을 그리워한 '정과정곡' 시비를 이곳에 세운 것은 의종이 둔덕기성에 유배되어 오고, 정서는 유배지에서 풀려 개경으로 돌아가며 거제도 오량리에서 만났었다는 추정에 의한 듯하다. 의종 임금이 폐위되어 머물렀었다고 하여 둔덕기성을 일명 '폐왕성'이라 이른다고도 한다.
시래산에 가로먁혀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보이지 않는다.
왼쪽에 솟은 산봉은 산방산, 중앙 맨 뒤쪽 형제봉처럼 솟은 산봉이 노자산, 그 오른쪽에 구름에 가린 산이 가라산
폐왕성은 둔덕기성을 이르는 듯. 왼쪽은 안치봉 등산로, 2.4km 지점에 안치봉이 있다.
거제지맥 시래산에서 둔덕기성의 우두봉과 황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가로질러 임도를 따라 걷는다.
앞 중앙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산봉에 둔덕기성이 있는 듯
견내량과 바다 건너 통영시 통영타워가 보인다.
바다 건너 통영의 삼봉산, 이봉산, 일봉산이 보인다. 남파랑길 27코스 종착지는 거제대교 통영 입구의 신촌마을 버스정류장
거제대교를 건너 통영으로 진행하는데 앞 계단을 올라 거제대교 동쪽 보도를 걸어도 되는데, 남파랑길은 거제대교 아래를 돌아서 뒤쪽의 계단으로 올라가 거제대교 서쪽 보도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왼쪽에 해간도와 해간도연륙교, 뒤쪽 맨 끝에 미륵도의 미륵산이 보인다.
해간도와 해간도 연륙교 그리고 맨 뒤에 미륵도의 미륵산 그리고 맨 뒤 왼쪽에 흐릿하게 솟은 산봉은 한산도의 고동산
견유방파제 건너편이 견유마을이고 견유방파제 왼쪽 위가 새로 생겨난 신촌마을인 듯하다.
27코스의 끝지점이며 28코스의 시작지점인 신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27코스를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