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교구
천진암 순교성지
-한국천주교의 새싹이 돋은 발상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성지 연락처 031-764-5994
일반적으로 한국천주교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이곳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는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일신 형제와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학자들이 이벽과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발판을 이 모임에서 준비하였다.
천진암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움이 트고 싹이 돋은 신앙의 고향이며 원적지이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자생적인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이다. 기념 성당을 비롯해 연구소, 박물관, 신학연구소, 강학당, 피정의 집 등이 이곳에 있다. 앞으로도 계속 한국천주교의 발전에 주춧돌이 될 성지이며 디딤돌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정하상 성인의 자취를 따라 그 묘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정하상 바오로 집안에는 대를 이어 순교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정하상 바오로의 부모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정하상 바오로의 이복형 정철상 가롤로, 누이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등. 천진암성지 입구에서 바라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형 십자가다. 이 십자가까지 300미터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대성당 터가 운동장처럼 펼쳐진다.
거룩한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는 천진암 순교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싹이 돋고 자라온 묘포苗圃와 같다. 이 신앙의 못자리는 지금 미완의 성지이다. 그리고 그 완결이 언제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사의 가장 처음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에 있을 성지일지도 모른다.
토속음식점 단지라고 쓰여 있는 계곡 사이로 여러 식당 간판을 바라보며 산길 위쪽으로 계속 오르면 대형 십자가를 보게 된다. 휴일에는 행락객들의 차량이 넘친다.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에 대하여 언급해보면 그의 묘가 있는 소재지는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남동 정수장 뒤편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본관은 평창이고 아버지는 동욱, 이기환의 누이를 어머니로 하여 1756년 서울 죽림동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자술子述’, 호號는 ‘만천蔓川’이라 하였다. 이승훈은 재주가 뛰어나 열 살 때부터 글에 익숙했고 24세 때에는 진사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벗들과 천주교를 연구하여 믿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서 그라몽 신부에게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 세례를 받았다. 그 후 1784년에 귀국하여 동지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서울 명동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을 빌려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이듬해에 발각되어 모두 해산되었다. 그 당시 한때 마음이 흔들렸으나 2년 뒤에는 마음을 돌려 권일신을 주교로 삼고 스스로 신부 행사를 하다가 의심이 생겨 이를 그만두고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부를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 후 평택 현감을 3년 동안 지내다가 1791년에 일어난 박해로 그 벼슬을 빼앗겼고, 1795년에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일이 발각되어 예산으로 귀양 갔다. 1801년 박해가 시작되자 붙잡혀 2월 26일(음력)에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45세의 나이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인천시 만수동 산기슭 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었으나, 1981년 천진암으로 옮겨져 조선교구 설정 150년을 기념하여 이벽, 정약종, 권철신 형제와 함께 벗하면서 무덤에 누워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그에게 매우 엄격하였다. 왜냐하면 이승훈이 자기의 배교를 철회하지 않았고 통회한다는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제일 먼저 영세한 그는 자기 동포들에게 성세聖洗를 주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순교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지만 순교는 아니었다. 천주교인이라고 참수 당했지만 배교자로 죽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그는 안타깝게도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