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선사시대란 인류가 문자로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기 이전의 시대로 역사시대와 대비되는 용어이다.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의 연구는 대부분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 시대까지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뗀석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 등 다른시대의 유물에 비해 대단히 단순한 편으로 특히 돌을 재료로 하여 필요한 생활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인들이 석기재료로 사용한 돌은 보통 돌이 아닌 입자가 매우 고운 단단한 유리질인데 석기를 타제(打製)할 때 나오는 박편들이 매우 날카로운 날을 갖고 있어 도구나 무기로서 나무나 뼈 보다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뗀석기는 돌로 도구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떼어 낸 방식으로 만든 연장. 산업과 생업, 모든 의식주를 해결 하는데 이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주먹도끼를 들수 있다.
이 주먹도끼가 출토된 강원도 상무룡리 유적은 흑요석(黑曜石)을 포함한 후기 구석기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연대는 약 5만년 전에서 1만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토기> 음식이나 생필품을 담고, 저장하고 운반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무문토기(無文土器) :
음식등을 저장하는 저장용기로 사용하였다.
즐문토기(櫛文土器)
신석기(新石器)에 사용되었다.
음식기나. 식품을 저장하고 담아놓는 저장 항아리로 사용되었다. 그 겉표면의 문양장식으로 기하문(幾何文) /단사선문(短斜線文) , 기하문(幾何文) /점열문(點列文)이 발견되었다.
빗살무늬 토기
빗살 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릇 표면을 빗 모양의 무늬 새기개로 누르거나 그어서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었다. 크게 바닥이 뾰족한 형식과 바닥이 항아리같이 납작한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빗살 무늬 토기들은 바닥이 납작한 것이다. 강원도 춘천 소양강에 인접한 교동의 동굴 주거지에서 사람뼈, 석기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한 점 외에는 모두 구연부(口緣部)에 문양이 새겨져 있어 빗살무늬토기 가운데 구연문토기(口緣文土器)로 분류된다. 문양이 없는 토기는 원통형에 가까운 토기로서 민무늬 토기와 접촉이 있는 빗살 무늬 토기 말기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토기들 중 한 점에는 가로로 구멍이 뚫려 있는 한쌍의 손잡이가 대칭으로 달려 있어 이채롭다. 토기를 빚은 흙은 모두 점토질(粘土質)이고, 표면을 갈아 매끈하게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음식은 담고 저장,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홍도
청동기(靑銅器)시대 토기
음식을 저장 운반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사회생활(社會生活),의례생활(儀禮生活), 선사부장품(先史副葬品)에 쓰여졌다.
붉은 빛의 광택이 나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이다.
단도마연토기, 홍도, 붉은 간토기 등으로 불린다.
이 토기는 정선된 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한 후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마연한 뒤 구워 만든 것으로, 한반도 서북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둥근 바닥의 항아리 모양을 띠는 이 토기의 몸체 어깨부분에는 W자 모양의 검은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몸통에서 수직으로 구연부가 형성되어 있으며, 구연 끝이 외반한다. 경남 밀양군 부북면 전사포리에서 출토되었다.
그밖에 팽이형토기(土器) , 토기장경쌍이호(土器長頸雙耳壺, 신석기) 등이 있다.
<도구>
석검(石劍)
청동기(靑銅器)시대에 쓰여졌던 검으로 주로 군사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종교신앙(宗敎信仰), 민간신앙(民間信仰), 동신신앙(洞神信仰)등에 상징적으로 이용되었다.
마제석촉(磨製石鏃)
청동기(靑銅器) 시대의 화살 촉(鏃)으로서 수렵, 사냥하는데 이용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화살촉에는 슴베가 달리지 않은 것과 깨서 만든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서면 형태가 다양해지고 제작 방법도 세련된다. 화살촉은 형태에 따라 슴베가 달린 것과 슴베가 달리지 않은 것, 버들잎 모양 등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은 실제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무덤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형태와 크기를 보았을 때 실제 무기로서보다는 부장용(副葬用)으로 제작된 듯하다. 이것은 대전 괴정동의 석관묘(石棺墓)에서 발굴된 돌로 만든 화살촉이다. 삼각형 화살촉과 같은 뾰족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표면 가장자리에 모를 내어 입체감을 주었는데, 이는 물체를 잘 뚫고 지나갈 수 있도록 고안된 것 같다. 모두 세 개가 같이 발굴되었다.
다두석부(多頭石斧)
청동기(靑銅器) 유물로써 군사무기나 농사를 짓고 임업을 하는데 이용되었다.
원삼국실
원삼국시대란 기원 전후부터 서기 300년 경까지 삼한시대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는 본격적인 철의 생산과 함께 철제 무기와 농경구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이 국가체제를 갖출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다. 또한 철의 수출과 함께 중국, 북방, 왜 등과의 대외교류도 활발하였다. 원삼국실에는 삼한의 여러 소국이 성장하면서 남긴 집 자리, 무덤 등의 유적은 사진자료를 활용한 패널로 전시되어 있고,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영남, 호남 , 중부 등 지역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어 각 지역별 특징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또한 종래의 민무늬토기에서 중국 한나라의 토기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두드림무늬로 전환하는 등 토기의 변형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이 시대의 토기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
<토기>
그밖에 음식을 담고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던 것들로는 신선로(神仙爐)모양토기(신라) , 조합식쇠뿔잡이항아리 ,주머니단지 , 보시기 ,김해식와질토기(金海式瓦質土器)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굽다리항아리
영남지방의 원삼국시대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대표되어 진다. 와질토기는 회색 위주에 회흑색·흑색 등의 색조를 띠며 단단하기가 기와와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회청색 경질(硬質) 토기 보다 굽는 온도가 낮기 때문에 경도가 약하여 흡수성이 강하며 태토는 매우 고운 진흙을 사용하였다. 원삼국시대를 양분하였을 때 전기에는 이전시기의 목이 긴 검은간토기(黑陶長頸壺)에서 출발한 목항아리가 주류를 이루는데 그릇의 형태는 구연부가 나팔형으로 바라진 둥근바닥의 조합식 쇠뿔잡이토기(牛角形 把手附壺)와 항아리(圓底短頸壺)가 기본적이다. 후기에는 무늬가 다양해지며 굽다리와 뚜껑이 있는 항아리로 변화해가는 한편 굽다리접시·화로모양토기·새모양토기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경주 황성동 목곽묘에서 출토된 이 토기는 원삼국시대 후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와질토기는 널무덤(木棺墓)와 덧널무덤(木槨墓)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어 껴묻거리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부 생활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무문토기호(無文土器壺)
초기철기(初期鐵器)시대의 토기로써 강원도 춘천시 중도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소위 중도식(中島式) 토기로 불리는 평저의 외반구연호(外反口緣壺)로서 그 형태는 편평한 바닥, 배가 부른 가름한 난형의 몸체, 밖으로 벌어진 아가리를 가진 항아리이다. 입 부분과 몸체의 배 부분 사이의 겉 표면과 안벽에 손누름 자국이 있다. 이것은 입을 밖으로 꺽이게 하기 위해서 눌러 주었던 자국인 듯하다. 그릇 표면에는 검은 탄화물이 부착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흑갈색의 색조를 띠며, 굵은 석립(石粒)이 섞인 사질토(砂質土)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밖으로 꺾인 입을 가진 민무늬 토기는 민무늬 토기 시대 말기에 많이 사용된 형식이다. 한강 유역 일대에서는 원삼국 토기와 같이 출토되는 예가 많다. 중도 주거지 유적에서는 이러한 형식의 민무늬 토기가 다량의 원삼국 토기 및 철기 등과 함께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무기, 도구>
주조쇠도끼, 칠초동검(銅劍)
군사무기로 사용되거나, 임산물 생산 임업등 생업에 관련된 도구로 사용되었다.
<장신구>
금제대구(金製帶鉤)
원삼국시대의 낙랑(樂浪)시대의 유물이다. (1~2세기)
동물문(動物文) /용문(龍文)등의 문양무늬가 발견된다.
1916년 평안남도 대동군 석암리 9호분에서 발견된 띠고리이다. 금판(金板) 위에 푸른색 비취옥을 깍아 박은 알집을 또 다른 금판으로 만들어 붙여서 장식하는 감장(嵌裝) 기법으로 유명하다. 이 감장 기법은 삼국시대 이전의 금 장신구의 장식 기법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후에 입사(入絲) 기법으로 이행되었다. 머리는 둥글고 끝은 네모난 모양으로 되어 있다. 머리 부분에 초승달 모양으로 금판을 파내고 그 중앙에 걸쇠를 달았다. 이 걸쇠에 혁대를 달도록 고안하였다. 모형 위에 순금판을 놓고 뒷면에서 두드려 용 무늬를 양출(陽出)하였다. 양출된 용은 모두 일곱 마리로, 윤곽이 뚜렷하고 율동적으로 조각되었다. 용의 등 부분에는 굵은 금립(金粒)을 써서 장식하였고, 발이나 기타 다른 곳에는 작은 금립을 붙여 모양을 내었다. 그런 후에 금사와 누금(鏤金) 장식으로 용의 윤곽 부분을 장식하였다. 가장자리에는 금사로 띠를 둘러 섬세함을 더했다. 용과 용 사이에 화판형의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비취옥을 감입(嵌入)하였다. 호사찬연한 금빛과 영롱한 비취색의 대조로 천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비취옥이 일곱 개만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탈락되어 아쉬움을 갖게 한다. 섬세한 장식 문양과 정교한 제작 기술이 환상적으로 결합된 작품이다.
고사리무늬장식철기 , 성운문경, 곡봉형띠고리 , 마형대구등의 장신구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 특히 마형대구(馬形帶鉤)에서는 물상문(物象文) /격자문(格字文) , 기하문(幾何文) /점열문(點列文) 등의 문양이 발견되어 눈길을 끌었다.
보석류로는 유리와 옥으로 만들어진 소옥(小玉)이 있다.
점뼈로는 골각패갑(骨角貝甲)이 있는데 사회생활, 의례생활, 상장, 고대부장품등으로 이용되었던걸로 추정된다.
고구려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다양하게 수용하여 고구려 특유의 역동적이며 실용적인 문화를 창출하고 나아가 새로운 문화를 백제 신라에 전파하여 삼국문화를 하나로 묶는 민족문화의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고구려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학, 음악, 무용, 공예 등에 뚜렷이 나타나는데 집안 평안 일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특히 고분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강인한 힘과 창조력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실에는 벽화가 비교적 잘 남아있는 집안의 장천 1호분의 돌방을 실물크기로 복원하고 당시의 벽화제작 방법에 따라 벽화를 그려 인물풍속화에서 사신도로 변해가는 그림의 변환모습과 고구려 고분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서울 구의동유적 출토의 고구려계 유물을 전시하여 당시의 고구려가 한강지역에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을 유물로 증명해 주었으며, 고구려의 각종 토기와 기와 벽돌 등을 전시하여 고구려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토기>
대표 토기로서 토기호(土器壺)와 양이부호(兩耳附壺)가 있다.
고구려 토기는 집자리나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오랜 역사와 넓은 영역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토기의 양이 매우 적다. 대체로 납작한 바닥을 하고 있다. 이 단지도 대부분의 고구려 토기와 마찬가지로 납작한 바닥을 하고 있다. 입술은 해바라졌고, 목은 짧고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부푼 어깨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 좁혀졌다. 어깨 부분 양쪽에 귀가 달렸다. 귀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몸체는 둥그스름하다. 검은색의 단지 표면에는 녹로의 자리가 선명하다. 평안남도 대동군 송신리(松薪里)의 고정호(古井戶)에서 출토되었다. 그릇 모양이나 흑색의 소성(燒成)은 요동, 낙랑 등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중국 한나라식의 토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나, 고구려 시대의 전형적인 단지 모양을 하고 있다.
유개삼각호(有蓋三脚壺)
원통형의 몸체에 세 발 달린 토기이다. 평앙 부근의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일상 생활용이었다기보다는 무덤에 껴묻기 위해 제작된 듯하다. 뚜껑에는 연봉오리형 꼭지가 달려 있다. 뚜껑의 입술에는 깊은 줄무늬가 돌려져 있다. 뚜껑은 황갈색으로 처리하였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어깨 부분과 몸체 중간에 두 줄의 줄무늬가 돌려져 있다. 그릇의 안팎은 흑색으로 발현(發現)시킨 후 겉면은 다시 갈아서 반짝거리고 있다. 바닥은 납작하며 여기에 짧은 발이 세 개 달려 있어 이채롭다. 발은 가운데가 잘록한 수족형(獸足形)이다. 고구려 토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나, 토기 밑에 다리가 붙은 것은 그리 흔한 예가 아니다. 중국 한나라 세 발 토기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건축부재>
기와
건물을 짓는 건축부재로서 지붕재이다.
한반도에 기와가 처음으로 유입된 것은 중국 한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기원전 108년)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의 북부지방에는 이전 시기와 달리 목조 기와집의 건축술이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운데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이 빈번하였고 지리적으로도 서로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국내성 도읍기에 이미 기와의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고구려의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 수막새, 반원막새, 치미, 귀면와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암키와와 수키와에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는 집안지방에서 초기의 것이 발견된 바 있다. 불교가 전래된 (372년) 4세기 후반에는 연꽃무늬가 장식된 수막새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평양천도(427년)를 전후하여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연화문수막새가 주류를 이루면서 성행하게 된다.
연화문수막새(蓮華文瓦當)
이것 역시 건물을 짓는 부자재로서 지붕재로 이용되고, 또한 수막새로 이용되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한민족과 접촉이 빈번하였고, 지리적으로 서로 인접해 있었기 때무에 백제나 신라보다 일찍부터 기와와 전돌이 제작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암·수키와로 옛 도읍지인 통구(通溝)나 산성자(山城子) 등지에서 발견되고, 평양천도(427년)를 전후하여 연화문이 새겨진 수막새가 성행하게 된다. 이 시기의 수막새는 표면을 4·6·8 구획으로 구분하여 연판을 장식하고 자방에는 반구형의 돌기를 높게 배치한 것이 대부분이나, 6세기 이후부터는 보상화문, 인동문, 귀면문, 기하문 등의 새로운 무늬가 점차 채용됨과 동시에 연화문의 모습도 고구려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여 날카롭고 볼륨이 강하며 적갈색을 띠게 되는 특색을 나타내게 된다. 이 유물은 다른 수막새에 비해 지름이 크고, 전체적으로 회색의 색조를 띠며 주연이 높고 연판 자체도 볼륨이 강하다. 와당을 6개로 구획한 다음 중방에는 1과의 연자를 표현되고 연은 Y자형의 꽃봉오리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꽃은 장천1호분의 고분벽화에서도 확인된다. 대체로 집안일대의 천추총이나 태왕릉에서 출토된 기와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평양천도 직후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발>
대표유물로서는 금동식리(金銅飾履) 가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신발에 대한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삼실총 제2실 서벽의 무인상과 통구 제12호분 북실 좌벽의 전투도 중 무인이 신고 있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 이 금동신발도 고분벽화에 보이는 것과 유사한 스파이크형의 못을 부착하고 있다. 금동신발은 신발 아래쪽판 및 금동못의 두께, 금동못의 수량이 많고 견고한 점 등에서 실용성을 감안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러나 보행시 꺾임이 없는 신발 아랫부분과 발등부분의 고정, 포장되지 않은 도록 등을 감안하면 일상의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역사기록이나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인의 일상용 신발은 가죽이나 섬유 등을 재료한 것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분벽화의 말탄 무사의 신발에 스파이크형의 신발이 착용되고 있는 것은 백제나 신라, 가야의 고분에서 의례를 행할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신발과는 구별되며, 중국 집안 일대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제스파이크 신발과 같이 실용적인 방어용 무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솥>
청동세발솥
고구려의 생활용구 중 용기(用器)는 주로 토기로 된 것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금속으로 제작된 용기나 기타 생활용구는 지금까지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중 집안의 우산 2968호 고분과 칠정산 1196호 두 적석묘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루(甑)과 가마솥(釜), 세발달린 솥(鼎), 다리미( 斗), 세숫대야(洗), 뚜껑 있는 그릇(盒) 등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그 실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유물도 집안지역의 우산 2968호 고분과 칠정산 1196호 출토 세발달린 솥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어 상호 비교되며 발이 셋 달린 솥이라는 점에서 제사용기로 생각된다.
백제실
기원 전후 무렵에 고구려와 같은 갈래인 부여족(夫餘族)들이 한강유역에 내려와 세운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백제(百濟)로 성장하였으며, 점차 국제적인 안목을 넓혀 중국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고 남으로는 왜와 통하는 등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와 같이 성장한 백제는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문화를 꽃피워,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백제문화는 도읍지의 변천에 따라 한성(4세기 초~470년), 웅진(475 초~538년), 사비(538~660년) 시기 등으로 나뉘며 각 시기별로 문화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음식기, 저장단지>
병 ,두귀단지, 새발자국무늬단지,합 등이 있다.
<의(衣),장신구>
금동관(金銅冠)
국보(國寶) 295 에 지정되어 있다.
전남 나주군 신촌리 9호분 을호(乙號) 옹관에서 출토된 것이다.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대옹(大甕)의 바닥 쪽에 놓여 있었는데 내부의 모(帽)와 외부의 화려한 입식(立飾),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입식(立飾) 테두리의 상·하연(上下緣)에 타출선문대(打出線文帶)를 구획하고 그 사이에 드문드문 능형문(菱形紋)을 돌출시켰으며 상단(上段)에는 영락을 달았다. 중앙부에는 7엽(葉)의 화문(花文) 아홉 개를 배치하고, 테두리의 양끝에는 각각 두 개씩의 구멍이 나 있는데 사용할 때 양끝을 겹쳐 끈으로 묶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신라 금관(新羅金冠)에서도 보인다. 테두리에는 앞과 좌우에 각각 같은 모양의 입식을 세웠다. 입식은 가운데 세 개의 줄기를 세우고 중앙 줄기 위쪽에 보주형(寶珠形) 꽃봉오리를 장식하고 그 좌우에 비스듬히 작은 꽃봉오리를 배치했는데 끝에는 각각 구슬을 달았다. 그 아래쪽에는 테두리와 나란히 좌우로 두 개의 가지를 내었다. 입식의 모든 윤곽을 뒤에서 때린 타출점선문(打出點線文)으로 두르고, 꽃봉오리 중앙에는 꽃술을 역시 타출점선문으로 묘사하였다. 전면에 영락을 달아 화려한 효과를 얻고 있다. 내부의 관모(冠帽)는 두 장의 같은 형태로 오린 동판(銅版)을 붙여 상연(上緣)에 복륜(覆輪)을 붙이고 못으로 접합시킨 산형(山形)의 모자로, 하변(下邊)의 길이 19cm, 높이 18.5cm이다. 주연변(周緣邊)은 복륜을 씌웠으므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연변(緣邊)에 타출(打出)한 산형파문(山形波文)이 가장자리를 돌고 있다. 안에는 상하 2단으로 꽃봉오리 모양의 인동(忍冬) 같은 무늬를 주점(珠點)으로 타출시켰다. 크고 작은 세 개를 나란히 배열한 아래쪽에 비해 위쪽 무늬는 좌우에 작은 꽃봉오리 가지를 두고 가운데 큰 꽃봉오리를 배치하였다. 타출의 표현이 고졸(古拙)하여 고식의 느낌을 주고 구도(構圖)는 양측이 모두 같으나 정확히 같지는 않고 각각 자유로이 표현하였다. 신라 금관이 직선적 공예 기법으로 만들어진 데 비하여 아직도 사실적인 나뭇가지 인동문의 표현이 남아 있어 형식적으로는 고식에 속한다.
금제관식
무령왕릉에서 발견되었다. 식물문(植物文)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왕 관식(冠飾)과 같은 0.2cm의 순금판을 맞새김하여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좌우로 상칭(相稱)되게 하였으나 왕 관식과 같은 작고 둥근 달개는 한개도 붙이지 않았다. 아래로 길게 뻗은 한줄의 굵은 줄기는 천이나 가죽으로 된 관모의 테에 끼워 고정시킬 수 있도록 되었는데 1개는 끝이 부러진 상태이다. 전체적인 모습을 중심부에 불단(佛壇)같은 복연대좌(伏蓮臺座)위에 보병(寶甁)이 새겨지고 이 보병위에 활짝 핀 꽃같은 화형(花形)은 나주(羅州) 동관(銅冠)의 내관측판(內冠側板)과 비슷하나 좌우 중앙부는 인동당초문이 불꽃무늬처럼 위로 뻗어있다. 이렇게 인동, 당초, 연화(蓮花)로 구성된 도안은 육조(六朝)시대 하남성자현(河南省磁縣)에서 발견된 고분현실석문목절형석조(古糞玄室石門木節形石彫)의 문양과 비슷하다고 보아진다. 이와같은 연꽃무늬와 보병의 문양은 불교적인 사상 습속에서 영향된 것이라고 생각할 때 백제귀족 내지는 왕실에서의 불교의 숭상이 그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짐작케하고 육조 불교미술의 영향이 짙다고 할 수있다.
감금탄목제편옥 (嵌金炭木製扁玉)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왕의 과대수식(과帶垂飾) 부근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얇은 금판(金板)을 둥글게 납작하게 말아 틀을 만들고 탄화목(炭火木)으로 생각되는 검은색 유기물을 채워 넣은 편옥형(扁玉形)이다. 금틀의 양끝은 꼭 붙지않아 약간씩 벌어졌으며 이 금틀의 아래위를 뚫어 서로 연결한 것으로 언뜻 보기에는 목걸이 같기도 하나 허리 부위에서 출토되고 또 목걸이라면 시커먼 숯같은 유기질 물질을 채워 넣었으므로 부서질 염려도 있고 검정물이 들 터이므로 혹시 목걸이나 가슴치렛거리로 굳이 본다면 이는 피장자를 위한 후장(厚葬)의 유습으로 고인(故人)의 내세(來世)에서도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어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감장용금모
역시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감장용금모(嵌裝用金帽)로 형태는 상단은 모자형(帽子形), 중앙은 관형(管形), 하단은 총탄형(銃彈形) 3종이 있다. 표면에는 기하학문, 능형문(菱形文), 원형문 등이 장식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 금세립(金細粒)을 붙여 화려하게 하였다. 곡옥(曲玉)같은 것에 씌워 장식한 금모라고 본다..
또한, 무령왕릉에서는 지름 0.6cm의 유리구슬도 발견되었다.
담청색, 감색, 녹색, 적색, 청색 등 7~8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모두 같지는 않으나 백제 장인들의 유리에 대한 착색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지름이 2mm정도의 작은 것으로부터 약간 큰 것들인데 가운데에는 모두 구멍이 있어 유기질의 끈으로 꼬여서 패용한 듯하나 이 구슬들이 왕과 왕비의 머리, 가슴, 허리 부위에서 발견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 구슬표면 금박(金箔)을 씌운 것, 연주옥(連珠鈺)등 섞여 있어 더욱 그 사용된 형태와 목적을 알기 어렵다
가야실
가야는 변한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여러 세력집단으로 5가야, 6가야 등 연맹체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시기와 성격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연맹이,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이 성립된다. 가야실에는 이러한 가야문화가 결코 고구려, 백제, 신라에 뒤지지 않았음을 살펴볼 수 있도록 최근 발굴조사된 영남지역 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종류별, 주제별로 전시하고 있다. 즉 여러 형대의 갑옷과 투구 그리고 각종 철기류를 전시하여 철의 왕국으로서의 가야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배(高杯)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제례(祭禮), 제기(祭器),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유물로는 유개고배(有蓋高杯)가 있다.
가야 시대에 만들어진 뚜껑이 있는 고배(高杯)이다. 경북 고령 수산(首山)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뚜껑 중앙에는 꼭지가 달려 있는데 이 꼭지는 보주형(寶珠形)이 변형된 형태이다. 꼭지를 중심으로 동심원의 요형(凹形) 띠를 세 줄로 깊게 파고 그 사이로 점문(點文)을 차례로 돌렸다. 몸체는 넓고 편평하다. 둥글고 납작한 합(盒)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각(臺脚)은 낮고 아래로 갈수록 넓게 퍼져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다리 윗부분과 가운데에 돌출된 띠를 둘렀는데, 네모난 투창(透窓)을 아래위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2단 1열로 투창을 내는 것은 가야 고배의 특징이다. 뚜껑과 몸체의 색조가 약간 다르다. 이것은 가마에서 받은 화력(火力)의 차이에 기인한 듯하다.
<군사,장비,>
차양주(遮陽胄)
갑옷과 투구는 우수한 철기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전투시에 뛰어난 방어구로서 기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징물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갑주의 출현은 전쟁의 상황에서 군사력을 장악한 지배자의 출현을 알리는 증거라 할 수 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출현하는 판갑(板甲)은 덩이쇠(鐵鋌)과 같이 넙적한 철소재를 이어 만들었다는 점에서 덩이쇠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데, 울산 중산리나 경주 구정동 출토 예가 이른시기에 해당된다. 찰갑(札甲)도 경산 조영동 무덤의 예로 보아 판갑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지만 이른시기의 것은 드물다. 4세기에 장식성이 가미되던 판갑은 5세기에 들어 찰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상징성이 약화되고 있다. 이 유물이 출토된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인 대가야의 왕릉군으로 생각되는 유적이다.
금동안륜(金銅鞍輪)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던 말의 안장(鞍裝)이다.
안장(鞍裝) 앞뒤에 나무로 턱을 만들어 댄 것을 안장가리개라 한다. 보통 안교 위에는 금속을 덧씌워서 튼튼하게 만든다. 경상북도 지방의 고분에서 출토된 호화로운 투각(透刻) 장식의 안교인데, 큰 것이 뒷가리개이고 작은 것이 앞가리개이다. 크기만 다를 뿐 전체적인 형태나 문양, 제작 기법은 같다. 동판에 도금을 한 것으로 위에는 따로 동판(銅板)을 구부려 마구리를 댔다. 동판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며 마구리는 못으로 고정시켰다. 중간 테는 촘촘히 못으로 박았다. 그 밑에서 모서리 안쪽으로 삼각형 장식판이 밖으로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바깥 테두리는 복륜(覆輪)이고, 중앙의 테두리는 대상 금구(帶狀金具)에 잔못을 박았다. 중심선에서 대칭으로 용봉문(龍鳳文)을 투조(透彫)하였다. 추상적인 용을 투각하여 매우 호화스러워 보인다.
<토기>
압형토기(鴨形土器)
저장용으로 사용되는 다른 토기들과 다르게 압형토기는 사회생활, 의례생활에 사용되었던 고대 부장품이다. 제례 용구(祭禮用具)이거나 물과 관계 있는 의식 용구(儀式用具)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쌍의 오리 모양 토기이다. 주둥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소박한 형태를 하고 있다. 네 개의 사각 투창(四角透窓)이 길게 뚫려진 받침(臺脚) 위에 오리가 서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등에는 원통형으로 솟아오른 구멍이 있어 오리의 몸체에 액체를 부을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원통의 아가리 끝은 톱날처럼 처리되고 있다. 머리는 약간 숙이고 있으며 오리의 독특한 부리가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과 콧구멍까지도 투박하지만 잘 나타나 있다. 목에는 둥근 목걸이처럼 띠를 두르고 있다. 띠를 보면 이 토기는 집에서 기르던 오리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날개를 따로 만들어 등에 붙였다. 꼬리는 살짝 치켜들었는데 끝이 잘려져 나갔다. 전체적으로 귀엽고 통통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물오리나 새는 악령을 방지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한다는 믿음이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있어 왔다. 가야 지역에서는 신간(神竿)에 오리 모양의 목조(木鳥)를 매달아 신조(神鳥)로 신앙되기도 하였다.
녹장식유공호(鹿裝飾有孔壺)
밑이 둥근 공 모양의 몸체에 주둥이가 넓게 바라졌으며 목 부분이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점차 가늘어져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주둥이 부분의 안쪽과 몸체 윗부분에 녹색의 자연유(自然釉)가 나타난 것은 가마에서 재가 떨어져 생긴 것으로서 회유(灰釉)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어깨 부분에 두 마리의 환조(丸彫)한 사슴이 놓여져 있다. 사슴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사슴은 북방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신성시한 동물로서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 토기는 제의용(祭儀用)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이러한 토기에 사슴을 조각한 것은 종교적 의미를 더욱 강조해 준다. 두 마리 사슴 사이의 아랫부분인 복부(腹部) 중간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져 있어 특이한데, 이러한 구멍토기는 가야지역이나 금강 이남의 백제지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스에키(須惠器)의 편년에 표기적 기능을 하고 있다. 일본 토기에는 복부 구멍에 죽관(竹管)이 꽂힌 채로 발견되어, 이 구멍이 술과 같은 액체를 붓기 위한 구멍이었음을 보여준다.
차륜형토기(車輪形土器)
사회 생활, 의례생활, 민간신앙에 이용되었던 토기이다.
바퀴를 두 개 단 대각(臺脚) 위에 두 개의 장경호(長頸壺)를 올려 놓은 듯한 토기로 경남지방 출토로 전한다. 이렇게 일반형을 벗어난 토기를 이형(異形) 토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와서 특히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따라서 가야 토기 중에는 이형 토기가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이형 토기는 반드시 속이 비고 등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에 술잔 같은 목이 달리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것은 중국 육조를 통해 들어온 근동 지방 토기의 영향이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기마 인물형 토기, 배 모양 토기, 집 모양 토기와 같은 이형 토기는 사자(死者)를 보내는 장송의 의미를 가진 것이 많다. 이 수레 토기 역시 일상 생활에서 쓰였던 토기가 아니고, 부장(副葬)하기 위한 특수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후 영혼을 저 세상으로 운반하기 위한 제의용(祭儀用) 그릇이었다고 믿어진다.
가형토기(家形土器)
2층을 이룬 고상 가옥(高床家屋)을 본떠 만든 토기이다.
고상 가옥은 강우량이 많고 습기가 많은 남방 아시아 지역의 가옥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가 유행하지 않았으나 가야 지역에서는 이러한 가옥 형태를 취한 토기가 많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토기로 미루어 당시 이러한 건축 양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볏집 또는 억새로 이엉을 만들어 덮은 지붕은 이엉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얽어 맸다. 지붕 꼭대기에는 고양이로 보이는 짐승이 올라앉아 있다. 지붕 아래에는 나무 기둥이 보인다. 지붕 한쪽 측면에는 굴뚝 모양의 큰 원통형이 붙어 있다. 이와 같은 집 모양 토기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듯하다. 즉 평소 안식하던 집을 만들어, 죽은이가 내세에서도 그와 같이 안락하게 살기를 바라는 명복을 담고 있다.
<장신구>
금제세환이식(金製細環耳飾)
세환식(細環式) 고리(環)에 영락(瓔珞) 등을 장식한 귀걸이이다. 둥근 고리에 영락이 달린 중공구체(中空球體)의 중간식(中間飾)을 연결하였다. 그 아래에는 금사슬로 3엽형(三葉形) 장식을 늘어뜨렸다. 누금 장식(鏤金裝飾)이 가해진 3엽형 수식 하단에는 금세립(金細粒)으로 표면이 싸여 있는 중공구체가 달려 있다. 둥근 고리의 단순함과 중간식의 화려함, 끝수식의 우아함이 잘 어울어진 빛나는 유물이다. 각 부위의 크기와 길이 등에 알맞은 비례감이 형성되어 있고, 정교하도도 치밀한 세공 솜씨가 돋보인다. 길이가 8.6cm이며 출토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작 연대는 신라시대 5-6세기로 추정된다.
신라실
신라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4~6세기 경주지역에 조영된 돌무지덧널무덤을 비롯하여 금관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등의 화려한 금제품을 들 수 있다. 신라실에는 황남대총, 금령총, 호우총, 식리총, 등에서 출토된 유물을 일괄로 전시하여 개별고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또한 황남대총을 비롯한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금제품과 꾸미개를 주제별로 전시하여 뛰어난 신라인의 금세공기술을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장신구>
금관(金冠)
순금의 얇은 금판을 도안에 따라 오려서 만든 외관으로, 띠모양의 테두리에 산자형과 나뭇가지 모양의 입식을 각각 2개씩 교차로 세워 화려하게 장식한 전형적인 신라의 금관이다. 산자형 입식과 나뭇가지 모양 입식은 모두 3단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5세기대의 신라 금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관테에는 위, 아래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물결무늬와 점문을 돋을 무늬 새김으로, 끝부분이 보주형의 봉우리로 표현된 산자형입식과 나뭇가지 모양 입식에도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점열문으로 장식하였으며, 관테, 입식에는 무두 반구형으로 도드라진 돌기를 만들어 동그란 순금 달개와 곡옥을 금실로 교차되게 매달아 화려함을 더하였다. 관테에는 귀걸이 모양과 같은 여러 가지 드리개를 매달아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이와같은 형태를 가진 관장식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으며, 신라의 지방이었던 낙동강 동쪽의 여러 지역에서도 간혹 출토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이 금관처럼 순금으로 만든 것은 경주에서만 출토되고, 경주 이외의 지방에서는 금동 또는 은으로 만든 것만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신라의 중앙 지배층과 지방의 우두머리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곧 신라의 지방에로의 세력 확대 과정에서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누금지환 , 금제누금감옥훈, 금제수식 등이 있다. 곡옥부경식은 유리로 된 보석으로써 의복의 장신구로 사용되었다.
<은제>
타출문은배
은으로 만들어진 고배종류이다.
음식을 담고 저장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닥이 평평한 은제잔으로 표면이 여러가지 의장형식의 타출문(打出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위, 아래쪽에 화엽문(花葉文)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고 별도의 선에 의해 중심부의 주문양대와 구분되고 있는데 중심부는 다시 귀갑형 패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 안에 새, 노루, 범, 말 등의 동물들이 한마리씩 배치되어 있다. 몸체의 문양표현은 모두 잔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타출이 되어 있지만, 세부 처리는 음각으로 표현되었다. 자그마한 잔이지만, 재질이 가진 금속성의 섬세함과 타출로 표현된 유연한 문양 표현의 대비에서 묵직하고 귀족스러운 우아함이 느껴진다.
은제관모
은으로 만들어진 관모(冠帽)이다.
<고배,토우>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국보로써, 음식을 저장하는 항아리이다.
둥근 몸체에 긴 목을 가진 항아리의 목 부분에 여러 가지 토우를 부착하여 장식하였다. 목 부분에는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오른손에 성기를 잡고 왼손에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남자상이 묘사되어 있다. 토기에 각종의 토우로 장식하는 예는 가야토기에도 더러 보이지만 주로 신라토기 가운데 5-6세기대의 토기에 많이 보인다. 이같은 토우 장식토기들은 토기 그 자체의 장식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 사람들의 신앙과 의식의 세계는 물론 일상 생활 습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화문토기배(印花文土器杯)
원통(圓筒) 모양의 기신(器身)에 높은 굽이 붙은 토기이다. 입은 직립하였다. 원통형 몸체에 일정한 간격으로 선(線)을 깊게 파돌리고 그 사이에 생긴 공간에는 작은 겹고리(二重圓圈) 무늬를 배치한 몸체 전면에 열 줄로 가득 채웠다. 굽은 비교적 높은데, 위가 잘록하고 밑은 밖으로 퍼진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굽에도 2조의 돌선대(突線帶)를 두르고, 그것을 중심으로 작은 겹고리무늬를 상하로 한바퀴 돌렸다. 이러한 겹고리무늬와 같은 도장무늬는 통일신라 직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시대 토기에 베풀어진 주요 무늬로 성행하였다. 색조는 회색이며 자연유(自然釉)가 약간 덮여 있어 광택이 난다. 경주시 서악동에서 출토되었으며 제작 연대는 통일신라 중기로 추정된다.
토기인화문고배(土器印花紋高杯), 승마토우(乘馬土偶)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