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땅굴 견학
북한이 전쟁 준비를 위해 판 제2 땅굴을 견학하기 위해 나섰다. 철원 고석정 앞 전적관에서 신청서를 내고 출입증을 받아 군에서 나온 버스로 갈아타야한다.
땅굴은 기습전과 방위선 후방 공략의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발견된 땅굴은 4개지만 철책선 밑으로 이십 여개의 땅굴이 더 있다고 한다. 제 2땅굴은 1975년 집념의 사나이 정명환 소장이 8개월의 노력 끝에 찾았다. 발견될 당시만 해도 7.4 남북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겉으로는 남북 화해 분위기를 조성시키고 있었다.
땅굴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가면 휴전선 인근 마을에서는 밤마다 산에서 탱크 소리가 났고 지축이 흔들렸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였고 라면을 사러 줄을 서며 나라가 들끓었다.
제2 땅굴은 견고한 화강암 지대에 있다. 노란 안전모를 쓴 다음 주의 사항을 듣고 사진기를 맡긴 채 들어가야 했다. 굴 안은 굴곡 때문에 전등이 있어도 어두침침하고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만큼 서늘했다. 땅속 150m까지 경사면을 따라 내려가는데 빗나간 시추공 자리로 차가운 물이 목덜미에 뚝 떨어져 깜짝 놀랐고 비쭉비쭉 돌출된 암석에 머리를 자주 부딪쳤다.
북한에서는 부인하지만 화약을 넣어 폭파하였던 구멍과 곡괭이로 화강암을 쪼아 낸 방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파 내려왔고, 갱도를 파면서 나오는 지하수를 빼기 위한 배수로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으며, 굴착 방법이 남쪽과 다른 점을 근거로 저들의 짓임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있는 제법 넓은 공간은 식량과 땅굴을 파는데 필요한 도구를 두던 곳이며 사람의 휴식 공간으로 쓰였단다. 굴의 끝은 북한이기에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철책으로 막혀 있고 돌덩이를 싫어 나르던 조그만 열차와 손수레가 놓여 있다. 땅굴의 총 길이만도 3.5.km 인데 남방 한계선을 넘어 1100m 지점까지 이어져 있다.
굴은 야포 등의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가 되어 있고, 유사시에는 1시간에 3만 명의 병사가 쏟아져 나와 1시간 후면 수도권 주요 시설을 점령할 수 있단다. 잘 훈련된 북한군 병사가 땅굴을 통해 개미같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상상만 하여도 소름이 끼친다. 사람의 왕래가 없는 우거진 나무숲에 땅굴 입구를 감추어 놓고 우리의 영토를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것만 같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굴 앞에 마련된 전시실에는 그때 습득한 물건을 모아 전시를 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때가 끼고 빛이 바랜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 검게 그을린 솥, 담배, 손전등.... 추위를 견디기 위해 신은 양말과 떨어진 장갑은 무명천에 솜을 넣어 손으로 누빈 벙어리장갑이었고 모자나 목도리, 옷, 신발 같은 일상 용품은 6.25 전쟁 때 피난민 사진 속에서 본 듯 형편없다. 낡고 조잡한 연장으로 화강암을 뚫은 그들의 고초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짐작이 간다. 말로만 듣던 아오지 탄광처럼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을 감시하며 땅굴을 파게 하였다면 그들은 살아서는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로켓이 발사되고 핵 유도탄이 발사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쟁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초토화 되고 방사선에 노출되면 살아 있는 생명체는 모두 없어진다는 무서운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본토까지 사정거리에 들기 때문에 피난을 가기 위해 고생할 것 없이 편히 앉아 죽는 편이 낫다는 말도 있다. 북한의 뒤쳐진 기술력으로 발사된 미사일이 제 궤도를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질 것 같아 두렵다.
땅굴을 발견하고 처음 수색하는 단계에서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가 폭발해 일곱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다 키운 자식이 군에 가서 주검으로 돌아왔을 때 그 부모의 심정이 오죽했을 까?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마음 놓고 편히 살고 관광도 할 수 있다. 북한은 땅굴을 파는 대신 헐벗고 굶주린 인민을 먹이고 입히는데 투자를 하여야 한다. 오늘 듣고 본 것을 자라나는 아들에게 잘 전해 주리라 다짐하며 위령 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땅굴 속에 세워둔 팻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